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1

이병철 - -극단적 진영의 대립을 뛰어넘어 화합과 대통합의 계기를 만들어가야

이병철 - -세밑, 실상사에서의 하룻밤/ 어느새 세밑이다. 세상이 흔들리고 요동 칠지라도 세월은 변함없이 흐른다. 한... | Facebook

이병철

18 December at 13:04 ·



-세밑, 실상사에서의 하룻밤/
어느새 세밑이다. 세상이 흔들리고 요동 칠지라도 세월은 변함없이 흐른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고맙고 그리운 이들을 만난다.
며칠 전에 익산의 남곡형과 연락하여 실상사에서 도법스님과 함께 만나기로 했다. 흔들리는 나라와 세상에 대한 걱정을 함께 나누고 새밑에 한해의 마지막 감사 인사를 서로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상사는 두어 달 만에 들리는 것 같다. 세월의 흐름이 갈수록 더 빨라진다는 것이 실감난다.
실상사 천왕문에서 마주 보는 지리산 천왕봉에는 잔설이 하얗게 쌓여있다. 이곳엔 어느새 겨울이 깊어졌다. 저 눈은 다시 봄이 오고 산자락에 꽃소식이 들릴 때쯤에야 녹으리라.
절에 들어서니 주지스님과 수지행자님이 반갑게 맞으며 스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준다.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다.
도법 스님의 거처 극락전 작은 요사채에는 남곡형이 먼저 와 계신다.
우리가 지리산 연찬과 정치학교 등을 함께해 온지도 어느새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남곡형은 이미 팔순이고 도밥스님과 나도 이제 칠십 대 후반을 넘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 영락없는 노인이 되었다.
우리가 나라와 세상에 대해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돌아보면 살 만큼 살았고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새삼 나라와 세상 걱정을 놓지 못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 이 땅과 이 나라에서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한다고 무슨 큰 힘이 되겠는가. 미력함에도 무엇인가 거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이 땅과 이 나라가 앞으로도 여기에 살아가야할 이들의 삶터, 그 생존의 터전인 까닭이다.
남곡 형은 희망을 담아 이야기 하지만, 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살아있는 자의 도리와 이 땅과 이 나라에 대한 은혜와 감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러 이야기를 나눈 끝에 우리가 함께한 결론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하든 전화 위복의 계기로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탄핵정국을 87체제의 문제와 모순을 극복하는 개헌정국으로 이끌어 내는 것과 그 과정에서 극단적 진영의 대립을 뛰어넘어 화합과 대통합의 계기를 어떻게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한국전쟁 전에(해방동이 남곡형은 일제치하를 잠시 경험한 사람이라며 차별성을 주장하지만) 태어나 나라가 잿더미 속에서 세계 선진국 반열에 들게된 그 세계사적인 기적을 경험한 세대들이다. 우리의 바람과 기도는 그런 기적이 정치하는 자들의 잘못과 이에 휩쓸린 자들에 의해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만은 어떻게하든 막아야한다는 절박함이 있다.
지금 극단적인 진영 편에 경도되어 있지 않은 이른바 중도세력, 그런 사람들이 나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자 해야 할 역할임을 다시 확인한다.

이런 세상의 걱정과 함께 불쑥 이미 노인이 된 우리 스스로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눈다. 남은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아침에 우리가 묵고 있는 템플스테이 숙소에 도법 스님이 찾아왔을 때 내가 남곡형에게 말했다. 형이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내가 호상을 맡아서 형의 마지막 길을 잘 보내드리고 작은 표지석 하나에 짧은 한 문장을 새겨 드릴 테니 마지막 길에 대한 걱정은 놓고 노년을 편안하게 지내시라고.
겨울 지리산 자락에 어둠은 일찍 내린다. 남국형과 나는 바둑을 좋아하는 것이 같은데, 우리는 승패가 서로 오락가락하는 호적수라 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남곡형이 바둑판을 챙겨와 일찍 온 지리산의 어둠 속에서 수담을 나누고 다음날 새벽에도 다시 수담을 나눈다. 이렇게 수담을 하면서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다시 스민다.
하룻밤 실상사에서 편하게 묵고 오전에 도법스님과 수지행님의 배웅을 받으며 남곡형은 익산으로, 나는 숲마루재로 돌아온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새해가 되리라.
실상사.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한 그곳은 내 고맙고 그리운 이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 생각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진다.
오는 길에 한살림연수원의 학산선생을 만나 마음살림활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점심공양을 함께하고 한지 기능장이 닥나무로 만든 귀한 순 한지를 선물로 얻어왔다. 새해 연하장은 이 한지로 만들면 좋겠다. 모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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