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이승만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 <7편> 기독교 귀의
허구인물 전우치 2015. 10. 15. 20:18




Korea by Hamilton, A. 1904 PDF.zip



Korea by Hamilton, A. 1904 문자.zip


이승만, 기독교를 믿다.


이승만이 합법적인 체포에 반항한 죄목으로 감옥 생활을 하던 중에 기독교로 귀의했다.1 귀의한 시기는 탈옥에 실패하고 잡힌 날짜가 1899년 1월 30일이고, 평리원 고등재판소 판결이 난 날짜는 1899년 7월 14일이니, 2월에서 7월 사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구명 운동에 나선 서양인 선교사들에게서 강한 호감을 얻으려면 일찍 기독교로 귀의할 수록 더 좋기 때문에 봄 2~3월에 뚜렷하게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영국 성공회의 지원 아래 1899년 기독교로 귀의한지 무려 6년 뒤인 1905년 4월 23일에야 워싱턴에서 장로교 소속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 때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장로교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2 하지만 이후 종교 활동은 감리교 목사들과 손을 잡고 한다. 왜냐하면 하와이 교포들이 인천 감리교 내리교회를 통해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을 왔기에 모두 감리교 소속이라서 자신에게는 감리교가 더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승만이 거의 최초 국내 양반 지식인 개신교 귀의 사례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3 서상륜(만주 1882년), 이수정(일본 1883년), 서재필(미국 1885년), 윤치호(중국 1887년)는 해외 세례파 양반 출신 기독교 신자이고, (모두 1897년~1898년 입교) 이무영(궁내부 물품사장), 이충구(형사국장 및 경무사), 유제(면천군수), 김홍수(죽산군수)는 현직 관료 양반 출신 기독교 신자이며, 1893년 세례 받은 배제학당 한문교사 최병헌은 몰락한 양반 출신이고, 1866년 세례 받은 노도사(춘경)와 1887년 세례 받은 배제학당 출신 박증상, 한용경은 양반 계층이 아닐 것이기에 이승만이 국내 거의 최초 양반 지식인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다.4



우선 다른 사람들은 세례 받은 년도를 기준으로 하면서 이승만만 귀의한 년도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비교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양반이면 양반이고, 지식인이면 지식인이지 양반 신분이면서 지식인이라는 분류도 어색하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이승만 역시 양반 계층이 아니다. 목에 씌우는 칼(枷)을 원칙적으로 양반에게는 채우지 않는 것이 조선의 율법이다.5 따라서 이승만의 목에 칼을 씌웠다는 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승만을 양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조선시대 내내 칼은 법률상 오직 탈옥을 시도했거나, 시도할 우려가 큰 범죄자에게만 씌우도록 되어 있다.



이승만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선교에 열성적이었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실체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떠받들정도로 은혜를 베풀어 준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 땅에서 돈 버는 사업가들이었다.



프랑스 공사관에서 정보 수집을 맡은 프라뎅이 1893년 7월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미국인 개신교 소속 선교사들은 프랑스 공관보다 더 안락하고 넓은 유럽식 주택에서 거주하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선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반면에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은 매우 활발하게 선교에 나섰다.6



프라뎅이 정보 보고서를 제출한지 11년이 지난 1904년의 상황을 보아도 미국 선교사들은 여전히 선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매년 200파운드가 넘는 연봉을 받았고, 매우 큰 서양식 집과 한국인 하인들을 무상으로 제공 받았으며, 자녀 교육비도 받았고, 또 따로 자녀 1명당 매년 일정액을 수당으로 받았다.7 주거비와 양육비 걱정이 없고, 하인까지 공짜로 부릴 수 있었으니 미국 선교사들이 대한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아이들을 낳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 무역업자들과 손을 잡고 각종 이권 사업을 벌이고, 호텔도 운영하고, 과수원도 경영하였으며, 보험대리점도 운영하고, 그외 잡다한 사업을 하면서 바쁘게 돈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막상 선교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에다 출판하고 싶은 책도 집필해야 했고, 책에 실을 사진도 찍으러 여기저기 다녀야 했기에 더욱 바빴다. 그래서 시간이 부족해서 도저히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은 최소한으로만 하고 이윤은 최대한 챙기면서 호화롭게 생활하였다.8

그런데도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증가하게 되는 원인은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이 아니라 원래부터 각종 무속신앙부터 해서 도교, 불교까지 섭렵할 정도로 한국인의 습성 자체가 종교를 좋아하기에 나중에는 한국인들이 알아서 서양 교회에도 몰려 들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


  1. 이정식, 이승만 자서전,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75쪽. 그때 나는 그들이 말하던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인데, 그 말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나무 칼에 머리를 숙이고 『오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며 기도했다. 나는 그후 성경을 구하려고 했으나 옥중에서는 종교적 서책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선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방법을 통해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 의사가 조그마한 신약성경을 보내왔는데 그것을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죄수 한 사람은 죄수 한 사람은 간수들이 오는 가 살피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 사람은 성경을 넘겨 주었다. 나는 목이 형틀에 들어가 있었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 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감옥에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잊을 수가 없다. [본문으로]
  2. 이정식, 이승만 자서전,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92쪽. 나는 1905년 4월 23일 부활절 아침에 세례를 받았다. 내가 한국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감옥에서 나온 후에 세례를 받을 시간이 없었고, 둘째로 감리교나 장로교 어느 쪽 친구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사정을 알고 있던 게일 박사는 나더러 미국에 가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해 주었다. 워싱턴 장로교회들의 주일학교들은 한국에 있는 게일 박사를 후원하고 있었다. 스미스씨의 소래로 나는 각 교회의 주일학교나 청년의 모임들에 다니며 간증을 했다. [본문으로]
  3.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61쪽 이와 같이 이승만은 한성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받이 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결신한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시기는 1899년 1~2월 경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이승만은 양반출신 지식인으로서는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개신교에 개종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4.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204~205쪽 양반 계층에 속한 한국 지식인으로서 1899년 이전에 국외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인물로는 서상륜(徐相崙 1849~1925), 이수정(李樹廷 1842~1886), 서재필, 윤치호 등이 있다. 이들은 만주, 일본, 미국 그리고 중국에서 1882년, 1883년, 1885년 그리고 1887년에 각각 세례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1886년에 언더우드가 노도사(춘경)에게, 그리고 1887년에 아펜젤러가 배재학당 학생인 박중상, 한용경 등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개신교 개종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읻르은 양반계층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93년에 몰락 양반 출신으로서 배재학당 한문교사였던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이 존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7~1898년간에 양반 출신으로 여겨지는 현직 관료 중에서 궁내부 물품사장 이무영(李懋榮, 일명 李喬榮 1860~?), 경무사 및 형사국장을 지낸 이충구(李忠求), 면천군수 유제, 죽산군수 김홍수 등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현직에서 기독교적 생활을 했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이승만은 양반 출신 지식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개신교에 귀의한 인물이라고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세례를 받았다. [본문으로]
  5. 가(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한중앙연구원, 보통 칼이라고 하였다. 칼은 마른 나무널판으로 만든 형틀로 죄수의 목에 씌워 보행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칼과 같은 나무형틀로, 손에 채우는 추(杻: 소칼, 수갑)가 있는데, 이는 발에 채우는 질(桎: 착고)과 한 벌로 되어 있었다. 죄수에게 가추 등을 채우는 형벌은 당송(唐宋)시대의 옥관령(獄官令)에서 이미 정비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수계한 『대명률』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가의 길이는 5자 5치, 두활(頭闊)은 1자 5치이고, 무게는 사죄인(死罪人)에게 씌우는 것은 25근, 도형(徒刑)·유형(流刑)은 20근, 장죄(杖罪)는 15근이며, 그 규격을 나무칼에 새겨놓았다. 정조 때의 『흠휼전칙(欽恤典則)』에는 길이 5자 5치, 두활 1자 2치이고, 무게는 22근·18근·14근으로 각각 규정하여, 형을 치르는 자의 고통을 다소 덜어주었다. 칼을 쓰고 추국(推鞫)이나 고신(拷訊)을 받은 죄인을 가수(枷囚)라 하였다. 양반에게는 원칙적으로 칼을 씌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본문으로]
  6. 정치국 제63호, 국사편찬위원회 Direction PolitiqueN° 63Séoul, le 1er Juillet 1893.Tableau statistique de la population étrangère en Corée.1 tableauMonsieur le Ministre,J'ai l'honneur de transmettre à Votre Excellence le tableau statistique de la population étrangère résidant en Corée.Les Japonais sont, de beaucoup, les plus nombreux. Ce sont, en général, des artisans, des pêcheurs, des bateliers et des petits marchands.Les Chinois, qui viennent en seconde ligne, se divisent en ouvriers et petits boutiquiers.Les Américains sont, pour la plupart, membres des sociétés bibliques protestantes;ils habitent des maisons européennes plus confortables et plus spacieuses que le Commissariat de France, ont beaucoup d'enfants et font peu de propagande religieuse.Sur les 45 Anglais, plus des trois quarts sont missionnaires appartenant à la « High Church » d'Angleterre. Ils portent le même costume que nos protégés et sont assez remuants.Quant aux étrangers appartenant aux autres nationalités, ils sont tous membres du corps diplomatique et consulaire ou bien négociants.Les femmes et les enfants sont compris dans le tableau ci-joint.Je suis avec le plus profond respect, Monsieur le Ministre, de Votre Excellence, le très humble et très obéissant serviteur.H. Frandin.Son Excellence, Monsieur Develle, Ministre des Affaires Etrangères, etc., etc., etc. Paris.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정치국 제63호 서울, 1893년 7월 1일 장관님,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통계표를 귀하에게 송부하는 바입니다.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격차로 일본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장인, 어부, 뱃사공, 상인들입니다.두 번째로 많은 중국인들은 주로 노동자들과 소매상인들입니다.미국인들은 대부분 개신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로 프랑스 공관보다 안락하고 넓은 유럽식 주택에서 거주하며, 아이들이 많고, 선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영국인은 45명으로 이중 3/4이상이 영국 성공회(high church)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국민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꽤 활동적입니다.그 외 외국인들은 모두 외교 영사단에 속하거나 무역업자들입니다.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통계는 첨부한 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H. 프랑댕파리의 외무부 장관 드벨 각하께, 등등 [본문으로]
  7. Hamilton, A. Korea 1904 265~266쪽The American missionary in the Far East is a curious creature. He represents a union of devices which have made him a factor of considerable commercial importance.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 were formerly closely associated with the more important export houses in the leading industrial centers of America. Owing to diplomatic representation this practical demonstration of Western superiority is no longer openly indulged. In Seoul, however, an American missionary inconsiderately receives paying guests, causing a manifest loss of business to the Station Hotel; in Won-san, another exploits his orchard. As a class they are necessarily newspaper correspondents and professional photographers; upon rare occasions and here I refer especially to a small coterie of American missionaries in Seoul-they are the scholarly students of the history, manners, customs and language of the country in which they happen to be placed.The American missionary has a salary which frequently exceeds £200 a year, and is invariablty pleasantly supplemented by additional allowances. Houses and servants are provided free, or grants are made for house rent; there is a provision for the education of the children, and an annual capitation payment is made for each child. As a class, American missionaries have large families, who live in comparative and commodious houses in the foreign settlements, and appear to me to extact from their surroundings the maximum of profit for the minimum of labour. I do not know whether it is with the permission of the executive officers or the American Mission Boards that their representatives combine commerce with their mission to the heathen. When a missionary devotes no little portion of his time to literary labours, to the care of an insurance agency, to the needs of a fruit farm, or to the manifold exigencies of casual commerce, it seems to me that the interests of those who sit in darkness must suffer.American mission agents have made Korea their peculiar field. Converts, who prattle of Christianity of the capital in the twentieth century. Mission centres, which have been created in a number of places, now show signs of prosperity. They enlist no little practical sympathy and support from the native population. The self-supporting character of much of the missionry work in Korea bears out the spirit of toleration which distinguishes the attitude of the people towards the propaganda. It is not to be supposed that the work of the missionaries is agreeable to all shades of native opinion. 극동 미국 선교사는 괴이한 자다. 그는 거대 상업 중심지를 형성한 요인이었던 기구연합을 대표한다. 한국내 미국 선교사들은 한때 미국의 선도 산업 중심지에서 보다 중요한 수출업자들과 긴밀하게 연합하였다. 외교적 대표성 때문에 서구 우월성의 실제 표출은 더 이상 드러내 놓고 하는 탐욕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사려 깊지 못하게 하숙자들을 받아 들여, 스테이션 호텔에 명백하게 사업적 손실을 입히는 원인이 되었고, 원산에서는 다른 과수원을 상업적으로 활용하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필시 신문 기자들이거나 전문 사진 작가들이고, 좀처럼 드물게, 여기서 내가 특별히 서울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의 작은 동아리에 대해 말해 본다면, 그들은 그들이 머물 게 된 나라의 역사, 예절, 풍습과 언어를 배우는 학구적인 학생들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급료를 일년에 흔히 200 파운드 넘게 받으며, 늘 흡족하게 수당으로 보충된다. 집과 하인은 공짜로 제공되며, 아니면 주택 임대료 보조금을 주며, 자녀 교육비를 지원해 주고, 자녀 1명당 매년 일정액을 준다. 전체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은 대가족을 거느리고 외국인 마을 안의 상당히 큰 집에서 살고, 내게는 정확하게 그들의 환경은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보였다. 상급기관 아니면 이방인 선교를 하는 무역연합 대표인 미국 선교회가 허락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선교에 전념하게 되면 문학 작업, 보험대리점 관리, 과수원 작업, 그외 많은 급한 일상적 상업 활동에 분배할 시간이 없게 되는데, 이는 내가 보기에는 어둠 속에 앉은 자들의 이윤이 압박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선교 요원들은 한국을 특별 구역으로 만들었다. 개종, 20세기 수도에서 기독교가 떠들어 대는 개종이다. 여러 장소에 세워진 선교 단체들은 지금 번창할 조짐을 보이고있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실제적인 공감과 지원을 조금도 요청하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의 대단한 자립형 특성은 선전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를 구별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영혼을 증명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작업이 원주민 견해의 모든 차이에 동의할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없다. [본문으로]
  8. Hamilton, A., 위의 책 [본문으로]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