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2

19 “나는 중도, 중용이라는 착각” : 네이버 블로그

“나는 중도, 중용이라는 착각” : 네이버 블로그

“나는 중도, 중용이라는 착각”
427시대 ・ 2019. 11. 25







[주체사상 에세이]

“나는 중도, 중용이라는 착각”





사람들은 흔히 중립, 중도를 좋아하며 자기 사상은 중용(中庸)을 지향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에 주류사상과 저항사상이 존재한다면, 자기 사상은 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조화로운 중간 정도여야 편하고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탓이지요. 대체로 중도, 중용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착각입니다. 사회현상이나 사상에 어중간한 중간지대는 있지만, 그것이 객관적 중립성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자연계의 N극과 S극 사이에 중립적인 ‘M(middle)극’이 따로 존재하는 양 오해라는 거지요. 사상이나 철학에 M극처럼 제3의 공간과 초월적 중립지대가 있는 게 아니라 양극의 기운이 서로 약해지는 중간지대가 있을 뿐입니다.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중립지대란 원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적 중간지대와 다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간 또는 중간지대는 거의 기득권 세력쪽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언론을 예로 들면, 한국 사회에서 주류언론(조선·동아·중앙 등)은 다수 근로대중(노동자계급뿐 아니라 농민과 도시빈민, 중소자영업자 등을 일컫는 개념)의 편이 아니라 대체로 극소수 재벌과 수구 보수세력의 편에 서있습니다. 일부 인터넷언론과 진보운동단체의 신문 정도가 근로대중과 진보적 입장을 겨우 대변할 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중용을 지킨다는 말은 결국 중간 정도에 서있겠다는 말인데 그 중간의 자리도 대부분 주류논리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요즘은 촛불투쟁 이후 시민의식이 성숙해서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10여년 전만해도 언론은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고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지요. 수구보수정권 10년을 거치며 이른바 ‘조중동’ 등 수구보수신문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보도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을 겁니다.



박근혜가 대통령 시절 ‘통일대박’이라며 사실상 북한(조선)의 체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하던 때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도 ‘통일’ 특집기사를 쏟아내며 맞장구를 쳤지요. 그런데 정권이 바뀐 지금은 어떻습니까?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등 수구보수정권 10년 동안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진짜 풀릴 조짐을 보이자 조선일보 등은 자유한국당과 발을 맞춰 ‘평양올림픽’ 색깔론 공세로 남북 사이에 불신의 장벽을 세우려 혈안이 되었지요. 전쟁을 부를지도 모를 흡수통일만이 그들이 바라는 통일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은 명분상 국가의 안전 보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냉전·분단체제와 정권 관리유지법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 때부터 반인권, 반민주, 반통일로 악명 떨쳐온 사실상 수구보수 기득권세력 보안법일 뿐입니다. 조중동과 자유한국당 등 수구보수 냉전·분단 유지세력은 국가보안법을 찬성하고 유지하려는 반면 민주통일, 화해협력 세력은 그를 폐지하려고 피 흘리며 투쟁해 왔습니다.

​재벌들이 조중동을 편드는 데서 나아가 종편 등 방송사업에 직접 진출한 건 당장의 이윤 창출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중립성과 객관성으로 포장한 주류사상과 지배논리를 국민들에게 일상적으로 주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사상과 상식을 지배, 관리하는 게 체제유지의 강력한 수단이란 사실을 사회 기득권 지배층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근로대중인 만큼 원래 중립에 서면 근로대중의 입장에 가까워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실에서 중간지대는 근로대중 편이 아니라 소수 지배층, 주류사상 편에 치우쳐 있어요. 심지어 근로대중조차 수구보수 기득권층과 자본자의 지배논리에 쉽게 동조합니다. 근로대중이 주류사상과 논리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어려운 말로 ‘생활과 견해의 불일치’ 또는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라고 합니다. 앞서 비유한 남의 알을 제 알인 양 품고 사는 십자매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회현상과 이슈에 대해 나름 중립적이고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순수하고 바람직한 겁니다. 헌데 현실에서 그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제3지대는 따로 없습니다. 제3지대란 대립된 두 입장 사이의 어디쯤일 뿐입니다. 맑스주의는 이런 사상의 특성을 발견하고는 그를 사상의 ‘계급성’ 또는 ‘당파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희가 펴낸 <중용>은 우리나라에 전파돼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필독서가 됐습니다. <중용>이 현대까지 애용되고 미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희가 봉건체제와 규범을 유지하는데 필요했던 ‘중용지도(中庸之道)’라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타협사상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첨예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대립을 희석하는데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사상의 당파성’이란 개념은 우리에게 생소해도 사상의 중용, 중립성이라는 착각은 지금도 널리 마치 사회의 미덕처럼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나는 중도, 중용이라는 착각”|작성자 427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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