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1

한강이여, 울어라…한강이여, 불러라 - 교수신문


한강이여, 울어라…한강이여, 불러라 - 교수신문

한강이여, 울어라…한강이여, 불러라
정세근
승인 2024.10.16

특별기고_정세근 충북대 교수(철학과)


이제 한강의 소설로 세계인은 광주를 알게 되었다.
한국의 비극은 인류의 비극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의 민주화로,
한국의 현재는 지구의 현재로 보편화하고 있다.

나도 그녀처럼 저녁을 마칠 즈음이었다. 이과 동료들과 AI 연구자가 노벨 화학상을 받는 것이 맞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바로 옆 물리학자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데!’라고 외쳤다. 노벨상을 검색하다 한강의 소식이 뜬 것이다. 내 입의 반응? ‘나, 이제 죽어도 된다.’

살면서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까? 김연아, 봉준호, 한강 이 셋이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김연아는 몸으로, 봉준호는 눈으로, 한강은 글로 나를 기쁘게 했다. 이제 나의 ‘몸’과 비슷한 사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이제 내가 ‘보는’ 사회를 소재로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받고, 이제 내가 쓰고 있는 ‘글’로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니, 아니 기쁠 수 있을까.

한강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했다. 지난해에는 메디치 외국문학상, 2016년에는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한 작가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사진=문학동네 인스타그램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나는 평소처럼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노점에 놓인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나도 글쟁이라서 읽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니 웬만한 책은 서점에서 선 채로 완독을 한다. 근래에 그렇게 읽은 것이라면 다들 잘 아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브레드 피트가 주연을 맡아 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원작은 피츠제럴드의 소설(1922)이다. 읽으면서 처음으로 ‘영화가 소설보다 낫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한가한 시외터미널의 여유로운 대기시간이었는데도 나는 소설을 놓고 말았다. 한강의 글은 시였다. 시를 읽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

“감정의 응축과 폭발을 시로 풀어”

스웨덴 한림원의 첫 마디도 ‘시적 문체’(poetic prose)다. 운문이 아닌 산문인데도 시 같다는 말이다. 한강의 소설 곳곳에도 시가 나온다. 감정의 응축과 폭발을 시로 푼다.

내가 한강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녀의 문장이다. 소설가 가운데 문장이 탄탄한 사람이 한둘이겠냐만 한강처럼 시적인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그녀의 소설은 서서는 못 읽는다. 앉거나 뭐에라도 기대어 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의 소설이 아주 재미없냐? 아니다. 이미 『채식주의자』는 영화화되었고 선덴스 영화제에 초청(2010) 받았을 정도다. 읽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문학적 장치라고나 할까, 그것이 특별하고 기이할 뿐이다.

나는 한강의 소설이 국외에서 더 많이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소년이 온다』도 중국어로 번역되어 대만에서 나왔다. 내가 아는 출판사 사장이 한강의 소설을 좋아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1915) 백 년 선배인 로맹 롤랑(1866∼1944)과 여러모로 닮았다. 선후배 모임이 있다면 둘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둘 다 학구파인데다가 롤랑은 음악사를 가르쳤는데 한강은 노래를 만든다. 둘 다 무척이나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그렇기에 인간 내면의 울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롤랑은 2차 대전 때 반전에 앞장섰고, 한강은 제주(『작별하지 않는다』)와 광주(『소년이 온다』)와 같은 한국사의 비극에 매달리며 폭력에 항거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롤랑은 한 학자가 태어나려면 3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 실례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았다. 아버지 사마담이 모아놓은 자료를, 아들은 죽음보다 못한 궁형을 당하면서도 정리해 냈다.

한강이란 작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있었다. 고향 장흥에서 득량만을 바라보며 ‘해산토굴(海山土窟)’에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한승원이 그다. 해산은 바닷속 산이고, 토굴은 스님들이 자기 거처를 이르는 말이다. 바로 옆에는 한승원문학학교가 있다. 거기서 차로 30분이면 장흥반도 끝에 그의 고향마을 신상리가 있다. 거기서 20리 더 가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의 원작자 이청준(1939∼2008)의 생가인 진목마을이다.

한승원은 같은 감독의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의 원작자다. 제목부터 ‘가자 가자 넘어가자’라는 불교의 정신을 담는데 주인공 강수연의 삭발 열연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한승원이 자리를 잡고 집을 지으면서 상량을 마쳤을 때 도깨비가 나타나 돈을 빌려줄 테니 이 바다와 하늘을 사라고 했단다. 아버지도 시를 쓴다. 시인답게 착한 마음으로 산돌에 물 주며 부쩍부쩍 자라길 바라며 산다.

부녀에게 문학은 인간의 구제다. 빈민과 환자를 구제하듯, 우리는 우리를 구제하면 산다. 아버지는 종교적이고 자연적인 색채로, 딸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성을 드러내면서 구제한다.

샤르트르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한승원은 말한다. 물을 긷듯이 마음속 달을 긷자고. 한강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깨질듯하다고.

한승원은 먼 역사 속의 초의, 추사, 다산을 다루지만 한강은 가까운 역사 속의 살상과 죽음을 다룬다. 한승원은 정신적 초인이 보여주는 위대한 극복을 말하지만 한강은 생명을 빼앗긴 초라한 영혼의 넋두리를 옮긴다.

한강의 소설이 세계적인 까닭이 또 하나 있다. 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마드리드의 미술관에서 만난 8미터 거작 게르니카를 보며 게르니카에 가고 싶었다. 이제는 잠잠해졌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테러로 시끄러운 곳은 더블린과 바스크 지역이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바스크의 소도시였고, 프랑코와의 묵계로 히틀러는 바스크에 융단폭격을 실험한다. 그래서 게르니카에는 학살박물관이 있다. 나는 그곳의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너희들이 광주를 아느냐고.



지구의 현재로 보편화하는 한국의 현재

이제 한강의 소설로 세계인은 광주를 알게 되었다. 한국의 비극은 인류의 비극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의 민주화로, 한국의 현재는 지구의 현재로 보편화하고 있다. 한국의 예술에 ‘비애의 미’가 있다면 그것은 3.1 운동이며, 이어 60년이 지나 5.18로 격조 높게 승화하고 있다. 역사의 왜곡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어도, 이제는 40여 년이 지난 5.18을 한강과 함께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영어 번역에서 『소년이 온다』는 『사람이 한다』(Human Acts)로 바뀌었는데, 이는 광주의 중학생이 인류 보편의 행위를 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2024년 노벨문학상은 가벼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닌 무거운 한강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의 삶을 가볍게만 볼 일은 아닌 것이다. 이제 한강은 제주를 떠나고 싶어 한다. 소설가 현기영이 전해준 『순이삼촌』(1979)의 망령(亡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현기영이 말하듯, 이제는 패자의 역사도 받아줄 때다.

엊저녁 좌석의 교수들에게 알파고를 만든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것을 놓고 나는 물었다. 인류의 가치가 ‘사랑과 평화’라면 AI도 종국에 가서는 인류의 모든 가치를 배우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나쁜 사람에게 먼저 쓰일지라도.

한강은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라는 산문집 뒤에 작곡 작사하고 직접 부른 노래 열 곡을 CD에 담았다. 작가에게 부탁한다. 스톡홀름에 가서 말하기보다 노래하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주는 사랑과 평화를 전쟁과 살육이 일어나는 곳곳에 들려주라고. 아무리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내 일처럼 기쁘다. ‘악의 형이상학’을 다루는 논문 마감을 미루고 이렇게 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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