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3

알라딘: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유진 Y. 박

알라딘: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유진 Y. 박 (지은이),유현재 (옮긴이)푸른역사2018-07-13원제 : Between Dreams and Reality: The Military Examination in Late Choson Korea, 1600-1894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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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20,000원
Sales Point : 240

8.0 100자평(0)리뷰(1)


292쪽
152*224mm
566g
ISBN : 9791156121152

책소개
'문화'로 읽어낸 조선 후기 역사. 조선의 역사는 1392년부터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왕조이지만 식민지배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의 역사가 끝나다보니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은 조선시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무인의 역사를 통해 상기한 이분법적인 통설에 기반하여 조선 후기역사를 이해하는 큰 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 조선 조정은 무과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는지 그리고 백성들은 합격하더라도 무관이 될 수 없었던 무과에 왜 백성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는지 조선 후기 무과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저자는 무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종종 간과되어왔던 방법론과 이론적인 이슈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1608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총 477회의 무과에 대해 현존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무과와 같은 조선 후기의 특정 제도들이 어떻게 피지배층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정부의 부정부패와 농민의 몰락과 같은 문제가 계속되는데도 왕조가 지속되는 데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설명한다.


목차


한글판 서문
서문

1. 조선 초기 무과제도
고려의 무과와 조선의 건국|국가를 위한 군대|새로운 무과제도|무과급제자들의 추락하는 정치적 위상|귀족들의 지속적인 무과 장악|소결

2. 벌열 무반의 대두
1592년 이후의 무과|무과제도에 대한 조선 후기의 비판|벌열 무반가계의 형성|왜 전문화specialization인가|벌열 무반과 정치|소결

3. 향촌 지배층과 무과
영호남 지방의 양반|개성의 지배층|평안도와 함경도의 유력층|소결

4. 피지배층과 무과
혼인관계|양자 입양|문.무관 소속의 다양성|매관매직|신성불가침한 귀족|소결

5. 피지배층과 무과
17세기 피지배층의 정치 참여에 대한 민담과 법적 조항 근거들|《무과방목》을 통해 살펴본 비양반층 과거 응시의 실제|피지배층과 조선 후기 사회변동|사회적 성공으로 이끄는 무과의 한계|피지배층의 열망|무인의 기풍과 통속문화|소결

결론


참고문헌
부록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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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 문文과 무武의 관계가 복잡하게 된 것은 귀족들이 그들의 신분을 규정짓고 그 신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과정 때문이었다.



P. 40 1402년 2월에 처음 무과가 시행되면서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년시에서는 대체로 경서에 관한 시험(강서講書, 강경講經)과 무술시험을 치렀다. 식년시의 예비단계에서 응시자들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騎擊) 등 총 여섯 가지 무술 실력을 평가받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응시자들은 무술 실력을 다시 한 번 평가받을 뿐 아니라《경국대전》과 고전에 대한 지식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경전은 사서오경 중 한 권,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한 권, 그 외에 여러 고전에서 한 권씩 선택할 수 있었다. …… 마지막 단계인 전시를 치를 때 응시자들은 임금 앞에서 격구와 보격步擊 등의 기예를 선보여야 했다. 접기
P. 44 15세기에는 두 차례의 무과에서만 100명 남짓 되는 합격자가 배출된 것과는 달리, 16세기 조일전쟁 전까지 무과는 적어도 여섯 차례 이상의 무과를 통해 100명 이상의 급제자를 양산했는데, 모두 16세 기 중반 이후에 시행된 것이었다. …… 당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 관료들은 대부분 문무과가 과하게 시행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왕과 공신들은 이 시험들이 단지 일종의 자격을 조금씩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달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를 장려했으며 실행에 옮겼다. 접기
P. 65 여진족과 왜구가 침입하면서 국가 안보에 위기가 나타났고 이전보다 자주 대규모의 무과를 시행할 필요가 생겼다. 조선 초기의 양인개병제가 붕괴된 이후 무과제도는 필요한 군사를 확보하는 데 임시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국가에서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전 시기의 정책에서 벗어나 한량과 서얼, 심지어 노비에게까지 규제를 풀어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접기
P. 73 1402년부터 1591년까지는 무과급제자가 7,758명이었지만, 1592년부터 1607년까지는 대략 2만 명에서 4만 명 정도의 응시자들이 무과에 합격했다. 1608년에서 1894년 사이에는 그 수 가 12만 1,623명이나 되었다. 무과급제자의 마지막 숫자는 1592년 이전 조선 초기와 비교할 때 15배 증가한 수치이다. …… 1402년부터 1592년까지 대략 160번 정도의 무과가 치러졌는데, 1592년부터 1894년까지는 적어도 535번이 시행되었다. 대략 15개월에 한 번에서 6개월에 한 번씩으로 시행횟수가 증가한 것이다. 접기
P. 74 조일전쟁 중 정부는 적어도 세 번의 무과를 시행했으며 각각의 무과에서 천 명 이상의 합격자를 양산했다. …… 1593년 왜군에게서 서울을 되찾았을 때부터 1597년 왜군의 공격이 재차 발발하기까지 4년 동안, 궁술시험에서 화살을 과녁에 한 개라도 적중시킨다면 강경을 보지 않고도 무과에 합격할 수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1592년 여름 사간원의 상소에 따르면, 무과에서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낮아 응시자들 중에는 활을 한 번 잡아보지도 않은 자들이나 노인들 혹은 연약한 아이들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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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유진 Y. 박 (Eugene Y. Park)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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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지역학 전공으로 석사,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펜실베니아대Upenn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0년부터 동 대학의 제임스 주진 김 한국학 프로그램 디렉터 보직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Between Dreams and Reality: The Military Examination in Late Chos?n Korea, 1600~1894, A Family of No prominence: The Descendants of Pak Tokhwa and the Birth of Modern Korea, 엮은 책으로 Peace in the East: An Chunggun’s Vision for Asia in the Age of Japanese Imperialism(Yi Tae-Jin, Kirk W. Laesen과 함께 엮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 총 7종 (모두보기)

유현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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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로 문학석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경교대, 서울교대, 서울대, 조선대, 한림대, 펜실베니아대Upenn에서 강의했다. 대표 저작으로 〈조선 후기 주전鑄錢 정책과 재정財政 활용〉(박사학위 논문)과 조선 후기 화폐 및 군문軍門의 운영에 대한 논문이 있다.

최근작 : <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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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다시,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등 총 315종
대표분야 : 역사 5위 (브랜드 지수 583,901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300년간 시행된 477회 무과급제자 3만 2327명 완벽 분석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틀에 비춰본 조선 후기 새롭게 보기

조선의 무과武科는 체제 수호를 위한 완충장치

‘문화’로 읽어낸 조선 후기 역사

조선의 역사는 1392년부터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왕조이지만 식민지배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의 역사가 끝나다보니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은 조선시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무인의 역사를 통해 상기한 이분법적인 통설에 기반하여 조선 후기역사를 이해하는 큰 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 조선 조정은 무과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는지 그리고 백성들은 합격하더라도 무관이 될 수 없었던 무과에 왜 백성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는지 조선 후기 무과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저자는 무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종종 간과되어왔던 방법론과 이론적인 이슈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1608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총 477회의 무과에 대해 현존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무과와 같은 조선 후기의 특정 제도들이 어떻게 피지배층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정부의 부정부패와 농민의 몰락과 같은 문제가 계속되는데도 왕조가 지속되는 데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설명한다.

무과의 역사, 체제의 완충장치

임란 이후 조정에서는 공로가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전과 달리 무과를 대규모로 시행했고 북쪽 변경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1620년의 무과에서는 만 명이 넘는 합격자를 양산하여 ‘만과萬科’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었다. 1609년부터 1894년 사이 실시된 무과 가운데 254번의 무과에서는 한번에 100명이 넘는 많은 합격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합격자들이 실제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해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과는 더 이상 국방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관의 지위하락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무과응시에 더욱 열을 올렸고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를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즉, 체제의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조선 조정은 무과를 통해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빈번한 무과의 설행이 관직 권위의 실추 등 또 다른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조정이 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층들은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화적 자산을 일부만 공유함으로써 유연하게 사회위기를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배층들은 독점적으로 향유했던 문화의 일부 특히 과거 합격이라는 중요한 관문 특히 무과의 관문을 피지배층에게 조금씩 양보하며 체제불만이라는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통념에 대한 도전

저자는 한국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던 보편적인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양반’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원문에서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을 ‘귀족aristocracy’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조선의 양반을 귀족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는 양반의 성격이 고려시대의 지배층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지배층이 어떻게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과와 무인들이 어떤 역할과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통사적으로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양반 특히 문신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떤 사회적 제도를 이용하여 특권을 유지하며 세습해 나갔는지 과거科擧, 결혼, 입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연대기 자료를 포함해 문?무과 급제자의 합격자 명단을 바탕으로 저자의 해박한 보학譜學 지식을 더해 인적 네트워크를 밝히고 그 네트워크가 어떻게 양반을 귀족으로 불리도록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밝히고 있다.
한 사회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정의할 것인지 여부는 그 사회 전체의 성격규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제로 한 동안 한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검토되지 않았던 거시적인 문제였다. 저자가 조선의 지배층의 호칭에 대한 보인 관심은 500년이나 지속된 조선왕조의 성격규정과 관련된 큰 틀에 대한 거시적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탄탄한 자료 분석으로 뒷받침

저자의 조선 후기의 위기와 무과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탄탄한 한국사 자료 이해에서 그 견고함을 더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한국사 공부를 하여 전산화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기자료(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를 비롯하여 각종 방목榜目(문?무과 합격자 명단)과 같은 관찬사료뿐만 아니라 지방지, 문집, 호적戶籍, 민담, 소설, 회화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그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첫 번째로, 조선시대 전체 무과급제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2,327명의 무과급제자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러한 자료 구성은 무과급제 연구에 대한 분석 중에서 가장 방대한 샘플이다.
두 번째로, 이전에 간과되었던 법전, 호적戶籍, 읍지, 문집, 방목榜目, 그리고 족보 등무과제도 관련 자료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이전 연구에서는 이러한 자료들이 충분히 이용되지 않았거나 심지어 빠지기도 했다.
세 번째, 구전되거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자료를 분석해 무과제도가 당시의 서민문화를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고찰했다. 본래 무과의 기능은 국가가 중앙관직의 무관을 뽑기 위한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으며, 이는 1894년 무과제도가 폐지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군담소설 등을 분석해 평민들이 말 타기와 활쏘기 같은 기능을 시험하는 무과를,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접기




신분 상승 욕구의 대안, 무과



외국 학자가 쓴 한국사는 항상 신선하다.

제 3자적인 관점이 익숙한 현상과 통설들을 다르게 보는 역할을 해서 무척 흥미롭고 무엇보다 민족주의적인 당위론에 함몰되지 않아 객관적인 느낌이 들어 읽기가 편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던컨 교수의 <조선 왕조의 기원>과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조선의 건국 이후 혁성혁명으로 이질적인 지배층이 들어선 게 아니라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이 여전히 집권층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에서는 조선 건국 이전에 과거를 봐서 중앙으로 진출한 향리들은 양반, 즉 귀족이 됐으나 1392년 건국 이후는 그 통로가 막혔음을 지적한다.

이 부분이 정말 새로웠다.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고려 시대의 향리가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다는데, 이들이 조선의 아전 계층과 같다는 얘기인가 항상 모호했었다.

고려 전에는 가능했던 중앙으로의 진출 혹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조선 건국과 함께 닫힌 셈이다.

더불어 강력한 중앙 집권제로 인해 지방에서 자율성을 유지했던 향리층은 중인 피지배층으로 떨어지고 만다.

또 양반을 분명하게 귀족이라 명시한 점도 흥미롭다.

양반은 서양의 귀족과 어떻게 다른가, 의문이었던 점이다.

저자는 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양반을 귀족이라고 정의했다.

보통 양반이라고 하면 고정된 신분층이 아니고 관료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계층으로 유동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이 책에서 보면 양반은 조선 말기까지 그 태생에 의해 다른 계층과 구별되는 확실한 상위 신분, 즉 귀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중앙 권력은 극소수의 서울 관료 가문이 오랫동안 독점하여 마치 지방 양반들이나 무인 관료들과는 다른 신분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나, 이들은 서로 통혼했고 양자를 들일 정도로 같은 신분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양반의 특권인 면세를 위해 경제적 관점에서 함께 싸웠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면세층이 늘어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고 국고가 줄어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 항상 의문이었던 점이, 조선은 양란을 거치면서도 체제가 전복되지 않고 어떻게 오랜 기간 존속했을까였다.

중국이라는 강력한 제국의 번국으로서 안정을 취한 점도 있겠으나 저자는 국가 자체 내에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무과 급제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줬다고 본다.

과거가 실제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기 보다는,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위신재 내지는 문화자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관직 매매인 공명첩도 마찬가지 작용을 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엄청난 인원의 무과 급제자들이 생겨 단순히 급제했다고 양반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고 무엇보다 피지배계층의 지위 상승 욕구를 충족시켜 궁극적으로는 불만 세력의 완충재가 된다.

이미 가치가 하락해 버린 무과 급제를 갈망하는 하층민의 욕구를 부르디외의 이론을 빌려와 지체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중앙 귀족들은 문과 급제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무과 역시 위상이 살아 있었다.

조선이 얼마나 내부적으로 안정된 사회였는지 새삼 깨달았고 일본에 의한 강제 개방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통제력을 가진 국가로써 기능했을 듯 하다.

조선 사회 계층과 이동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책이고 무엇보다 번역이 정말 훌륭하다.

뒤에 꼼꼼하게 단 역자주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거의 없이 아주 매끄럽다.

기본적으로 역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 같다.

230 페이지 정도의 작은 분량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조선 사회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7p

조선 후기에 소수의 벌열 가문이 중앙 문관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 밖의 양반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때 중앙관직에서 소외된 몇몇 가문들은 무과를 통해서 정치적으로 문반보다 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무반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관이 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과 문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삼남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도 중앙정치의 장에서 그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무관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처럼 문반과 차이가 나는 무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남지방의 귀족가계와 중앙의 문무관 후계가문들은 여전히 서로를 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한국의 역사학자와 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정치적 참여를 하고자 하는 사회적 세력을 국가가 수용하지 못해 통일신라가 멸망했다거나 조선과 같이 체제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듯이 직업과 그에 따른 수입이라는 기준을 사용해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특권이라는 요소는 계급을 정의하는 데 고려하지 않았다.

16p

필자는 조선 초기의 최상위층이 고려의 귀족층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조선의 귀족들은 문과를 통해 상당한 명예와 주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지라도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향리 같은 기득권층을 권력구조에서 제외함으로써 고려의 귀족보다 더욱 엄격하게 권력을 독점하였다. 조선의 귀족 신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었고, 1392년에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한 그룹은 이후에도 귀족이라는 지위는 얻을 수 없었다. 조선이 개국하기 이전에 최상위층에 속하게 된 귀족층들은 그들이 포함된 최상위층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과거급제, 관품 혹은 관직 등이 없어도 되는 세습적 지위를 영구화했다. ... 한국에서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사회적으로 新鄕, 구체적으로는 요호부민의 등장을 봉건질서의 해체에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지만, 서구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양반층이 중심이 된 구체제의 안정이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조선의 정규군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러 봉기들을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그들은 서구나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에나 공화정을 요구하기보다 근면한 성리학적 군주가 당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왕정을 요구했다.

31p

무관 지도자들은 기존의 관료구조를 버리거나 문관들을 숙청하지 않는 대신 무관 독재자들 자신이 문관의 지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를 거치면서 무관들은 문관들과 협력하며 혼인관계를 맺었고 문무관을 구별하는 오래된 사회적 차별은 모호해져, 귀족가문에서 문무관리가 모두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 1506년과 1623년 두 차례의 반정으로 국왕이 폐위되었던 사실은 군의 실질적 통수권이 임금으로부터 유력한 대신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당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 관료들은 대부분 문무과가 과하게 시행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왕과 공신들은 이 시험들이 단지 일종의 자격을 조금씩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달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를 장려했으며 실행에 옮겼다. ... 16세기 조선의 주된 근심은 백성들의 빈곤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여 군대에 병사들이 제대로 충원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중앙집권화 정책은 지방 향리와 같은 사회집단을 희생시켜서 국가와 양반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양반들이 국가와 양인 납세자들의 희생을 통한 이득을 보기 시작했다. ...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술 실력을 갖추어야 했지만, 급제자들이 일반 병사들과 확실히 구별되었던 특징은 지휘관과 관리로서의 가능성이었다. 무과 장원급제자들은 무관직보다는 문반직 6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받았는데, 이는 이들 급제자들이 병법과 경서 그리고 법전을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군대 지휘권자가 될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전 세기에 이루어졌던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과급제자들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장군이나 관리자가 아닌 군사훈련만 익힌 병사로서 인식되었다. ... 중앙귀족들은 서북지역을 양반이 없는 곳으로 간주했고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여 지역차별을 하였다. 17세기부터는 북쪽지방 출신들이 문무과시험에서 경쟁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쪽지방이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여러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인재들을 활용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 기본적으로 양반에게 중요한 것은 이후 어떤 관직에 진출하느냐가 아니라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 그 자체였다.

72p

균역법 시행이 논의될 때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할지 여부가 논란의 중심이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양반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 자신들의 신분상 특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조는 최초로 양반에게 세금을 걷는 것을 찬성한 왕이었으나... 조일전쟁 직전의 무과가 1592년 조일전쟁 당시 왜군에게 대적했던 조선의 초기 군사력을 향상시키는 데 특별한 효과가 없었던 것처럼, 조일전쟁 이후의 무과도 만주인들과 싸우는 전장에서의 효울성을 높이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 1681년 청나라가 난을 진압하고 마침내 명나라에 충성하던 대만을 통치하게 되자, 조선은 18세기까지 청에 대한 적개심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군사적으로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 만약 일본군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동학농민군은 정부를 압박하여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빈번히 시행되었던 대규모의 무과들이 군대를 유지해서 작은 규모의 봉기들을 무산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사회적 불만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던 19세기 말로 갈수록 그 효용성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미 살펴본 것처럼 외세의 군사적 위협이 줄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선 후기 대규모 무과가 자주 치러진 이유로 볼 수 없다. 조선 후기까지 대규모 무과를 존속시켰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능한 무관들을 필요로 했고, 19세기까지 조선은 성공적으로 필요한 무관을 선발하고 있었다. ... 무과급제자들의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었음을 볼 때 무과급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루기 힘든 성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남성들이 대부분 10대에 결혼하여 30세 즈음에는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사실에 근거해 본다면, 무과에 급제하려면 보통 10년 이상 공부하고 수련을 해야 하므로 근근히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무과급제는 더욱더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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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소외된 양반들이 당당하게 관직에 오르는 방법이자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써 무과급제를 바라보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많은 가문의 후손들은 스스로가 걸출한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기 위해 족보를 점점 더 세밀하게 고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중국에서 기원한 조상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가문도 있었다. ... 소양을 갖춘 귀족들이 계속해서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고 합격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 시험 자체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권위는 당시로서는 확실히 가치가 떨어져 버린 관직에 이름을 올리는 일과 구분되었다. ... 이렇게 압도적인 개성의 상업적 역할은 1882년 이후 조선이 무역 상대국들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하기 전까지만 계속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개성상인들이 변화된 조선의 근대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중앙에서는 해당 지방에 '상무'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풍이 성장하여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커졌고, 서원에 사액을 요구하던 문사가 앞장서서 성리학적인 문화와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 필요하다면 조선 초기의 중앙이나 영호남 지방 양반가와 연결고리를 상상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이 초기에 영호남에서 북부로 옮긴 이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병사, 피지배층의 범죄자 등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몇몇 족보는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관서지방민들은 중앙의 소수 양반가문이 장악한 관료사회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장벽은 영호남 지방의 양반들조차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 조선 군사체계의 주안점은 전반적으로 군사의 징집과 훈련보다는 과세제도로 옮겨갔다.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나중에 정말 무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가와 관계없이 무과는 그들에게 그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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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사 연구자들이 양반을 관직에 종사하는 중앙관료가 아닌 세습되는 신분집단으로 간주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한 예로, 송준호는 향반 출신의 무과급제자들 및 무관들이 문무와 관계없이 다른 지방 양반들과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밝혔다.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양반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출생은 그러한 지위를 취득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더 나아가 별다른 관직이 없는 향반 전체도 대체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위를 얻고 있었다. ... 이에 대한 답례로 지방의 양반은 자신들의 연줄인 한양의 양반에게 많은 선물을 했으며, 이는 나라에서 주는 급료만으로는 사치스러운 삶을 향유하기 힘들었던 한양 양반들의 수입을 충당해주는 역할을 했다. ... 관직을 가진 중앙의 양반들조차 결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습되는 정치적 분열, 피비린내 나는 숙청, 학파와 사승관계에 따른 서원의 파벌화 등, 양반사회는 특히 정치적으로 결집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훨씬 큰 동질성을 보인다. 중앙과 지방 귀족층은 모두 자신들의 토지와 노비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지키는 동시에 군역을 면제받으려 했다. ... 조선 후기 문무과 급제자들은 극소수 가문들이 통혼권을 유지하면서 중앙 관직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 후기에는 어떠한 양반가에서도 서얼이라는 이유로 혈통상 문제가 있는 (중인이나 향리, 평민, 노비 등은 말할 것도 없이) 가문의 자손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생각해보면, 중앙 문관, 중앙 무관, 영호남 지방의 양반가문들 내에서 서로 양자가 오고간 것은 이 세 집단이 서로를 동등한 양반 신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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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의 가격이 연 천 석을 수확한 이의 한 달 수입과 맞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명확하게 중앙 정계에 몸담지 않았던 후손들이 각각의 족보에는 중앙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그들은 평범한 소작농이거나 가난한 양반은 아니었다. 곡식을 기부한 비양반층들은 관직이나 직위 그 자체에 체화된 보상에 더욱 끌렸을 것이다.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간극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했을 확률이 크다. 특히 귀족층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봤을 때, 양반이 아닌 자들이 그 자리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관을 통해 얻은 관직에 비교적 경외심을 가졌던 평민들조차 자신들이 관직을 산다고 해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불행히도 조선 후기에 아무기 관직을 돈으로 산다고 해도 진정한 양반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많지는 않더라도 관직이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몇몇 양반들에게는 비양반층의 시각에서 볼 때에 아직 그들이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많은 지방 향리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문화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향리들 중 지식층은 단순히 그들의 고유한 역사와 그들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양반과 기원이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 왕조대에 지방 향리들도 과거에 통과하면 중앙 공직에 들어가 중앙 귀족사회에 합류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물론 이렇게 양반이 되었던 가문의 자손들은 자신의 가문이 지방 향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척했다. 뿐만 아니라 향리 지식층들은 그들 또한 양반과 다를 바 없이 유교적 예를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세습적 지방 향리들은 직위를 세습했던 경아전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유교적 예우를 양반들에게 받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과는 상관없이 귀족층은 계속 기술직 중인과 지방 향리를 하대하였다. ... 신헌이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위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을 상대적으로 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와의 외교관계에서는 조선 대표로 훨씬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관들이 임명되었던 사실을 보면 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헌의 이런 행보는 조선 후기 무관의 궁극적 성과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수의 문관 출신 가문들이 압도적이었으며 따라서 무관에 대한 제재가 심했던 궁중에서, 유장으로 낼 수 있었던 최대의 성과였던 것이다. 양반 무관이 유장으로서 군주를 충실히 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전체적인 관직체계 안에서 무관들이 이런 이상에 환멸을 느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무관들은 각자 적절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19세기 한양의 무인 귀족층은 국가 내부의 반란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국가에 계속해서 공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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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귀족들의 향청 지배가 약화되었고 수령이 향임을 일방적으로 임명하면서,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과 지역의 자원들을 착취하는 문제는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향리에 대한 인사권이 전적으로 수령에게 있었던 만큼 세습적인 향리가문들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양반이라는 호칭은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는데,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자가 되지 못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얻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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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은 자신들과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의 차이를 유지하려고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부르디외는 교육받은 정도와 그리고 신분에 따라 습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능력이 발휘되는 방식은 '상징적 의사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 이것의 의미와 가치는 능력을 갖춘 당사자와 그 능력을 소비하는 당사자가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문화적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피지배층이 사회계층에 대해 도전하지 않도록 하면서 흔쾌히 신분에 대한 성취를 인정해주고 있다. ... 군주가 무과에 표시한 두터운 신망을 생각할 때에 피지배층들이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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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귀족들이 피지배층의 '성리학화'를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은 비록 피지배층 사이에서 형식적인 예절로 적용되었지만 잠재적으로 피지배층에게 문화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판소리와 한글소설에서 그려진 피지배층의 영웅적인 모습은 성리학적인 미덕이 더 이상 귀족들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에게도 공유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무과제도는 국가의 주요한 제도로서, 무관직이나 중앙관직에 새로운 관원을 모집하는 본래의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점차 다양한 사회 기반을 가진 지원자들에게 직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중의 기능은 전체적으로 피지배층과 권력에서 도태된 양반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현존하는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양반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고의 사회신분은 누리고 신유학적 가치와 수사에 기반을 둔 관료문화를 고수하였으며, 농업경제에서 상업화로 진행되는 가운데 확대되어 가던 자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대다수 사람들은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인, 왕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국가는 새로운 집단이 충분한 자원을 대안이나 일련의 스키마 주변에 수집하는 것을 못하지 않는 한, 피지배층의 신분이 상승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려 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귀족층과 평민의 입장에서 지배층을 거역하는 혁명적인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19세기 무렵의 봉기는 과도한 세금, 만연한 관의 부정, 현실 속의 계급차별에 반발해서 일어났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왕조를 대체하거나 왕정을 없애려는 방법을 생각한 것은 극소수뿐이었다. 이후 조선에 공화정이 도입된 것은 고종이 1919년에 서거하고, 1910년 일본에 병합되고 난 이후였다. ... 지방 귀족들이 여전히 현존하던 사회체계 내에서 혁명세력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반면, 가치가 낮아진 신분이라도 구하려던 피지배층은 자신들에게 백패나 홍패와 같은 임명증서를 내주던 국가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문화자본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충분히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국가를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로 여겼다. 교육의 기회가 한참 배제되었던 소작농들조차 비록 부패한 귀족과 관리가 아주 많기는 했지만,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나라의 수장인 왕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 물론 무과에 급제하거나 혹은 가치가 낮아진 그 어떠한 자리라도 대다수의 피지배층들은 그 자리를 얻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 많은 수의 평민들은 18세기 영조와 같은 군주들의 경장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조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 ... 한국의 근현대사 과도기를 거치며, 박성빈의 신분상승에 대한 바람이 초라하게 마무리된 반면, 그 아들인 박정희는 최고의 국가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격변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241p

조선 초기 과거제는 관념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사회계층에게 열려 있었던 사실을 강조하고 문과에 합격했던 비양반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등극하게 되면 그들은 후손들이 특권을 영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따라서 비양반층이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 본질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수사법에 있어서 신유학의 신봉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오류>

105p

특히 외척이었던 안동김씨와 평양조씨 같은 가문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평양조씨가 아니라 풍양조씨다.

207p

화성능행도병의 4천 낙양헌방방도

->낙남헌방방도이다.

218p

소녀의 부친은 개국공신이었던 권근으로, 살아남은 딸을 남이 장군과 혼인시켰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의 딸이 남이와 혼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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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8-11-2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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