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4

지금은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다 윤평중

(3) 지금은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다 2년 전 오늘, '윤평중 칼럼'을 숙고 끝에... - Pyung-joong Yoon | Facebook

Pyung-joong Yoon shared a memory.

7h 
지금은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다
2년 전 오늘, '윤평중 칼럼'을 숙고 끝에 중단했을때 난 윤석열 정부의 앞날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그게 '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라는 글제목에 압축되어 있다.
이 칼럼에서 난 "주관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과 이성을 압살하면 망상과 파멸을 부른다"고 경고했는데, 이건 한국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린 12월 3일 '윤석열의 난(亂)'이 입증한다.
또한 이 마지막 칼럼에서 난 "내 신념이 옳다며 다른 신념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려 들면 그게 바로 역사의 반동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일당은 한국 역사를 수십년은 퇴행시킨 극우반동 세력이다.
난 윤석열 정권이 '정치적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취임 직후부터 일관되게 경고해 왔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이렇게 난폭하게 '정치적 자살'을 범하면서 대한민국을 '국가실패' 위기로 몰아넣을지는 몰랐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일뿐 아니라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고질적인 정치 혼란을 제외한다면, '윤석열의 난' 이전 한국사회는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최고의 성취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문화와 경제에서도 그렇고 시민사회의 활력에서도 그렇거니와 군사력과 첨단 기술력을 포함한 종합 국력에서 우린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윤석열의 난'은 현대 한국문명이 힘들게 쌓아온 민주공화국 정치게임의 룰을 단 한번에 파괴하려 한것이어서 그 죄업(罪業)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역사는 말한다.
반동은 또 다른 반동을 부른다는 사실을....
최악의 경우 극우반동은 극좌반동을 낳을 수 있다.
난 전율한다.
앞으로 우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게 될것인가...
우리가 겪어온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87년 체제의 빛과 그림자.....
한국 국민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실패를 부르는 정치세력을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들릴지언정 결코 난파하지 않을 것이다.
인식의 비관론을 의지의 낙관론으로 돌파해가는 나날이다.
‘윤평중 칼럼’을 멈추면서
2022년 12월 23일자 글(‘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로 ‘신문칼럼 글쓰기’를 잠시 멈춥니다. 조선일보엔 2012년부터 3주 간격으로 기명 칼럼을 집필해왔는데 그동안 한 번도 건너뛴 적이 없어 11년 동안 총 193편의 ‘윤평중 칼럼’을 썼더군요.
칼럼니스트로서 제 이력은 1994년 한겨레신문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겨레논단’에 격주로 세 달간 쓴 게 일간지 칼럼니스트 데뷔였습니다. 그 후 동아, 중앙, 조선, 경향 등 여러 신문에 칼럼을 계속 썼으며 2012년부터는 조선에 ‘윤평중 칼럼’을 연재해 왔습니다. 2014년~2021년엔 KBS 1TV 해설위원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근 30년 쉬지 않고 시사 칼럼을 써온 셈입니다.
저는 사실과 합리성의 토대 위에서 균형감과 콘텐츠가 있는 칼럼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 졸문(拙文)을 읽어주신 독자들이 가장 잘 아시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칼럼 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글쓰기의 부담은 세상의 모든 문필가에게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지만 제게도 일종의 ‘번아웃’이 온 것이지요.
‘칼럼의 질(質)이 떨어지면 글을 접겠다’고 생각한지는 오래 됐습니다. 지금 그런 ‘절필(絶筆)’의 순간이 온 건 아니지만 글의 콘텐츠를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재충전할 때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더 좋은 칼럼을 더 오래 쓰기 위해’ 쉬어가려고 합니다.
2010년부터 사용해 온 페이스북엔 가끔 이런저런 상념을 올리겠습니다. 저는 페북을 마감 부담 없는 자유로운 글쓰기 공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윤평중 올림
2022. 12. 23(금)
덧글: 아래 글은 대학 정년퇴임 직전인 2021년 6월에 제가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신문칼럼 글쓰기’와 관련된 제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다시 올립니다.
--------------------------
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의 변론(辯論)~ 윤평중(2021년 6월 20일자 페이스북 게시글 수정)
1. 두 지식인(고종석 선생과 권혁범 교수)이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나의 행보가운데 조선일보 기고행위를 강하게 비난했다. 고 선생과 권 교수의 입론은 간단하다. 내가 ‘극우신문인 조선일보의 사실왜곡과 선전선동의 미화원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비판이다.
2. 고 선생과 권 교수의 주장은 2000년대 초 유행했던 ‘안티조선’ 운동의 선악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당시 ‘안티조선’을 선도한 강준만 교수의 문제제기가 갖는 의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특정신문 기고를 ‘악(惡)에 부역한 행동’이라는 식으로 재단하는 강 교수의 논리가 오히려 ‘민주다원사회의 공론장을 위협한다’고 반론한 바 있다.
나는 보수지가 됐건 진보지가 됐건 특정 매체를 악으로 여기는 선정적 행태에 대해 그 당시에도 결연히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한다.
3. 고 선생의 비판은 기본을 결여하고 있다. 나는 칼럼니스트이기 이전에 철학자인데 내 칼럼집 정도만 읽고 나를 파악한 듯이 여긴다. (나는 11권의 단독저서와 30여권의 공저를 썼다).
내가 “조선일보와 탐욕스럽게 결탁”한 “기회주의적 처신때문에 온전한 지식인에 미달한다”고 고 선생은 주장한다. 내 스스로 온전한 지식인이라고 여긴 적이 없으니 ‘조선과 탐욕스럽게 결탁한 기회주의자’라는 게 그의 비판의 핵심인 셈이다.
나는 칼럼니스트 데뷔를 94년도에 한겨레신문에서 했다. 당시 한겨레신문 얼굴 칼럼이던 ‘한겨레논단’에 박원순 변호사와 격주로 3개월을 썼다. 그땐 고 선생도 한겨레에 있었을 땐데 고 선생 논리대로라면, 내가 한겨레신문과 ‘탐욕스럽게 결탁’하면서 칼럼니스트로 데뷔한 것이 된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동아, 중앙, 조선, 경향, 한국, 문화, 세계, 경제지 등 거의 모든 중앙 일간지에 칼럼과 대담을 실어왔는데 이것도 해당 매체들과 ‘결탁’한 것인가? 이 모든 신문에 내가 먼저 글을 싣겠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언제나 매체 쪽에서 요청해온 데 응했을 뿐이다. 신문칼럼 집필은 내 ‘철학적 실천’의 한 방식이었으며 나는 매체와 상관없이 언제나 ‘나의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4. 조선일보는 2012년부터 내게 ‘윤평중 칼럼’이라는 고정 꼭지를 주었다. 3주에 한번 쓰는 이 칼럼에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온전한 집필의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 윤평중 칼럼의 내용과 표현을 두고 조선일보와 갈등했을 때도 있었으나 나는 한 번도 내 칼럼을 두고 양보한 적이 없다. 윤평중 칼럼을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조선일보 애독자들도 많다. 나를 두고 ‘빨갱이’라는 비난도 댓글엔 넘쳐난다.
5. 고 선생 말대로 내가 “조선일보와 탐욕스럽게 결탁한 기회주의자”라면 내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조선일보에 윤평중 칼럼을 쓰기 시작한 2012년 이래 나는 진보신문을 포함해 숱한 신문사들의 고정칼럼 집필 요청을 일관되게 사양해왔다. 난 그걸 겹치기 출연을 고사한 최소한의 ‘상도의’(商道義)로 여겼다. 다른 신문들엔 윤평중 칼럼과 겹치지 않는 대담·특별기고·주간지나 월간지 원고청탁에만 응했다.
그런데 10년 넘게 지속된 이런 나름의 ‘절제’는 결과적으로 나를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윤평중’으로 제한하는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극단적 진영대립이 사회적 양식(良識)과 균형감각을 초토화한 한국의 야만적 풍토에서 특정 진영에 ‘자동적으로’ 귀속돼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진영귀속 효과는 ‘철학자 윤평중’의 학술작업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느낀다(물론 이건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지식사회와 (철)학계의 도덕적·학문적 헤게모니는 대부분 진보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고 기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학술서든 신문칼럼이든 궁극적으로 글의 가치는 당파성이 아니라 그 설득력과 정합성, 논리와 매력에 의해 판정되기 때문이다.
6. 권혁범 교수의 비판은 온건하지만 과거의 안티조선 노선을 단순 반복하고 있다. 권 교수는 특히 문재인 정권이 저지른 민주주의 해체와 가치규범 파괴의 중대성을 경시하고 있다. 그가 요새 윤평중 칼럼에서 느낀다는 “우경화”의 기미는, 내가 문 정권을 계속 강력하게 비판하는 데 대해 그가 느끼는 ‘불편함’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진보정권이든 보수정권이든, 문화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성역을 두지 않고 비판해왔다. 어느 시대에도 ‘권력과의 불화’는 비판적 지식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견해를 존중한다. 그와 나 둘 중에 누구 판단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여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아마 5년 안엔 측정이 가능할 터이다.
7. 나는 1994년 한겨레신문부터 2021년 조선일보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의식하지 않고 칼럼을 써왔다(고 자부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특정매체나 그 매체의 독자들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홀로 있는 자(者)’다.
어떤 진영도 편들지 않고 어떤 권력에도 영합하지 않는 태도 덕분에 ‘칼럼니스트로서 장수하고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물론 나의 이런 자기규정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부동(浮動)하는’ 독립지식인으로서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목표라고 나는 농반진반 얘기하곤 한다. 물론 나는 글의 밀도(密度)와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순간 공론장에서 자진 퇴장할 것이다. 그게 칼럼니스트로서 내 소박한 다짐이다.


[윤평중 칼럼] 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정치철학
입력 2022.12.23. 00:00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위로 펼쳐진 은하수./김영근 기자
==
오직 사람만이 시간을 분별(分別)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세밑과 새해로 나누어 의미를 부여한다. 새해의 결의는 모든 것을 마멸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에 맞서는 안간힘이다. 그런데 새해가 다가와도 긍정의 언어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각자도생이 한국인의 생존 문법이 되어가고 있다. 민생고와 진영 대결의 소용돌이가 희망을 삼켜버렸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진짜 재앙이 시작된다. 재난(disaster)은 별(aster)이 없는(dis) 암흑의 상태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별이 사라져버린 어둠의 시대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출구가 막힌 현실은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릴 때 성장 장애로 고통받던 메시(L. Messi)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우승컵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땀과 헌신이 만든 극적인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우승했어도 아르헨티나 민생의 해피엔딩은 요원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연말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율은 100%를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우리도 잔치는 끝났고 신산한 현실이 남았다. 쓰라린 삶의 고통에 직면하는 자세가 인간의 용기를 입증한다.

대한민국은 계량적 잣대로는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성공의 뒤안길엔 르상티망(ressentiment·약자와 패자가 강자와 승자에게 품는 질투와 원망)이 가득하다. 한국 사회의 불공정과 저신뢰가 만들어 낸 르상티망의 감정이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전쟁이 되어버린 정치와 디지털 포퓰리즘이 무한 증식시킨 원한(怨恨)과 분노가 한국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자족하고 자긍(自矜)하는 마음자리의 기본은 우리 사회에서 희귀한 자질이 되어 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의 객관성과 신뢰성은 붕괴 직전이다.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공론 영역이 마비 상태다. 진영과 당파에 따라 흑이 백으로, 백이 흑으로 순식간에 표변하지만 보수·진보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진정한 정치의 가능성도 소멸한다. 총체적 아노미 상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 삶의 기본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진영과 당파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신념과 소속감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연대 의식을 북돋아줄 수 있다. 하지만 주관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과 이성을 압살하면 망상과 파멸을 부른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한 땅을 두고 정면에서 부딪친 십자군 전쟁이 생생한 사례다. 우리 신념이 옳다며 다른 신념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려 들면 그게 바로 역사의 반동이다. 21세기 한국의 좌·우 진영 대립에도 중세 암흑기의 족쇄가 뚜렷하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경쟁 당파를 사문난적(斯文亂賊·진리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아 숙청했을 때 중세 한반도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민주 다원 사회에선 다른 신념들이 정면충돌할 때 토론과 검증이 우선이다. 사실성과 합리성의 잣대로 신념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진영의 확신과 다를지라도 전문가 공동체가 합의한 객관적 검증 결과는 인정하는 게 과학적 태도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양심을 내세워 명명백백한 사실을 유린하곤 한다.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폭침, 코로나 사태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논의가 소모적 음모론으로 비화하는 이유다. 현대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과학과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나의 오류를 인정하는 개방성에서 나온다. 결국 현대인의 삶에서 기본 중 기본은 사실성과 합리성이다. 우리는 사실과 합리성이 창출하는 양식(良識)으로 중세의 어둠을 부수고 현대 시민으로 승격한다. 사실의 준엄함을 부인하면서 의인(義人)을 자처하는 사람은 중세의 포로다.

축구 선수 손흥민과 메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삶의 교훈을 증명한다. 화려한 개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협업이고 팀플레이다. 작은 것들에 성실할 때 기본이 닦이고 큰 것이 이루어진다. 역지사지가 창조하는 사회적 신뢰와 관용이 르상티망을 치유한다. 사실과 합리성을 나침반 삼아 창공의 별을 바라볼 때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된다. 증오와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인간은 언제나 도상(途上)에서 고투(苦鬪)하는 존재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

지금까지 윤평중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윤평중 칼럼
#읽어주는 칼럼
많이 본 뉴스
[조형래 칼럼] ‘주 52시간’이 반도체 산업보다 중요한 야당
[조형래 칼럼] '주 52시간'이 반도체 산업보다 중요한 야당
반도체 특별법이 R&D(연구 개발)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
[광화문·뷰] 트럼프를 막은 공화당의 38인
[광화문·뷰] 트럼프를 막은 공화당의 38인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2기’를 한 달 앞둔 지난 주말, 미국 의...
[사설] 편파성 논란 자초한 선관위, 뒷감당할 수 있겠나
[사설] 편파성 논란 자초한 선관위, 뒷감당할 수 있겠나
중앙선관위는 국민의힘 의원을 ‘내란 공범’으로 표현한 현수막은 허용...
100자평20
도움말삭제기준
로그인 해주세요.
최신순찬성순반대순관심순
bearking
2022.12.24 06:22:54
상식과 팩트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위해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답글작성
4
0
immortalis
2022.12.24 03:21:10
윤 선생님, 그동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10
1
immortalis
2022.12.24 03:15:42
얼마 전에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애드 아스트라(Ad Astra: To The Stars 별을 향하여)를 보았다.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탐사하기 위하여 별로 향하는 우주비행사의 모험을 그린 영화인데 머나먼 우주가 아닌 가까운 곳에 자기가 원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 선생의 결론은 마지막 문장에 있는 것 같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 어제 이동규 교수의 칼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Now)이고,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Here)다. 두 가지를 합치면 'Now+Here(Nowhere)'가 된다"라고 하였다. 내 의견을 더하자면 유토피아의 원래 뜻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No+Where"인데 동일한 스펠링에서 "Now+Here", 바로 지금 여기가 유토피아인 것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