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3

일동장유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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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장유가

최근 수정 시각: 2020-02-04 02:39:42


분류
가사
조선의 도서
훈민정음
100대 한글 문화 유산
나무위키 문학 프로젝트
1. 소개2. 내용
1. 소개[편집]
日東壯遊歌

김인겸(金仁謙)이 1763년(영조 39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 지은 시다. 연행가와 함께 대표적인 기행 가사로 꼽히며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당연히 이 기준은 수능 국어 영역 출제 빈도에 근거한 것이며 인용된 부분의 마지막 여섯 줄을 보면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한문이 아닌 국문본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19 수능에 나왔다. 2017 수능 연행가 이후 2년만에 기행가사가 돌아온 셈이다.

일동장유가 원본의 경우 국립중앙도서관본, 가람본(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등이 있다.

2. 내용[편집]

이십 칠 일 사상네가 관소(館所)에 잠간 내려
숙공 받고 잠간 쉬어,
저무도록 행선(行船)하여 청포(靑浦)로 올라오니,
여염도 즐비하며
물가에 성을 쌓고 경개(景槪)가 기이하다.
물속에 수기(水機) 놓아 강물을 자아다가
홈으로 인수(引水)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니,
제작(製作)이 기묘하여 법 받음직 하고나야.
그 수기(水機) 자세 보니 물레를 만들어서
좌우에 박은 살이 각각 스물여덟이오,
살마다 끝에다가 널 하나씩 가로 매어
물속에 세웠으니,
강물이 널을 밀면 물레가 절로 도니,
살 끝에 작은 통을 노으로 매었으니,
그 통이 물을 떠서 돌아갈 제 올라가면,
통 아래 말뚝 박아 공중에 나무 매어,
말뚝이 걸리면 그 물이 쏟아져서
홈 속으로 드는구나.
물레가 빙빙 도니 빈 통이 내려와서
또 떠서 순환(循環)하여 주야로 불식(不息)하니,
인력(人力)을 아니 들였어도
성가퀴 높은 위에 물이 절로 넘어가서,
온 성안 거민(居民)들이 이 물을 받아먹어
부족들 아니 하니,
진실로 기특하고 묘함도 묘할씨고.
지명은 하내주(河內州)요 사십 리 와 있구나.
이십 팔 일 발행(發行)할 새 수백 필 금안준마(金鞍駿馬)
중하관(中下官)을 다 태우니 기구(器具)도 장할시고.
각 방 노자(奴子)들도 호사(豪奢)가 참람(僭濫)하다.
좌우에 쌍견마(雙肩馬)요, 한 놈은 우산 받고
두 놈은 부축하고 담배 기구 한 놈 들고
한 놈은 등불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한 사람의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나하고 삼 문사는 가마 타고 먼저 가니,
금안(金鞍) 지운 재고 큰 말 거듭말로 앞에 섰다.
여염도 왕왕 있고 흔할손 죽전(竹田)일다.
토지가 고유(膏)하여 전답(田畓)이 마이 좋이.
이십 리 실상사(實相寺)가 삼사상(三使相) 조복(朝服)할 제,
나는 내리잖고 왜성(倭城)으로 바로 가니,
인민(人民)이 부려(富麗)하기 대판(大阪)[1]만은 못하여도,
서에서 동에 가기 삼십 리라 하는구나.
관사(館舍)는 봉국사요 오층 문루(門樓) 위에
여나문 구리 기둥 운소에 닿았구나.
수석(水石)도 기절(奇絶)하고 죽수(竹樹)도 유취(幽趣) 있네.
왜황(倭皇)의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산형(山形)이 웅장하고 수세(水勢)도 환포(環抱)하여
옥야천리(沃野千里)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이리 좋은 천부(天賦) 금탕(金湯) 왜놈의 기물(器物) 되어,
칭제(稱帝) 칭황(稱皇)하고 전자(傳子) 전손(傳孫)하니,
개돗 같은 비린 유(類)를 다 몰속(沒屬) 소탕(掃蕩)하고,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朝鮮) 땅 만들어서,
왕화(王化)에 목욕(沐浴) 감겨 예의(禮儀) 국민 만들고자.

일동장유가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국어 문제집에서. 접하고 나서 이 시가 전문인 줄 아는데 일동장유가는 총 7158행, 3,500여구에 달하는 장편 기행 기사이다. 여기에 전문을 올려두고 싶지만 여백이 부족하므로 적지 않는다.

이 부분은 왜황(倭皇)의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라는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덴노가 살고 있었던 교토에서 화자가 본 것들을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일본 지명을 일본어 그대로 옮겨적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어식 독음대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사카(大阪)를 '대판' 이라 적은 것. 사실 특징이랄 것도 없는 것이, 조선에서는 이런식으로 외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표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당장 쓰시마 대신 대마도라고 부르는것도 그렇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가등청정, 소서행장, 풍신수길이리고 부른것도 그렇고, 반대로 중국의 인물들도 원세개, 모택동 등으로 불렀다. 오히려 도착한 도시나 마을마다 '여기는 우리가 ㅁㅁ라고 부르는 곳인데 왜음(倭音)으로는 ㅁㅁ라 부른다' 라고 꼬박꼬박 기록남용익이 특이 케이스.



[1]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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