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1

나를 버리고 월북한 형을 5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저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반갑기도 한 것이.. 우린 '형제'였다 [수요...


나를 버리고 월북한 형을 5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저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반갑기도 한 것이.. 우린 '형제'였다 [수요기획] | 형제 | KBS 2002.01.16

KBS 같이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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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691 views  Oct 30, 2024  #수요기획 #같이삽시다 #월북
나를 버리고 월북한 형을 5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저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반갑기도 한 것이.. 우린 '형제'였다 [수요기획] | 형제 | KBS 2002.01.16

모든 출연자 분들에게 따듯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출연자진들의 인신공격 및 부적절한 내용의 댓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될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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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원숙의 같이삽시다
 매주 목요일 ✅ KBS2 오후 8시 30분 방송🔥

#같이삽시다#수요기획#월북
KOREA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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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
Transcript


헤어진지 50년 영 존체 셋째 권은이 세상을
떠다 영화감독 준을 북한으로 향했던 째 추는의 명가로
남고 형이 떠난뒤 남은 막내는 월북을
숨 살 [음악]
다 난 남은 것은 과연
[음악]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 비행기로 불과
시간지 카스의 한국인정 가지 못한 멀고도 먼
거리였다 알마티 음악대학의 연습실
[음악]
그는 지금 3년만에 열게된 연주회를 위해 연지도 연이
없다 그는 작곡가다 전 카 대학
음악교수 예술 그는 지금까지 50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음악]
들 마음으로 찾아온 연주 회장 하지만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자가 동맹 관계자 등 몇몇 친지들만이 참석한 연주회장 하지만 그의 감는 달랐다
[음악]
서울의 시국을 붙인 가곡 [음악]
진달래꽃 그리고 농담이란 제목에로 협고
[박수] [음악]
그것은 머나먼 카자흐스탄 땅 한가운데에서 듣는 고양의 소리였다 조국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
50년을 살아온 그의 심장속에 박혀 있던 소리들 지금 그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대로 유학원 북한의 유학생이었다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해방 후 형을 따라 월북을 했던 그는 차이콥스키 음대를 5점 만점으로
졸업을 한 수재였지만 그의 음악은 조국에 연주되지 못했다
다시는 조국 당을 밟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이고 이런 것이 다 우리 한국에서 우리 조국에서 좀 있었으면 정말
오원이 풀 풀리겠습니다 그렇게 안 돼서 참 유감입니다
그게 돌아가고 싶은 조국 한국당 좋아요
[음악] 그것엔 50년간 헤어져 산 막내동생
정근이 살고 있다이 자리가 바로 예 고향이죠 여기서 다 안하시고 소품 챙기시고 애
마음밖에 없어 가지고 동심 밖에 모르셔서 이젠 철이 좀
들으셨나 텔레비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그램의 작곡자이자 안무가 구성 작가로
30여년을 일해온 동생 정근 누가 제일 잘 만들었어
아저씨 아저씨 모았다고 그렇게 해볼까 아저씨 아저씨 집원
[음악] 아저씨어요 그만큼도 아 잘한
거야 젊은시절 그의 꿈은 가였다 하지만 위로 형이 월을 하면서
그는을어야 [음악]
했다를 승가 주연한 리라 최초의 연생 영화 사도성 이야기를 감독한 북한
최고의 영화 감독이 [음악] 됐고 작곡을 전공한 째 추과 셋째
권마 북한으로 가면서 그는 월북자 가족으로 낙인 찍힌 채 50년을
고통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조건이 나한테 허지 않아 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마음에 항 불안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냥 축소에서 축소 나를 숨긴 것이
유이라 세계를 그냥 숨어버린
거야 그 보다도 더 가슴 아픈 세월을 보낸 건 바로 부모님이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좀도 살아서 반드시 새 아들을 만나고 하시던
아버지 그 아들들을 만나지 못한 째 돌아가시고 만
어머니이 이렇게 우리도 참기가 힘든
세월을 그 당신 몸에서
난에 자식들을 세시나 그렇게 보내고
이제 이른 고개를 넘어선 탓일까 부모님이 보낸 인구의 세월은 요즘들어
훨씬 더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한 분도 뭐 그리다가 보고 싶다던가 말할 한번 안 하시고 그걸
자기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참고 참고 그러고게 전 눈을 으셨어요 예 그런
걸 생각할 때에 그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기쁜가 그런 것
찾고 장남 아닌 장남으로 살아온 50년 그리고 연좌제와 반공 이대
오르기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후에 숨을 죽여야 했던 지난
50년 부모님의 산소에 들렀다 오는 날이면 애 잊어버렸던 그 세월들 기억
속에 새록새록 되살아나곤
했다 모든 기대가 사라져 버렸죠 나는 참 형님들이 나를 잘
가르쳐 줄 것이다고 그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런다 하루 사라져
버렸죠 그리 형들에 대한 원망은 안 해보셨습니다 글쎄요 인간이기
때문에에 자기의 욕망에 대한 피해가 있다고 생각하다는
원망도 하겠죠 하지만 나는 어떤 필연적이라는 어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그걸 너무나 일찌감치 그
알게 됐죠 그래서 어설피 입을 다물고 나 혼자
새기자 카자흐스탄에도 50년의 세월은 흘렀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낯설기만한
땅 내만 낸 한국 음식이라도 먹어야하는 그 심정을인인
아는이지 못한 지금 저 뭐라는거 사고서 시금 시금
하지 그러니까 이게 김치다 하고 먹는 건데 비극이 비극
정말로 하로 빨리 조국에 고양에 돌아가서 진짜
김치를 좀 보고 살고
싶어 준체 영을 따라 월북한 것이 46년 모스크바로 유학길을 떠난 그는
김일성 1인 숭배 체제에 반대해 소련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망명이 받아들여 주면서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트 있다 이곳에서 사사 학자였던 아내
나타샤를 만나 두 딸을 낳고 40여년을
살았다 북한에서의 그 개인 숭배가 첫날부터 있어 가지고 내 말은 내
말은 어김 할수 없는 어 법이다 거기에 대한 불이고 거기에
대한 시이고 그걸 뭐 생각할 수 없어요 자유가 없는 그런 그
체제든 이곳 알마티 함께 망명했던 북한유학생 출신 친구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북한 인민배우 출신인 최국인 씨도 그중에 한명
무슨 고추장 맛이 있어 찹쌀 고추장 커 이런 이런 걸 내 보지 못했는데
뭐 왜 한국이 판아 고려인 여자와 결혼에 아들 하나를 둔 최국인 씨의
집에선 그나마 한국 음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음 정말
맛있다 이제 한국 맛도 다어 민성이 뭐라고 했는가 여번 흰흰 흰밥에
고등은 아니 사회주의가 뭐라고 뭐뭐 할 때 그 생각나 어 그것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졌는데 당 아니 생각나지 그고 그 그다 뭐라
그랬어 기와집에서 사는 것이 최고 이상이었다 그래 아니 그게 사유다
그랬어 이주에 대해서 말 생각하는 놈이고 말이야 다른 이상은 없었는가 그
사람들한테 아 그 그게 사회주의라고 그랬다고 어 말해 위하야 우리도 위하야 말어
국 옛날 이야기를 나누며 망명 생활에 외로움을 달래곤 하는 두 사람 경도가 고향으로 북한 체제
반대했던 최국인 신은 정말로 돌아갈 조국이
없었다 아 정말 당신 그 농사꾼이
다름 없지 당신 성분이 아 내가 지금 말 가만히 생 노동자도 아니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말야 응 농민이 농 근데 집안 자랑을 넘어 해 가지고
최치원이 직선이 정말로 직선이 가가 많지 옛날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두노인 알마티에 정착한 건 바로 국인 씨 때문이었다 여기
알마 그 국인이 때문에 온 거예요 사실은 국인이 저 동쪽으로 가서 그 고래들
산 들가 있는데 자기가 한번 갔다 와서 잘한다 그러니까 동쪽으로
가자 말로 해서 말이야 친구 따라서 천리 간단 말이 있잖아 난 그 그거
실천한 거야 난 당신을 따라서 말이야 친구 따라서 천리밖에 온 거야 그
1958년 알마티 로올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알마티는 기차로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지금도 기차로 며칠 가야 하는 그 먼길 막길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이었다 이틀을 가도 사막이고
사흘을 가도 사막이 뭐 사람 한 사람 볼 수 없고 어떻게 산이
그립고 남가 그리운지 내 생전 처음으로 그 이제
느꼈는데 우리 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산과 그 나무가 없는 그런 땅에서는
살 수 없는 거 같아 마치 그 사막과 같았던 객
생활 그 50년간 기해 왔던 건 바로 큰형
준체 있다 동생의 망명 이후 북한 내에서 숙청을 당하고 강제 수용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준체 형 그는 아직도 형이 언제 어떻게 죽어 가는지 알지
못한다 기차가 도착한 것은 고려인들의 고장인 끝을
오르다 아이 아이고 한국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안녕하십니까 이서울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니까 제 58년에
왔으니까 개님 선생은 독립유공자인 봉우 선생의
친아들이다 일제시대 고려인 이주자들의 거주지였고 홍범도 개봉후 선생등
독립운동가들의 고장이었던을 오르다
그가이 카자흐스탄을 선택한 것은 이런 한국인들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기
[음악] 때문이었다 망명 이후 30년 그는
수천 km 떨어진 이곳에서 고려인들의 미녀를 채집했다 버려진 사막의 땅에서 그를
지탱해 줬던 것은 바로 조국의 소리였던 것이다
지금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UFO 그동안 수집한 UFO 관련
자리들을 보는 시간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주인이에요 지난 90년 우연히 UFO 존재를
체험하면서 빠져들게 된 UFO 연구 작업 [음악]
비슷한 시기에 그는 뇌절을 알타가 기적적으로 회복됐고 지금은 당뇨병으로
인슐린 주사의 의지에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몸이다 비은 서제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기 시작한지도 벌써
10년 UFO 대한 그의 집착은 는 그를 배신했던 이대기 보상받지 못한
50년 세월에 대한 또다른 탈출구는
모른다에서 태어나으로 돌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동생 정근씨 집에선 온가족이 모여 차리를지다 그렇게 우리를 굽어보소서
200년 10월 1일 추날 아 민기
올림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새 형에 대한 제사까지 겸해서 쓸쓸히 지내왔던
차례 하지만 요즘은 형에 대한 그리움까지 덧붙여졌다 근데 뭐
형제끼리 용서 용서받는다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거
같고요 처음에는 반가웠고 그다음 단계는 궁금한게 많았고
세 번째 단계는 원망도 했었고 근데 명절이나 이런 걸 앞두고 그 원망이
길게 가질 않고 어 한번 만난
사람이고 450년 만에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헤어져 살아야된다 그런 것 때문에 더
그립다 차라리 그 만나지 않을 때보다 더 그리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형제는 지난 89년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알마티에서 서울로 보낸 편지 한장이 계기였다 고향을 떠난지 43년 만에
네명의 형제 중 두 형만이 순의 노인으로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
방금이 이럴 수 말할 수 없이 아 기쁘고 참 너무나 그 마음속 깊이
느낀게 많죠 어 그동안에 어떻게
살았는가 이런 것이 너무나 그 듣고 싶고음 그 현장을 보고 싶고 막 그런
것이 용서 숨 쳤지요 그래서 만나서 끌어안고 정말로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기가
턱 막혀 가지고 그 성명을 다하고 했지만은
결국 그런 통곡을 하는 그 장면이 없어요 그 저를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면 말을도 알 알아요 왜 저 사람이 43년 만에 돌아와 가지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통곡도 안 하는 거 그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그렇게
그리운 자기 고향 조국에 돌아가지 못해서 밤이나 저녁이나 고향 생각만
하고 있고
그 심정을 외국에 살면서 외국에 산다는 것이 자기 뭐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자기 고국에
돌아가서 사는 것이 그 인생의 즐거움이고 기쁨이고 행복이
건데
오직 고국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던
정씨 알마티에 추석은 찾아왔다
[음악]
로키 알마 식으로 려진 상 고을 떠 때 지니고 온 부모님의
사진이 있어 었다 어릴적 고양인 광주에서 지냈던
상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보드카 한잔 올리는 것으로 매년 명절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손녀와 아내에게 매년 찾아오는이
기념일은 언제나 생하기 하다 [음악]
그저 어려 풋이 말로 다하지 못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남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을 [음악]
뿐이다 주석 다음날
큰딸 릴리 집을 찾은 정부부 피아노를 전공하고 교사로라는
큰딸 릴리는 과거 정 부부가 살던 집에서 살고
[음악] 있다 외야는 할아버지의 큰 기쁨 중에
[음악] 하나다 오늘은 아버 정를 축기 위
있는 지 온가족이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다 주는 카자흐스 유명한 어린이 배우다 어면 큰딸 릴리도
[음악] 예술 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망이 작은 위 할아버지가 작곡한 우체부 아저씨도 곧잘 부르는
야 노래를 들으며 정씨는 헤어져 사는 동생을 떠올리곤
한다 음식 준비에 한창인 정근 씨의 집 내일이면 형님이 서울로 오는
것이다 아 여기도 하고 여기 그렇지도 하지음
간짝음 큰아버지가 딱 좋아하시 마세요 어머니가 해 드리는 건 다 맛있으니까
또 어머니는 그게 또 좋으셔 갖고 제수씨 솜씨가 최고지 그런
계시니까 정초 씨의 둘째 딸 야나도 광주에서 아버지를 마중하러 오는
길이다 아이고
고모인 경희 씨까지 온 가족이 모두 모인 셈이다
안녕요 지금 광주 조선대에서 러시아어 강사로 일하는 야나는 정근씨 집에선
귀한 손입니다 잘해 많이 좋아졌다 아니요 괜찮아요
많이 이쁘지 않 않았어 같 졌어 그래네 감사합니다
그뭐 저은 아버지 공강이 어떻습니까 아 건강 아이 좋아네
야나의 한국식 자를 본다면 아버지는 더 없이 기뻐하시리라 양반 집이라
그러요 정근씨 집에는 5년 만에 찾아오는 형님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아
야나의 전하다
다 작은 아버지 집에서 이렇게 나 딸 리아와 나타에게
더 없이 반가운 처 반가워요 아이 말씀 말해 그래서 스간
후면은 우리 공항에 나가요 오늘 밤 정추 씨는 그리던
서울로 떠나는 것이다 큰딸 릴리지퍼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 온 가족이 1분간 조용히 모여앉아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것이 러시아의
풍습이다 가족들과는 이곳에서 작별이다 공지 왔다갔다 비는 된
것이다 다섯 시간 후 정군 시내도 공항에
도착했다 알마 아직 알마티 발 비행기가
도착하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지난 50년간 그렇게 기다려
왔는데도 아직도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비행기 안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정주 씨의
마음은 훨씬 더 조급해진다 세 번째 오는 조국이 올
때마다 더욱 설레이는 마음 [음악]
출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눈이 뚫어져라 지켜보는데 형님은 아직 나오질
않는다 드디어 멀리서 보이는 형의 모습
누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뛴 모양이다
와어 벌써 세 번째 만남이기 때문일까 기다림의 시간들에 비하면 막상 해우는
담담했다 요번에 기회가 있어서 좋았네요 잘 그래 나 나와도 5년
만에 만남이다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클라식 계통은 하나도 안 팔리고 쎄 어쩌다가 한두 개 1년에
어렵게 해가지고 가곡 쓰고 그냥 아 어려움 누가 노래를 불러요 기약 국도
그래 기국 그렇죠 대학을 열개 나와도 동료를 못 짓는데 아니 지어도 누구도 부 부르지
않아 예
올해는 누님의 순이었다 아 저축합니다 늦었어 20대 헤어진
삼남매가 도인으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일 정말 하고
그고 준비된 음식상 앞에서 감는 삼남매
모도 밖에 없으니까 우리 집안에서는 이제
님이 연장 람 없어 그만 그 안고
사는이 자리에 체와 권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안타까운
삼남매 50 흘러가
있었다 이튿날 삼남매는 광주근교 부모님 묘소를
찾았다 43년 만에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 섰을 때 통곡조차 나오지 않았던
그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매정한 사람이라며 돌아서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다시 찾은 부모님의 묘소와
비었다 그 앞에 머리를 묻고 그는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이제서야 비로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전 추가 평양으로 연구로 간다고 간 사람이 50년 만에 왔네요 와서 니
아버지 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러고 이제 정말 그저
여기 준채 형님이 안 계신데 큰 사람이 되었어요 정말
그래서 그 아주 전기적인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 가지고 우리
나라에서 앞으로도 이제 많이 많이 말을 정존 체 된 말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머니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정초 씨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이 저희 우리 사체가 땅에 무 있는
그 사이에는 어 몇 년이 되고 몇백년이 돼도 그 영적인
영역이 후손들을 보고 있고 그 가이 있대요 그 빌리가 그렇게
말해요 걱정 많고 노 계시면 돼요 그러선 어쩌면 솔직하고 절실한
심경이 것이다 형님이 우주인 연구를 하신다니까
만나보세요 오늘은 정말 정말 눈물이 나옵니다 왜 그러냐면 제가 너무 죄를
많이 었습니다이 부모 앞에 그래서네 항상 가슴이 아 아파요 어머니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오래 살면 그래서 추나 준
체가 권인아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만 딱 물어보시라 그렇게
다는데 [음악] 아휴 형의 모습에 순간 화가난 듯
동생은 괜실히 힘껏 풀을 뜯는다
형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동생과 부모님의 가슴 아리를 곁에서 지켜보며
50년을 보낸 동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형 그 사이엔 여전히
50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었다 우은 기쁘죠 우리에이 자리에 누워계신 우리
부모가 아들 딸들을 한꺼번에 봤으니까 예 기쁘시겠어요
어 항시 올 때마다 슬슬이 나 혼자 왔는데 이제는
가족이 다 같이 올 수 있었다는 얼마나 기뻐요 어 저희 형제들이 세
사람이 집에서 나가 가지고이 동생 그녀 동생
아주 그 불행은 자기 이름도 가지 가지고 살지
못한 그런 불행한 사람으로 되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도 죄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아 승전을 이렇게 만나서 보니 그리고 그런 포라도 하고 어
서로 잘됐다 잘못했다 그런 말도 이렇게 서로 주고 받고 오게 되니까
그게 행복이죠 오늘날 정말 행복입니다 돌아가는 형제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는 광 제일고등학교에
들렀다는 모두 이곳 졸업생이다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광주학생 학생운동이 있었고 청은 이곳에서
일본인 선생을 하대한 죄로 약을 당했다가
졸업장을 을지
못했었다 이곳에도 형제의 50년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아마도 형은 동생의 쓸쓸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세상이 뭐도 그러니까
투쟁에서 얻어내야 하는데에 성격상 그러지는 못했고 그냥
내가 내 길을 선택해서 간 거죠 지금까지 그래 살아 났잖아요
그것은 우리 역사가 남긴 어쩔 수 없는
상처였다 두 사람에겐 피곤한
하루였다 만난 처음으로 두 사람만 남아 있게 된 [음악]
시간 [음악] 없 50년을 기다려
만났지만 형제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했던 건 헤어져 지냈던 50년 세월의
[음악]
무게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그록 보고 싶던 고의
산이었다지만 고은 속 모습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만큼이나 자신의 모습도 달라져 보인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사흘 뒤 형제는 50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 그 누님 기 댕기
잡느라고 집을 횡 돌면서 막 눈을 쫓아다니면서 댕기를 잡 잡아 아이고
개구 개구쟁이 말은 하도 말라고 그것도 도망치라고 눈인 말이야
놈을 몇 박 9집을 돌면서 말이야 경아 그랬지 경이도 아니야
경아 옛날 이야기를 하며 다정한 오누이로 돌아간 세 사람 그런 성길이 있어 갖고 그러지 하나 둘
셋 우리도 한번 해보자 하나 둘 셋 또 한번 누가
하나 둘
셋 이게 안개가 먹고 아닌가 야
[음악]
호 어제 한번 동생도 한번 해 봐 어 그래 어제 어제는 큰 저 소리가 너무
커서 아 아니 해 봐 동네 사람 다 올라올 텐데 놀려서 어제 한번 해 봐 그래도 제 해 봐 그죠 자
감성 속에 지난 세월이 후를 날아가고 있었다 아 자기 집 온 생각 긴 다른
생각이 없어요 어 자기 집 찾아온 것 같고 그니까 동생 집인데 자기 집이지
정말 세상에 그렇게 만족스러운 일 어디가 있어요 동생을 봤지 누님이 저
기다리고 있었지
지난해 팔순잔치를 치른를 생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다시 산을 내려가는 온의
뒷모습엔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음악]
있었다 돌아가기 전날 오후 함께 번잡한 서울 거리로
나섰다 돌아가는 아버지에게 식구들의 선물을 주려는 야나의
마음이다 야나와 아버지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가
없다 착하기를 바라는 것이 정씨의 마음이었다
잘가 나에게도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 바람은 돌아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기대일
몰랐다 몇 시간 후면 다시 공황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정철 씨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근 씨도 잠든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마루로 다시 나온 정추 씨 아이고 이렇게 좋은 겁다
조가가 보냈어이 구라고
장가 결국 이번 만남에서도 형제는 할 말을 다 하지
[음악]
못했었다 그리고 이젠 이별할
시간이었다 수석을 밟으며 형제의 표정은 많이 밝아져 있다 없어 그래도 안심 며칠 사이 형의 보따리는 많이
무거워져 있었다에서 어떻게지 모르겠어 그러면 들고 가죠 책 훔쳐갈 하나도 없 카사
산에서 한국말을 잘 모르니까 동생은 이번에도 아주
돌아오시라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안 맞는 부분도
많아졌죠 많았죠 이게 벌써 생활 한결이 달라 있으니까 어 그런데서는
거죠이 사고방식이 좀 다르니까 앞으로이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세요 심한 상황이 있으시
결국은 어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까 아마 여기
오셔도도록 어 꿈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야
되겠죠 오시는 것까지는 환영하는데
지금과 같은 생각으로 이웃에 살기는 힘들 것 같아
왜요 어 기본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동안에 너무 고집이
졌어 관용할 줄 몰라 그런 점 조금 달라진게 있어
건강이 이제 살아 있어야 서로가 만날 수 있으니까 건강을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동생 휘어지는 손 형제는 맞잡은 손을
쥐 녹을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
손이었다 헤어짐은 역시 안타까운
것이었다 건강 만 피고 가세요 [음악]
돌아서는 순간 형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음악]
만다 이번에는 형의 모습이 왠지 더 쓸쓸해 보이는
동생 50년 세월의 간극을 무너뜨리기에 일주일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형제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음악]
알마티의
천산 카자흐스탄의 한국인 정춘 수시로이 천산을
올랐다 해발 2500m 천사는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았다 봉이 하나를 올라도 다 봉 가로막혀 산가 보이지 않는 높은
산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산 너어를 본다 저 산이 끝없이 이어져 맞다
있을 고향의
산을 저쪽에 우리 좀 고향의 산이지 무산도 있을
것이다 그 그 무등산이도 정말 이렇게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있고 혹시 또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제나 하고 있어요
그쪽에 이제 우리 부모도 살았고 살아 있는 이제 동생도 누님도
있는데 보고 싶
각이이 산에 가로막혀 50년을 기다려온 세
이제 막 산 하나를 넘었나 그것엔 또 다른 산들이 굳게
버티고서 있었다 세월이 가지고 온 변화와 경제적 문제와 얼마남지 않은
시간이라는 산들이 그 산에 길을 내고 얼어붙은
눈을 녹이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주련다 말꾸
[음악]
고손의 천공를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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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q5u
3 weeks ago
저분이 바로 내가 국교 1년때 입학해서 제일 먼저 불렀던 동요인 텔레비젼에 내가 나왔으면... 으로 시작하는 동요와 '둥글게 둥글게~~'를 지었던 분이라니...
반백년이 지난 지금 처음 지은 이를 뵙네요. 감개무량 합니다. 아울러 숱한 명동요들을 지으신 분이시네요. 즐겨불렀던 우체부 아저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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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younglee8058
3 weeks ago (edited)
22년전 영상이네요  .. 방금검색해보니 두형제분 모두 돌아가셧더군요 ...  한민족의 비애 비극입니다  ...마음이 넘 아프고 무겁습니다 . 우리 후손들은 다시 이러한 아픔을 안겪도록 기성세대가 노력하고 반성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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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n1t6g
2 weeks ago (edited)
가족을 뒤로하고 사상을 쫒아 월북했고,  김일성에 반대해 소련으로 망명할 정도이니 보통 고집일까...  남겨진 동생이 남은 가족 추스리고 가장역할한다고 자신을 죽이고 얼마나 속을 삭이며 냉혹한 삶을 살았을까.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포커페이스, 꼭 필요한 말만하는 모습에서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기 위한 차자로서 그간의 고난이 느껴져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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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gaibian8415
3 weeks ago
가수 현미도 저무렵 중국에서 여동생 만났는데 북한에서 이름난 가수이더만. 언니, 오빠들 앞에서 자기만 남겨두고 피난 간 것 원망하며 노래 부르는데 현미가 동생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기가 막히는지 넋을 잃고 바라보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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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kingTruthAnd
3 weeks ago
그래도 이 가족은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들이 평생을 그리다가 재회를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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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9870
3 weeks ago
그시간을 안지내본사람들 다이해못함니다...고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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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e7l
3 weeks ago
젊은시절 공산체제에대한이해가 부족한상태에서 한결정이
본인과가족들에게 상처를 준게되어버렸네요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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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i-kj3mt
3 weeks ago
우리 아버지께서도 큰아버님이 서울에 오시면  오시던날에는 늘 큰절을 하셨고 그 담엔 우리가 절을 하면서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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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하루-k5p
3 weeks ago
야~ 동요 작곡하신 곡 들이 전부 명곡으로 전부 잘 아는 노래들이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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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라떼-r9x
3 weeks ago
공산주의 신봉 했던 말로... 나중에 깨닫게 될때의 배신감...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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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vanechkapark
1 month ago
정추, 정근 선생 모두 오래전 세상 뜨셨습니다. 월북한 가족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아버지의 말씀을 자주 들었기에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상이 세상 어떤 것보다 우선인 사람들에게는 주변인들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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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replies

@jeonsoonchun6716
4 weeks ago
김일성 독재가 싫어서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 음악대학을 5.0 만점으로 졸업한 작곡가 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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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소망-e5t
3 weeks ago
에이 씨..
괜히 봐가지고.. 잠도 못자고..
보면서 계속 울고..  지금도 울고..
에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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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replies

@JH-ei9qt
1 month ago
다만 이 분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민족의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가슴이 아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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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주바라기자매
3 weeks ago
공산 사회주의 사상은, 
인간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비상약과 같죠.
깨닫게 되면 이미  늪에 빠져있는 자아만 남겨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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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김-f7c7g
3 weeks ago
멸공!!! 자기가 좋아서 버린 대한민국. 동생분이 말하신 마지막 말이 맞는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야지 같이 살기는 어렵다". 사상은 바꾸기 어려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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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다이아-r3v
3 weeks ago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이라서 보고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부디 천국에서 형제들끼리 행복했으면 좋겠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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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kim7471
1 month ago
그랑에서 50년을 사셨는데 한국말이 전혀 서툴지 않고 변함없이 사용하시니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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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김상진
3 weeks ago
당시 시대상황에 이 분의 겪었을 깊은 고뇌가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보는 내내 눈물이 나네요 고인이 되셨다니  천국에서 부모 형제 만나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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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박-t9s
1 month ago
너무  안타깝네요.  정말 대단한  인재이신  형제분인데  부모님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데올로기로  분단이 되지 않았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을텐데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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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star1201
3 weeks ago
KBS의.다큐를 즐겨보는데 KBS의 다큐  프로는 정말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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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gil1
1 month ago
올해본 최고의 다큐멘터리네요 이런걸 이제서야 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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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yoon_12
1 month ago
두 분다 돌아가셨녀요...형은2013년에 동생은2015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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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bakingsewin
3 weeks ago
이념때문에 수십년을 헤어져살았지만
피는 못속이는듯 합니다
6.25때 월북하신 외삼촌을 남북이산가족 찾기에서 만날수있었는데
한번도 뵌적없었던 외삼촌이지만 한국에계신 외삼촌 이란 넘 닮아서 길거리에서 만나도 바로 알수가있었을듯한데 이분들도  쌍둥이처럼 닮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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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achang7308
3 weeks ago
아~~~마음이 아리네요. 
해설자님 어쩜 그럴게 그 분들의 마음을 잘 전하시는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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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웅-t5c
3 weeks ago (edited)
외국살이 아니여도 늘 그리운게 고향인데  잘못한 순간의 선택이 50년의 세월이 가버렸으니 한스럽고 안타까우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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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ilahn6089
2 weeks ago
일제와 분단의 고통스런 역사가 형제의 삶을 통해 표현되었군요. 동요와 클래식 작곡등 예술을 통해 민족혼이 영원히 기억될 것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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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A-q4d
3 weeks ago
마음이 먹먹합니다.
얼마나 한스런 세월이었을까요?

저도 어렷을 적 자란  외할머니의 집과 마당 나무 앞산 똥통까지 선명하게 사진처럼 기억합니다.

냄새는 어떻구요.
계분냄새가 나는 닭장.
비 내리는 장마철 비가 그치면 초가집 습기가 날아가며 내는 볏짚냄새.
안방에 누워 잠들때면 머리 위에서 느껴지던 수수깡과 새까줄로 엮어만든 고구마냄새.

너무 그립습니다.
나를 끔찍히 사랑하고 아껴주셨던 가엾은 나의 외할머니.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기억하는 그리움 조각일것입니다.

인간은 소우주라는 말이
어느 하루도 똑 같은 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절벽을 넘은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절벽.

이 애련한 그리움을 
왜 인간의 마음에 자리하고 간직하게 만들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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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viewer6025
4 weeks ago
최고 다큐멘터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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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9870
3 weeks ago
무어라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저 그리움이란 단어만 생각나는 영상입니다...
비록 이상은 달랐지만 그이상이 달라진걸 아셨을땐 후회와 자책감 그리움먀 가지고 사셨을듯요...
두형제분 아니 형제 남매분들...
영면들 하시기를요...
분단에 아픔을 여기서 또 느낌니다...
감사합니다 영상을 다시보게 해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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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in9795
2 weeks ago
이 집안 형제들은 뛰어난
예능집안이네요.
역사의 비극이 없었으면
모두 한국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남 부럽지 않은 
기득권이 될 수 있는 집안이었는데..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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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ndaontheroadofasceticis9424
3 weeks ago
보는 내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미 한참 전에 고인이 되신 분들이지만 우리 민족의 기구한 역사가 두 어른께 그대로 투영되어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후손세대에서는 부디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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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t6o
1 month ago
인간 별거아니네
삶을다해 죽음에 가까울수록 나고자란곳을 그리워하네 사무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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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n4j
1 month ago (edited)
1963년 광주영생유치원에서 정근선생님은 우리들을 지도하셨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로 시작하는  원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 좋고,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 나는 지금도 유치원친구들과 만나면서 사는 68살의 노인이지만 추억속의 핸섬하셨던 선생님. 하늘나라에서는 불이익없이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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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replies

@정수현-w2t
1 month ago
우리 부모님 세대나 윗세대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합니다.ㅜㅠ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뭔지 부모와 형제, 가족까지 갈라놓았을까요?.......!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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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r3h
1 month ago
시청하면서 내내 먹먹했습니다
민족사의 비극이고 가족사의 비극입니다
헤어져 사는 분들이 지금이라도 자유롭게 왕래할수 있도록 정부에서 경제적 지원은 물론 법적인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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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oklee5500
2 weeks ago
참으로 사상의 다름이 이렇게  무서운 비극의 세월을 보낸 민족의 슬픔이네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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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park334
3 weeks ago
북한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월북했다가 모두 후회했겠죠. 
반대로 우리 외갓집 가족들은 북한의 무서움을 깨닫고 1.4후퇴때 대부분 배를 타고 월남했죠. 일부는 미국으로.. 일부는 브라질로 이민을 가고 또 일부는 우리나라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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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plies

@빈斌님
3 weeks ago
나는 이래서 공산주의가 너무 싫다… 평등을 가장한 독재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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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fineapple123
2 weeks ago
너무 슬픈 가족사이자 서글픈 민족사다...이게 끝나지 않을 고통이라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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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팅-m9o
3 weeks ago
와우^^ 천재 집안 이시네요~ 자유민주주 대한민국에  계셨다면~ 상상이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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