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표정 되찾자 떠난 태완 또는 타이왕, 그가 남긴 것…
후배들 힘돼준 그의 뜻 기리며
‘렛 어스 드림’ 서명운동 시작
이문영기자수정 2024-12-16
15일 경기도 군포시 원광대 산본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모셔진 고 강태완씨의 영정.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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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예쁜 얼굴의 태완(몽골명 타이왕·32)이 색색의 꽃들에 둘러싸였다.
태완이 사망 20일 전(10월19일) 했던 인터뷰 영상이 15일 추모제 내내 빈소에서 상영됐다. 6살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을 때, 중학생 시절 한국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고등학교 졸업 뒤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공포로 숨죽여 지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극심한 무력감에 빠졌을 때,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 덜덜 떨며 자진출국을 신고했을 때의 기억 등을 떠올리며 태완은 카메라 앞에서 수많은 ‘엔지’(NG)를 냈다. 멋쩍게 웃다가, 혀를 날름 내밀다가, 민망해하면서도, 말하길 포기하진 않았다.
인터뷰를 위해 태완은 전날 머리를 단정하게 잘랐다. 귀엽고 말랑한 곰돌이 같았던 태완이 최근 열심히 운동해서 탄탄해진 몸으로 영상에 담겼다. 11월8일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뒤 영상 속 태완의 그 얼굴은 영정이 됐다.
지난 6월4일 전북 김제시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에서 얼굴을 가리고 촬영한 고 강태완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장례식장 빈소 한쪽 벽엔 태완의 어렸을 때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초중고 시절 받은 상장과 대학 입학을 준비하며 쓴 자기소개서,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 취업 면접을 대비해 쓴 예상 질문·답변서, 하루빨리 제 몫 하는 연구원이 되기 위해 코딩과 영어를 공부했던 노트 등과 함께였다. 사진들은 지난 5일 회사 앞 항의집회 뒤 열린 추모제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태완은 이런 얼굴을 가진 아이였구나.
‘성인 태완’에게서 보지 못했던 표정들이 어린 태완의 얼굴에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물총을 들고 상대를 노려보는 명사수 태완, 앞니 빠진 입을 활짝 연 개구쟁이 태완, 주먹을 불끈 쥐고 기합을 잔뜩 넣은 ‘태권 소년’ 태완이 사진 속에서 반짝였다. 그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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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4일 전북 김제시 에이치알이앤아이에서 얼굴 마스크를 벗고 촬영한 고 강태완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태완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아이였구나. 이렇게 장난기 많은 꼬마였구나. 이렇게 친구들이 많은 십대였구나. 2020년 태완을 처음 만난 날 그가 했던 말도 기억났다.
“고등학교(단속과 강제퇴거 유예) 졸업 전까진 엄마의 지친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학교 밖으로 나오니까 엄마가 왜 매일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한국에서 26년을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면서 태완은 ‘표정을 빼앗긴 청년’으로 자랐다. 태완이 죽고 나서야 만난 그의 옛 얼굴은 낯설지만 처음 본 얼굴은 아니었다.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자진출국을 신고했던 2020년 6월부터 그의 4년을 기사(한겨레 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로 쓰는 동안 딱 한번 그 얼굴을 본 적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난 6월의 어느날이었다.
그날 연재 마지막 기사 취재를 위해 전북 김제로 향했다. 태완과는 퇴근 뒤 회사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난 기사에서 태완의 이름은 모두 ‘호준’(가명)이었다. 그가 한국 사회 속으로 1㎝씩 내딛는 과정을 쓰겠다고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었다. 태완의 회사 취재를 굳이 계획하지 않은 이유도 동일했다.
1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시 연화장’에서 고 강태완씨가 누운 관이 운구를 기다리고 있다. 이문영 기자
태완에게 전화해 도착을 알렸을 때부터 그날 일정은 계획과 다르게 전개됐다. 태완은 자신이 기사 속 ‘호준’이란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고 취재 차량 출입까지 회사에 허락을 받아둔 상태였다. 회사도 취재 협조를 꺼리지 않았다. 태완은 회사를 사랑했고 그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날 취재를 마치고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을 때였다. 동행한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태완의 체류자격 취득부터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을 조력)에게 태완이 명함을 건넸다. 스스로를 숨기느라 바빴던 그가 자신의 이름과 직함이 적힌 종잇조각을 품에서 꺼내며 환하게 웃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행복하다”고 했다. 그 얼굴을 반년 뒤 추모제에 걸린 옛 사진들 속에서 다시 봤다.
4년 전 처음 만난 태완은 주눅 든 청년이었다. 자진출국을 신고하러 갈 때, 퇴직금을 받으러 갈 때, 출국하러 공항에 갈 때, 대학과 회사 면접을 볼 때, 비자 신청하러 갈 때, 그에게서 가장 반복적으로 들은 단어는 ‘불안’과 ‘걱정’이었다. 두 단어를 끊임없이 오가던 그가 겨우 잃어버린 표정을 되찾기 시작하자마자 돌연 소멸했다.
16일 오전 수원시 연화장에서 고 강태완씨의 어머니와 누나가 화장 중인 아들과 동생을 지켜보고 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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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사가 돼버렸지만, 마지막 기사를 쓴 건 아니었다. 태완이 다채로운 표정을 얼굴에 되찾고 그의 꿈이었던 ‘평범한 일상’에 한걸음 가까워졌을 때 한번 더 그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호준’ 또는 ‘호이준’이 아니라 ‘태완’ 또는 ‘타이왕’의 이름으로 그의 ‘다음’을 쓰고 싶었다.
마지막 취재 때 사진기자는 태완의 얼굴을 두 가지 버전으로 찍었다. 마스크를 한 얼굴과 벗은 얼굴. 기사 마감 직전 태완이 ‘지역특화형 거주비자’를 받고 좀 더 안정적인 신분이 됐지만 끝내 마스크 없는 사진을 고르진 못했다. 태완은 “이제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했지만 정작 쓰는 자는 용기가 없었다. 혐오와 차별 걱정 없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수 있을 때 1㎝씩 기어 수십m를 나아간 그의 분투를 쓰고 싶었다.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그를 드러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5일 저녁 경기 군포시 원광대 산본병원에 마련된 태완의 빈소(사망 37일째)는 앉을 자리 없이 가득 찼다. 추모제에 온 100여명의 사람들이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눈물지었다. 어머니(이은혜·몽골명 엥흐자르갈·62)는 “내일이면 아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내기 싫지만 한달 넘게 차가운 곳에 두고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회사의) 사과 한마디 들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싶어요. 아니, 보내기 싫어요. 그래도 어두운 곳에 두기 싫어요. 어쩌면 좋아요. 내 아들 살릴 수 있다면 내 목숨도 줄 수 있어요.”
이튿날 아침 태완은 수원시 연화장(영통구)으로 이동했다. 그의 친구와 선배, 이주인권단체 활동가 등이 유족을 뒤따랐다. 어머니의 오열 속에 태완은 오전 9시53분 화구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니가 불속에서 뜨거울 아들을 걱정했다.
“아들아, 엄마 여기 있어. 너무 힘들어하지 마.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서 행복했어.”
이날 태완의 발인과 동시에 그가 인터뷰로 응원했던 캠페인(‘Let us dream: 지금 여기서 꿈을 키우는 이주아동’)은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국내 거주 기간 등의 요건을 충족할 경우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일반연수 체류자격(D-4 비자) 또는 기타 체류자격(G-1 비자)을 부여하는 법무부 구제대책이 내년 3월31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태완은 자신이 겪은 고초를 후배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책의 연장과 상시 제도화를 촉구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는 태완의 뜻을 기리며 내년 3월 전까지 시민들의 서명을 모아 국회와 법무부에 전달할 계획이다.
김사강 연구위원은 “태완씨는 국내에서 미등록으로 살면서 자기처럼 의기소침하고, 말수가 줄고, 집에만 있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캠페인 영상을 촬영했다”며 “구제대책이 끝나면 그전까지 신청하지 못한 아이들은 과거의 태완씨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문영 기자
마지막 취재 때 사진기자는 태완의 얼굴을 두 가지 버전으로 찍었다. 마스크를 한 얼굴과 벗은 얼굴. 기사 마감 직전 태완이 ‘지역특화형 거주비자’를 받고 좀 더 안정적인 신분이 됐지만 끝내 마스크 없는 사진을 고르진 못했다. 태완은 “이제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했지만 정작 쓰는 자는 용기가 없었다. 혐오와 차별 걱정 없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수 있을 때 1㎝씩 기어 수십m를 나아간 그의 분투를 쓰고 싶었다.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그를 드러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5일 저녁 경기 군포시 원광대 산본병원에 마련된 태완의 빈소(사망 37일째)는 앉을 자리 없이 가득 찼다. 추모제에 온 100여명의 사람들이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눈물지었다. 어머니(이은혜·몽골명 엥흐자르갈·62)는 “내일이면 아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내기 싫지만 한달 넘게 차가운 곳에 두고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회사의) 사과 한마디 들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싶어요. 아니, 보내기 싫어요. 그래도 어두운 곳에 두기 싫어요. 어쩌면 좋아요. 내 아들 살릴 수 있다면 내 목숨도 줄 수 있어요.”
이튿날 아침 태완은 수원시 연화장(영통구)으로 이동했다. 그의 친구와 선배, 이주인권단체 활동가 등이 유족을 뒤따랐다. 어머니의 오열 속에 태완은 오전 9시53분 화구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니가 불속에서 뜨거울 아들을 걱정했다.
“아들아, 엄마 여기 있어. 너무 힘들어하지 마.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서 행복했어.”
이날 태완의 발인과 동시에 그가 인터뷰로 응원했던 캠페인(‘Let us dream: 지금 여기서 꿈을 키우는 이주아동’)은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국내 거주 기간 등의 요건을 충족할 경우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일반연수 체류자격(D-4 비자) 또는 기타 체류자격(G-1 비자)을 부여하는 법무부 구제대책이 내년 3월31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태완은 자신이 겪은 고초를 후배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책의 연장과 상시 제도화를 촉구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는 태완의 뜻을 기리며 내년 3월 전까지 시민들의 서명을 모아 국회와 법무부에 전달할 계획이다.
김사강 연구위원은 “태완씨는 국내에서 미등록으로 살면서 자기처럼 의기소침하고, 말수가 줄고, 집에만 있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캠페인 영상을 촬영했다”며 “구제대책이 끝나면 그전까지 신청하지 못한 아이들은 과거의 태완씨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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