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ung-joong Yoon shared a memory.
지금은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다
2년 전 오늘, '윤평중 칼럼'을 숙고 끝에 중단했을때 난 윤석열 정부의 앞날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그게 '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라는 글제목에 압축되어 있다.
이 칼럼에서 난 "주관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과 이성을 압살하면 망상과 파멸을 부른다"고 경고했는데, 이건 한국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린 12월 3일 '윤석열의 난(亂)'이 입증한다.
또한 이 마지막 칼럼에서 난 "내 신념이 옳다며 다른 신념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려 들면 그게 바로 역사의 반동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일당은 한국 역사를 수십년은 퇴행시킨 극우반동 세력이다.
난 윤석열 정권이 '정치적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취임 직후부터 일관되게 경고해 왔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이렇게 난폭하게 '정치적 자살'을 범하면서 대한민국을 '국가실패' 위기로 몰아넣을지는 몰랐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일뿐 아니라 현대 한국문명의 총체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고질적인 정치 혼란을 제외한다면, '윤석열의 난' 이전 한국사회는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최고의 성취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문화와 경제에서도 그렇고 시민사회의 활력에서도 그렇거니와 군사력과 첨단 기술력을 포함한 종합 국력에서 우린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윤석열의 난'은 현대 한국문명이 힘들게 쌓아온 민주공화국 정치게임의 룰을 단 한번에 파괴하려 한것이어서 그 죄업(罪業)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역사는 말한다.
반동은 또 다른 반동을 부른다는 사실을....
최악의 경우 극우반동은 극좌반동을 낳을 수 있다.
난 전율한다.
앞으로 우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게 될것인가...
우리가 겪어온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87년 체제의 빛과 그림자.....
한국 국민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실패를 부르는 정치세력을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들릴지언정 결코 난파하지 않을 것이다.
인식의 비관론을 의지의 낙관론으로 돌파해가는 나날이다.
[윤평중 칼럼] 어둠의 시대에 기본을 생각하며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정치철학
입력 2022.12.23. 00:00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위로 펼쳐진 은하수./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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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람만이 시간을 분별(分別)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세밑과 새해로 나누어 의미를 부여한다. 새해의 결의는 모든 것을 마멸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에 맞서는 안간힘이다. 그런데 새해가 다가와도 긍정의 언어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각자도생이 한국인의 생존 문법이 되어가고 있다. 민생고와 진영 대결의 소용돌이가 희망을 삼켜버렸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진짜 재앙이 시작된다. 재난(disaster)은 별(aster)이 없는(dis) 암흑의 상태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별이 사라져버린 어둠의 시대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출구가 막힌 현실은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 열광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릴 때 성장 장애로 고통받던 메시(L. Messi)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우승컵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땀과 헌신이 만든 극적인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우승했어도 아르헨티나 민생의 해피엔딩은 요원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연말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율은 100%를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우리도 잔치는 끝났고 신산한 현실이 남았다. 쓰라린 삶의 고통에 직면하는 자세가 인간의 용기를 입증한다.
대한민국은 계량적 잣대로는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성공의 뒤안길엔 르상티망(ressentiment·약자와 패자가 강자와 승자에게 품는 질투와 원망)이 가득하다. 한국 사회의 불공정과 저신뢰가 만들어 낸 르상티망의 감정이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전쟁이 되어버린 정치와 디지털 포퓰리즘이 무한 증식시킨 원한(怨恨)과 분노가 한국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자족하고 자긍(自矜)하는 마음자리의 기본은 우리 사회에서 희귀한 자질이 되어 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의 객관성과 신뢰성은 붕괴 직전이다.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공론 영역이 마비 상태다. 진영과 당파에 따라 흑이 백으로, 백이 흑으로 순식간에 표변하지만 보수·진보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진정한 정치의 가능성도 소멸한다. 총체적 아노미 상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 삶의 기본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진영과 당파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신념과 소속감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연대 의식을 북돋아줄 수 있다. 하지만 주관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과 이성을 압살하면 망상과 파멸을 부른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한 땅을 두고 정면에서 부딪친 십자군 전쟁이 생생한 사례다. 우리 신념이 옳다며 다른 신념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려 들면 그게 바로 역사의 반동이다. 21세기 한국의 좌·우 진영 대립에도 중세 암흑기의 족쇄가 뚜렷하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경쟁 당파를 사문난적(斯文亂賊·진리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아 숙청했을 때 중세 한반도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민주 다원 사회에선 다른 신념들이 정면충돌할 때 토론과 검증이 우선이다. 사실성과 합리성의 잣대로 신념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진영의 확신과 다를지라도 전문가 공동체가 합의한 객관적 검증 결과는 인정하는 게 과학적 태도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양심을 내세워 명명백백한 사실을 유린하곤 한다.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폭침, 코로나 사태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논의가 소모적 음모론으로 비화하는 이유다. 현대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과학과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나의 오류를 인정하는 개방성에서 나온다. 결국 현대인의 삶에서 기본 중 기본은 사실성과 합리성이다. 우리는 사실과 합리성이 창출하는 양식(良識)으로 중세의 어둠을 부수고 현대 시민으로 승격한다. 사실의 준엄함을 부인하면서 의인(義人)을 자처하는 사람은 중세의 포로다.
축구 선수 손흥민과 메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삶의 교훈을 증명한다. 화려한 개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협업이고 팀플레이다. 작은 것들에 성실할 때 기본이 닦이고 큰 것이 이루어진다. 역지사지가 창조하는 사회적 신뢰와 관용이 르상티망을 치유한다. 사실과 합리성을 나침반 삼아 창공의 별을 바라볼 때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된다. 증오와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인간은 언제나 도상(途上)에서 고투(苦鬪)하는 존재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
지금까지 윤평중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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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rking
2022.12.24 06:22:54
상식과 팩트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위해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답글작성
4
0
immortalis
2022.12.24 03:21:10
윤 선생님, 그동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10
1
immortalis
2022.12.24 03:15:42
얼마 전에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애드 아스트라(Ad Astra: To The Stars 별을 향하여)를 보았다.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탐사하기 위하여 별로 향하는 우주비행사의 모험을 그린 영화인데 머나먼 우주가 아닌 가까운 곳에 자기가 원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 선생의 결론은 마지막 문장에 있는 것 같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 어제 이동규 교수의 칼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Now)이고,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Here)다. 두 가지를 합치면 'Now+Here(Nowhere)'가 된다"라고 하였다. 내 의견을 더하자면 유토피아의 원래 뜻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No+Where"인데 동일한 스펠링에서 "Now+Here", 바로 지금 여기가 유토피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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