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지명관 "日 세카이誌 '한국통신' 필자는 나였다" - 조선일보

[사람들] "日 세카이誌 '한국통신' 필자는 나였다" - 조선일보:

[사람들] "日 세카이誌 '한국통신' 필자는 나였다"
지명관 한림대 교수 “필명‘T.K.생’으로 15년간 연재”고백

김수혜기자
입력 2003.07.25 18:56 | 수정 2003.07.25 19:21

1973년부터 88년까지 15년간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世界)’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한국 군부 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주화 운동이 주제였다.

필명(筆名)은 ‘T.K.생’. 당연히 가명으로, 누구도 정체를 몰랐다. 일본에 주재하는 한국 정보요원들이 필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지명관(池明觀·79) 한림대 석좌교수가 ‘세카이’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15년 만에 입을 열었다. “‘T.K.생’은 바로 나”라고.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지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강사와 덕성여대 교수를 지낸 뒤 197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93년 귀국하기까지 만 20년간 일본 도쿄여대 교수를 지내며 칼럼을 썼다.

이 글을 쓰도록 맨 처음 권한 사람은 당시 세카이 편집장을 맡았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후에 이와나미출판사 사장 역임·98년 작고)였다. 지 교수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고향 선배 선우휘(鮮于輝·86년 작고)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 나를 야스에 편집장에게 소개했다”며 “선우 주필은 ‘T.K.생’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지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유신체제 출범과 긴급조치 발동 등으로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외부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라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취재는 어려웠다. 미국인 선교사와 언론인을 포함해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국내 민주화 진영이 작성한 메모를 지 교수에게 전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지 교수는 “손으로 쓴 꼬깃꼬깃한 메모로 일일이 담배를 말아 담뱃갑에 넣어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메모들을 바탕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지 교수가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의 원고를 썼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누군가 들이닥쳐 수고(手稿)를 훔쳐볼까봐, 반드시 앉은 자리에서 새벽까지 집필해 한 번에 썼다.

탈고하고 나면, 야스에 편집장이 제3의 장소에 사람을 보내 스파이 접선하듯 지 교수의 원고를 받아갔다. 그는 지 교수가 손으로 쓴 원고를 일일이 손으로 베낀 다음, 자기 손으로 원본을 불태웠다. 지 교수는 “특히 1980년 7월호에 실린 칼럼에서 ‘반민주화의 폭력’이라는 제목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썼다”고 말했다. 광주의 진실을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던 시절,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세카이를 손에서 손으로 전하며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돌려 읽었다.

일본에 와서 지 교수와 만나고 한국에 돌아간 사람 가운데 정보당국에 붙잡혀가서 "세카이 칼럼의 필자가 누구인지 대라"고 혹독하게 혼이 난 사람도 있었다. 지 교수는 "독방에서 외롭게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내 이름을 대지 않은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다"고 했다.
98년 야스에 편집장이 작고했을 때, 지 교수는 일본의 문호(文豪) 오에 겐자부로, 도쿄대 명예교수 사카모토 요시카즈와 나란히 야스에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했다. 야스에 편집장이 "평생의 지기(知己)였던 이 세 사람에게 조사를 맡겨달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야스에는 특히 “지 교수가 세카이에 칼럼을 쓰느라 오랫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고생했다”며 마음 아파했다. 장례식에서 지 교수는 몹시 울었다.

지 교수는 88년 대선 직후 자발적으로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 "누구든 자유롭고 안전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T.K.생'이 2003년의 한국 현실을 돌아본다면, 무엇이 가장 안타까울까.
"어느 쪽 입장에 서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인데, 요즘은 너무 분열되어 있어서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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