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안녕하세요. 오늘은 2박 3일 동안 여러 종교 지도자와 사회 인사들을 모시고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생 200주년 기념 순례를 떠난 지 2일째 되는 날입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경주에서 출발해 남원으로 이동하여 동학사상을 집대성한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을 방문하고,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아침 6시에 경주 동학교육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참석자들과 함께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버스를 타고 경주에서 출발했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스님의 사회로 어제 못다 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어제 김기화 신부님이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과 최제우 대신사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고, 천도교가 무엇을 과제로 삼아야 하는지 다소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신부님과 목사님, 교령님이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토론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남원에 다다랐습니다.
스님이 박남수 전 교령님에게 왜 남원으로 순례의 길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남원이 가까워져 오네요. 아직 30분을 더 가야 합니다. 교령님께 오늘 일정에 관해 설명을 청해 듣겠습니다.”
교령님은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저희들이 지금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 이 길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1860년 경주 용담정에서 득도를 하시고, 다음 해인 1861년 11월에 전라도 남원 덕밀암 은적당을 향해 걸어가셨던 그 길입니다. 대신사께서 이 길을 가신 데에는 세 가지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피신을 하기 위한 길이었고, 두 번째는 도를 깨달으신 후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러 가신 길이었으며, 세 번째는 동학을 종교로써 체제를 갖추고자 준비하기 위해 가신 길이었습니다. 이 점을 알고 나면 오늘 저희가 대신사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성지 순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쪽에서 나서 서쪽에서 펼치지 않으면 번성이 안 된다.’ 하는 한울님의 이치에 따라 경주에서 남원으로 가신 일은 최제우 대신사님으로 보면 제2의 창도를 이루는 여정인 것입니다. 오늘 저희는 천도교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길을 따라 성지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은적당을 완전하게 복원하지 못한 것이 저희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번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하여 우리가 그곳에 가서 대신사의 심정을 이해하는 값진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스님도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에 얽힌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주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님의 일생을 보면 예수님의 일생하고 상당히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일찍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완성하였듯이, 천도교에서도 최제우 대신사께서 돌아가신 후 최시형 선생이 오늘날 동학의 근간을 이루었고, 그다음으로 손병희 선생이 종교적인 체제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천도교에서 신을 논하는 내용은 어쩌면 기독교와 비슷한 면이 있고, 한울님이 마음에 내재한다는 관점은 불교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유불선에 기독교까지 다 경험을 하신 후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셨다고 하잖아요. 또 원래 진리를 찾다 보면 공통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대신사께서 어떻게 혜월 화상을 알고 찾아왔으며, 혜월 화상은 어째서 대신사를 숨겨주는 그 위험한 일을 기꺼이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만 최제우 대신사가 덕밀암에 가서 지냈고, 나중에 대신사께서는 관에 잡혀가서 돌아가시게 되자 혜월 화상은 대신사를 숨겨준 죄목으로 승적이 박탈되고 절에 가택연금이 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용천사도 그런 이유로 불태워졌거나 철거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최제우 대신사는 좌도난정의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받았습니다.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에 임금이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라고 했으니, 역적이 되었던 거죠.”
경주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남원에 도착하니 해가 쨍하고 떴습니다. 한 분이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려주시나 봐요.”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이번 순례에 참석한 목사님과 신부님들 덕분이죠.” (웃음)
교룡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산길을 천천히 오르자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참가자들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10분 정도 오르막길을 걸은 후 교룡산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꺾여져 오르는 돌계단 길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안내판을 가리키며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성벽을 지나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야 은적당이 있었던 터가 나옵니다.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거기까지 올라갔다 오기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설명을 듣고 내려가겠습니다.”
이어서 동학유족회 주선원 회장님이 이곳에서 최제우 대신사가 남긴 업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음은 스님이 혜월 선사와 최제우 대신사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때의 인연이 발전해서 용성조사와 손병희 선생이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선 밑바탕에는 용성조사와 전라도 만석꾼들이 전 재산을 바친 지원이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교룡산성 아래에 용천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혜월 선사께서 덕밀암에서 용천사 조실 스님으로 주석하고 계셨습니다. 최제우 대신사가 와서 머무르신 건물은 덕밀암의 조실채인 은적당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이유로 나중에 혜월 선사는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죄인을 숨겨준 죄로 승적이 박탈되었습니다. 저의 스승의 스승인 용성조사는 이곳에서 혜월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신 분입니다. 스승의 승적이 박탈되자 스승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혜월 선사는 사제인 해인사의 화월 스님에게 제자를 보내서 계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용성조사는 해인사에서 계를 받았지만, 실제로 수행을 지도한 분은 혜월 선사입니다. 스승과 연계된 인연 때문에 용성조사는 천도교 손병희 선생과 3.1운동 때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이 가능했던 이유
나중에 혜월 선사는 같은 남원 안에서 본사인 실상사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실상사 가는 길에 운봉이라는 곳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그곳의 만석꾼 집안에 출입하게 되었어요. 그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임동수이고, 용성조사와는 나이가 한 살 차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둘이 알고 지내다가 후에 용성조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 그 자금을 다 댔습니다. 임동수 거사의 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분의 처남을 비롯해 주변의 만석꾼들이 용성조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상해임시정부 자금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와서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용성조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망명 정부를 구성할 준비를 했는데, 그 자금이 이미 상해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용성조사와 임동수 거사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상해 임시정부가 생길 때 그 재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일체 밝혀진 적이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모금을 해왔다는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입니다. 임시정부가 생기자마자 외국에서 모금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거든요.
민족사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가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농민들의 저항 운동도 있었지만, 당시로 치면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만석꾼들도 민족사 앞에서는 집안의 전 재산을 몰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너무 민중사적으로만 보는 것도 조금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경주의 최부잣집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다 보내면서 집안이 기울어졌습니다. 천도교도 3·1독립운동을 이끈 후 타격을 받아 위축된 것이고요. 우리가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님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천도교와 불교 간에는 이곳에 얽힌 이야기가 교사(敎史)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송월당(松月堂)이라고 하는 분을 불교에서는 혜월 화상이라고 하고, 우리가 은적암이라고 하는 곳을 불교에서는 덕밀암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명을 가지고 도망쳐 온 사람을 감싸준 스님이 얼마나 큰 탄압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천도교 스스로 혜월 화상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송월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해서 그분을 보호해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천도교 교사에는 송월당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일 하나만 보더라도 그때 동학에 대해 관에서 얼마나 탄압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숭유억불 정책을 쓰던 시대여서 불교도 어차피 탄압을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최제우 대신사님은 통도사 산하에 있는 내원암에서 도통을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불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후천 오만 년의 무극대도인 천도교가 탄생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불선 3교와 기독교를 합쳐서 동학을 만든 것 아니냐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동학을 아주 모욕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 종교의 좋은 점을 따다가 새 종교를 만들겠습니까? 그건 종교의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유교의 윤리가 있고, 불교의 각심이 있는 것이지, 그걸 가져다가 우리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도교에는 선천 개벽과 후천 개벽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만들어진 것을 선천 개벽 세상이라고 한다면, 후천 개벽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천주(侍天主)의 시대가 열림을 의미합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이곳 교룡산성은 천도교의 제2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의 성지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최제우 대신사가 집필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오후 대화 마당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점심식사를 한 후 대화 마당을 하기 위해 남원 시내에 있는 춘향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대화 마당을 시작하기에 앞서 종교인 모임에서는 박희승 남원시 국회의원과 최경식 남원시 시장님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였습니다.
스님은 남원시 시장님에게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 복원에 대해 시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교령산성 덕밀암 은적당을 복원해서 순례자들이 참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 좋겠어요. 이곳은 민족사의 관점에서 역사 유적지로 복원하려는 것이지 종교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순례도 다양한 종교인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대한민국 사람이고, 최제우 대신사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분이니까, 종교를 떠나서 다 같이 순례하고 있습니다.”
시장님도 적극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남원의 정기가 교룡산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도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차담을 마친 후 다 함께 대화 마당을 하기 위해 소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대화마당의 주제는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입니다. 왜냐하면 이곳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 은적당에서 최제우 대신사가 동학사상을 집대성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박희승 남원시 국회의원이 축사를 했습니다.
“동학사상은 최제우 선사께서 동경대전을 통해 사상적 뿌리를 내린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토양이자 근본이 되는 사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운 요즘 시대에 본받아야 할 사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덕밀암 은적당이 우리 정신 사상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게 이곳이 성역화되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게 저도 작은 역할을 하겠습니다.”
다음은 최경식 시장님이 축사를 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님께서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덕밀암 은적당은 단순히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 민족정신의 상징입니다. 이런 중요한 역사를 복원하고, 후대에 계승하는 것은 저와 같은 행정 관료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종교 단체, 시민들, 그리고 박희승 국회의원님과 협력하여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복원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축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대화 마당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대화 주제는 ‘동학사상 살펴보기’입니다. 원광대 동북아시아 인문 사회연구소 조성환 교수님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중심으로 동학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토론의 마중물이 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조 교수님은 동학사상의 시천주, 보국안민, 개벽 사상이 뜻하는 바를 이야기한 후 그것이 동학농민혁명과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을 강조했습니다.
모두를 하늘처럼, 동학이 전하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정신
“시천주(侍天主)라는 개념은 동경대전에서 나옵니다. ‘내 안에 신령이 있다. 내 이웃에도 신령이 있다.’ 이것이 동학사상의 중심 내용입니다. 최제우 선생님은 이 개념을 통해 신앙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보국안민이라는 말에서 ‘보’ 자는 돕는다는 뜻입니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보호를 넘어 민주주의적 참여를 상징합니다. 이는 백성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동학의 혁명적 정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제우 선생은 시천주, 즉 사람을 하늘처럼 모시라는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명령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질서를 열기 위한 개벽 사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될 수 있으면 적을 해치지 말라'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혁명이 아니라 시천주의 인간관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이라고 봅니다. 한울님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분배된 존재로, 양반과 평민, 남성과 여성 모두를 구별 없이 대한다는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구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유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동학사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자유롭게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동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시천주’의 철학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또한 동학이 성평등, 환경문제, 사회 정의와 같은 현대적 과제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그리고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민주주의 사상으로서 동학이 현대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습니다. 이를 통해 동학사상이 갖는 철학적, 실천적 의의가 깊이 조명되었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두 번째 대화 마당을 시작했습니다. 남원 실상사에 계신 도법스님과 남원 제일교회에 계신 장효수 목사님이 축사를 한 후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번 대화 주제는 ‘동학혁명 살펴보기’입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 연구소 소장님이 토론의 마중물이 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신 소장님은 동학의 사상적 기초를 토대로 동학 농민군이 가졌던 평등 정신, 동학농민군이 가졌던 혁명적 목표, 우금치 전투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평등과 혁명의 꿈, 동학농민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동학농민혁명은 동학, 농민, 혁명,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해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본질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동학의 사상은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사상과 서로 돕고 사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정신에 기반합니다. 가진 자(유)와 못 가진 자(무)가 서로서로(상) 의지함(자)으로써 단체 내부의 결속력도 강화되었고, 그들의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시대의 요구였고 동학이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은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여 함께 싸웠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평등 사회를 꿈꾼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동학은 단순히 국내의 문제를 넘어 아편전쟁 이후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은 단순히 지역적 봉기를 넘어서 국가 전체를 바꾸고자 했던 혁명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는 단순히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닙니다. 수많은 희생 속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돌아보고, 미래의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신 소장님의 발표에 이어서 자유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수만 명이 사망하는 대학살이 벌어졌음에도 아직도 그 피해 규모가 연구 중에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습니다.
동학 농민들이 사회 변혁을 꿈꾸며 행동했을 때, 그들이 과격한 집단과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며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나요?
동학농민혁명 유족의 명예 회복과 보상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동학농민군이 일본 외세와 국내 봉건 세력에 동시에 맞서야 했던 전략적 선택지는 무엇이었나요?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후 왕권을 뒤엎고 민주 체제를 세우려 했나요, 아니면 다른 대안을 모색하려 했나요?
동학사상이 동학농민군 대다수에게 어느 정도로 공유되었고, 후천 개벽 사상이 실제로 영향을 미쳤나요?
동학사상이 현재에 어떤 형태로 부활할 수 있고, 현재의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나요?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고, 질문에 따라 다양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대화 마당은 저녁 6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에 초점을 맞춰서 토론하다 보니 논의의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고, 뒤로 갈수록 점점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4시간 동안의 토론을 마치며 평화재단 지도위원인 고경빈 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전쟁에서 질 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죽을 각오로 항복하지 않고 싸웠던 이런 동학혁명 정신이 없었다면, 우리가 1945년 해방됐을 때 과연 국권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동학이나 천도교를 잘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능하도록 한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대화 마당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지난 이틀 동안 순례를 하면서 느낀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 나누기는 스님이 사회를 보며 진행했습니다.
“대화 마당에서 발언을 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느낀 점을 한 마디씩만 해주세요.”
천도교, 성공회,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함께 순례를 했고, 사회원로, 시민단체 활동가, 정치인, 언론인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만큼 각자 느낀 소감도 다양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입니다. 저는 정치를 하고 있는데요.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선거구제 개편과 다당제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학의 정신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 종단의 선거 제도를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 종단의 민주화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동학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에도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특히 동학사상의 경천, 경인, 경물 사상은 기후 위기 시대에 세계를 구할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2박 3일 동안 순례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동학의 정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민주주의 정신에 대해 무지했음을 반성하며 앞으로 더 연구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동학 정신이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순례는 단순한 역사 탐방을 넘어 동학사상이 현대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님이 유교, 불교, 기독교를 뛰어넘어 새로운 한민족의 정신을 만들었는데, 200년이 지나고 바로 오늘 이 자리가 대신사님의 동학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개가 무량합니다.”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님은 소감을 대신해 시를 낭송했습니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중략)”
시 낭송을 듣고 감동을 한 성공회 박경조 주교님이 전통 민요가 생각이 난다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노래 한 소절을 불렀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상황과 전봉준 장군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가사 속의 녹두꽃과 청포 장수는 혁명의 아픔과 희망을 담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오늘 기조 발표를 맡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번 순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발표자분들이 전부 돈을 받지 않고 재능 기부를 해주셨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와 함께 소감 나누기 시간을 마쳤습니다.
모두 숙소로 돌아간 후 스님은 이번 순례를 주관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 어르신들과 함께 간단하게 평가 회의를 했습니다. 잘한 점과 개선할 점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 내일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리는 대화 마당을 마지막까지 잘 준비하자고 이야기한 후 모임을 마쳤습니다.
“저는 내일 서울에서 생방송을 해야 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야기들 나누다가 주무세요.”
스님은 종교인 분들께 인사를 하고, 밤 9시에 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숙소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천도교 대교당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와 동학사상이 한국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마지막 대화 마당을 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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