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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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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의 『갈릴래아 예수』 (동연, 2024, 517쪽)를 읽고.]
- 기독교사상 2025년 1월호 게재
저자 소개
김근수 해방신학 연구소장께서 지난 2024년 5월에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 (논형, 2024)에 이어 5개월 만에 『갈릴래아 예수』를 펴냈다. 이에 앞서 저자는 『슬픈 예수』(2023), 『행동하는 예수』(2014), 『가난한 예수』(2017), 『평화의 예수』(2018), 『예수 평전』(2021), 『여성의 아들 예수』(2021)를 출간했다. 저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사제가 되기 위해 광주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사제의 길을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독일 마인쯔 대학을 거쳐 남미 엘살바도르의 중앙 아메리카 대학의 해방신학자 소브리노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사제가 아닌 평신도 신학자로, 제도권에 속하지 않은 신학자가 되어 평생을 예수에 대하여 글을 쓰는 삶을 살아왔다. 예수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이렇듯 예수에 대한 다수의 저작을 낳은 셈이다. 이번 책에서는 그의 예수전 1부, 예수의 공생애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갈릴래아 예수』를 다루었다.
마가복음 원판에 그려진 예수
저자는 『갈릴래아 예수』를 그리면서 원판을 마가복음서로 삼고 누가복음서와 마태복음을 가지고 덧칠하듯 이 책을 썼다.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마가복음서의 특수한 위치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신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는 바울이 이해했던 예수의 한계를 극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만나고 그의 공생애를 지켜본 마가는 예수의 역사적 삶과 사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둘째, 마가복음은 예수가 당시 로마 제국에 대립하는 입장에 서있는 모습을 담은 복음서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김근수,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 281). 예수의 십자가 형벌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결과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은 누가복음서와 마태복음을 기록하기 위하여 참고한 1차 자료가 된 책이다. 이 세 가지 관점은 마가복음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마가복음은 제 1 장 전반에서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떨쳐낸 후 갈릴래아로 갔다고 약술한 후, 서둘러 예수의 공생애에 관한 관심으로 넘어간다. 예수의 공생애는 광야와 갈릴래아 호숫가,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 걸쳐 펼쳐졌다. 마가는 1장 후반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공생애중 상당한 부분을 갈릴래아에서 보내면서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한 역사적 사실을 증언했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갈릴래아를 떠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거기서 로마의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
그 후 거의 2000년이 지났다. 이 예수로 인하여 참으로 많은 종교 전통이 생겨났다. 각 종교 전통마다 각기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이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였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여러 모습으로 해석했다. 평화주의자는 예수를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예수로, 호전주의자들은 예수를 십자군의 대장으로, 지배욕을 가진 이들은 예수를 우주적 권세를 가진 왕 중의 왕(pantocrator)으로, 영성주의자들은 예수를 영성의 대가로, 교회 성장주의자들은 예수를 교회의 성장과 번영을 안겨주는 축복의 샘으로, 종말론자들은 예수를 종말의 심판자로, 교회주의자들은 예수를 영혼 구원의 주로 해석했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가르쳐온 예수의 얼굴은 이 외에도 너무나 많다.
『예수의 정치』를 쓴 요더(John H. Yoder)는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가 너무나 어려워 요리조리 피해서 이해해 왔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어록에 대한 별칭을 “Hard Sayings"라고 했으니 예수의 가르침은 제대로 마음을 단호하게 작정하지 않고서는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이라 여겼던 것 같다. 성서에 나오는 어느 부자 청년의 예처럼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엄중한 요구 앞에서 그 청년이 예수를 떠나간 정황도 이와 유사하다. 하지만 예수보다 종교를 지키려는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자신들이 이해 가능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축소 해석했다(319). 의도가 원래 그러했는지, 아니면 그러한 결과를 보니 의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사람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예수의 날카롭고 진실한 요구가 부담스러워 그것을 숨기거나 감추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마 지금도 설교하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숨겨진 비밀, ‘자기 편한 대로’ 예수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고 『갈릴래아 예수』를 읽는다면 이 책은 독자에게 보다 선명한 원판 예수를 보여줄 것이다.
갈릴래아에서 만난 가난한 이들과 예수
이 책의 제목은 <갈릴래아 예수>지만, 내용은 ‘갈릴래아에서 만난 가난한 이들과 예수’다. 예수의 생애를 걸쳐 예수가 활동했던 무대는 나사렛, 갈릴래아, 그리고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예수의 복음 선포 과정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에 주목하며 주해하고 있다. 저자는 방법론적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세 부류의 시선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관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던 이들은 제자들, 반대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던 가난한 자들이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독특한 시각은 다른 성서 주해서처럼 예수의 메시지 그 자체를 세상에 알리려는 의도에 더해 예수의 메시지와 행동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반응에 깊이 관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니 예수 편에 서 있었지만, 사실 그들도 예수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의 반대자들은 예수를 이해하려들기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를 멀리하거나 제거하고 싶어 했다. 예수는 그들의 동조자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라는 존재는 그들의 가르침이나 권위, 그리고 이익에 해가 되었던 것 같다. 예수와 그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 사이에는 가난한 이들, 갈릴리 사람들이 있었다(10). 저자는 이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지만, 대부분 단호하게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하지 않았다고 본다(550).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았다. 기적과 이사를 행하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도 있었고, 거라사의 광인도 제 정신을 들게 해주었다. 눈이 먼 이에게는 눈을 뜨게 해주고,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게 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며 가르침도 주었다. 기적과 이사를 행하는 예수의 언행은 누가보아도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종교적인 행위였다. 죄의 용서와 평안을 빌어주는 예수의 모습도 보인다.
예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많았다(237). 예수를 비난하던 이들은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라고 힐난했다. 예수는 당시 그를 비난하던 종교인들이 가졌던 거룩의 개념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거룩하지 않은 행위일까? 저자는 이런 물음보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236)”라고 질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율법의 정신은 긍정적인 가치로 사랑했지만(248)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을 드러냈다. 예수는 자신을 힐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238. 누가 5, 31b).” 이 예수의 정신을 따른다면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심판하자고 소리를 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고 사랑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가 보는 예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먹는 제자들을 비난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가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는 일이라고(256), ”안식일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예수다. 예수에게는 종교적 규례와 법도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예수와 종교 지도자들과의 마찰
예수의 행태는 사사건건 당대의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율법적 전통과 규례를 어기는 자,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자, 안식일을 범하는 자였고, 무엇보다 그들이 대중에게 가르쳐오던 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노했다(260, 눅 6,11). 그들은 심지어 예수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려 죽이려 하기까지 했다(261, 눅 4, 28-29; 마가 3, 6). 저자는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었던 급진적인 표현들을 삭제하거나 온화한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237, 259, 261). 아마도 급진적 표현들로 인해 일어날 갈등을 피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행태에서 생명우선주의를 지지했다. 율법이든, 성전이든, 안식일이든, 그 규례가 어떠하든 사람이 우선이고, 생명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262, 마태 22.40)”이라는 말씀 아래 복속된다.
저자는 마태복음서 기자가 자기주장을 위해 일종의 허위 기재를 한 사실도 지적해 낸다. 마태는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시오 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라는 가르침을 전제하고 이어 원수사랑을 요구하는 예수를 삽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구약 성서에도, 유대교 문헌에도 없는 내용이다. 마태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사랑의 계명을 원수 사랑으로 연결했다(마, 5.43). 정말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다고 주장할 근거가 매우 희박한 주장이다. 보편적인 사랑의 계명을 확대하여 뜬금없는 원수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악을 향한 정의의 규범이나 공의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생명 우선주의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악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에야 숙고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갈릴래아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성격에 대하여 공표하기를 꺼려했다. (마가 3, 12; 1, 34) 신약성서 연구자들에게는 신학적으로 “메시아의 비밀”로 괄호가 쳐진 내용이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의 별을 달고 기다리고 있었던 정치적 구원자라는 의미로 읽혀질 수도 있었다. 일련의 신학자들은 이런 의미로 예수가 규정될 것을 염려했다고 이해했다(269). 예수의 사역을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적인 해방으로 간주하는 위험을 피하든지, 혹은 그 결과 원치 않는 중앙 정치세력과의 마찰이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 같다. 저자는 마가복음을 통전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예수의 메시아의 비밀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시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한, 탈정치적 종교화를 향한 해석이라는 성격이 짙어 보인다. 탈정치적 해석은 탈역사화를 불러오고, 탈역사화는 현실 개혁적 의지를 포기하고 인간에 의한 개혁의 실패를 하느님의 권능에 맡기는 사후 구원론으로 연결되곤 했다. 하지만 마가는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마가복음 10장 이후에 메시아의 비밀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는 로마 제국의 적대자로 간주되어 정치범으로 낙인찍혔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서 죽임을 당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은 무엇인가. 가난과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연결되는가.‘(303-304)를 묻고, 그 해명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가난은 “하느님께 처벌받은 상태부터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상태까지 폭넓게 가리킨다(304).” 가난한 사람은 부자와 대비되는 사람이고(302, 누가 16, 19-31),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걸인을 가리키기도 한다.”(304).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힘이 없어 억압받는 사람들도 가리킨다(312).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우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누가복음에서는 행복선언에서 최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나라가 주어질 사람들이다”(305).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가난한 마음의 사람을 이른 것일까. 가난한 이들을 지시하는 이 단어를 해명하기 위해서 사회 경제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가난한 이들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저자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면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인가. 굶주린 사람들인가, 울부짖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들이다(308).” 울부짖는 상태에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 만족스러워 웃고 있는 부자와 대비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는 성공했는가?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 예수의 지혜와 능력은 놀라웠다. 그런데 예수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서도, 고향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494). 심지어 저자는 가난한 이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보았다. 이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갈릴래아 예수는 성공 했는가”라고 묻는다(547). 그리고 이어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연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 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그 이유를 밝힌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다가섰지만, 가난한 사람 중에 극히 일부만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위로와 편들기는 충분했지만,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고 싸우는 예수의 모습은 크게 부족했다(551).”
저자의 결론은 수정될 수 있을까? 민중 신학자 안병무는 예수와 갈릴래아의 민중 오클로스 사이에는 갈등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저자는 예수와 가난한 민중은 여전히 갈등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는 나사렛에서 태어나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무수한 기적과 이사를 행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었던 사회정치적 억압자들을 향해 저항하거나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550).” 하지만 위로자 예수는 되어도 해방자 예수의 모습은 약했다는 평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전부가 아니다. 마가복음 10장 이후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 길을 가는 예수는 갈릴래아 예수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예수의 죽음이 여러 차례 예고되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예수를 우리는 그 길 마지막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예수의 길은 참담한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진술은 이 책에 담겨지지 않았다. 『갈릴래아 예수』는 예수의 사역 전(前)편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맺는 말
저자가 주목한 “갈릴래아 예수”는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 주후 60년 경 기록한 문서에는 담겨있지 않은 예수다. 바울 서신들이 누락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예수를 직접 만나고 그와 동행했던 제자들의 증언을 담고 있는 책이 마가복음서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바울의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 즉 제자들이 예수와 동행하며 목격하고 들었던 내용,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의 사건, 그리고 인간 예수의 고뇌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담아내고 있다. 이 갈릴래아의 예수는 일찍이 민중 신학자 안병무가 주목했던 예수, 민중 예수였다. 그러나 저자는 안병무와는 다소 다르게 예수를 본다. 갈릴래아의 예수는 아직 민중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지적하며 갈릴래아에서는 “메시아의 비밀“이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암시를 남기고 있다.
마가복음에 담긴 메시아의 비밀은 기존 종교 및 정치 질서에 저항하며 고난을 당한 예수, 그의 십자가에서 드러난다. 이 예수는 예루살렘의 예수다. 갈릴래아의 온화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며 급진적인 예수, 자신의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예수로 이어진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누룩처럼 번지는 악한 욕망과 정치적 욕망을 경고 했다(544). 예수의 길은 누룩이 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 헤로데와 대립하는 길이었다. 이 길에 대하여 일찍이 폴 레만(Paul Lehmann)은 정치적 메시아니즘(political messianism)의 오류를 지적한 바가 있다. 그는 예수의 길은 정치적 메시아니즘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치, 곧 메시아적 정치(messianic politics)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민중 신학이 민중을 찾아서 “갈릴래아로!”를 외쳤다면, 저자는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라고 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신자들을 광장으로 몰아가며 세속 정치에 기댄 정치적 메시아니즘의 누룩이 핀 한국교회를 정화하고 변화시킬 새로운 힘은 갈릴래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의를 펼치는 예수의 메시아적 정치를 실천하는 데에서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박충구(감신대 명예교수, 기독교 윤리학)
김근수
자세한, 맥락을 꿰뚫은, 좋은 서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Paul Chang
와~
교수님!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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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감사합니다
길지만 정독했습니다
Kyungjoo Lee
정독하며 묵상합니다. 목사님. 울림의 말씀 고맙습니다. 기쁜 성탄절 되시고 행복한 연말 되세요.
AuthorCK Park
Kyungjoo Lee 이 피디님, 온 가족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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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이명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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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5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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