2024-10-13

Young-Jun Lee | Facebook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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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un Lee

·
와다 하루키의 저서가 지난 5월에 나왔다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박유하의 저서에서 다룬 자료보다 진일보한 자료가 사용된 듯하다. (고 썼는데 알고보니 오래된 자료라고 한다. 자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생긴 차이.) 이런 것이 토론과 논쟁에 의한 학술적 진보다. 학자들이 연구 좀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다가 위안부 연구도 일본에 한참 뒤질 것 같다.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뒤지고 식민지가 되고 또 학술적으로도 뒤지고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학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한국에서 공부 안하는 교수 밑에 있지말고 일본 가서 배우는게 낫다고 말해줘야 할 판이다. 일본에게 얻어맞고 치료도 일본에게 받고 그러면서 살고 싶은가. 한국의 위안부 문제 관련 기사는 신문의 한계가 명확하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요약을 할 수밖에 없고 거기서 왜곡이 생긴다. 문제는 책이 가진 풍부함을 제거하고 중심적 주장을 발라낼 때이다. 한겨레 길윤형 기자의 기사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명확하게 나누기 힘든 문제를 다룰 때는 위험선을 넘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신문 영인본에 게재된 위안부 모집 광고를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힌다. 그런 광고가 일간지에 반복적으로 게재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당시에 위안부 광고를 접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신대 모집을 적극적으로 독려한 친일파들의 노력을 알려져 있지만 위안부 모집에 나선 친일파 지도자나 지식인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직 들은 바가 없다. 몇십년 후에 오늘날의 한국 지식인들이 무슨 소릴 하며 살았던가를 보게 된다면 또다른 위안부 광고를 보는 느낌이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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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un Lee

·
하버드대 앤드류 고든 일본사 교수와 카터 에카르트 한국사 교수 공동성명서 발표. 램자이어는 조선인 위안부의 계약서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위안부 계약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지적. 위안부 계약에 관해 쓰려면 그 주제에 대한 역사적 맥락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이해도 결여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계약에 관한 논문이라면 계약서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계약서는 보지도 못한 채 그런 논문을 썼다는 건 충격적이라고. 쯧쯧.



Young-Jun Lee


Thomas Heekwon Jeong

· 작년 이맘때다.
내가 학부를 졸업한 대학의 교수 하나가
일제시대 성노예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물의를 일으켜서 논란이 생긴일이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확인 한 것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게 한 사람 중 하나다.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던 것은 그의 덕분이다. 뭐 그게 꼭 나쁜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을 접은게 다행이었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감사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른 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다가 군대를 갔고 군 복무중 비트겐슈타인을 접한 후, 철학자가 되고자 결심했었다. 군복무 중 공부하여 1993 후기입시로 경희대 철학과를 입학했다. 그야말로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다.
군 복무중에 작심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고등학교때 헤비메탈 밴드를 하느라 공부와는 담쌓은 덕에 학력고사를 꽤 잘 보고도 전기입시에서 미끌어지고 말았다.
군복무 중 철학과를 입학하겠다는 뜻을 세운 이후에는 전에 다니던 대학에 자퇴부터 했다. 배수진을 친 나는 군대에서 혼자 하루종일 일하는 쓰레기 하치장에 지원을 했다. 아침에 일터로 가자마자 미친듯이 일해서 하루 일을 다 끝내고 수학의 정석과 EBS 교재, 교과서만으로 홀로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자퇴하면서 기존의 친구관계도 다 없어지고 참 외로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서둘러 일을 마친 후 난방도, 냉방도 없는 쓰레기장 가건물에서 혼자 공부하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 해진다. 고교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관계로 나는 고교 내신이 7등급이었는데 (간발의 차로 8등급 수석을 놓쳤다. 소꼬리 보다는 뱀 머리라던데 아쉬운 일이다.) 당시 학력고사에서 320점 만점에 308점을 맞았으니 열등생 치고는 잘하지 않았는가? 그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딱히 연락하는 친구도 없이, 응원해 주는 선임 하나에게만 알리고 혼자 공부를 하던 외롭고 어린 나를 생각하면 그때로 돌아가 내 어깨를 안아주고 싶다.
최선을 다했지만 내신으로 인한 -14점 페널티는 꽤 컸다.
서울대 철학과를 갈 수 없었다.
전기 입시를 위해 아껴둔 휴가를 썼기 때문에 전기를 떨어지자 나는 입시를 포기 했다. 그런데 갑자기 후기 입시 날이 특박 이었던 선임이 자기 대신 그걸 쓰라고 해서 나는 후기 입시를 볼 수 있었다. 준비를 많이 못했지만 운이 좋아 경희대 철학과에 합격했다.
난 힘들게 들어간 내 학교가 참 좋았다. 군 복무 중 입학이라 입학과 동시에 군휴학을 해야 했다.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이제 고백하지만, 너무 학교가 가보고 싶어서 산을 넘어 탈영을 했던 일이 있다. 경희대는 벚꽃이 필때 정말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벚꽃이 핀 아름다운 교정 벤치에 홀로 앉아 교내 방송을 들으며 지나가는 학생들을 구경하다가 몇년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학생식당에서 맛대가리 없는 밥을 한그릇 사먹고 저녁 점호시간 이전에 부대로 들어갔다. 천만 다행으로 붙잡히지 않았다. 뭐 걸렸어도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영창에 갔을 것이다. 아쉬움 없이.
대학시절 성적은 극과 극이었다. 정확히 8학기의 절반은 전체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았고, 나머지 4학기는 F를 일곱개 맞았다. 제일 좋아하던 교수님 수업을 재수강이 아니라 삼수강을 했던 기억도 난다.공부를 안하거나 못할때도 있었고 연애도, 감정도 업스앤 다운스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비교적 행복했던것 같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는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고, 유학을 준비했다. 대학원을 고를 때 소위 더 좋은 대학으로 가려면 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학교 4학년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안에 유학 보내달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국비장학생 시험을 쳤고,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 철학과는 일년에 국비장학생 한명을 뽑았는데 나와 서울대학 석사과정 학생 하나가 함께 면접을 보았다. 나는 합격을 하고나면 가고 싶은 곳이 정해져 있었다. 훗날 A.I.가 화두가 되며 다시 재조명 받은, 마음의 철학으로 유명했던 Daniel Dennet이 Rutgers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나는 학부생 시절 되도 않은 개똥같은 내 생각을 담아 이메일을 써서 그에게 답장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교수님들 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국비장학생 최종후보가 됐다는 사실이 교수님들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잘 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분도 계셨다. 그리고 한 교수가 나를 불렀다. 작년에 문제를 일으킨 그 교수 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외국에서 유학 후 바로 교수가 된 그는 교수들 중 젊은 축이라 학생들과 비교적 친하게 지냈다. 나도 당시에는 학생들과 격의 없이 말하는 그분을 좋아했다. 내게 PC를 조립해 달라고 해서 조립해 주기도 하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뭣한 유명한 동영상 CD를 하나 구해 달라고 해서 그걸 수소문해 구했던 기억도 난다.
"희권아 너 국비장학생 최종까지 올라갔다며?"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를 하시겠구나 생각했던 나는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나를 눈 아래로 차갑게 보는 낯선 사람이 거기 있었다.
"너 하고 같이 올라간 애 있지? 걔 내 제자다."
그는 경희대 교수였지만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거기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었나 보다.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너 그거 꼭 가야 하냐?"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말로.
나는 국비장학생으로 뽑히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교수님 한분이 내게,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실망할까봐 말을 안했는데 그건 보통 서울대 출신들이 후배들을 보내주는 자리다." 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해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철학공부를 접었다.
이 당시 이미 나는 지나가버린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분석하고 감상하는 강단 철학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때고, 사실 유학에 성공한다 했어도, 순수한 철학이 아니라 철학과 관련하여 한참 떠오르던 소위 통섭의 학문이었던 인지과학 쪽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철학을 택했던 이유였던, 인생의 문제를 철학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 됐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서울대를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낸 등록금으로 월급 받는 사람에게도 이런 수모를 당하는데
앞으로 이 공부를 하면,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바꿀 수 없는 이 사회, 학계에서 영원한 을로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많이 당할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대학원을 그만두고 직장을 다니다가 홈커밍데이에 초대를 받고 모교에 들렀을 깨,
대학원을 그만뒀다는 이유로 나를 가장 크게 나무랬던건 바로 그 교수였다.
그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했던 것일까?
뒤늦게 생각난 것은, 엠티 갔을때 어린 학생들과 술을 먹던 중 CC였던 남학생 에게 노골적으로 "너 XX 따먹었지?" 하고 물어보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래 그는 아마도 변함이 없었으리라.
그렇게 수십년간 같은 일을 반복하며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 그의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깨닫는데 오래 걸리는 것들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걸 어렸을 때 깨달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상처입힐 수도 있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물이 고여있는 사회인 대학이란 곳은 때로 오히려 그런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대학 안에 있을 때,
나는 그의 행동이 크게 부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가 항의하고 문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대학사회는
높은 수준의 겸허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이 틀렸으며 교육자인 자신의 잘못이 어린 학생들에게 나쁘 영향을 오랫동안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영영 깨닫지 못하기 쉬운 곳이다.
거기다가 문제는,
한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아주 종종
다른 종류의 문제도 일으킨다는 것이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걸 고칠 길이 없으니,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부류는 오랫동안 좁은 대학사회 안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견제 받지 않는 잘못을 반복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당사자는 작은 징계를 받았다.
어차피 그 상벌위원회는 같은 대학 교수들이 운영한다.
징계를 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와 척질 이유도 없는 교수들은 원칙과 정치적 고려 사이 어딘가에서 타협점을 찾았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다른 문제들은 묻혀졌지만 적어도 어디 가서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이름을 달고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정년을 앞둔 늙은 교수의 추태에 맞섰던 사람들,
특히 학생들에게 잘 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직 젊은 학생들에게는 앞으로도
겁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나처럼,
어차피 세상은 이 모양이니 내가 화를 내봐야 소용 없어라고 체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이들을 두려워 하는 바보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두려워 해야할 건 잃을게 많은 자들이다. 그들이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나오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상이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로 힘이 있는 사람은 남을 강압할 필요가 없다. 권위를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은 굳이 남에게서 그걸 확인 받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막상 교수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지는 너무나 적다.
기껏 시간당 몇만원 받는 강의를 할애해 주는 정도 밖에 별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지나간 일에 후회를 두지 않고 살려 하는데,
그때 부당한 말을 듣고도 가만 있었던 것은 후회가 된다.
그 때문에 그는 수십년간 아마도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았을 것이다. 자신이 존중하지는 않으나 그 자신을 교수님이라 부르며 존중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적어도 내 후배 세대들은 내가 겪은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지금부터라도, 어른으로서 할 일을 외면하지 않는 어른으로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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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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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왜곡죄 처벌법’을 대표발의 했습니다. 이 법안은 故 노회찬 대표님이 추진하던 법안입니다. 좀 낯설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한마디로 법을 왜곡하여 판결한 판사나 검사도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독일, 스페인, 러시아 등에서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발의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법관이나 검사가 법을 왜곡하거나 일방을 유리 또는 불리하게 할 경우 처벌하는 <형법 개정안>과 법관이나 검사의 법 왜곡행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입니다.
헌법이 법관에게 보장한 자유와 독립은 사법부가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하라고 부여한 것입니다. 사법농단 사건을 보면서 제약되지 않은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제가 발의한 <법왜곡죄 처벌법>은 판·검사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어야 하고, 법관에게 독립성은 부여하되 오·남용 시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하자는 것입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경악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대법원에서조차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판개입·재판거래·법관사찰을 일삼아왔음이 밝혀졌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폐지를 비롯한 개혁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사법부의 붕괴를 걱정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어느 기관이든 셀프개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제1의 기관인 국회가 자신의 권한과 책임으로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혁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국민을 위한 법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법개혁은 사법부 판결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입니다. 일제강제징용 사건, 일본군‘위안부’ 사건, 쌍용자동차 사건, 전교조 사건, 원세훈 사건, 통합진보당 사건 등, 하나같이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없어서 좌절했던 사건들입니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법관 탄핵,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농단 사건 처리를 위한 특별재판부 설치 등 국회의 역할을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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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u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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