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1

조선여자근로정신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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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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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정신대 1944년 6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51 해군 항공 조병창, 진해구
조선여자근로정신대(朝鮮女子勤勞挺身隊)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착취 조직이다.

개요[편집]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실제 조선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법령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다.[1]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2][3][4][5][6][7]

사례[편집]

1944년 봄에 취업 및 진학을 시켜준다고 꾀어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한 뒤 미쓰비시 중공업의 군용 항공기 공장에서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다.[8] 이 가운데는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간 경우도 있었다.[9] 이 공장에서 강제로 노동한 조선인 여성은 약 400명으로 파악된다.[10]
경상북도 등지에서 모집된 소녀들이 군수업체인 후지코시 철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경성가정의숙 학생이던 김금진은 이 학교 교장인 황신덕이 1943년에 다른 학교와 달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며 한탄하는 것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자원해 들어갔다.[11] 김금진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총알 만드는 일을 하다가 종전 후 귀국하였다.
이밖에 도쿄 마사방적주식회사 누마즈 공장,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도토쿠 공장, 나가사키 조선소, 사가미 해군공창, 야하타 제철소 등이 강제로 끌려가 노역한 곳으로 지적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편집]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의 동원이라는 점에서 성적 착취가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지만 사실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일제에 대한 여성착취라는 개념에서 한 분류로 인식돼 종전 후 위안부와 혼용하여 정신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12] 성 착취를 당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근로정신대로 강제노역을 마치고 온 여성들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경력자로 오해받을까봐 근로정신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살아온 경우도 있었다.[13]

참고자료[편집]

  •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6월).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항소심 제1차 공판 열려”. 《민족사랑》: 9쪽.

각주[편집]

  1. 이동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기파랑, 2008년, 92쪽.
  2. 이동 "총인구 321만에 강제동원 인구 650만?", 《연합뉴스》, 2005년 4월 26일.
  3. 이동 한국 초대석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일제 청산,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야"사회적 통념에 도전하고 상식의 벽을 넘어선 용기있는 학자"일본군 위안부·징용자 수 과장"국민정서에 反한 주장으로 파문, 《한국i닷컴》, 2005년 5월 19일.
  4. 이동 이영훈, "국사 교과서 일제피해 과장됐다" "위안부 수십만-강제 연행 650만은 허구", 국사학계 논란 예고Pressian 2005년 4월 26일.
  5. 이동 이영훈 교수 "교과서 속 '위안부 20만'에 찬성 못해", 《오마이뉴스》, 2005년 4월 26일.
  6. 이동 이영훈 교수, 수십만 위안부설은 “허수의 덫”, 《한겨레》, 2005년 4월 26일.
  7. 이동 이영훈 "국사교과서의 일제 수탈상은 신화" Archived [날짜 없음], - Archive.is, 《중앙일보》, 2006년 6월 20일.
  8. 이동 오마이뉴스 (2007년 6월 5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들어보셨나요? -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또 기각... 정부와 정치권 관심 절실”.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9. 이동 김경식 (2007년 5월 20일). “입학 69년 만에 나주초등 명예졸업장 -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나주뉴스.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0. 이동 이국언 (2003년 9월 18일). "지금이라도 한국정부가 나서면 가능하다" - [인터뷰]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두 일본인 변호사”.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2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26) (도움말)
  11. 이동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3월 1일). 〈황신덕 :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장하진)〉. 《친일파 99인 2》.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24.
  12. 이동 ‘여러분은 달러를 벌어주는 애국자입니다’ 증언 통해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속속 드러나 2008/12/15
  13. 이동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6월).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항소심 제1차 공판 열려”. 《민족사랑》: 8쪽.

함께 보기[편집]



Sejin Pak
1 October 2013 · 
[한일관계][여자근로정신대] 근로정신대의 한일간의 차이는?

한국서는 "정신대"하면 위안부같이 일제정부로 인한 "피해"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피해자보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신대에 끌려간 할머니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노예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http://www.yonhapnews.co.kr/…/0701000000AKR2013082816270006…)
그런데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로 되어있다. 일본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하면 한국인보다 우선 일본인 정신대를 생각 할 것이다. 자연히 나오는 질문이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한 일본인의 경험과 기억, 또 일본정부의 처리이다. 정신대에 관해 가장 알고 싶은 것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이다. 조사를 해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는 국가총동원령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대근로 제도란 강제적이기는 하나 "국가를 위한 봉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일 것이다. 패전후 일본에서라면 근로정신대의 경험이 있는 여자들에게서 한국인 정신대 경험자들처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거나 "노예같은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올것 같지는 않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정신대원으로서의 노동생활의 경험의 차이가 있을수도 있다. 이점은 더 알아 보아야 하겠다. 경험의 차의는 경험자의 주관적인 면이 있어서 정신대의 경우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점은 일본인은 비록 전시하의 독제체제라 할지라도 자기나라를 위해서 한것이고, 한국인은 남의 나라를 위해서 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당시로서는 공식적으로는 남의 나라도 아니지만.) 그렇다면 한국의 정신대가 한국정부에 의해 만들어 진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전시하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남자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의 직장문화에도 비슷하고 다른 례가 있다. 보통 근무시간이 끝나가는데 일이 남아 있는 경우 잔업을 어떻게 처리 하고 경험하는가. 자진해서 하는가 강제적을로 하게 만들어 지는가 이다. 상황으로 보자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대부분 경우는 "강제적 자진"이다. 강제성의 느낌의 차이가 있다면 한국측이 일본측 보다 더 강제성을 느끼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런데 경영측이 일본이고 근무자가 한국인이면 그 강제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한국뉴스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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