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팀 원버그 (Tim Warnberg) 번역: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
Tim Warnberg,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Korean Studies, Vol.11, 1987, pp33-57, University of Hawai’i Press. (원문 참조: http://www.jstor.org/stable/23717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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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두 미국인의 눈으로 본 광주항쟁
1. 5.18기념재단은 5.18관련 해외기록물 발굴사업의 일환으로 5.18 당시 광주와 인근에서 활동 하고 있던 미국 평화봉사단원이었던 Tim Wrnberg와 William Amos가 작성한 5.18관련 기 록물 두 건을 번역하고 소개했다.
2. 5.18 당시에는 광주와 인근 지역에는 수십 명의 평화봉사단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 일부는 계엄군의 과잉진압과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 에 나섰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3. Tim Warnberg는 당시에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항쟁 당시 가장 적극적 으로 활동한 인물로 5월 27일 진압작전 직후에는 도청에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4. 팀 원버그는 당시의 자신이 작성한 일지와 관련기록을 바탕으로 1987년에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라는 논문 형식의 종합적인 보고서를 하와이대학의 한국학 전문잡지 Korean Studies에 발표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국외에서 영어 로 발간된 최초의 체계적인 5.18관련 분석보고서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논문의 한글 번역본은 보도자료에 첨부되어 있다.
5. 이 자료를 번역하고 분석한 5.18재단의 최용주 연구원은
첫째, 국외자의 입장에서 당연히 정치적 편견을 버리고 10일간의 사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기 술하고 있으며,
둘째, 광주항쟁이 외부의 정치선동가들이나 공산주의자와 같은 불순세력들에 의해 사전에 공 모되고 계획된 게 아니라,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학살에 따른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인 시민 저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셋째, 당시 전두환 정권이 발표한 5.18 수사결과 및 평가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 며,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라고 평가 했다.
6. William Amos는 현재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5.18 당시에는 목포와 경기도 안양에서 할동했던 평화봉사단원으로 근무했으며 Tim Warnberg와 교분이 두터웠고, 당시 5.18을 목격했던 동료 평화봉사단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5.18을 직접 다룬 최초의 영어 소설 “The Seed of Joy”를 발표해서 관심을 끌고 있다.
7.소설 The Seed of Joy는 항쟁 당시에 목포에서 활동하는 평화봉사단원과 항쟁에 참여한 전남대학교 운동권 출신 여교사 사이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광주항쟁의 전 과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미국인이라는 국외자의 시각에서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광주시민들의 집단적 저항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8. 5.18기념재단의 최용주 연구원은 최근에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인터뷰 전문은 보도 자료에 첨부되어 있다. (보도를 위한 추가 인터뷰나 사진자료 등은 작가에게 직접 연락하면 받을 수 있다. 작가 연락처 email: wpamos11@gmail.com facebook: @Bill Amos)
※본 보고서의 연구대상 논문인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Tim Warnberg)는
http://www.jstor.org/stable/23717579 에서 유료 구입으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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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Tim Warnberg 논문 전문 번역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팀 원버그 (Tim Warnberg) 번역: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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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 Warnberg,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Korean Studies, Vol.11, 1987, pp33-57, University of Hawai’i Press. (원문 참조: http://www.jstor.org/stable/23717579 )
<요 약>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 건 중에 하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과 혼란에 휩싸여 있다. 사태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과 분석 자료들이 있으나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으며, 현장에서 직접 사태의 진행상황을 지켜본 목격자들의 증언들은 정부의 공식입장과 언론보도들과는 큰 차이 가 나고 있다. 당시 광주에 거주했던 평화봉사단과 선교사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광 주사태는 외부의 정치세력이 선동한 사전에 계획된 도발이 아니라 군인과 경찰의 폭 력에 대항하는 지역주민들의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저항이었다. 정부 발표 자료와 이 에 반하는 목격자 증언들, 그리고 수많은 의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한국정부의 행태는 대한민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광주사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더디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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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80만 명이 거주하는 전라남도 광주 시에서 당시의 한국적 기준으로는 소규모 에 지나지 않는 일상적인 시위가 군인관의 폭력적 대치상황으로 확대되어 다수의 민간인과 군 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아직까지 엄청난 정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광주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이렇게 엄청난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은 공식자료는 대한민국 내외의 민간단체
들의 증언들과 매우 다르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volunter: PCV)소속으로 당시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목격한 나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은 새로운 목격자 증언들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하고자 한다. 과거의 많은 보고서 들은 주로 '사상자 수'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사태가 처음 발생한 시점부 터 그 후의 일련의 사건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무장저항으로 발전한 시기까지 의 목격자 증언, 정부 발표문, 언론보도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사태의 큰 그림을 그릴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사건이 갖는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과 당시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항쟁의 배경
광주항쟁에 큰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두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는 지역주의다. 대한민 국 지형은 여러 산맥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도 이런 산맥들 때문에 지리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최근에는 통신기술이 발전하여 서서히 나아지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는 이 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여 상호간 사회적, 경제적인 교류가 더디었고 결과적으 로 지역주의가 발전하고 고착되었다.
대한민국 지역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 당시에 전라도는 백제왕 국의 일부분이었고 경상도는 신라왕국의 영토였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는 마침내 10세기에 이르러 고려에 의해 통일되었다. 고려는 백제지역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펼 쳤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항복한 신라의 귀족들은 고려의 지배계층에 흡수되는 반면, 고려는 멸 망 직전까지 끈질기게 대항한 백제 주민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 이후 16세기에서 17세기 무렵에는 지식인들 간의 파벌 다툼에서 지역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에 와서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에서 지역주의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2])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요인 들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상이한 생활양식 및 사투리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지역주의는 양 지역 간에 열리는 매우 열광적인 스포츠 경기에서 종종 발견된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서로 혼인을 하기 꺼려하는 사회적 관행 등에서도 지역주 의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사람들은 이 두 지역 사람들에 대해 매우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 경상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로 충직함, 배타적, 독선, 남성적, 고집, 무뚝뚝 등과 같은 성 향이,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중적, 독선, 무식, 기회주의, 무례, 교활, 예술적 성향이 강할 것이라는 편견들이 존재한다.[3]) 이 두 지역 간의 경쟁은 대부분 악의가 없지만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는 보기 좋지 않은 모습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지난 26년 간 여당 계열의 정치인사(박정희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포함)들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인 반면에 지난 15년 간 이에 맞서는 재야 정치인들(김대중을 필두로)이 전라도 출신인 사실이 이러한 지역주의적 성 향을 더 부추기고 있다.
광주항쟁을 분석 할 때에 고려해야 할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은 사태 발생 전 몇 달에 걸친 대 한민국의 역동적인 정치상황이다. 1979년 후반에서 1980년 초에 대한민국 정치권은 극심한 혼 란을 겪고 있었다. 신민당 당수 김영삼의 부상과 야당 리더로서 그의 극적이고 예상치 못한(여 당의 입장에서)승리는[4]) 그 후 12개월 사이에 일어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의 촉매가 되었다. 1979년 10월 5일,[5][6]) 여당이 그의 "반체제적 발언"을 핑계로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킨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권에 엄청난 영향을 준 연쇄적 사건들을 촉진시켰다. 제명당하던 날 김영삼 본인 도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사건의 주동자들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앞일을 예상하기 라도 한 듯한 발언을 하였다.6)
김영삼 제명 이후 그의 고향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에서 매우 폭력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 고, 이로 인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7])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 대 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 중앙정보부(KCIA) 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26일에 박정희 를 암살했다. 이 사건 다음날, 신문에는 전두환 장군의 자그마한 사진이 실렸고 박정희 암살사 건 수사 책임자라는 설명이 붙었다.[8]) 2개월 후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 화가 박정희의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체포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이른바 12.12사태로 명명되었다.[9][10]) 전두환은 자신의 지휘 하에 있었던 수도방위사령부와 그의 육사 동 기들(노태우를 포함)이 지휘하고 있는 부대들을 동원하여 정승화 장군을 지키고 있던 해병부대 들을 제압했다. 정승화는 체포되고 곧 이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대사였던 윌리암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은 이 사건을 두고 "박정희를 따르는 세력들이 정치 자유 화를 반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라고 본국에 보고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12.12사태 이후 자유화를 향한 움직임은 확연히 진행되고 있었다. 유신헌 법[11])에 의한 긴급조치는 해제되었으며 수감되었던 학생들은 풀려났고 오랜 반정부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필두로 많은 재야 정치인들이 복권되었다. 1980년 초의 대한민국은 조심스러운 낙관 주의가 지배했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의했으며 곧 이어 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3김" 후보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장단점을 따지곤 했다.[12][13]) 이런 가운데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서서히 다져나갔으며, 1980년 4월 무렵에는 중 앙정보부 부장 및 보안사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4월에 들어서면서 계엄령 폐지 및 대통령대행 최규하를 막후에서 조정하 는 실세인 전두환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서 5월 초에 이르면서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5월 15일, 약 10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전날인 14일 정오가 학생들이 요구한 계 엄령 폐지 시한이었기 때문이다. 목격자 증언들에 의하면 이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진행 되었지만 폭력적으로 급전되었으며, 결국에는 탈취된 버스가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13)
학생운동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5월 16일 금요일과 5월 17일 토요일에는 시위가 없었으며, 비 교적으로 매우 고요했다.[14])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이전 1주일 사이에 이미 군부대들의 이동이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광주 기독병원 소속 선교사였던 헌틀리(Huntley) 목사 부부는 5월 16일 대전을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버스표를 전부 사버려서 버스표를 구할 수 없었다. 대신 기차를 탔는데 기차역과 열차 안에도 군인들이 우글우글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월 17일 자정에 선포될 계엄령에 대비하여 군인들이 미리 전국 곳곳으로 배치되는 중이었다.[15])
이렇게 복잡했던 당시의 정치상황과 대한민국 고유의 잠재적인 지역갈등을 염두에 두고 1980년 5월 18일의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중요한 사건들은 그것이 일어났던 날짜 로 기억되는데, 5월 18일은 ‘광주사태’(Kwangju Incident)를 의미하는 날짜가 되었다. 이제부터 평화봉사단(필자를 포함한)과 당시 광주에 살고 있었던 선교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5월 18일부 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것이다.
날짜별 정리
항쟁 발발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누가 상황을 지휘하고 있으며, 그리고 어떤 소 문들이 진실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소문 이상으로 잔인한 폭력을 실제로 겪고 목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군의 과잉진압과 관 련된 소문은 사실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10일의 항쟁 기간 동안 광주사람들을 지배하고 있 었던 정서는 불안감이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태가 정치적, 사회적 갈등에 의해 일어난 것은 분명 하지만, 폭력적인 사태로 확산된 원인은 여전히 모호하다. 사태의 시발을 좀 더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필자는 초반 며칠 간 일어난 사건들에 집중을 할 것이다. 이 초반의 사건들은 정부의 일련 의 대응과 광주시민들이 자신들의 무장항쟁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이 기 때문이다. 5월 18일 (일요일)
새벽에 김대중, 김종필, 학생 운동권 간부, 그리고 수많은 활동가들과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다.[16]) 주말을 맞이하여 근처 시골에서 광주로 모인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 관광호텔에 모여서 전날 저녁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호텔에서 우리는 미국문화원(American Cultural Center) 원장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를 만났지만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오전 11시쯤 우리는 광주 중앙로인 금남로로 나와서 버스정류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했을 때에 우리는 약 3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봤다. 그들은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듯 했으나 곧 이어 거리 한 가운데를 행진하며 김대중과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 과 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전경들과 장갑차들로 이루어진 저지 선에 맞닥뜨렸다. 전경들은 근처의 군용체육관인 ‘상무관’에서 출동했다.
학생들은 근처 공사장에 널브러져 있던 돌멩이들을 주워서 던지기 시작했으며 전경들은 곧바로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정부의 공식자료는 “오전 11:50 경 약 200명의 전남대학교 학생 들이 시내로 행진하는 도중에 경찰과 대립을 했으며 이 와중에 돌멩이와 최루탄이 투척되었다” 고 밝히고 있는데,[17]) 우리가 목격한 시위대는 전남대 정문 앞 시위대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 시간대에 우리는 이미 시내에 있었고 우리가 목격한 학생의 수는 30명 정도였기 때문 이다. 우리가 목격한 이 시위는 아마도 많은 광주시민들이 처음으로 목격한 ‘대치상황’인 것으 로 판단된다.
광주시민들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가거나 쇼핑을 즐기곤 하기 때문에 일요일의 거리에는 주 민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대로 옆에는 미국의 쇼핑몰과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산책로가 있는데 이곳 또한 쇼핑, 장사,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항상 꽉 차 있었다. 전경들이 시민을 향해 최류탄 을 일부러 발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과 근접거리에 있었던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를 피할 수 없었다. 최루탄이 투척될수록 시민들은 점점 더 분노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우리는 한 경찰관이 저지선을 뚫고 나와서 시민들을 향해 주먹을 치켜세우며 돌멩이 를 던져보라는 듯이 도발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계속 돌을 던졌고 전경은 최루탄으로 맞받아쳤으며 떨어진 돌을 다시 시민들을 향해 던졌다. 교통이 마비되었고, 버스는 시내를 벗어 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시민들은 전경들과 대립했지만 이 당시 우리가 본 광경은 우리가 과거에 서울에 봤었던 다른 시위들에 비해서는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후 3시 즈음 나는 금남로를 가로 막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18]) 바로 그 순간 공수부대원들이 앞으로 진격하며 진압봉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포에 휩싸인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도망쳤고 혼란 속에서 나는 어느 작은 가게 안으로 피신했다. 약 15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나와 같은 평화봉사단 소속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곧 군인 한 명이 가게로 들어와서 자신이 들고 있던 진압봉으로 사람들을 마구 패기 시작했다. 나와 평 화 봉사단 동료들을 발견한 그 군인은 멈추고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리가 골목 을 나와서 보니까 군인들은 다시 금남로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다친 사람들이 쓰 러져 있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머리, 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나와 두 명의 다른 평 화봉사단원들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중국집 배달원을 근처 병원으로 데려 갔다. 의사는 군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치료하기를 꺼려했지만 우리는 결국 의사를 설득해서 치료받게 하였다.
우리 말고도 다른 많은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들어오려고 애썼지만 의사는 10명 정도의 환자들 만 받고 문을 잠가버렸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문을 두들겼다. 이마에서 피를 흘 리고 있던 어느 한 소년은 당구를 치고 있다가 들이닥친 공수부대원에게 머리를 맞았다고 우리 에게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시위에 가담하고 있던 사람들도 있 었지만 상당수의 부상자들은 시위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던 도중에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 른 군인들에 의해 다친 것이었다.
우리는 병원을 떠나 거리로 나왔는데 가는 곳마다 부상당한 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다른 봉사자들은 각자의 봉사지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내 숙소의 건너편 도로에서도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광주에 15년 간 거주한 선교사 마사 헌틀리(Martha Huntley)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에 대전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서 돌아오 는데 택시기사는 우회로로 운전을 했다. 우리는 기사에게 왜 이 길로 가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시내 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답해줬다. 우리가 귀가하고 얼마 안 있어 정오 즈음에 전화가 울 리기 시작했고, 그후 며칠 동안 끊임없이 울렸다. 친구들과 학생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거리를 다 니다가 공격을 당했다고 알리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목격한 장면들을 설 명해주려고 전화를 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 황 설명을 요구했으며, 미국문화원(American Cultural Center)나 국무부(State Department)는 상황 을 잘 알고 있는지 물어왔다. 일요일 오전에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가거나 주일 학교에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은 시민들 중 상당수는 기독 교인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어느 한 30대 남성은 버스를 타고 있다가 강제로 하차 되어(다른 젊은 사람들과 함께) 머리에 심각한 발길질을 당했고, 결국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비슷한 나이였던 한 여성은 자녀들과 함께 주일학교에 가던 도중 공격을 당했고 의식을 잃은 채 인도에 방치되었다. 그녀는 두피에 부상을 입어 바늘을 꿰맸으며, 4개월 동안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일요일 오후에 학생들과 합심하여 군인들과 싸웠다. 그 누구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집 옥상에서 광주를 살펴봤다. 기차역 부근에 불에 타고 있는 트럭 한 대가 보였 지만 그 외에 도시는 비교적 조용했다.
5월 19일 (월요일)
11시30분 경 나는 출근을 하는 도중에 금남로의 카도릭센터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을 목격했다. 여기는 시내 중심부이기 때문에 시위대와 시민들이 뒤섞어서 누가 시위군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기는 했으나 시위대 규모는 제법 되었고, 방금 전까지 카도릭센터를 향해 투석 한 것처럼 보였다. 계엄군 사령부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던 탓이었다. 몇 몇은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며, 거리 한 가운데에는 불타는 차량이 한 대 있었다. 처음에 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위 를 서성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경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도청에 주둔하고 있었 던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진압봉으로 패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어느 중년여성이 나 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군인 한 명이 그녀의 십대 아들을 연행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군인에게 다가갔고 진압봉으로 얼굴을 한 대 맞고 난 뒤에 그 아이를 놓으라고 군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중년여성과 함께 그 장소를 벗어나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죠? 저들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죠?”하며 물어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 후 나는 뒷골목을 이용해서 여러 번 길을 우회한 후에 대로로 다시 나올 수 있었는데, 근처 에 있던 한국인 의사 한 명이 나에게 와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군인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는 가운데 부상자들은 길바닥에 방치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진압봉에 맞았지만 혼란에 빠 진 군중에 의해 짓밟혀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군인들 사이를 뚫고 가장 심하 게 다친 사람들 중 몇몇을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작업을 몇 번 반복 하니까 군인들이 우리를 저지했고 부상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아직 남아있는 30명 가량의 부상자 들은 자력으로 군용 차량을 넘어야 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싸우자!”와 같은 구호들이 들 렸다. 그리고 이 구호를 외친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대부분 일반 시민들이었다.
그 의사와 나는 매우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 한 명을 들것을 이용하여 군인들 사이를 뚫고 내가 일하던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옮겼다. 그 곳의 의사들은 이미 일요일부터 많은 수의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이송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환자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해줬다. 심지어 한 중년 남성은 심한 뇌진탕으로 사망 직전이라고 했다. 내가 후송했던 환자는 카도릭센터 앞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던 남자였다. 당시 그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냐 하면, 내가 2년 후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11번의 수술을 거친 후였고 말을 하지 못했다.
또 다른 평화 봉사단 소속이었던 쥬디 챔버린(Judi Chamberlin)과 나는 귀 수술이 필요한 고아 한 명을 전주의 병원으로 데려가 주기 위해 전남대학교 병원을 떠났다. 그 때가 오후 1시 즈음 이었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정거장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 가 타던 버스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그 사이를 뚫고 나와서 우회로를 이용해 정거장까지 가려 고 했다. 군인들은 진압복을 입고 있었고 주택지역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집이나 가게 등에 있 는 젊은 남성들을 찾아내어 머리와 팔을 구타했다. 우리는 그들을 말리려고 했으나 저지당했다.
다른 평화봉사단 사람들에 의하면 버스 터미널은 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젊은 남성들을 대상으로 구타하고 제압했다고 했다.
5월 20일 (화요일) 이 날 아침은 비교적 조용했으나 불안했다. 나는 일단 별 탈 없이 출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점 심을 먹은 후에 나와 동료들은 근처 터미널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길을 막았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진격해서 젊은 남성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가 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에게 다가갔더니 그는 “몇 명이 죽든 상관없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의하면 일요일 오후와 월 요일 오전에 부상자들이 내원하기 시작했고 화요일에는 타박상, 찰과상, 골절상 등을 입은 환자 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심각한 부상자들만 받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화요일 오후에 도시 밖 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다음날 오후에 돌아올 때 한국 방송사였던 KBS와 MBC가 방송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송국들이 지난 며칠간 일 어난 사건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방송을 한다고 느낀 성난 시민들이 강제로 방 송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군인들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5월 21일 (수요일)
수요일 오전에 나와 평화봉사단 동료는 광주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버스 운행이 중단되었다. 차 를 얻어 타고 걸어서 오후 2시쯤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로 걸어 들어갔는데 공수부대 가 아닌 일반 군인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이들은 광주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송정리에 서 광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서 열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도착하 면서 우리는 그동안 도시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도로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며 시민들이 탈취한 버스와 트럭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수요일 오전에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서 군대와 맞섰 고, 버스, 군용 차량, 병력 수송 장갑차 등을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M-1 소총, 권총, 그 리고 탄약을 확보했던 것이었다. 선교사들과 다른 평화봉사단원들은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에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증언했다.[19]) 오후 4시 즈음 내가 도시 외곽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금남로에서 심각한 총격전이 벌여지고 있었다. 광주 기독병원은 2시에서 4시 사이에 99명의 중상자들이 내원했으며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20]) 대로에서 진행되고 있 던 싸움을 지켜보다가 우리는 근처에 있던 보건소들을 돌아보며 부상자들을 살폈다. 대부분 총 상을 입었지만 총칼에 찔린 사람들도 있었다. 이후에 몇몇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 기 관총을 설치했고, 군대는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5월 22일 (목요일)
군대가 철수했기 때문에 도시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여전히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 는 전남대학교 영안실에서 27구의 시체를 확인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출신 기자가 우리와 동행 했고 우리가 통역을 했다. 우리는 어딜 가든 자신들이 무슨 일을 봤는지 알려주려는 인파에게 휩싸였다. 특히 시민들은 지역방송사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크게 분노했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했다. 우리는 기독병원으로 가서 한 부상당한 학생과 대화를 나눴다. 그 학생에 의하면 본인은 서울대학교 학생이며 근처 시골인 담양에서 광주로 오 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했던 30명 가량의 사람들 중에서 자 신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주장했다.
그 날 오후 시민들은 “5.18 수습 15인위원회”(May 18th Coordinating Committee of 15)를 조 직했고 군대와 협상을 하러 군사령부가 위치한 상무대로 갔다. 그들은 일곱 가지의 요구 사항을 전했는데, 1)전투 부대의 배치를 중단할 것, 2)계엄군의 과잉진압 인정, 3)수감된 학생들 및 청 년들의 석방, 4)부상자와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 5)시민들을 처벌하지 말 것, 6)상황이 정리된 후 보복행위를 하지 않을 것, 7)우리의 요구 사항들을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할 것 등이 그 것이었다.[21]) 늦은 오후, 3-5만 명 정도의 인파가 도청 앞에 모여서 어떤 요구 사항을 관철시킬 것인지에 대해 토론을 했다. 강단 위에서는 다툼이 벌어졌고,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제 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몇몇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요구사항을 반대를 했고 무장을 해제할 것을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가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까지 싸우자는 의지를 피력하 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도중에 정부에서 보낸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인파 속으로 잡 혀 들어왔다. 그를 보호해주던 학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현장에서 무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으며 주변에서는 그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려는 사람들 도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위원회의 구성원은 바뀌어 있었으며, 온건적인 타협안에 반대한 집단이 주도권을 잡았다.
5월 24일 (토요일)
우리는 로빈 모이어와 독일 기자 몇 명을 데리고 도청으로 향했고, 출입증을 받아서 도청 안으 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날 결성된 위원회의 입장을 누가 대변하는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언론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나 이제 군인들을 도시 밖으로 쫓아낸 시점에서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가야할지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기자회견이 한 번 열렸는데 한국 언론인들은 배제된 채 진행되었다. 이는 국내언론의 편파적 보도에 분노한 학생들의 의지였다. 나는 동아일보 소속 기자 한 명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는데 그는 매우 억 울해 하고 있었다. 본인은 제대로 된 보도를 하고 있으나 서울에서 이를 검열하고 있다며 분통 을 터트렸다.
우리는 전남대학교 학생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군대가 곧 광주로 진격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이 눈 앞에서 폭행을 당하고 죽어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태가 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라(비록 정치적인 요구는 있었 지만) 군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집단적 저항에서 비롯된 것임을 해외 언론 사들에게 강조했다. 이는 이 학생뿐만 아니라 그 동안 우리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 려주던 수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던 바였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우리는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입구와 복도는 병원 침대가 즐비했다. 의사들은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우리에게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보여주기를 원했고, 자유롭게 병 원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우리는 병원 뒤쪽에 설치된 임시 영안실에 가서 30구의 시신을 확인했다.[22])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유족들은 시체 중에서 친구나 가족을 발견하면 오열을 하곤 했다. 이후에 도청 건물 건너편의 상무관으로 갔는데 여기에도 학생들이 설치한 임시영안실이 있었다. 여기서는 100구가 넘는 시신이 있었다. 늦은 오후, 도청 앞에 시 위가 벌여졌고 전두환의 인형이 불태워졌다.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새벽 3시 30분경 에 많은 총성이 들려서 군대가 다시 진격하는 줄로 알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달라진 것은 없었 다.
5월 25일 (일요일)
여전히 긴장이 감돌았지만 비교적 조용한 날이었다. 서울 언론사는 광주에 만연한 약탈 행위와 생필품 부족 사태를 보도했지만 정작 그러한 불평을 하는 광주시민은 만나보지 못했다. 도청 건 물에 있던 학생들 중 몇 명이 의문의 가해자에 의해 뒷다리를 볼펜으로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정부가 도시를 혼란에 빠뜨려서 다시 점령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고 믿었다. 다음 날 신문에는 “학생 한 명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상처에서 독을 빨아주려던 동료 학생도 곧이어 쓰러졌다. 둘 다 중태에 빠져 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23]) 나는 이 중 한 명을 알고 있었기 때 문에 그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단지 피곤해서 쉬고 있었다며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의사는 학생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고, 독이 아니라 잉크가 들어 있 는 볼펜으로 찔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시내에서 열린 한 시위에 참가했는데 버스 운행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분노한 사 람들 몇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위컴(Wickham)장군이 광주 사람들을 사살하는 것을 허가한 것이냐고 물었다.[24]) 실랑이 끝에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고 그들을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5월 26일 (월요일)
쥬디 챔버린과 나는 선교사들과 만나서 외국인들을 광주에서 대피시키는 문제로 회의를 했다. 선교사들과 모든 외국인들은 광주에서 떠나야 한다는 전갈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부 도시에 남기로 결정했다. 마사 헌틀리의 증언에 의하면,
5월 26일 아침에 기독교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서 “김 양”이라는 젊은 여성 한 명을 소개해줬다. 김 양은 자기를 만나러 광주로 왔다가 사태가 터지자 도시에 갇혔다고 말했다. 그 날 아침 누군가가 옆 집 사람들을 모두 몰살해버렸기 때문에 김 양이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도 되 느냐고 물었다. 헌틀리 여사는 이를 허락해줬다. 한 시간 후 즈음에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일주일 전 에 광주의 전화 서비스가 모두 차단된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였다. 알고 보니 김 양이 최규하 대통령의 친척이었던 것이었다. 하루에 몇 번씩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그녀의 상태를 물어보곤 했다. 김 양은 최규하 대통령 주위에는 그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사람 들 밖에 없고, 그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남 편과 동생도 청와대에서 근무를 했었고 본인은 미군병원에서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결국에 그녀는 헬리콥터를 통해 광주를 떠날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상무관에서 열린 합동장례식에 참가했다. 약 40개의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례가 끝난 후 우리는 도청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20여 구의 시신들이 있었다. 늦은 오후에는
New York Times의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 기자를 만났다.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설득하여 광주를 폭격하는 것을 저지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으 로 가서 피부과 의사 한 명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도시 외곽 지역에 위치한 군 병원에 근무를 나갔다 왔었는데, 한 시간 동안에 50구의 시신이 영안실로 공수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 날 밤, 군대가 다시 도시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 했 다.
5월 27일 (화요일)
쥬디 챔버린, 데이브 도링어, 그리고 나는 새벽 3시 경에 잠에서 깼다. 군대가 탱크를 앞장세우 고 포탄을 터뜨리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광주시민들은 도청으로 모여서 도시를 지키자 고 호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는 총성으로 묻히기 전까지 약 한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다. 오전 5시 30분 경에는 우리가 위치한 2층 방 바로 밑까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곳곳에 숨어있는 “폭도”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군인들이었으며 흰색 띠를 팔에 두르고 있었다. 8시 반에 우리는 시내로 갔다. 길가에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으 며 여기저기에 탱크와 군인들이 있었다. 15구의 시신을 확인했다. 어떤 군인은 광주에서 공산주 의 반란이 있어서 이를 진압하러 왔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도청으로 향했다. 건물의 좌 측 편은 무수한 총탄으로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 함께 말을 나눴던 한 학생 은 2층 창가에 반쯤 불에 탄 채로 죽어 있었다. 군인들은 체포된 시민군들을 줄로 묶은 후에 머리에 발길질을 했다. ABC News 소속의 한 기자는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며 구타행위를 말 리려고 카메라를 땅에 내려놓고 달려갔으나 군인들은 그를 밀어냈다. 우리는 공격을 목격한 기 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이 묵었던 방 벽에 박힌 총알들을 보여주며 촬영하지 말라 는 경고의 의미로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쐈다고 했다. 그 날 내내 군인들은 길가를 돌아다 니며 주택과 가게들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리고 폭도로 의심되는 자들을 숨겨주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 광주항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언론 보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하면 당시에 191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는 기관에 따라 300명에서 2000명까지 다양하다. 정확히 몇 명이 죽었든,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확인하게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이 사태에 관해 북한, 남한, 중국, 그리고 소련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그 차이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련의 보도는 북한과 비슷하나 사태를 극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사건은 혁명으로 묘사되었 으며, “노동자들은 어깨를 맞대며 학생들과 행진했다”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25]) 소련 측은 이 사태의 원흉으로 억압적인 정권을 지목했으나 미국의 역할을 더 강조하며,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에는 미국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보도했다.26)
소련은 또한 “중국의 패권주의자들이 미국의 책략을 묵인하고 있다”며 중국을 탓하기도 하였다.[26]) 그러나 전체적으로 소련의 보도들은 광주항쟁에 관련된 사실 전달이나 수치에 관해서는 매우 정확했다. 소련은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의 잔혹한 진압보다는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데 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도 북한의 논조를 따랐으나, 흥미롭게도 미국이나 미국의 정채기조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는 않았다. 중국의 미국비판은 간접적이었으며 북한이나 다른 해외 언론사들의 몫으로 떠넘겼 다. 또한 광주항쟁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묘사하려 했으며, “수천 명의 소작농들이 시골에서 모 여들었으며, 광부들은 폭발물을 들고 함께 했다”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28) 광주사태에 관한 중국의 비판은 간접적이었으며 마지막 심판은 역사에게 맡긴다와 같은 우회적 표현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파시스트 정권의 살육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와 같은 논조가 그것이다.29)
5월 29일까지의 북한의 보도는 비교적 정확했다. (따라서 이를 인용하는 소련과 중국의 보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사실을 매우 과장하곤 했다. “시위대는 바닥이 피로 물들 때까지 곤봉으 로 맞았다”[27])와 같은 표현을 쓰고, 노동자, 광부, 농민들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기도 했으나 사건 들에 대한 사실전달은 정확했다.
5월 19일에는 곧바로 “미국도 잘못이 있다”라고 보도했고, 5월 30일에도 “미국은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28]) 그러나 5월 29일부터 북한의 보도는 심각하게 과장되기 시작했다. 노동신문에서는 “꼬마 아이들은 나무로부터 목이 매달렸고 7살 아이 하나는 고문실에 들어갔다”라 는 기사가 실렸고, “역사상 이렇게 광주에서 일어난 것처럼 며칠 만에 잔혹한 학살 사건이 일어 난 것은 처음이다”라고 강조했다.[29]) 1980년 이후 광주항쟁을 언급하지 않는 북한매체는 별로 없을 정도였으며 소설, 에세이, 정치적 발언 등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매우 과 장되어 인용되었다. 영어로 발매되는 북한 잡지인 Korea Today의 최근호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공수부대원들은 나무에 묶인 나체의 여인의 몸에 단검을 쑤시며 솟구치는 피를 보며 기뻐했고, 절망하는 어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녀는 희망에 찬 눈으로 북쪽 하늘을 지켜봤다”라고 묘사하고 있다.[30])
대한민국의 언론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가며 사태를 축소하고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 5월 21일 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600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며 만연하는 헛소문들 때 문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시위에 참가했다.”[31])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보도나 기록은 계엄군 사령부가 5월 22일에 “지난 일요일 시작된 폭동이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다”라고 밝히는 정도였다.[32]) 10일 내내 군인과 경찰들의 사망 소식은 매우 강조된 반면에 시 민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무시되었다. 5월 21일자 신문에는 “21일 아침에 5명의 경찰과 군인들 이 사망하였으며 1명의 시민이 죽었다. 34명의 군경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인 한 명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서 사망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33]) 군인들의 잔혹함은 하나도 보도되지 않 았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가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들에 의해 현 혹되고 변질되었다”라고 주장했다.[34][35]) 광주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수감 중 인 김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5월 21일 TV 뉴스는 “김대중이 사주한 최근 사태가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5월 30자 Korea Herald는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다. 정 부에서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 것”이라고 전했다.38)
정부 발표
1980년 6월 1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에게 선동된 광주의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곧 난폭한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불순 세력들의 협조를 받으 며 북한간첩들도 이 사태에 개입했다”고 발표했다.[36]) 1980년 6월 5일에는 더 상세한 보고가 발 표되었으며, 김대중을 광주항쟁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가 잔인한 폭동을 사주하고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학생들은 김대중의 지시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선동가들에게 포 섭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특히 계엄군 사령부는 김대중이 전남대학교 학생인 정동년에게 시위 활동비 명목으로 5백만 원을 건넸다고 발표하고, “정동년이 5월 18일 학생시위를 일으키도록 부추겨서 결국 10일 간 진행된 폭동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라고 결론을 내렸다.[37]) 이 수사보고 서는 계속해서 “5월 18일 김대중은 서울에서 약 40명의 불순세력을 광주로 보냈으며 이들은 시 위자들로 위장하여 부엌칼, 괭이, 쇠방망이로 경찰들을 때렸으며 공공건물들을 불태우고 파괴했 다. 또한 김대중의 직속 부하 10명이 광주에 침투하여 헛소문을 퍼뜨렸다”라고 기술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믿지 않았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세부사항을 조금 수정 한 것 외에는 본래 보고서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1980년 8월에 미국대사관은 대한민국 정부 가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38][39]) 5년 후 1985년 6월 8일, 재야인사 들의 끈질긴 재조사 요구 끝에 국방부장관 윤성민은 국회 앞에서 광주항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을 했다.
9일간의 광주사태는 계엄군과 시위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이는 급진적인 전남대학교 학 생들이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유입된 불순세력들이 지민들의 감정 을 선동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다. 그들은 헛소문을 퍼뜨리고 뒤에서 사건을 조종 했다. 무장한 폭도들이 날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시민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의 자기방어마저도 자제했다. 군인들이 폭도들에 의해 학살됨에도 불구하고 군은 사태가 확산 되고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광주사태 뒤에는 정치 세력의 사주가 있었다. 이 는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42)
마지막 발언은 김대중이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
“정치세력”과 “외부 불순세력”의 사주와 헛소문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선동당했다는 주장이 대 한민국 정부 발표문의 핵심이다. 정부 보고서를 포함하여 목격자의 증언 등을 자세히 분석해보 면 이 주장은 완벽하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분석의 명확을 기하기 위해 필자는 5 월 18일 오후를 두 단계로 나누어 보겠다. 첫 단계는 3시까지이고 그 이후 단계는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된 3시부터 시작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맨 처음 사람들이 모이게 된 이유는 시위가 애초에 사람들이 많았던 시내 지역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보고서는 처음부터 외부세력이 사람들을 모았고 반 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했다고 주장한다. 즉, “5월 18일 정오부터 전라도 주민들을 흥분시킬 목적 으로 퍼뜨려진 헛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실제로 외부 선동가의 개입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미 군을 투입하려는 정부의 계획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5월 18일 정오에서 3시까지 광주 시내에 있었던 병력은 전투경찰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정부 보고서도 전라도 주민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들이 동원되었다는 헛소문 을 퍼트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시위대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지긴 했지만 어느 특정 인 물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결집시키려 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또한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서 반란을 기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전남대학교 학생은 당시에 다른 죄명으로 이미 체포 된 상태였다.
군중행위 연구에 의하면 “군중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마련이다.”[40][41]) 광주항쟁 당 시 군중행동은 지도자의 선동 보다는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오는 계엄군에 대한 집단적 대응의 형태에 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초기의 대응은 로저 브라운(Roger Brown)이 제시한 집단폭력의 고전적인 유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동기를 마음 속에 간직한 채 집단행동에 참여한다. 집단의 목적에 부합하는 열정에서 부터 단순한 호기심에 으르기 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몇몇은 자신들의 감정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 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동기와 공포를 의식하지 못한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종합해보 면 서로 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방향성을 잃은 집단이 생겨나는 것이다.44)
이것이 바로 우리가 5월 18일에 목격한 군중의 성격과 일치한다.
브라운은 ‘집단’을 선동자와 추종자로 나누고 있다. 그의 분류방식에 따르자면 학생들은 선동자 로 분류되겠지만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 들은 선동자가 아닌 셈이다. 나아가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사건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의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날 오후 광주 시내에 있 었던 군중들의 대다수는 ‘관심은 있으나 의견은 엇갈리는 추종자’였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학생 들과 전경들이 서로 돌을 던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 3시 이전에 사람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최류탄의 과도한 사용이었다.
우리가 관찬한 바에 따르면 “군중의 행위는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에 영향을 받 지 못한다”는 샘 라이트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5월 18일 진행된 시위는 4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인파가 움직이는 동안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 할 시간은 없었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급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며, 정부발표대로 ‘소문’을 듣고 외곽지역에서 도심으로 결집했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사태가 진행되면서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다. 리차드 버크(Richard Berk)가 지적했듯이 추종자들은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이해득실 과 명분을 지속적으로 따지기 마련이다.[42]) 몸을 사리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들 은 직접 행동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즉,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시위가 처음 시작되고 오후 3시까지 사람들은 단순히 전경들과 대립을 했을 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서울에서 목격한 수많은 시위들보다 더 과격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특히, 전년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시위보다는 확연히 더 평화로웠 다.
3시가 되자 공수부대가 등장했고, 군의 전략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는데, 필자는 이 사건이 광주 시민들이 군대에 대항한 시위대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분석하 는 데에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초기의 소규모 시위는 이틀 동안에 10만 명의 인파로 불어 났다. 군인들이 3시에 돌격을 해서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을 제압했을 때에 그들은 임시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는 앞으로 며칠 간 일어날 통제불가능한 폭력의 굴레를 촉발시킨 것이었다. 추종자들은 곧 주동자가 되었고 소문들(도시 밖에서 나도는 것이 아닌)이 생겨났고 다수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 다음날 5월 19일에 일어난 사건들은 이미 불타는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목격자 증언 들에 의하면 공수부대원들은 지속적으로 무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주거지역을 돌아 다니며 젊은 남성들을 수색하고 폭행하는 행위는 시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직접 목격한 이 군인들의 잔혹함은 그 어떤 “선동, 사주, 소문”보다 사람들의 봉기를 촉발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정부 보고에 의하면 5월 18일, 김대중은 40명의 깡패들을 광주에 보냈고 그들이 경찰관들을 부 엌칼, 괭이, 그리고 쇠방망이로 공격했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이 사실인지 판단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일요일 내내, 그리고 월요일의 대부분을 시위의 중심에 있었지만 시위대가 돌멩이 외에 다른 무기를 쓰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고, 이는 당시 대한민국 시위에서는 아 주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목격자 증언들 중에서도 시위대가 부엌칼, 괭이, 쇠방망이를 사용했다 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물론 화요일 오후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기 시 작했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광주항쟁은 학생이나 소위 “폭도”들의 시위가 아닌 도시 전체 규모 의 항쟁으로 확산된 상태였다.
선교사들과 평화 봉사단의 증언들에 의하면 군이 주장했던 “최소한의 자기 방어만 행사하며 마 지막 순간까지 자제력을 행했다”거나,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주 앙은 전부 거짓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공수부대원들은 5월 18일 오후 3 시에 도착했고, 아마도 이미 곤봉을 이용해서 시위대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 다. 이들의 행동에서 “자제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시위에서 10 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를 메웠는데도 서울의 전경들은 광주에서보다 훨씬 더한 자제력과 조심 성을 보였다. 시위가 시작된 시점에서 무력진압이 명령될 때까지는 4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력사용이 사람들을 위협하려고 한 것인지, 혹은 사람들을 도발시키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확실한 명령체계를 갖춘 대한민국 군인들이 개별적인 행동을 했다고는 믿겨 지지가 않는다. 분명히 모종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 벌어진 모든 사건들은 이 “명령”에 의해 촉발되었다. 시민들이 군인들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학생들의 정치적인 요구들은 아마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KBS가 왜 곡과 편파방송을 통해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폭력의 희생자가 소수였다면 광주시민들은 이른바 “헛소문”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소문들은 아마도 사실이 아니 었을 테지만, 방금 눈 앞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잔혹한 폭력을 목격한 시민들은 정부 보다는 학생, 동료 시민, 그리고 친구들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군이 폭력을 가하는 순간 당시의 정치 체계와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당연한 순서었다.
쟁점은 결국 군이 오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계획적으로 도발을 한 것인지로 모아진다. 대한민국 군대의 공식 자료를 열람하기 전까지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지만, 그들이 무력을 사용한 이유에 대한 유추는 가능하다. 계엄령이 전날 저녁에 선포되었고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세 력에 대한 첫 걸림돌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곳에서의 시위를 좌절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1979년 10월 일어났던 부마항쟁과 비슷한 사태를 막으려고 과잉진압을 했었을 수도 있다. 5월 19일에 군 지휘자 한 사람은 내가 일했던 병원의 의사들에게 부마항쟁 때에 군의 대응전략이 광주시위대를 제압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 때처럼 사태의 초기 상황에서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무력이 사용되곤 했었다. 만약에 이게 진정 군의 전략이었 다면 군은 자신들이 사용한 무력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거나, 이를 직접 실행에 옮긴 병사들이 너무나 ‘열심히’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직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군의 의도적인 도발 역시 정황상 설득력이 있다. 광주사태 초기에는 5월 18일 이전의 상황보다는 그 이후의 상황에 더 이목이 집중되었다. 5월 17일 밤에 실질적인 쿠데타가 일어나고 주요 정치인들과 수백 명의 학생들과 종교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광주 사태 이후의 엄청난 혼란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사태 이전에 이미 수감되었던 김대중이 반란의 주동자로 혐의를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정동년을 포함한 다른 학 생들 또한 내란혐의가 적용되었다.[43]) 몇몇 인권단체들은 군이 일부로 상황을 조작해서 정치개 입과 재야인사인 김대중의 체포를 정당화 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분석에 의하면 광주는 두 가지 이유로 선택되었다. 첫 번째로 김대중의 고향이고, 두 번째로 광주시민들에 대한 지역감정 때문 에 다른 지역 사람들의 동조를 얻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폭력이 사용된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초기저항과 정부의 과잉진압은 5월 17일의 실질적 인 쿠데타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지적한 것처럼 “권력 누 수를 느끼는 자들은 폭력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44]) 이 주장은 1980년 봄의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광주항쟁 이전에 군부는 정치권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 던 것은 사실이다. 대선이 약속되어 있었고 유신헌법은 해체되었으며 20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 이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군부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암살 이 후 꿈틀댔던 자유화를 향한 움직임이 탐탁지 않았고 이를 막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원했을 것 이다. “대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무질서는 안보의식의 부족이 초래한 것이다”라는 국 방부장관의 사태인식은 이러한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5월 17일 밤에 쿠데타가 진행되 었을 당시 군부는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정부정책을 바꾸기 위한 의지를 명백히 표명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자 그들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폭 도”들이 광주를 10일 동안 점령했지만 군부는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폭력으로 대신하 면 승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크다. 패배자뿐만 아니라 승리자 또한 자신의 권력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48) 광주항쟁 이후 종교계. 노동계, 재야, 그 리고 학생들에 의해 현 정부의 정당성은 끊임없이 위협받아 왔다.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진행되었던 과격시위는 당시 정권의 위태로운 처지를 잘 보여주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없이는 정권의 정당성은 계속해서 도전 받을 것이고, 공개적이고 공정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정부는 자기 자신을 기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광주사태는 대한민국 정치의 최대 분수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사태의 원인을 결론짓는 작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많은 요인들이 존재했고 명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군당국의 성실한 협조뿐만 아니라 더 많은 목격자 증언들을 수집하고 확인해야 한다. 5월 18일과 19일 특수부대가 행한 폭력의 잔혹함은 당시 진행되었던 시위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에 과도했던 것 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부 보고서에서는 단 한번도 군인들의 과잉진압을 인정하지 않았고 누구 에게 책임이 있는지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정부는 시민들의 과격행위를 탓하고 있으나, 왜 시민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돌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소 문’ 때문에 10만 명의 시민들이 무장저항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반면 일부 인권단체들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군인들의 야만적인 진압 사례를 고발하고 사상자의 수에 집착을 한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만 발생했더라도 이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투명하고 공정한 진상조사의 부재는 이미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5월 17 일의 쿠데타와 광주항쟁은 서로 얽혀져 있어서 분리되어 평가되지 않고 있다. 현정권이 이룩한 외교 및 경제적 성과는 이 정권이 권력을 잡게 된 과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증거 및 수치와 함께 광주소재 병원(군 병원을 포함하는) 자료, 병력배치 상황, 그리고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공명정대한 보고서의 작성 이 시급하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이러한 보고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광주에서의 10일간의 사건은 비밀과 음모에 의해 은폐되어 새로운 갈등과 폭 력, 광주시민들의 고통만 초래할 것이다.
[1] ) 대한민국의 지역주의의 뿌리와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Ki-baik Lee, A New History of Korea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84)를 참조. 특히 66-71, 98-101, 221-223쪽.
[2] ) 대한민국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나타난 파벌적 경향에 대해서는 Chonk-sik Lee,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63)과 Dae-su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67) 참 조.
[3] ) Korean Readers (Seoul, Yonsei Univ Press, 1979) 118-22쪽.
[4] ) 김영삼의 승리와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Ron Richardson, “The Opposition Gets
Tough,”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79,6.8 12쪽.
[5] ) Korea Times, 1979, 10.6 1쪽.
[6] ) Korea Times, 1979, 10.7, 1쪽.
[7] ) 부마사태에 대해서는 Newsweek, 1979, 10,29, 50-51쪽.
[8] ) Korea Times, 1979, 10,27, 1쪽.
[9] ) 12.12사태에 대해서는 Time, 1979, 12,24.
[10] ) “South Korea Army Rears Up,” Time, Dec 24, 1979. 30쪽.
[11] ) 유신헌법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1972년에 선포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Young
Whan Kihl, Politics and Policies in Divided Korea (Boulder, Westerview Press 1984).
[12] ) Young Whan Kihl, “Korea’s Fifth Republic: Domestic Political Trends,” Journal of North Asian Studies, vol 1, 1982, 38-40쪽.
[13] ) Paul Courtright, “Eyewitness Account of Demonstrations in Seoul and Kwangju,” 미발간, 1980년 6월
[14] ) Ron Richardson, “Barricades on the Road to Democracy,” Far Eastern Economic Review, May 23, 1980, 8쪽.
[15] ) Martha Huntley, “Recollections of the Kwangju Uprising: An Eyewitness Account,” 1985년 3월.
[16] ) Ron Richardson, “Barricades on the Road to Democracy,” Far Eastern Economic Review, May 23, 1980, 8쪽.
[17] ) Korea Times, 1980, 6월 8일.
[18] ) 공수부대는 게릴라전 훈련을 받은 한국군의 최정예 특수부대이다.
[19] ) 필자를 포함한 평화봉사단원들(쥬디 챔버린, 데이비드 도링어, 폴 코트라이트)과 헌틀리 목사 부부의 미발간 증언록 참조
[20] ) 헌틀리 목사의 증언
[21] ) 평화봉사단원 코트라이트의 기록 참조
[22] ) Judi Chamberlin, Eyewitness Account of the Kwangju Uprising, 미발간, 5쪽.
[23] ) Korea Times, 1980.5.27
[24] ) 위컴은 당시 한미연합사와 UN 사령부 사령관으로, 위컴이 전두환 신군부의 병력 이동을 허락해주었 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한미 양국 간 이러한 군사적 관계는 이후 한 국에서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Time, 1985, 6.5. 34쪽 참조
[25] )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FBIS), TASS, 1980. 5.21 26) FBIS, TASS, 1980. 6.2.
[26] ) FBIS, TASS, 1980. 5.25 28) FBIS, People’s Daily, 1980.5.22 29) FBIS, Beijing Review, 1980.6.5.
[27] ) FBIS, Korea Central News Agency(KCNA), 1980.5.19.
[28] ) FBIS, KCNA, 1980.5.19., 5.29.
[29] ) FBIS, KCNA, 1980. 5.30.
[30] ) Mount Mudung, Korea Today, 1985.11.11. 51쪽.
[31] ) FBIS, News Service, 1980.5.21.
[32] ) Korea Time, 1980.5.22.
[33] ) FBIS, News Service, 1980.5.21.
[34] ) Korea Times, 1980.6.1.
[35] ) Korea Herald, 1980.5.30.
[36] ) Korea Times, 1980.6.1.
[37] ) Korea Times,198.6.5.
[38] ) Time, 1980.8.25.
[39] ) Korea Times, 1985.6.8.
[40] ) Sam Wright, Crowds and Riots: A Study in Social Organzation, Sage Pubication, 1978, 61 쪽.
[41] ) Roger Brown, Social Psychology, (New York, Free Press, 1965)
[42] ) James Short et al., eds., Collective Violence, (Chicago, Aldine-Atherton, 1972)
[43] ) “Letter from Kwangju”,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81.5.29
[44] ) Hannah Arendt, On Violence, (New York, Harcourt, Bruce and World, 1969) 89쪽 48) Arendt, 53쪽.
Tim Warnberg,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Korean Studies, Vol.11, 1987, pp33-57, University of Hawai’i Press. (원문 참조: http://www.jstor.org/stable/23717579 )
<요 약>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 건 중에 하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과 혼란에 휩싸여 있다. 사태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과 분석 자료들이 있으나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으며, 현장에서 직접 사태의 진행상황을 지켜본 목격자들의 증언들은 정부의 공식입장과 언론보도들과는 큰 차이 가 나고 있다. 당시 광주에 거주했던 평화봉사단과 선교사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광 주사태는 외부의 정치세력이 선동한 사전에 계획된 도발이 아니라 군인과 경찰의 폭 력에 대항하는 지역주민들의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저항이었다. 정부 발표 자료와 이 에 반하는 목격자 증언들, 그리고 수많은 의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한국정부의 행태는 대한민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광주사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더디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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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80만 명이 거주하는 전라남도 광주 시에서 당시의 한국적 기준으로는 소규모 에 지나지 않는 일상적인 시위가 군인관의 폭력적 대치상황으로 확대되어 다수의 민간인과 군 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아직까지 엄청난 정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광주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이렇게 엄청난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은 공식자료는 대한민국 내외의 민간단체
들의 증언들과 매우 다르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volunter: PCV)소속으로 당시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목격한 나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은 새로운 목격자 증언들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하고자 한다. 과거의 많은 보고서 들은 주로 '사상자 수'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사태가 처음 발생한 시점부 터 그 후의 일련의 사건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무장저항으로 발전한 시기까지 의 목격자 증언, 정부 발표문, 언론보도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사태의 큰 그림을 그릴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사건이 갖는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과 당시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항쟁의 배경
광주항쟁에 큰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두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는 지역주의다. 대한민 국 지형은 여러 산맥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도 이런 산맥들 때문에 지리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최근에는 통신기술이 발전하여 서서히 나아지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는 이 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여 상호간 사회적, 경제적인 교류가 더디었고 결과적으 로 지역주의가 발전하고 고착되었다.
대한민국 지역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 당시에 전라도는 백제왕 국의 일부분이었고 경상도는 신라왕국의 영토였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는 마침내 10세기에 이르러 고려에 의해 통일되었다. 고려는 백제지역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펼 쳤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항복한 신라의 귀족들은 고려의 지배계층에 흡수되는 반면, 고려는 멸 망 직전까지 끈질기게 대항한 백제 주민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 이후 16세기에서 17세기 무렵에는 지식인들 간의 파벌 다툼에서 지역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에 와서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에서 지역주의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2])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요인 들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상이한 생활양식 및 사투리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지역주의는 양 지역 간에 열리는 매우 열광적인 스포츠 경기에서 종종 발견된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서로 혼인을 하기 꺼려하는 사회적 관행 등에서도 지역주 의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사람들은 이 두 지역 사람들에 대해 매우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 경상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로 충직함, 배타적, 독선, 남성적, 고집, 무뚝뚝 등과 같은 성 향이,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중적, 독선, 무식, 기회주의, 무례, 교활, 예술적 성향이 강할 것이라는 편견들이 존재한다.[3]) 이 두 지역 간의 경쟁은 대부분 악의가 없지만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는 보기 좋지 않은 모습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지난 26년 간 여당 계열의 정치인사(박정희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포함)들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인 반면에 지난 15년 간 이에 맞서는 재야 정치인들(김대중을 필두로)이 전라도 출신인 사실이 이러한 지역주의적 성 향을 더 부추기고 있다.
광주항쟁을 분석 할 때에 고려해야 할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은 사태 발생 전 몇 달에 걸친 대 한민국의 역동적인 정치상황이다. 1979년 후반에서 1980년 초에 대한민국 정치권은 극심한 혼 란을 겪고 있었다. 신민당 당수 김영삼의 부상과 야당 리더로서 그의 극적이고 예상치 못한(여 당의 입장에서)승리는[4]) 그 후 12개월 사이에 일어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의 촉매가 되었다. 1979년 10월 5일,[5][6]) 여당이 그의 "반체제적 발언"을 핑계로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킨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권에 엄청난 영향을 준 연쇄적 사건들을 촉진시켰다. 제명당하던 날 김영삼 본인 도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사건의 주동자들은 국민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앞일을 예상하기 라도 한 듯한 발언을 하였다.6)
김영삼 제명 이후 그의 고향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에서 매우 폭력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 고, 이로 인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7])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 대 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 중앙정보부(KCIA) 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26일에 박정희 를 암살했다. 이 사건 다음날, 신문에는 전두환 장군의 자그마한 사진이 실렸고 박정희 암살사 건 수사 책임자라는 설명이 붙었다.[8]) 2개월 후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 화가 박정희의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체포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이른바 12.12사태로 명명되었다.[9][10]) 전두환은 자신의 지휘 하에 있었던 수도방위사령부와 그의 육사 동 기들(노태우를 포함)이 지휘하고 있는 부대들을 동원하여 정승화 장군을 지키고 있던 해병부대 들을 제압했다. 정승화는 체포되고 곧 이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대사였던 윌리암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은 이 사건을 두고 "박정희를 따르는 세력들이 정치 자유 화를 반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라고 본국에 보고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12.12사태 이후 자유화를 향한 움직임은 확연히 진행되고 있었다. 유신헌 법[11])에 의한 긴급조치는 해제되었으며 수감되었던 학생들은 풀려났고 오랜 반정부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필두로 많은 재야 정치인들이 복권되었다. 1980년 초의 대한민국은 조심스러운 낙관 주의가 지배했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의했으며 곧 이어 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3김" 후보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장단점을 따지곤 했다.[12][13]) 이런 가운데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서서히 다져나갔으며, 1980년 4월 무렵에는 중 앙정보부 부장 및 보안사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4월에 들어서면서 계엄령 폐지 및 대통령대행 최규하를 막후에서 조정하 는 실세인 전두환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서 5월 초에 이르면서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5월 15일, 약 10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전날인 14일 정오가 학생들이 요구한 계 엄령 폐지 시한이었기 때문이다. 목격자 증언들에 의하면 이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진행 되었지만 폭력적으로 급전되었으며, 결국에는 탈취된 버스가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13)
학생운동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5월 16일 금요일과 5월 17일 토요일에는 시위가 없었으며, 비 교적으로 매우 고요했다.[14])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이전 1주일 사이에 이미 군부대들의 이동이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광주 기독병원 소속 선교사였던 헌틀리(Huntley) 목사 부부는 5월 16일 대전을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버스표를 전부 사버려서 버스표를 구할 수 없었다. 대신 기차를 탔는데 기차역과 열차 안에도 군인들이 우글우글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월 17일 자정에 선포될 계엄령에 대비하여 군인들이 미리 전국 곳곳으로 배치되는 중이었다.[15])
이렇게 복잡했던 당시의 정치상황과 대한민국 고유의 잠재적인 지역갈등을 염두에 두고 1980년 5월 18일의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중요한 사건들은 그것이 일어났던 날짜 로 기억되는데, 5월 18일은 ‘광주사태’(Kwangju Incident)를 의미하는 날짜가 되었다. 이제부터 평화봉사단(필자를 포함한)과 당시 광주에 살고 있었던 선교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5월 18일부 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것이다.
날짜별 정리
항쟁 발발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누가 상황을 지휘하고 있으며, 그리고 어떤 소 문들이 진실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소문 이상으로 잔인한 폭력을 실제로 겪고 목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군의 과잉진압과 관 련된 소문은 사실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10일의 항쟁 기간 동안 광주사람들을 지배하고 있 었던 정서는 불안감이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태가 정치적, 사회적 갈등에 의해 일어난 것은 분명 하지만, 폭력적인 사태로 확산된 원인은 여전히 모호하다. 사태의 시발을 좀 더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필자는 초반 며칠 간 일어난 사건들에 집중을 할 것이다. 이 초반의 사건들은 정부의 일련 의 대응과 광주시민들이 자신들의 무장항쟁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이 기 때문이다. 5월 18일 (일요일)
새벽에 김대중, 김종필, 학생 운동권 간부, 그리고 수많은 활동가들과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다.[16]) 주말을 맞이하여 근처 시골에서 광주로 모인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 관광호텔에 모여서 전날 저녁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호텔에서 우리는 미국문화원(American Cultural Center) 원장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를 만났지만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오전 11시쯤 우리는 광주 중앙로인 금남로로 나와서 버스정류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했을 때에 우리는 약 3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봤다. 그들은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듯 했으나 곧 이어 거리 한 가운데를 행진하며 김대중과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 과 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전경들과 장갑차들로 이루어진 저지 선에 맞닥뜨렸다. 전경들은 근처의 군용체육관인 ‘상무관’에서 출동했다.
학생들은 근처 공사장에 널브러져 있던 돌멩이들을 주워서 던지기 시작했으며 전경들은 곧바로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정부의 공식자료는 “오전 11:50 경 약 200명의 전남대학교 학생 들이 시내로 행진하는 도중에 경찰과 대립을 했으며 이 와중에 돌멩이와 최루탄이 투척되었다” 고 밝히고 있는데,[17]) 우리가 목격한 시위대는 전남대 정문 앞 시위대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 시간대에 우리는 이미 시내에 있었고 우리가 목격한 학생의 수는 30명 정도였기 때문 이다. 우리가 목격한 이 시위는 아마도 많은 광주시민들이 처음으로 목격한 ‘대치상황’인 것으 로 판단된다.
광주시민들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가거나 쇼핑을 즐기곤 하기 때문에 일요일의 거리에는 주 민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대로 옆에는 미국의 쇼핑몰과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산책로가 있는데 이곳 또한 쇼핑, 장사,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항상 꽉 차 있었다. 전경들이 시민을 향해 최류탄 을 일부러 발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과 근접거리에 있었던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를 피할 수 없었다. 최루탄이 투척될수록 시민들은 점점 더 분노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우리는 한 경찰관이 저지선을 뚫고 나와서 시민들을 향해 주먹을 치켜세우며 돌멩이 를 던져보라는 듯이 도발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계속 돌을 던졌고 전경은 최루탄으로 맞받아쳤으며 떨어진 돌을 다시 시민들을 향해 던졌다. 교통이 마비되었고, 버스는 시내를 벗어 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시민들은 전경들과 대립했지만 이 당시 우리가 본 광경은 우리가 과거에 서울에 봤었던 다른 시위들에 비해서는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후 3시 즈음 나는 금남로를 가로 막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18]) 바로 그 순간 공수부대원들이 앞으로 진격하며 진압봉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포에 휩싸인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도망쳤고 혼란 속에서 나는 어느 작은 가게 안으로 피신했다. 약 15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나와 같은 평화봉사단 소속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곧 군인 한 명이 가게로 들어와서 자신이 들고 있던 진압봉으로 사람들을 마구 패기 시작했다. 나와 평 화 봉사단 동료들을 발견한 그 군인은 멈추고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리가 골목 을 나와서 보니까 군인들은 다시 금남로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다친 사람들이 쓰 러져 있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머리, 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나와 두 명의 다른 평 화봉사단원들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중국집 배달원을 근처 병원으로 데려 갔다. 의사는 군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치료하기를 꺼려했지만 우리는 결국 의사를 설득해서 치료받게 하였다.
우리 말고도 다른 많은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들어오려고 애썼지만 의사는 10명 정도의 환자들 만 받고 문을 잠가버렸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문을 두들겼다. 이마에서 피를 흘 리고 있던 어느 한 소년은 당구를 치고 있다가 들이닥친 공수부대원에게 머리를 맞았다고 우리 에게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시위에 가담하고 있던 사람들도 있 었지만 상당수의 부상자들은 시위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던 도중에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 른 군인들에 의해 다친 것이었다.
우리는 병원을 떠나 거리로 나왔는데 가는 곳마다 부상당한 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다른 봉사자들은 각자의 봉사지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내 숙소의 건너편 도로에서도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광주에 15년 간 거주한 선교사 마사 헌틀리(Martha Huntley)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에 대전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서 돌아오 는데 택시기사는 우회로로 운전을 했다. 우리는 기사에게 왜 이 길로 가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시내 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답해줬다. 우리가 귀가하고 얼마 안 있어 정오 즈음에 전화가 울 리기 시작했고, 그후 며칠 동안 끊임없이 울렸다. 친구들과 학생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거리를 다 니다가 공격을 당했다고 알리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목격한 장면들을 설 명해주려고 전화를 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 황 설명을 요구했으며, 미국문화원(American Cultural Center)나 국무부(State Department)는 상황 을 잘 알고 있는지 물어왔다. 일요일 오전에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가거나 주일 학교에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은 시민들 중 상당수는 기독 교인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어느 한 30대 남성은 버스를 타고 있다가 강제로 하차 되어(다른 젊은 사람들과 함께) 머리에 심각한 발길질을 당했고, 결국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비슷한 나이였던 한 여성은 자녀들과 함께 주일학교에 가던 도중 공격을 당했고 의식을 잃은 채 인도에 방치되었다. 그녀는 두피에 부상을 입어 바늘을 꿰맸으며, 4개월 동안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일요일 오후에 학생들과 합심하여 군인들과 싸웠다. 그 누구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집 옥상에서 광주를 살펴봤다. 기차역 부근에 불에 타고 있는 트럭 한 대가 보였 지만 그 외에 도시는 비교적 조용했다.
5월 19일 (월요일)
11시30분 경 나는 출근을 하는 도중에 금남로의 카도릭센터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을 목격했다. 여기는 시내 중심부이기 때문에 시위대와 시민들이 뒤섞어서 누가 시위군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기는 했으나 시위대 규모는 제법 되었고, 방금 전까지 카도릭센터를 향해 투석 한 것처럼 보였다. 계엄군 사령부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던 탓이었다. 몇 몇은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며, 거리 한 가운데에는 불타는 차량이 한 대 있었다. 처음에 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위 를 서성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경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도청에 주둔하고 있었 던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진압봉으로 패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어느 중년여성이 나 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군인 한 명이 그녀의 십대 아들을 연행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군인에게 다가갔고 진압봉으로 얼굴을 한 대 맞고 난 뒤에 그 아이를 놓으라고 군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중년여성과 함께 그 장소를 벗어나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죠? 저들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죠?”하며 물어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 후 나는 뒷골목을 이용해서 여러 번 길을 우회한 후에 대로로 다시 나올 수 있었는데, 근처 에 있던 한국인 의사 한 명이 나에게 와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군인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는 가운데 부상자들은 길바닥에 방치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진압봉에 맞았지만 혼란에 빠 진 군중에 의해 짓밟혀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군인들 사이를 뚫고 가장 심하 게 다친 사람들 중 몇몇을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작업을 몇 번 반복 하니까 군인들이 우리를 저지했고 부상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아직 남아있는 30명 가량의 부상자 들은 자력으로 군용 차량을 넘어야 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싸우자!”와 같은 구호들이 들 렸다. 그리고 이 구호를 외친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대부분 일반 시민들이었다.
그 의사와 나는 매우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 한 명을 들것을 이용하여 군인들 사이를 뚫고 내가 일하던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옮겼다. 그 곳의 의사들은 이미 일요일부터 많은 수의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이송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환자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해줬다. 심지어 한 중년 남성은 심한 뇌진탕으로 사망 직전이라고 했다. 내가 후송했던 환자는 카도릭센터 앞에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던 남자였다. 당시 그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냐 하면, 내가 2년 후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11번의 수술을 거친 후였고 말을 하지 못했다.
또 다른 평화 봉사단 소속이었던 쥬디 챔버린(Judi Chamberlin)과 나는 귀 수술이 필요한 고아 한 명을 전주의 병원으로 데려가 주기 위해 전남대학교 병원을 떠났다. 그 때가 오후 1시 즈음 이었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정거장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 가 타던 버스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그 사이를 뚫고 나와서 우회로를 이용해 정거장까지 가려 고 했다. 군인들은 진압복을 입고 있었고 주택지역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집이나 가게 등에 있 는 젊은 남성들을 찾아내어 머리와 팔을 구타했다. 우리는 그들을 말리려고 했으나 저지당했다.
다른 평화봉사단 사람들에 의하면 버스 터미널은 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젊은 남성들을 대상으로 구타하고 제압했다고 했다.
5월 20일 (화요일) 이 날 아침은 비교적 조용했으나 불안했다. 나는 일단 별 탈 없이 출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점 심을 먹은 후에 나와 동료들은 근처 터미널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길을 막았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진격해서 젊은 남성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가 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에게 다가갔더니 그는 “몇 명이 죽든 상관없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의하면 일요일 오후와 월 요일 오전에 부상자들이 내원하기 시작했고 화요일에는 타박상, 찰과상, 골절상 등을 입은 환자 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심각한 부상자들만 받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화요일 오후에 도시 밖 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다음날 오후에 돌아올 때 한국 방송사였던 KBS와 MBC가 방송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송국들이 지난 며칠간 일 어난 사건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방송을 한다고 느낀 성난 시민들이 강제로 방 송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군인들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5월 21일 (수요일)
수요일 오전에 나와 평화봉사단 동료는 광주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버스 운행이 중단되었다. 차 를 얻어 타고 걸어서 오후 2시쯤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로 걸어 들어갔는데 공수부대 가 아닌 일반 군인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이들은 광주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송정리에 서 광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서 열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도착하 면서 우리는 그동안 도시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도로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며 시민들이 탈취한 버스와 트럭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수요일 오전에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서 군대와 맞섰 고, 버스, 군용 차량, 병력 수송 장갑차 등을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M-1 소총, 권총, 그 리고 탄약을 확보했던 것이었다. 선교사들과 다른 평화봉사단원들은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에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증언했다.[19]) 오후 4시 즈음 내가 도시 외곽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금남로에서 심각한 총격전이 벌여지고 있었다. 광주 기독병원은 2시에서 4시 사이에 99명의 중상자들이 내원했으며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20]) 대로에서 진행되고 있 던 싸움을 지켜보다가 우리는 근처에 있던 보건소들을 돌아보며 부상자들을 살폈다. 대부분 총 상을 입었지만 총칼에 찔린 사람들도 있었다. 이후에 몇몇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 기 관총을 설치했고, 군대는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5월 22일 (목요일)
군대가 철수했기 때문에 도시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여전히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 는 전남대학교 영안실에서 27구의 시체를 확인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출신 기자가 우리와 동행 했고 우리가 통역을 했다. 우리는 어딜 가든 자신들이 무슨 일을 봤는지 알려주려는 인파에게 휩싸였다. 특히 시민들은 지역방송사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크게 분노했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했다. 우리는 기독병원으로 가서 한 부상당한 학생과 대화를 나눴다. 그 학생에 의하면 본인은 서울대학교 학생이며 근처 시골인 담양에서 광주로 오 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했던 30명 가량의 사람들 중에서 자 신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주장했다.
그 날 오후 시민들은 “5.18 수습 15인위원회”(May 18th Coordinating Committee of 15)를 조 직했고 군대와 협상을 하러 군사령부가 위치한 상무대로 갔다. 그들은 일곱 가지의 요구 사항을 전했는데, 1)전투 부대의 배치를 중단할 것, 2)계엄군의 과잉진압 인정, 3)수감된 학생들 및 청 년들의 석방, 4)부상자와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 5)시민들을 처벌하지 말 것, 6)상황이 정리된 후 보복행위를 하지 않을 것, 7)우리의 요구 사항들을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할 것 등이 그 것이었다.[21]) 늦은 오후, 3-5만 명 정도의 인파가 도청 앞에 모여서 어떤 요구 사항을 관철시킬 것인지에 대해 토론을 했다. 강단 위에서는 다툼이 벌어졌고,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제 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몇몇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요구사항을 반대를 했고 무장을 해제할 것을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가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까지 싸우자는 의지를 피력하 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도중에 정부에서 보낸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인파 속으로 잡 혀 들어왔다. 그를 보호해주던 학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현장에서 무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으며 주변에서는 그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려는 사람들 도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위원회의 구성원은 바뀌어 있었으며, 온건적인 타협안에 반대한 집단이 주도권을 잡았다.
5월 23일 (금요일)
사태는 많이 진정되었고 학생들이 사태 뒷수습, 총기 회수와 등록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비행기 한 대가 도심 위를 지나가며 전단지를 뿌렸다. 이 전단지에는 정부에서는 이 사태가 선 량한 광주 시민들의 짓이 아닌 외부세력의 선동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있 었다. 이 전단지들과 더불어 TV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왜곡 및 편파 방송 때문에 시민들은 분 노했고 고립되어 갔다.
전날 결성된 위원회는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학생과 시민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조정위원회, 그 리고 새로이 만들어진 “투쟁위원회”(struggle committee)가 들어섰다. 우리는 Time지(로빈 모이 어, Robin Moyer)와 AP(테리 엔더슨, Terry Anderson) 소속의 기자들과 만나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이 날 우리는 통금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도청 건물 뒤에 위치한 작은 여관에 서 기자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한 번은 젊은 남성이 우리의 방에 와서 학생들의 입장을 알리려 했으나 숙면 부족으로 인해 앞뒤가 안 맞는 말만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 나갔다. 그날 밤 거리에 돌아다니는 차량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총성 또한 별로 들을 수 없었다.
사태는 많이 진정되었고 학생들이 사태 뒷수습, 총기 회수와 등록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비행기 한 대가 도심 위를 지나가며 전단지를 뿌렸다. 이 전단지에는 정부에서는 이 사태가 선 량한 광주 시민들의 짓이 아닌 외부세력의 선동으로 인해 벌어진 것임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있 었다. 이 전단지들과 더불어 TV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왜곡 및 편파 방송 때문에 시민들은 분 노했고 고립되어 갔다.
전날 결성된 위원회는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학생과 시민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조정위원회, 그 리고 새로이 만들어진 “투쟁위원회”(struggle committee)가 들어섰다. 우리는 Time지(로빈 모이 어, Robin Moyer)와 AP(테리 엔더슨, Terry Anderson) 소속의 기자들과 만나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이 날 우리는 통금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도청 건물 뒤에 위치한 작은 여관에 서 기자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한 번은 젊은 남성이 우리의 방에 와서 학생들의 입장을 알리려 했으나 숙면 부족으로 인해 앞뒤가 안 맞는 말만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 나갔다. 그날 밤 거리에 돌아다니는 차량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총성 또한 별로 들을 수 없었다.
5월 24일 (토요일)
우리는 로빈 모이어와 독일 기자 몇 명을 데리고 도청으로 향했고, 출입증을 받아서 도청 안으 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날 결성된 위원회의 입장을 누가 대변하는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언론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나 이제 군인들을 도시 밖으로 쫓아낸 시점에서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가야할지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기자회견이 한 번 열렸는데 한국 언론인들은 배제된 채 진행되었다. 이는 국내언론의 편파적 보도에 분노한 학생들의 의지였다. 나는 동아일보 소속 기자 한 명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는데 그는 매우 억 울해 하고 있었다. 본인은 제대로 된 보도를 하고 있으나 서울에서 이를 검열하고 있다며 분통 을 터트렸다.
우리는 전남대학교 학생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군대가 곧 광주로 진격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이 눈 앞에서 폭행을 당하고 죽어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태가 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라(비록 정치적인 요구는 있었 지만) 군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집단적 저항에서 비롯된 것임을 해외 언론 사들에게 강조했다. 이는 이 학생뿐만 아니라 그 동안 우리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 려주던 수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던 바였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우리는 전남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입구와 복도는 병원 침대가 즐비했다. 의사들은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우리에게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보여주기를 원했고, 자유롭게 병 원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우리는 병원 뒤쪽에 설치된 임시 영안실에 가서 30구의 시신을 확인했다.[22])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유족들은 시체 중에서 친구나 가족을 발견하면 오열을 하곤 했다. 이후에 도청 건물 건너편의 상무관으로 갔는데 여기에도 학생들이 설치한 임시영안실이 있었다. 여기서는 100구가 넘는 시신이 있었다. 늦은 오후, 도청 앞에 시 위가 벌여졌고 전두환의 인형이 불태워졌다.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새벽 3시 30분경 에 많은 총성이 들려서 군대가 다시 진격하는 줄로 알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달라진 것은 없었 다.
5월 25일 (일요일)
여전히 긴장이 감돌았지만 비교적 조용한 날이었다. 서울 언론사는 광주에 만연한 약탈 행위와 생필품 부족 사태를 보도했지만 정작 그러한 불평을 하는 광주시민은 만나보지 못했다. 도청 건 물에 있던 학생들 중 몇 명이 의문의 가해자에 의해 뒷다리를 볼펜으로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정부가 도시를 혼란에 빠뜨려서 다시 점령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고 믿었다. 다음 날 신문에는 “학생 한 명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상처에서 독을 빨아주려던 동료 학생도 곧이어 쓰러졌다. 둘 다 중태에 빠져 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23]) 나는 이 중 한 명을 알고 있었기 때 문에 그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단지 피곤해서 쉬고 있었다며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의사는 학생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고, 독이 아니라 잉크가 들어 있 는 볼펜으로 찔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시내에서 열린 한 시위에 참가했는데 버스 운행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분노한 사 람들 몇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위컴(Wickham)장군이 광주 사람들을 사살하는 것을 허가한 것이냐고 물었다.[24]) 실랑이 끝에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고 그들을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5월 26일 (월요일)
쥬디 챔버린과 나는 선교사들과 만나서 외국인들을 광주에서 대피시키는 문제로 회의를 했다. 선교사들과 모든 외국인들은 광주에서 떠나야 한다는 전갈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부 도시에 남기로 결정했다. 마사 헌틀리의 증언에 의하면,
5월 26일 아침에 기독교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서 “김 양”이라는 젊은 여성 한 명을 소개해줬다. 김 양은 자기를 만나러 광주로 왔다가 사태가 터지자 도시에 갇혔다고 말했다. 그 날 아침 누군가가 옆 집 사람들을 모두 몰살해버렸기 때문에 김 양이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도 되 느냐고 물었다. 헌틀리 여사는 이를 허락해줬다. 한 시간 후 즈음에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일주일 전 에 광주의 전화 서비스가 모두 차단된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였다. 알고 보니 김 양이 최규하 대통령의 친척이었던 것이었다. 하루에 몇 번씩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그녀의 상태를 물어보곤 했다. 김 양은 최규하 대통령 주위에는 그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사람 들 밖에 없고, 그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남 편과 동생도 청와대에서 근무를 했었고 본인은 미군병원에서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결국에 그녀는 헬리콥터를 통해 광주를 떠날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상무관에서 열린 합동장례식에 참가했다. 약 40개의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례가 끝난 후 우리는 도청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20여 구의 시신들이 있었다. 늦은 오후에는
New York Times의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 기자를 만났다.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설득하여 광주를 폭격하는 것을 저지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으 로 가서 피부과 의사 한 명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도시 외곽 지역에 위치한 군 병원에 근무를 나갔다 왔었는데, 한 시간 동안에 50구의 시신이 영안실로 공수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 날 밤, 군대가 다시 도시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 했 다.
5월 27일 (화요일)
쥬디 챔버린, 데이브 도링어, 그리고 나는 새벽 3시 경에 잠에서 깼다. 군대가 탱크를 앞장세우 고 포탄을 터뜨리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광주시민들은 도청으로 모여서 도시를 지키자 고 호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는 총성으로 묻히기 전까지 약 한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다. 오전 5시 30분 경에는 우리가 위치한 2층 방 바로 밑까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곳곳에 숨어있는 “폭도”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군인들이었으며 흰색 띠를 팔에 두르고 있었다. 8시 반에 우리는 시내로 갔다. 길가에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으 며 여기저기에 탱크와 군인들이 있었다. 15구의 시신을 확인했다. 어떤 군인은 광주에서 공산주 의 반란이 있어서 이를 진압하러 왔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도청으로 향했다. 건물의 좌 측 편은 무수한 총탄으로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 함께 말을 나눴던 한 학생 은 2층 창가에 반쯤 불에 탄 채로 죽어 있었다. 군인들은 체포된 시민군들을 줄로 묶은 후에 머리에 발길질을 했다. ABC News 소속의 한 기자는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며 구타행위를 말 리려고 카메라를 땅에 내려놓고 달려갔으나 군인들은 그를 밀어냈다. 우리는 공격을 목격한 기 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이 묵었던 방 벽에 박힌 총알들을 보여주며 촬영하지 말라 는 경고의 의미로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쐈다고 했다. 그 날 내내 군인들은 길가를 돌아다 니며 주택과 가게들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리고 폭도로 의심되는 자들을 숨겨주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 광주항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언론 보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하면 당시에 191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는 기관에 따라 300명에서 2000명까지 다양하다. 정확히 몇 명이 죽었든,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확인하게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이 사태에 관해 북한, 남한, 중국, 그리고 소련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그 차이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련의 보도는 북한과 비슷하나 사태를 극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사건은 혁명으로 묘사되었 으며, “노동자들은 어깨를 맞대며 학생들과 행진했다”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25]) 소련 측은 이 사태의 원흉으로 억압적인 정권을 지목했으나 미국의 역할을 더 강조하며,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에는 미국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보도했다.26)
소련은 또한 “중국의 패권주의자들이 미국의 책략을 묵인하고 있다”며 중국을 탓하기도 하였다.[26]) 그러나 전체적으로 소련의 보도들은 광주항쟁에 관련된 사실 전달이나 수치에 관해서는 매우 정확했다. 소련은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의 잔혹한 진압보다는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데 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도 북한의 논조를 따랐으나, 흥미롭게도 미국이나 미국의 정채기조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는 않았다. 중국의 미국비판은 간접적이었으며 북한이나 다른 해외 언론사들의 몫으로 떠넘겼 다. 또한 광주항쟁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묘사하려 했으며, “수천 명의 소작농들이 시골에서 모 여들었으며, 광부들은 폭발물을 들고 함께 했다”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28) 광주사태에 관한 중국의 비판은 간접적이었으며 마지막 심판은 역사에게 맡긴다와 같은 우회적 표현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파시스트 정권의 살육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와 같은 논조가 그것이다.29)
5월 29일까지의 북한의 보도는 비교적 정확했다. (따라서 이를 인용하는 소련과 중국의 보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사실을 매우 과장하곤 했다. “시위대는 바닥이 피로 물들 때까지 곤봉으 로 맞았다”[27])와 같은 표현을 쓰고, 노동자, 광부, 농민들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기도 했으나 사건 들에 대한 사실전달은 정확했다.
5월 19일에는 곧바로 “미국도 잘못이 있다”라고 보도했고, 5월 30일에도 “미국은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28]) 그러나 5월 29일부터 북한의 보도는 심각하게 과장되기 시작했다. 노동신문에서는 “꼬마 아이들은 나무로부터 목이 매달렸고 7살 아이 하나는 고문실에 들어갔다”라 는 기사가 실렸고, “역사상 이렇게 광주에서 일어난 것처럼 며칠 만에 잔혹한 학살 사건이 일어 난 것은 처음이다”라고 강조했다.[29]) 1980년 이후 광주항쟁을 언급하지 않는 북한매체는 별로 없을 정도였으며 소설, 에세이, 정치적 발언 등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매우 과 장되어 인용되었다. 영어로 발매되는 북한 잡지인 Korea Today의 최근호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공수부대원들은 나무에 묶인 나체의 여인의 몸에 단검을 쑤시며 솟구치는 피를 보며 기뻐했고, 절망하는 어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녀는 희망에 찬 눈으로 북쪽 하늘을 지켜봤다”라고 묘사하고 있다.[30])
대한민국의 언론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가며 사태를 축소하고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 5월 21일 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600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며 만연하는 헛소문들 때 문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시위에 참가했다.”[31])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보도나 기록은 계엄군 사령부가 5월 22일에 “지난 일요일 시작된 폭동이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다”라고 밝히는 정도였다.[32]) 10일 내내 군인과 경찰들의 사망 소식은 매우 강조된 반면에 시 민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무시되었다. 5월 21일자 신문에는 “21일 아침에 5명의 경찰과 군인들 이 사망하였으며 1명의 시민이 죽었다. 34명의 군경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인 한 명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서 사망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33]) 군인들의 잔혹함은 하나도 보도되지 않 았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가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들에 의해 현 혹되고 변질되었다”라고 주장했다.[34][35]) 광주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수감 중 인 김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5월 21일 TV 뉴스는 “김대중이 사주한 최근 사태가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5월 30자 Korea Herald는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다. 정 부에서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 것”이라고 전했다.38)
정부 발표
1980년 6월 1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에게 선동된 광주의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곧 난폭한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불순 세력들의 협조를 받으 며 북한간첩들도 이 사태에 개입했다”고 발표했다.[36]) 1980년 6월 5일에는 더 상세한 보고가 발 표되었으며, 김대중을 광주항쟁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가 잔인한 폭동을 사주하고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학생들은 김대중의 지시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선동가들에게 포 섭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특히 계엄군 사령부는 김대중이 전남대학교 학생인 정동년에게 시위 활동비 명목으로 5백만 원을 건넸다고 발표하고, “정동년이 5월 18일 학생시위를 일으키도록 부추겨서 결국 10일 간 진행된 폭동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라고 결론을 내렸다.[37]) 이 수사보고 서는 계속해서 “5월 18일 김대중은 서울에서 약 40명의 불순세력을 광주로 보냈으며 이들은 시 위자들로 위장하여 부엌칼, 괭이, 쇠방망이로 경찰들을 때렸으며 공공건물들을 불태우고 파괴했 다. 또한 김대중의 직속 부하 10명이 광주에 침투하여 헛소문을 퍼뜨렸다”라고 기술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믿지 않았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세부사항을 조금 수정 한 것 외에는 본래 보고서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1980년 8월에 미국대사관은 대한민국 정부 가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38][39]) 5년 후 1985년 6월 8일, 재야인사 들의 끈질긴 재조사 요구 끝에 국방부장관 윤성민은 국회 앞에서 광주항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을 했다.
9일간의 광주사태는 계엄군과 시위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이는 급진적인 전남대학교 학 생들이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유입된 불순세력들이 지민들의 감정 을 선동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다. 그들은 헛소문을 퍼뜨리고 뒤에서 사건을 조종 했다. 무장한 폭도들이 날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시민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의 자기방어마저도 자제했다. 군인들이 폭도들에 의해 학살됨에도 불구하고 군은 사태가 확산 되고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광주사태 뒤에는 정치 세력의 사주가 있었다. 이 는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42)
마지막 발언은 김대중이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
“정치세력”과 “외부 불순세력”의 사주와 헛소문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선동당했다는 주장이 대 한민국 정부 발표문의 핵심이다. 정부 보고서를 포함하여 목격자의 증언 등을 자세히 분석해보 면 이 주장은 완벽하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분석의 명확을 기하기 위해 필자는 5 월 18일 오후를 두 단계로 나누어 보겠다. 첫 단계는 3시까지이고 그 이후 단계는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된 3시부터 시작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맨 처음 사람들이 모이게 된 이유는 시위가 애초에 사람들이 많았던 시내 지역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보고서는 처음부터 외부세력이 사람들을 모았고 반 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했다고 주장한다. 즉, “5월 18일 정오부터 전라도 주민들을 흥분시킬 목적 으로 퍼뜨려진 헛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실제로 외부 선동가의 개입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미 군을 투입하려는 정부의 계획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5월 18일 정오에서 3시까지 광주 시내에 있었던 병력은 전투경찰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정부 보고서도 전라도 주민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들이 동원되었다는 헛소문 을 퍼트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시위대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지긴 했지만 어느 특정 인 물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결집시키려 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또한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서 반란을 기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전남대학교 학생은 당시에 다른 죄명으로 이미 체포 된 상태였다.
군중행위 연구에 의하면 “군중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마련이다.”[40][41]) 광주항쟁 당 시 군중행동은 지도자의 선동 보다는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오는 계엄군에 대한 집단적 대응의 형태에 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초기의 대응은 로저 브라운(Roger Brown)이 제시한 집단폭력의 고전적인 유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동기를 마음 속에 간직한 채 집단행동에 참여한다. 집단의 목적에 부합하는 열정에서 부터 단순한 호기심에 으르기 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몇몇은 자신들의 감정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 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동기와 공포를 의식하지 못한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종합해보 면 서로 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방향성을 잃은 집단이 생겨나는 것이다.44)
이것이 바로 우리가 5월 18일에 목격한 군중의 성격과 일치한다.
브라운은 ‘집단’을 선동자와 추종자로 나누고 있다. 그의 분류방식에 따르자면 학생들은 선동자 로 분류되겠지만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 들은 선동자가 아닌 셈이다. 나아가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사건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의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날 오후 광주 시내에 있 었던 군중들의 대다수는 ‘관심은 있으나 의견은 엇갈리는 추종자’였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학생 들과 전경들이 서로 돌을 던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 3시 이전에 사람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최류탄의 과도한 사용이었다.
우리가 관찬한 바에 따르면 “군중의 행위는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에 영향을 받 지 못한다”는 샘 라이트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5월 18일 진행된 시위는 4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인파가 움직이는 동안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 할 시간은 없었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급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며, 정부발표대로 ‘소문’을 듣고 외곽지역에서 도심으로 결집했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사태가 진행되면서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다. 리차드 버크(Richard Berk)가 지적했듯이 추종자들은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이해득실 과 명분을 지속적으로 따지기 마련이다.[42]) 몸을 사리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들 은 직접 행동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즉,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시위가 처음 시작되고 오후 3시까지 사람들은 단순히 전경들과 대립을 했을 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서울에서 목격한 수많은 시위들보다 더 과격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특히, 전년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시위보다는 확연히 더 평화로웠 다.
3시가 되자 공수부대가 등장했고, 군의 전략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는데, 필자는 이 사건이 광주 시민들이 군대에 대항한 시위대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분석하 는 데에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초기의 소규모 시위는 이틀 동안에 10만 명의 인파로 불어 났다. 군인들이 3시에 돌격을 해서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을 제압했을 때에 그들은 임시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는 앞으로 며칠 간 일어날 통제불가능한 폭력의 굴레를 촉발시킨 것이었다. 추종자들은 곧 주동자가 되었고 소문들(도시 밖에서 나도는 것이 아닌)이 생겨났고 다수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 다음날 5월 19일에 일어난 사건들은 이미 불타는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목격자 증언 들에 의하면 공수부대원들은 지속적으로 무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주거지역을 돌아 다니며 젊은 남성들을 수색하고 폭행하는 행위는 시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직접 목격한 이 군인들의 잔혹함은 그 어떤 “선동, 사주, 소문”보다 사람들의 봉기를 촉발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정부 보고에 의하면 5월 18일, 김대중은 40명의 깡패들을 광주에 보냈고 그들이 경찰관들을 부 엌칼, 괭이, 그리고 쇠방망이로 공격했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이 사실인지 판단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일요일 내내, 그리고 월요일의 대부분을 시위의 중심에 있었지만 시위대가 돌멩이 외에 다른 무기를 쓰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고, 이는 당시 대한민국 시위에서는 아 주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목격자 증언들 중에서도 시위대가 부엌칼, 괭이, 쇠방망이를 사용했다 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물론 화요일 오후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기 시 작했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광주항쟁은 학생이나 소위 “폭도”들의 시위가 아닌 도시 전체 규모 의 항쟁으로 확산된 상태였다.
선교사들과 평화 봉사단의 증언들에 의하면 군이 주장했던 “최소한의 자기 방어만 행사하며 마 지막 순간까지 자제력을 행했다”거나,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주 앙은 전부 거짓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공수부대원들은 5월 18일 오후 3 시에 도착했고, 아마도 이미 곤봉을 이용해서 시위대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 다. 이들의 행동에서 “자제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시위에서 10 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를 메웠는데도 서울의 전경들은 광주에서보다 훨씬 더한 자제력과 조심 성을 보였다. 시위가 시작된 시점에서 무력진압이 명령될 때까지는 4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력사용이 사람들을 위협하려고 한 것인지, 혹은 사람들을 도발시키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확실한 명령체계를 갖춘 대한민국 군인들이 개별적인 행동을 했다고는 믿겨 지지가 않는다. 분명히 모종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 벌어진 모든 사건들은 이 “명령”에 의해 촉발되었다. 시민들이 군인들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학생들의 정치적인 요구들은 아마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KBS가 왜 곡과 편파방송을 통해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폭력의 희생자가 소수였다면 광주시민들은 이른바 “헛소문”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소문들은 아마도 사실이 아니 었을 테지만, 방금 눈 앞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잔혹한 폭력을 목격한 시민들은 정부 보다는 학생, 동료 시민, 그리고 친구들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군이 폭력을 가하는 순간 당시의 정치 체계와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당연한 순서었다.
쟁점은 결국 군이 오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계획적으로 도발을 한 것인지로 모아진다. 대한민국 군대의 공식 자료를 열람하기 전까지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지만, 그들이 무력을 사용한 이유에 대한 유추는 가능하다. 계엄령이 전날 저녁에 선포되었고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세 력에 대한 첫 걸림돌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곳에서의 시위를 좌절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1979년 10월 일어났던 부마항쟁과 비슷한 사태를 막으려고 과잉진압을 했었을 수도 있다. 5월 19일에 군 지휘자 한 사람은 내가 일했던 병원의 의사들에게 부마항쟁 때에 군의 대응전략이 광주시위대를 제압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 때처럼 사태의 초기 상황에서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무력이 사용되곤 했었다. 만약에 이게 진정 군의 전략이었 다면 군은 자신들이 사용한 무력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거나, 이를 직접 실행에 옮긴 병사들이 너무나 ‘열심히’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직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군의 의도적인 도발 역시 정황상 설득력이 있다. 광주사태 초기에는 5월 18일 이전의 상황보다는 그 이후의 상황에 더 이목이 집중되었다. 5월 17일 밤에 실질적인 쿠데타가 일어나고 주요 정치인들과 수백 명의 학생들과 종교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광주 사태 이후의 엄청난 혼란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사태 이전에 이미 수감되었던 김대중이 반란의 주동자로 혐의를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정동년을 포함한 다른 학 생들 또한 내란혐의가 적용되었다.[43]) 몇몇 인권단체들은 군이 일부로 상황을 조작해서 정치개 입과 재야인사인 김대중의 체포를 정당화 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분석에 의하면 광주는 두 가지 이유로 선택되었다. 첫 번째로 김대중의 고향이고, 두 번째로 광주시민들에 대한 지역감정 때문 에 다른 지역 사람들의 동조를 얻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폭력이 사용된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초기저항과 정부의 과잉진압은 5월 17일의 실질적 인 쿠데타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지적한 것처럼 “권력 누 수를 느끼는 자들은 폭력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44]) 이 주장은 1980년 봄의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광주항쟁 이전에 군부는 정치권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 던 것은 사실이다. 대선이 약속되어 있었고 유신헌법은 해체되었으며 20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 이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군부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암살 이 후 꿈틀댔던 자유화를 향한 움직임이 탐탁지 않았고 이를 막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원했을 것 이다. “대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무질서는 안보의식의 부족이 초래한 것이다”라는 국 방부장관의 사태인식은 이러한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5월 17일 밤에 쿠데타가 진행되 었을 당시 군부는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정부정책을 바꾸기 위한 의지를 명백히 표명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자 그들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폭 도”들이 광주를 10일 동안 점령했지만 군부는 결국 승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폭력으로 대신하 면 승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크다. 패배자뿐만 아니라 승리자 또한 자신의 권력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48) 광주항쟁 이후 종교계. 노동계, 재야, 그 리고 학생들에 의해 현 정부의 정당성은 끊임없이 위협받아 왔다.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진행되었던 과격시위는 당시 정권의 위태로운 처지를 잘 보여주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없이는 정권의 정당성은 계속해서 도전 받을 것이고, 공개적이고 공정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정부는 자기 자신을 기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광주사태는 대한민국 정치의 최대 분수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사태의 원인을 결론짓는 작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많은 요인들이 존재했고 명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군당국의 성실한 협조뿐만 아니라 더 많은 목격자 증언들을 수집하고 확인해야 한다. 5월 18일과 19일 특수부대가 행한 폭력의 잔혹함은 당시 진행되었던 시위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에 과도했던 것 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부 보고서에서는 단 한번도 군인들의 과잉진압을 인정하지 않았고 누구 에게 책임이 있는지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정부는 시민들의 과격행위를 탓하고 있으나, 왜 시민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돌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소 문’ 때문에 10만 명의 시민들이 무장저항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반면 일부 인권단체들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군인들의 야만적인 진압 사례를 고발하고 사상자의 수에 집착을 한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만 발생했더라도 이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투명하고 공정한 진상조사의 부재는 이미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5월 17 일의 쿠데타와 광주항쟁은 서로 얽혀져 있어서 분리되어 평가되지 않고 있다. 현정권이 이룩한 외교 및 경제적 성과는 이 정권이 권력을 잡게 된 과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증거 및 수치와 함께 광주소재 병원(군 병원을 포함하는) 자료, 병력배치 상황, 그리고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공명정대한 보고서의 작성 이 시급하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이러한 보고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광주에서의 10일간의 사건은 비밀과 음모에 의해 은폐되어 새로운 갈등과 폭 력, 광주시민들의 고통만 초래할 것이다.
[1] ) 대한민국의 지역주의의 뿌리와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Ki-baik Lee, A New History of Korea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84)를 참조. 특히 66-71, 98-101, 221-223쪽.
[2] ) 대한민국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나타난 파벌적 경향에 대해서는 Chonk-sik Lee,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63)과 Dae-su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67) 참 조.
[3] ) Korean Readers (Seoul, Yonsei Univ Press, 1979) 118-22쪽.
[4] ) 김영삼의 승리와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Ron Richardson, “The Opposition Gets
Tough,”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79,6.8 12쪽.
[5] ) Korea Times, 1979, 10.6 1쪽.
[6] ) Korea Times, 1979, 10.7, 1쪽.
[7] ) 부마사태에 대해서는 Newsweek, 1979, 10,29, 50-51쪽.
[8] ) Korea Times, 1979, 10,27, 1쪽.
[9] ) 12.12사태에 대해서는 Time, 1979, 12,24.
[10] ) “South Korea Army Rears Up,” Time, Dec 24, 1979. 30쪽.
[11] ) 유신헌법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1972년에 선포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Young
Whan Kihl, Politics and Policies in Divided Korea (Boulder, Westerview Press 1984).
[12] ) Young Whan Kihl, “Korea’s Fifth Republic: Domestic Political Trends,” Journal of North Asian Studies, vol 1, 1982, 38-40쪽.
[13] ) Paul Courtright, “Eyewitness Account of Demonstrations in Seoul and Kwangju,” 미발간, 1980년 6월
[14] ) Ron Richardson, “Barricades on the Road to Democracy,” Far Eastern Economic Review, May 23, 1980, 8쪽.
[15] ) Martha Huntley, “Recollections of the Kwangju Uprising: An Eyewitness Account,” 1985년 3월.
[16] ) Ron Richardson, “Barricades on the Road to Democracy,” Far Eastern Economic Review, May 23, 1980, 8쪽.
[17] ) Korea Times, 1980, 6월 8일.
[18] ) 공수부대는 게릴라전 훈련을 받은 한국군의 최정예 특수부대이다.
[19] ) 필자를 포함한 평화봉사단원들(쥬디 챔버린, 데이비드 도링어, 폴 코트라이트)과 헌틀리 목사 부부의 미발간 증언록 참조
[20] ) 헌틀리 목사의 증언
[21] ) 평화봉사단원 코트라이트의 기록 참조
[22] ) Judi Chamberlin, Eyewitness Account of the Kwangju Uprising, 미발간, 5쪽.
[23] ) Korea Times, 1980.5.27
[24] ) 위컴은 당시 한미연합사와 UN 사령부 사령관으로, 위컴이 전두환 신군부의 병력 이동을 허락해주었 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한미 양국 간 이러한 군사적 관계는 이후 한 국에서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Time, 1985, 6.5. 34쪽 참조
[25] )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FBIS), TASS, 1980. 5.21 26) FBIS, TASS, 1980. 6.2.
[26] ) FBIS, TASS, 1980. 5.25 28) FBIS, People’s Daily, 1980.5.22 29) FBIS, Beijing Review, 1980.6.5.
[27] ) FBIS, Korea Central News Agency(KCNA), 1980.5.19.
[28] ) FBIS, KCNA, 1980.5.19., 5.29.
[29] ) FBIS, KCNA, 1980. 5.30.
[30] ) Mount Mudung, Korea Today, 1985.11.11. 51쪽.
[31] ) FBIS, News Service, 1980.5.21.
[32] ) Korea Time, 1980.5.22.
[33] ) FBIS, News Service, 1980.5.21.
[34] ) Korea Times, 1980.6.1.
[35] ) Korea Herald, 1980.5.30.
[36] ) Korea Times, 1980.6.1.
[37] ) Korea Times,198.6.5.
[38] ) Time, 1980.8.25.
[39] ) Korea Times, 1985.6.8.
[40] ) Sam Wright, Crowds and Riots: A Study in Social Organzation, Sage Pubication, 1978, 61 쪽.
[41] ) Roger Brown, Social Psychology, (New York, Free Press, 1965)
[42] ) James Short et al., eds., Collective Violence, (Chicago, Aldine-Atherton, 1972)
[43] ) “Letter from Kwangju”,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81.5.29
[44] ) Hannah Arendt, On Violence, (New York, Harcourt, Bruce and World, 1969) 89쪽 48) Arendt,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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