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0

김파란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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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3> 
오늘은 가장 논란이 되고 많은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갖게 만들었던 ‘동지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어떤 사안, 어떤 경우가 되었건 한두 마디 말로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쓸 수 있어! 그건 할머니들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야.” 이렇게 정리하면 참 쉽고 간단해집니다. 박유하 교수 한 명만 민족의 반역자로 만들면 우리 모두의 마음은 후련하고 편해질 테니까요. 그렇다면 박유하 교수는 왜 하필 그런 표현을 썼을까요? 속된 말로 ‘미친 년’이 아닌 다음에야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일단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박유하 교수의 생각을 따라가 봅시다. 책에 나온 증거, 즉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잠시 숨을 돌린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요. 
일단 책에 나오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67쪽)
혹독한 체험을 한 이들에게도 ‘즐거웠던’ 순간은 없지 않았고, 군인에게 신세타령을 하면서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위안부’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개미’ 같은 처지임을 서로 감지한 고독한 남녀이기도 했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76쪽)
일단, 위 글들을 보면 조선인 위안부의 처지는 일본 군인들에게 억압과 성적 착취를 당하는 존재인 한편, 때로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나아가 그들의 전쟁을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한, 복합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정확히 해독하자면 전자가 주된 처지이고, 거기에 후자가 부차적으로 결합된 처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후자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했는데, 박유하 교수가 그러한 관계로 파악하게 만든 지점들이 여러 가지라 일일이 인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작년 6월 경 처음 이 책이 논란이 되었을 무렵, 제가 책을 읽고 페북에 올린 글에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적어놓았더군요.  
박교수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책에서 밝힌 내용들을 간추리면 몇 가지 층위가 있다.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병사들도 제국의 강요에 의해 끌려왔으며 그런 점에서 서로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일본인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 환송회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당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 간호원처럼 일본인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아시아의 제3국이 보았을 때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생이 국가(일본)를 위한 것이라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그나마 비참한 처지를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근거들은 강요된 동지적 관계임에 분명하고, 친일파들처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식민지의 내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지적 관계라는 말 대신에 협력적 관계와 같은 말을 썼으면 오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어감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비난은 똑같이 쏟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서술한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멸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해 일본의 죄악상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다. 
제가 썼던 위 글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서술한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군요. 학자들이 역사서술이나 해석, 그리고 용어 사용에 있어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아마도 ‘객관성’ 혹은 ‘엄정성’일 것입니다. 아마도 박유하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규정함에 있어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이 그러한 ‘객관성’ 혹은 ‘엄정성’이라는 기준에 맞는다고 보았을 듯합니다. 모든 감정과 선입견을 다 버리고 아주 건조하게만 바라본다면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현상을 서술함에 있어 적합해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동지’라는 낱말이 그런 학술적인(건조하고 냉철한) 의미로만 대중에게 다가가지는 않는다는 점이겠지요. 더구나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러한 것이 박유하 교수가 지닌 학자라는 신분과 거기서 파생된 의식이 지닌 한계라면 한계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제 견해를 밝혀야 할 듯합니다. 저는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으며 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한 부분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와 관련한 대목들이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이며 다양한 모순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어떻게 자기 의식을 가져가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을 파악함에 있어 그 인간이 처해 있는 조건과 상황을 배제한 채 규정할 수 있을까요?
제가 만일 당시의 위안부였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일본군에게 짓밟히면서 속으로 ‘반드시 이 원수를 갚아주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기만 했을까요? 그건 ‘지금’의 우리가 요구하는 의식이 반영된, 주관적인 감정의 투영일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시의 위안부들 다수가 당연히 그런 분노를 지니고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러한 비참한 상황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고, 그러자면 자신을 달래줄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해줄 무언가를 찾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서 죽거나 혀를 깨물어야 했을 겁니다.(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는데, ‘이중의식’ 같은 말로 설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지점에 생각이 미치면서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들의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자기의식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야 생존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처지! 이보다 더 큰 비극과 슬픔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위안부들을 그런 처지로까지 내몬 일본에 대해 분노하고, 마땅히 일본은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박유하 교수 역시 기존의 사죄보다 진전된 형태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박유하 교수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박유하 교수가 줄곧 화해를 주장하지만 무조건의 화해가 아니라 사죄가 선행된 화해를 말하고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이건 저만의 독법입니다. 다른 분들은 또 얼마든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제가 문학을 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떤 인간이든지 악인과 선인으로 간단히 나눠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재단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수 있으며, 의식의 다양한 심층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 정부에 맞서 싸우는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투사 이전에 평범하고 나약한 존재이며, 한일 간에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든 단체와 사람들 간에 머리를 맞대고 하루빨리(이 말을 원칙 없이 무조건이라고 해석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그 분들이 남은 생이라도 편안히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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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물론 이런 기억들은 부수적인 기억일 수 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이 허한 존재가,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부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사실이란 말인가?
이것을 장황한 이론적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제기랄 난 왜 글을 읽고 쓰려 했는가? 왜 배우려고 이렇게 살았나?
두 눈을 파서 개에게 줘 버려도 사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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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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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5>
며칠 간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내 일은 손을 못 대고 있군요. 그래도 멈추지 못한 것은 하필이면(?)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내가 독해한 내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점에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름대로 성실한 학자이자 위안부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는(저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으면 그건 비겁한 태도이며,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을 읽는 이유는 지식이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읽은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한 학자의 책에 대해 어쭙잖은 내용이지만 몇 번의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페북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도 서로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일이고 해서, 긴 글은 이번을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상황에 따라 짧게 끼어드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논의는 학계에서 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박유하 교수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기본 시각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이 20년 동안, 우리는 초기에 만들어진 ‘상식’에만 고집하고 그에 반하는 이야기는 무조건 ‘우익의 망동’이거나 ‘친일적 발언’으로 간주하고 배척해 왔다. 그 결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배양’된 ‘위안부 이야기’뿐이다. (120~121쪽)>
박유하교수가 말하는 ‘순수배양된 위안부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왔을까요? 이 또한 단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않았겠지만, 책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던 이 증언은 근년에 가장 활발히 활동해온 이의 증언이다. 그런데, 20년 전인 1993년에 나온 증언집에서 그는, 이 일은 “만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친구 “분순이”가 불러 “따라나갔”는데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가 보여주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 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같은 책, 124쪽)고 말한다.
그런데 2004년에 교토 대학교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자신이 끌려간 정황을 “열다섯 살”이었고 “일본군의 칼에 위협을 받은 여성이 자신을 불러 감싸안아 끌어갔”다고 말한다. 또 최근 한국의 신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는 “대구에 있는 집 마당에까지 일본군이 들어와서 끌고 갔다”(영남일보, 2012.9.14.)고 말하기도 한다. 끌려갔을 당시의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일본군에 의한 강압적인 정황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132쪽)>
박유하 교수가 소개한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증언 내용을 바꿔가며 들려준 위안부 할머니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박유하 교수의 책과 인품에 대해 신뢰를 보이는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다음과 같은 서술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언의 신뢰성 문제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한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상황을 살펴가며, 개인의 한계까지 끌어안고 가려는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부의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 증언을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은, 미리 인지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지식이 보완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을 테니까. 한국인이라면, 그 피해가 더 가혹할수록, 더 끔찍할수록, 일본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당당해질 수 있게 되니까, 증언의 장이 어떤 이야기를 요구하는지는 위안부들 역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들의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이 과거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는 체험이 기본적으로 피해체험인 것은 분명하다. 그 정치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이 정신적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한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고문과 성적 노동을 포함한 신체적 강제에 더해 생명까지도 ‘일본’이라는 국가에 맡겨진 상태였으니 식민지 체험이 피해체험인 것은 분명하다.(133쪽)>
박유하 교수를 뉴라이트 계열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억측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 글에 나오는 대목 중 ‘그 정치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라는 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이며 뉴라이트 역사관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식민지 체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더라도 피해체험인 것이 분명하다고 밝힘으로써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를 논하는 챕터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애국’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애국을 해야 한다면 박유하 교수가 말하는 애국심 쪽에 한 표를 던지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가. 애국심이 그렇게 발휘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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