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박은하 경향신문 기자 페북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지명관 전 교수 별세 - 경향신문

박은하 경향신문 기자

경남 진주의 빈농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시골에서는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겠다고 판단해 부모와 아내, 여동생을 데리고 1930년대 일본 고베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왔다. 여동생은 함께 오지 않았다. 아마 고베에서 결혼한 모양이다. 

엄마의 고모에 해당하는 이 분은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을 생각하고 옷가지 등을 꾸준히 보내줬다고 한다. 받는 입장에선 어느 순간부터 부담되고 필요없었다는데. 1970년대 어느 날 고향을 방문해서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내가 공연한 일들을 했구나" 하고 놀랐다 한다. 아쉽게도 지금 이 분의 자손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1970년대에는 엄마의 고모 뿐 아니라 재일한국인들 사이에서 한국 방문 붐이 불었다고 한다. 왜? 그 때가 되어서야 양국 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도쿄대 교수였던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은 <청춘을 읽는다>에서 <세카이>에 연재된 T.K생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도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그도 1970년대 한국을 방문했다. 안보투쟁, 전공투 투쟁, 김대중 납치 사건 등으로 일본 역시 시끄러웠고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연재됐다는데 강상중 책을 읽은지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나는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를 대학교 졸업하고 취업에 허덕이며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때 읽었다. 서점에서 선 채로 읽다 눈물콧물 떨어뜨리는 바람에 책을 사고 말았다. 한 개인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강상중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자신의 청춘을 결정한 책 5권 중 하나로 꼽았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영향으로 다녀온 유신치하 한국에서 강상중은 무엇을 봤는지 그때부터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나름 사학과 졸업 백수였는데, T.K생이 지명관이란 사실을, 아니 애초 <세카이>에 이런 게 연재됐는지도 강상중 책 보고 처음 알았다. 오늘 다른 분 페이스북 댓글에서 봤는데 지명관은 한국의 기독교 계열 민주화 단체에서 반출한 자료를 보고 글을 쓰고 연재를 했다고 한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영화 <1987>식으로 (혹은 <설강화>라는 망한 작품으로) 줄곧 서사화되지만 기억의 투쟁을 거치며 빈 구석이 많아졌다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기억의 재현을 쥔 주체들이 편의적으로 지운 기억들이 많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재현에서 지워진 큰 덩어리 중 하나는 국제연대, 특히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일 것이다. 한국 민주화에는 여러 우연적 요소가 작용했다. 군사정권이 세계 자본주의에 편승해 수출 주도 경제개발 계획을 밀었기에 미국이 허용하는 한도까지의 독재를 할 수 있었고 (김대중을 죽이지는 못한다거나) 올림픽 유치가 역설적 효과를 낳은 것 등이 단적이다. 바로 옆에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고 선거로 정권이 선출되며(교체는 잘 안 되지만) 한국에 대해 잘 아는 나라가 있다는 것도 무시 못하지 않았을까. 

1970년대 운동권들은 학습을 이와나미 신서로 많이 했다고들 한다. 
80년 5월 광주를 알린 힌츠페터는  독일 방송국 도쿄특파원이었다. 지금 벨라루스는 폴란드 언론이, 아프간은 인도 매체나 알 자지라가 열심히 쓰는 걸 보며, 아세안이 형식적으로 뭐라도 해야 미얀마 군정이 주춤한다거나 아프간 여성 인권은 사우디에 달렸단 얘기들을 들으며, 달아날 인접국 없는 곳에서 연대를 호소하며 싸움을 계속하는 세계 곳곳의 활동가들은 보며, 
그리고 역시 일본 얘기는 한국 언론이 가장 잘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1970~1980년대의 <세카이>는 미얀마 현지 소식을 대신 내던 <주간경향>이나 <한겨레21> 같았겠구나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민주화에도 이웃이 필요했을 것이란 얘기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뿐 아니다. 1970년대  청계천에서 제정구와 함께 빈민운동을 한 일본인도 있었다. 한일 기독교 빈민운동의 연대였다. 한일 양국 수뇌부가 야합해 만든 기생관광 반대운동과 더 나아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일본발 국제연대운동이기도 했다. 일본제국이라는 [폭력으로 묶인] 공통의 뿌리를 직면하고 맞서는 운동이다. 근래에 들어 이런 류의 일본 시민사회와의 국제연대운동은 어려워졌다. 일본의 소위 양심적 지식인들에게도 한계가 있었고, 일본의 사회운동이 크게 퇴조한 까닭도 있다. 그러나 한국 진보 스탠스의 반일감정이나 일제시대, 민주화를 기억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다.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조차도 국가와 인민/시민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훈련돼 있지 않다.(언론은 이 무지의 첨병이고) 이건 국제연대의 큰 걸림돌이다. 기억의 독점 경향도 심해지고 있다. 

서로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아서 한일관계가 이대로 유지될 것 같지는 않지만. 지명관 선생의 생을 보며 한일관계의 입체성을 다시 생각한다. 특히나 아시아 민주주의 운동을 한국 민주주의의 수출 결과 쯤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을 바로잡거나, 자랑스런 민주화에 너무 취한 나머지 <설강화>같은 작품이 나오고(나는 취해서 나온 것이라 판단한다) 그 작품의 방영중지로 맞대응하는 걸 넘어서는 괜찮은 사회가 되려면 알아야 할 과거라 생각한달까. 지명관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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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Yi San
남조선 민주화 운동에 일본 언론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사실 상, 미국이나 독일보다도 큰데, 제대로 재조명을 받은 적이 없다고 봅니다. 지리적으로 그렇고, 당시 부산 마산 수출 자유지역에 일본 자본이 많이 투자한 탓도 있을겁니다. 공산당 기관지 적기 기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더만요. 

개인적으로는 여하튼 일본어 읽기 공부한 원인 중에 하나였고... 80년 광주만 해도 일본 기자들이 제일 먼저 들어갔고, 국내에 힌츠페터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화면들 중 NHK가 촬영한 분량이 꽤 됩니다. 일본 기자들 증언을 차분히 기록할 필요가 있는데, 별로 관심들이 없는듯 합니다 (여하튼, 최근 관제 반일감정 때문에 더 힘들어진 작업이 되어버렸음). 

실제로, CIA FOIA 웹사이트를 보면, 80년 당시 CIA도 일본 언론 한국 기사를 영문 번역해서 많이 열람했더라고요. 그 범위가 메이저 언론부터 주간지 수준까지 다양했어요. 

현 상황은 사실 한심하죠. 예컨데, 최근 518 진상위 국민 보고 회의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찾아낸 사실을 자신들이 찾아낸양 언론플레이 였는데... 세금과 시간이 아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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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지명관 전 교수 별세
오경민 기자
2022.01.02 15:04 입력
북한서 태어나 남한·일본 오간 ‘경계를 넘는 여행자’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대를 묘사
“역사적으로 사회는 늘 발전… 불균형 해소가 과제”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저자이자 한·일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간 우호를 강조해 온 지식인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지난 1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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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전 교수는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과 일본을 오가며 산, ‘경계를 넘는 여행자’였다. 고인은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46년 평양 김일성대학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1947년에 월남했다. 이후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덕성여대 교수와 잡지 ‘사상계’ 주간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197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20년 망명 생활의 시작이다. 일본에 머무르며 도쿄여자대학 교수로 9년간 재직했다. 1993년 귀국한 뒤에는 한림대 석좌교수, 일본학연구소 소장,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KBS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74년 7월호 <세카이>에 실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가 ‘T·K生’으로 표기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7월호 <세카이>에 실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가 ‘T·K生’으로 표기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인은 2003년 자신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 ‘T·K生(생)’임을 밝혔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유신독재 시절인 1973년부터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1988년까지 15년간 일본의 진보 학술잡지 ‘세카이(世界)>에 달마다 연재된 글이다.


고인은 ‘T·K생’이라는 필명으로 당시 국내 언론들도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독재정권의 실상과 민주화운동의 경과를 매달 기고해 해외에 알렸다. 당시 국내 정보기관의 추적에도 ‘T·K생’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이 풍부하고 정확해 많은 이들이 ‘T·K생’은 개인이 아닌 다수일 거라 추측했다.


2007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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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엮어 책으로 내면서 저자의 말에 “미완의 역사로서 현대사는 자칫하면 쓰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대를 묘사한다는 것은 때로는 일방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며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고인은 이 밖에도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한국과 한국인> <한일 관계사 연구> 등 다수의 학술서와 자서전 <경계를 넘는 여행자> 등을 집필했다. 저서에서는 거듭해 지식인의 역할과 한·중·일 등 아시아 국가 간 연대를 강조했다.


그는 어두운 시대를 겪고 나면 새 시대가 온다고 봤다. 생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는 늘 발전해왔다. 그런데 사회는 발전 과정에서 늘 한 부문은 쇠락하고, 또 다른 쪽은 융성하는 불균형이 일어난다”며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중요 과제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고,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새롭게 융성하는 부문은 키우되,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도 쇠락하는 부문은 정책적 배려를 통해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7시에 치른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정숙씨와 지형인(게이오대 교수), 지효인(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임원), 지영인(미네소타대 교수), 박순경씨가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지명관 전 교수 별세 - 경향신문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지명관 전 교수 별세

2022.01.02 15:04 입력
북한서 태어나 남한·일본 오간 ‘경계를 넘는 여행자’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대를 묘사
“역사적으로 사회는 늘 발전… 불균형 해소가 과제”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저자이자 한·일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간 우호를 강조해 온 지식인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지난 1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8세.

지 전 교수는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과 일본을 오가며 산, ‘경계를 넘는 여행자’였다. 고인은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46년 평양 김일성대학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1947년에 월남했다. 이후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덕성여대 교수와 잡지 ‘사상계’ 주간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197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20년 망명 생활의 시작이다. 일본에 머무르며 도쿄여자대학 교수로 9년간 재직했다. 1993년 귀국한 뒤에는 한림대 석좌교수, 일본학연구소 소장,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KBS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74년 7월호 <세카이>에 실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가 ‘T·K生’으로 표기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7월호 <세카이>에 실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가 ‘T·K生’으로 표기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인은 2003년 자신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 ‘T·K生(생)’임을 밝혔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유신독재 시절인 1973년부터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1988년까지 15년간 일본의 진보 학술잡지 ‘세카이(世界)>에 달마다 연재된 글이다.

고인은 ‘T·K생’이라는 필명으로 당시 국내 언론들도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독재정권의 실상과 민주화운동의 경과를 매달 기고해 해외에 알렸다. 당시 국내 정보기관의 추적에도 ‘T·K생’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이 풍부하고 정확해 많은 이들이 ‘T·K생’은 개인이 아닌 다수일 거라 추측했다.

2007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이상훈 선임기자.

2007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고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이상훈 선임기자.

고인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엮어 책으로 내면서 저자의 말에 “미완의 역사로서 현대사는 자칫하면 쓰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대를 묘사한다는 것은 때로는 일방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며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고인은 이 밖에도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한국과 한국인> <한일 관계사 연구> 등 다수의 학술서와 자서전 <경계를 넘는 여행자> 등을 집필했다. 저서에서는 거듭해 지식인의 역할과 한·중·일 등 아시아 국가 간 연대를 강조했다.

그는 어두운 시대를 겪고 나면 새 시대가 온다고 봤다. 생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는 늘 발전해왔다. 그런데 사회는 발전 과정에서 늘 한 부문은 쇠락하고, 또 다른 쪽은 융성하는 불균형이 일어난다”며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중요 과제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고,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새롭게 융성하는 부문은 키우되,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도 쇠락하는 부문은 정책적 배려를 통해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7시에 치른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정숙씨와 지형인(게이오대 교수), 지효인(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임원), 지영인(미네소타대 교수), 박순경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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