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30

알라딘: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2 이행기 2022

알라딘: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 
이행기
(지은이) 메이킹북스 2022-06-02
정가

전자책
12,600원 



7.5
100자평 2편
리뷰 2편
세일즈포인트 216
408쪽



책소개

조선근대사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청,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있던 열강의 움직임을 시간순으로 같이 본다. 조선사의 경우 1850년부터 1905년까지의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1차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사실에 가깝게 보도록 노력했다.



목차


서문

1800년 ~ 1849년 조선의 역사
10세의 순조 즉위와 수렴청정/“장차 몇 시절이나 지탱”할지 걱정한 대왕대비/‘애절양’/1810년의 굶주린 백성의 수/홍경래의 난/“소방의 미약한 힘으로 어떻게 제때에 초멸할 수 있었겠습니까?”/세자 책봉에 관한 청 황제의 ‘칙서’와 ‘고명’ 내용/급격히 줄어든 강화부의 군량/과거제의 폐단/“얻은 것은 항아리 하나의 저축”/“반드시 망하게 될 뿐입니다”/왕이 불태우게 한 흉서/“속국 중에서 가장 공순하다”/왕세손 책봉의 칙서와 조서/궁중의 사치와 탐관오리/순조가 지적한 과거제의 문제점/7세의 헌종 즉위와 수렴청정/헌종 책봉의 칙유/프랑스 신부 처형/아편전쟁 정보를 입수한 조선/1848년의 과거제 실상/18세의 철종 즉위와 수렴첨정

1800년 ~ 1849년 일본의 역사
막부, 쇼군, 번, 번주/‘산킨고타이’/조정과 막부의 관계/서양 지식에 개방적이었던 막부/인구조사/인체 해부도 ‘해체신서’/국방강화와 해외진출/오사카와 에도 농민들의 생활/종합세계지리서와 대백과전서/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청국의 외국 정보 수준/‘대일본연해여지전도’/《신론》/쇄국책/지볼트 사건/해외팽창론/아편무역이 중요한 영국과 인도/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모리슨호 사건/데키주쿠/아편전쟁/고도칸/백과사전 《후생신편》/포술교육, 반사로, 내화벽돌/덴포개혁/신수급여령/난징조약/‘해방팔책’/네덜란드 국왕의 개국 권고/대형 선박 건조허가 요청/미국 함대의 에도 출현/석탄 중간 공급지/혁명의 해 1848년/조선의 연호 사용

1850년 조선
암행어사도 눈물을 흘렸다/“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백성/
왕릉과 묘지 수리비

1850년 일본
대총제조방/함풍제 즉위와 태평천국의 난/빛의 속도 측정

1851년 조선
인구의 3%가 죄수/“고리대금업자가 이자놀이” 하는 것 같은 세금징수/조운선 고의 침몰/이명섭 모반사건

1851년 일본
사쿠마 쇼잔/일본 최초의 신문/해저 케이블, 지구자전 증명, 세계 박람회

1852년 조선
우의정과 좌의정의 호소/“당장 무슨 변이 일어날 듯” 불안해하는 좌의정

1852년 일본
슈세이칸/요시다 도요/미국함대의 방문 계획을 통보받은 막부/러시아의 사절단 파견/나폴레옹 3세 즉위/《해국도지》

1853년 조선
“궁핍한 백성을 보는 것은 어찌 그리도 야박하단 말입니까”/“모두가 죽음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는 영의정/경상북도에서 발견된 흉서

1853년 일본
에도 앞바다에 출현한 ‘구로후네’/미국 대통령의 국서/총의 도면을 그리게 한 번주/번주들의 의견을 물어 개항을 결정한 막부/인재육성과 해군건설론/이사가와지마 조선소/대형 선박 건조 허용/러시아 사절단의 방문/요시다 쇼인의 밀항 실패/대외교섭 사료집 완성

1854년 조선
영의정의 호소/고향을 떠나는 백성들/“백성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병조가 한심한 병조판서/싸움판이 된 과거장/러시아 제독의 조선 방문 보고

1854년 일본
일미화친조약/페인트, 증기기관차, 전신/밀항에 또 실패한 요시다 쇼인/일영화친조약/함선 제조 기술 습득 노력/러시아와 국경선 확정/네덜란드 국왕의 해군교육 제의/네덜란드 장교의 일본해군 창설 건의/후쿠자와 유키치와 사카모토 료마

1855년 조선
신하를 만나지 않는 왕/돈이 없는 병조와 경기도/호조의 재정난/옛날과 싸우는 유생들

1855년 일본
해군교육 시작/‘양학소’

1856년 조선
탐관오리의 처벌을 호소하는 대신들/호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상소/능을 옮기는 비용/가구당 2냥 이하의 구휼금/조선 점령을 건의한 프랑스 제독

1856년 일본
33세에 곱셈, 나눗셈을 배웠다/지중해 진출이 좌절된 러시아/애로우호 사건/미국총영사 부임/‘쇼카손주쿠’/네안데르탈인 화석

1857년 조선
“미치광이” 좌의정의 절규/궁전 수리비 등/칙사 대접에 군량미까지 동원

1857년 일본
아무르 지역을 탐내는 러시아/일미화친조약 개정/통상조약 체결 의사를 표명한 막부/제2차 네덜란드 군사교관단

1858년 조선
여전히 곤궁한 병조와 호조/재산을 뺏기는 부자들/궁전 수리비와 구휼비

1858년 일본
안세이 5개국 조약/안세이 대옥/암살 시도, 에도 유학, 영어 공부/일미수호통상조약/톈진조약/아이훈 조약

1859년 조선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철종/“극한 지경”에 이른 진주/침묵하는 언관과 신하를 만나지 않는 임금/조선인 범죄자는 조선에서, 일본인 범죄자는 쓰시마에서 처벌/상소하면서 돈을 뜯는 유생들/군량미까지 동원한 궁전과 왕릉 수리

1859년 일본
네덜란드 해군교육 완료/초대 주일 영국공사 부임/톈진조약 무효를 선언한 청/《종의 기원》

1860년 조선
“매질하고 긁어내어 흩어지고 쓰러지는” 백성들/군기고에 화약이 없었다/전국 관청의 돈을 동원하여 궁전 수리/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 통보/‘열하문안사’ 파견 결정

1860년 일본
미국방문 사절단의 충격/사절단의 기록과 건의/‘사쿠라다문 밖의 변’/함풍제의 피신과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만엔킨’

1861년 조선
“피맺힌 간절한 마음을 토로”한 좌의정/왕의 문란한 생활을 직언하는 영의정/“흉년이든 풍년이든 불쌍한 사람은 백성”/병조의 1천 냥도 궁전 수리비에/“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다”/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선 확정

1861년 일본
해군의 해외 유학 건의/러시아군의 쓰시마 점령/‘항해원략책’과 존황양이파/‘도사근왕당’/외국군의 요코하마 주둔/‘총리아문’/동치제 즉위와 서태후/남북전쟁, 농노해방

1862년 조선
진주민란/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민란/“눈물을 닦아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그토록 맹목적인 헌신과 존경, 복종을 배우지 않았더라면”/창고가 빈 호조와 병조

1862년 일본
분큐사절단과 런던각서/분큐사절단의 문명 탐방/네덜란드에 최초의 유학생 파견/계속되는 암살. 습격. 방화 사건/비스마르크 수상

1863년 조선
경상도의 가장 작은 고을/사망 3개월 전 “다급해하는” 철종/좌의정의 사직상소에 나타난 실상/프랑스 선교사가 본 조선인의 정신 상태/고종 즉위와 수렴첨정/동학의 실상과 최제우의 체포/1863년의 회계부

1863년 일본
‘상락’과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조슈 파이브’의 영국유학/사츠에이 전쟁/8.18사변/사카모토 료마의 각오/이홍장의 편지

1864년 조선
1월부터 돈이 없는 호조/대왕대비가 본 조선/도고를 폐지하라/조운선 고의 침몰/나태한 무관과 잡과의 실상/27만 냥을 횡령한 관리/최제우 사형

1864년 일본
‘이케다야의 변’과 ’금문의 전투’/제1차 조슈정벌/사쿠마 쇼잔의 암살/시모노세키 전쟁과 히코시마/가이텐 궐기/27세 외교책임자의 헌책/‘막부는 유한하지만 일본은 무한하다’/《만국공법》

1865년 조선
대보단과 만동묘/“생산이 모조리 텅텅” 비었다/경복궁 중건 결정/원납전 515만 냥/장부에는 16만여 석, 실제는 1만여 석/강화부의 군사 대비 태세
1865년 일본
시바타사절단과 조선소 건설 계약/주일 영국공사의 포함외교/사츠마번의 유학생 파견/‘만국공법’ 학습 열풍/청국 세관 총세무사의 상주문

1866년 조선
수렴첨정 철렴/병인박해/병인양요/왕비 책봉 의식/제너럴셔먼호 사건/“상국(上國)”의 공문이 있어야 교역을 할 수 있다/전선(戰船) 수리 비용/강화도 백성들에 1만 냥/원납전 액수와 수령직, 초사직/전선수리비와 강화도 구휼금의 규모

1866년 일본
《서양사정》/삿쵸동맹/요코스카 제철소 건설 시작/개세약서/민중들의 봉기/제2차 조슈정벌/막부 내부의 ‘대정봉환(大政奉還)’ 의견/“이 한 목숨 이슬같이 사라진다 한들 무슨 한이 남으랴”/붕괴되기 한 해 전에도 유학생을 보낸 막부/빈춘사절단/보오전쟁과 북독일 연방 탄생

1867년 조선
슈펠트 제독의 방문/야도 마사요시의 정한론/문을 무보다 더 중요시하는 왕과 대신들/원납전과 무기 수리비/구휼금 1만 4천 냥/당백전 주조 중단과 호전의 폐해

1867년 일본
파리로 간 시부사와 에이이치/프랑스 장교의 부국강병 건의/조선과 프랑스, 미국 간의 화해를 추진한 막부/삿도맹약/대정봉환/‘왕정복고의 대호령’/미국, 알래스카 매입

1868년 조선
미국 군함 쉐난도호의 방문/포격을 받은 쉐난도호/5개월간 원납전과 인건비 비교/사형 집행의 사례들/국경선에 대한 고종의 지식/일본 외교문서 접수 거부

1868년 일본
도바-후시미 전투/열강의 신정부 승인/조약 체결권자는 천황/조선의 ‘인신무외교’/쇼군의 항복/‘정체서’와 태정관 제도/에도 무혈 입성/‘5개조어서문’/막부 지지세력의 저항/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저항/청의 벌링게임 사절단/조선, 청, 일본의 인재육성

1869년 조선
“나라가 나라로 유지되지 못한다”/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백성/처참한 주거환경/함경도 백성들의 러시아로의 집단탈주/종친의 과거 특채와 난장판이 된 과거장/경상도와 전라도의 민란/외교문서 접수 거부 이유/정현덕과 안동준

1869년 일본
판적봉환/전신 부설과 전신망/‘쇼콘사’와 ‘야스쿠니 신사’/국력배양 우선론/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와 ‘엔’/관제 개혁, 징병제/대륙간 철도, 수에즈운하, 주기율표

1870년 조선
왕릉과 종묘 수리비와 조총 제작비/“서양오랑캐”들도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 다 감화될 것”/월급도 못 주는 경상감영/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러시아로 넘어간 백성들, 잘 살고 있었다/서계를 수정한 일본 외무성/조선과의 조약 체결 의사를 표명한 미국

1870년 일본
공부성, 공부대학교/가쓰라 다로/대(對)조선 강경론/청국과의 수교 결정/미국의 재정 · 통화정책 조사/농민봉기/보불전쟁

1871년 조선
신미양요/로우 공사의 철수 결정/척화비 설치와 우의정의 ‘정신승리’/서원 철폐와 유생들의 저항/영해민란/군기조성소에 10만 냥/‘외무성’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조선

1871년 일본
해외유학생 규칙과 우편제도/조폐공장, ‘신화조례’, 금본위제, ‘엔’/폐번치현/‘일청수호조규’와 조선의 지위/류큐인 피살 사건/이와쿠라 사절단의 출발/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탄생한 독일제국/‘파리 코뮌’

1872년 조선
외무성 관리 접촉을 거부하는 조선/계속되는 일본 외무성의 회견 요청/‘관왜난출’/외무성 관리들의 조선 철수/외무성의 왜관 접수와 ‘대일본공관’/경복궁 중건 비용 783만 냥/9개 고을 수재민에 3천 냥

1872년 일본
기상관측 시작/프랑스 군사고문단, 도미오카 제사장/백성들 간에 도는 소문/‘학제’/일본 최초의 철도/‘국립은행’ 조례/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국 방문/일본의 반성을 촉구/정치제도, 운하와 물류비, 마찰과 도로/영국 방문 기록/일본의 낙후 원인/이홍장의 중국 사대부 비판

1873년 조선
궁전공사에 반대하는 상소/사신들의 허위 보고/일본을 모멸한 동래부사/최익현의 대원군 비판 상소/“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 온 조선

1873년 일본
징병령/농민폭동/잿더미가 된 황궁/심각한 재정적자/청국 대신의 답변 내용과 양계초/목례로 청 황제를 알현한 외무경/조선에 군대파견과 특사파견의 대립/사이고 다카모리의 낙향/비스마르크의 충고

1874년 조선
역관 오경석과 영국 서기관의 대화/중국어를 모르는 사신들/백만 냥이 드는 전각 세 채 건설/“시를 지어서 적을 물리치겠습니까?”/군인명부는 빈 장부/수재민 구휼금 규모/세금이 아니라 약탈이었다/아내를 팔고 아들을 팔게 만드는 환곡제도/우의정의 일본에 관한 인식과 정보 수준/고종과 암행어사의 대화/일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일본에 서계 수정을 요청

1874년 일본
일본군의 대만 출병/대만 출병에 대한 일본 측 논거/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한 청/‘민선의원설립 건백서’/‘사가의 난’/육군사관학교, 의사시험제도 등/서계를 수정한 외무성/광서제 즉위, 몰트케의 연설, 캐번디시 연구소

1875년 조선
연호를 ‘광서’로 사용/“작은 나라”의 감격/청국 황제에게 곡하고 “만세”를 외치는 고종/서양대례복과 행사장 정문 출입을 거부/서계 접수 거부 결정/일본공관원의 귀국/운요호 사건/일본 전권대신의 부산도착/강화도 복구비 75%는 현지 조달/세입의 3배를 지출하는 호조/방납과 도고의 문제점/“모든 법도가” 무너졌다는 고종

1875년 일본
대조선 정책/‘입헌체제 수립에 관한 조칙’/사할린과 쿠릴열도/거문도 점령을 건의한 주일 영국공사/조선에 특사 파견 결정/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건백서들/폐도령/이홍장의 중국 유학자 비판

1876년 조선
강화도조약 체결에 대한 청의 충고/세 차례의 회담/‘서술책자’에 나타난 조선의 입장/강화도조약/서계 접수거부에 대한 조선의 해명/일본의 무기류 기증/고종과 신헌의 대화/조약 책자 전국에 배포/최익현의 강화도조약 반대 상소/고종도 개탄한 무기상태/수신사 김기수 임명/김기수의 귀국 보고/〈무역규칙〉 조인 및 수출입세 면세/“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가뭄, 경복궁 화재

1876년 일본
조선의 ‘속방’ 논쟁/김기수의 방문 일정/외무성이 준비했던 일정/김기수의 조선 내 위치/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마음껏 시찰하라는 일본과 곧 돌아가야 한다는 김기수/김기수의 고뇌/이노우에의 충고/김기수의 방문 소감/수신사의 귀국/회계학 연구서, 서양식 부기법/오가사와라제도 편입/헌법기초제정 칙어 발표/‘질록처분’과 사무라이들의 불만/사무라이들의 반란/일본, 청, 조선의 철도/민간기업 독려/과학사/타자기, 탄산음료

1877년 조선
궁궐의 절제를 호소하는 영의정/1876년의 회계부/거지에게 5전씩/서울 관아에 곡식이 바닥났다/계속되는 조운선 침몰/급여를 못 받은 훈련도감 병사들/일본의 개화 지원 의사

1877년 일본
세이난전쟁/박람회, 전화, 콜레라/공부대학교, 동경대학 등/이홍장과 곽숭도의 사대부 비판/러터전쟁과 일본의 정보력

1878년 조선
서원 복설을 요구하는 유생 1만 명/“머리끝부터 다 병들었다”/리델 신부 석방을 명령한 청 황제/“상국 지휘”/리델 신부가 본 조선 감옥/군의 실상과 치안 상태/암행어사가 보고한 삼남 지방/일본 수입품에 대한 과세 시도/이동인

1878년 일본
농민반란/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일본공사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다케바시 사건과 ‘군인훈계’/《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러시아의 지중해 진출 좌절/곽숭도의 한탄

1879년 조선
“단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부자와 부부가 하염없이 서로 바라볼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백성들/사신과 고종의 ‘정신승리’ 대화/일본군함 시찰을 거부한 훈련대장/“차라리 외교란 말을 하지 말고 앉아서 제 나라나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고종이 본 위급한 조선

1879년 일본
콜레라로 10만여 명 사망/홍콩과 일본 신문 내용/청에서 나온 조선의 개국 문제/전 미국 대통령의 청과 일본 방문

1880년 조선
미국의 조선과의 조약 체결 시도/수신사 김홍집의 출발/무기제조술을 배우려는 “작은 나라”/김홍집의 복명/고종과 영의정의 《조선책략》 대화/《조선책략》 비판 상소/함경도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열 집에 아홉 집은 빈 북방/“상하가 빈곤에” 허덕였다/일본공사의 부임과 무기류 기증

1880년 일본
미야코제도와 야에야마제도/‘흥아회’/김홍집의 일본 도착과 외무경의 조언/《조선책략》의 내용/재정악화와 마쓰가타 마사요시/참모본부장의 군사력 증강 강조/이홍장의 슈펠트 초청

1881년 조선
유생 1만 명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김홍집의 사직상소/황재현과 홍시중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홍재학, 신섭 등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청국 칙사에 은 7천 냥/별기군/수구파비판 상소/조사시찰단의 귀국 보고/“가난을 편안히 여기게 만드는” 안빈낙도/이재선 사건/김윤식의 상소/세자 결혼식비용은 12만 냥/“나라 일은 날로 잘못되고”/대궐 내의 문제점과 기강. 치안

1881년 일본
국회 개원 조칙 발표/가네코 겐타로와 우에키 에모리/조선의 방문단/‘마쓰가타 디플레이션’/미국과의 협상을 피한 조선/이리 지방을 획득한 청/알렉산더 3세

1882년 조선
조미수호조약 체결/조미수호조약의 내용/‘속방조회문’/속방조회문을 무시한 미국/임오군란/어윤중과 김윤식의 대원군 제거 건의/대원군 납치/“대국과 너희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청국군, 왕십리와 이태원 습격/제물포조약/묄렌도르프, 마건상/30세 고종의 결의/척양비 제거/27세 지석영의 상소/“마음으로는 옳게 여기면서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조중상민 수륙무역장정〉/고종의 하유

1882년 일본
이토, 헌법연구를 위해 유럽 방문/“귀국 일은 언제나 토할 듯 토하지 않을 듯하니, 이러고서 일이 될 것인가”/‘속방’ 조항을 둘러싼 이홍장과 슈펠트의 대립/불공정조약 개정 회담과 주일 영국공사/일본의 조선 파병 결정/청국의 조정 제의를 거부한 일본/미국, 조선이 독립국임을 일본에 통보/군비확장 논의/청 내부의 대일 주전론/임오군란 사죄사 파견/무라타 총과 탄약 5만 발 기증/37세의 ‘일본은행’ 초대 총재/군비확장 계획과 증세/박영효를 만난 주일 영국공사

1883년 조선
무너지는 공권력/배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조선 사신/보빙사 파견/‘조일통상장정’과 관세권 회복/청국인이 남대문에 내건 ‘방문’/‘조영수호조약’/“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므로 본토와 같이 본다”/한성순보, 전환국, 혜상공국, 해관

1883년 일본
4년 전 유학생과의 약속을 지켜 세운 회사/22세의 기술자가 입안한 비와호 건설/주청 영국공사 파크스/‘조일통상장정’에 대한 유럽 공사들의 불만/보빙사의 미국 시찰과 귀국/배에서 유교 서적만 읽은 민영익/영국, 조선에 총영사 파견 결정/‘만국공법’ 번역가가 본 청과 일본의 차이점

1884년 조선
‘한성순보’ 사건/세계표준시 확정 국제회의/청국군 1,500명 철수/민영익의 귀국 보고/“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좌절된 고종의 의복간소화 시도/거의 공석이 된 주진독리/변리공사로 강등된 미국공사/2천 년 전 중국 사람에 대한 시험을 치는 조선/호조판서와 영국 총영사/갑신정변/청국군과 일본군의 교전/부친들의 자결/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졌던 김옥균/한성조약/고종의 결의/유학을 떠난 윤치호

1884년 일본
1년간 유럽시찰에 나선 육군경/헌법제정을 위한 조직 구축/화족령/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청불전쟁/세계표준시 확정/주청 영국공사와 갑신정변 해결 방향/주청 영국공사, 거문도 점령을 건의/청국의 갑신정변 해결 방침/일본의 갑신정변 해결 방침/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주청 영국공사/조러조약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일본 해군 식단에 고기, 빵, 우유 등장

1885년 조선
거문도 점령/이홍장과 일본 공사의 서한/조선의 영국 비난/청국과 일본 군대의 철수/민란과 활빈당의 준동/월급이 없는 지방 하급관리/“세상에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는 없습니다”/당오전 문제와 조운선 고의 침몰/“군량이 없는 몇 길이나 되는 빈 성을 지키며”/대원군 귀국 저지와 이홍장/제1차 조러밀약설과 원세개 파견/대원군이 귀국하던 날에 사형집행/대조선 강경책으로 전환한 이홍장/원세개와 메릴, 조선 해관

1885년 일본
NYK, 무라타 총, 하와이 이민/반청 감정과 ‘오사카 사건’/예조참판의 일본 방문/‘탈아론’/펜제 점령과 거문도 점령/주청 영국공사의 청국 설득/톈진조약/제1차 조러밀약설과 일본 외무성/청불전쟁의 종식과 손문의 결의/내각제도 실시/서아프리카 회의

참고 사항
조선과 일본의 연혁/1800년 ~ 1891년 조선의 남녀별 인구 및 가구 수, 가구당 인구/1800-1905 회계부 내역 중 주요 항목/ 원납전 내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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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이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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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2>,<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 … 총 4종 (모두보기)
- 1962년 부산 수정동 출생 - 부산금성고등학교 졸업 -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및 동대학원 중남미지역연구학과 졸업(석사) - (주)대우 무역부문 근무 - 페더럴-모굴 코리아 근무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인 모두에게 근현대사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근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현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과연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이 일본에 팔아먹어 조선이 망했는가 하는 의문을 30년 넘게 갖고 오다가 지난 7년 동안 자료를 찾아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기본 방향은 오직 사실(facts)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사실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이 직접 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사의 경우 1850년부터 1905년까지의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1차 사료(primary sources)를 기반으로 하여 사실에 가깝게 보도록 노력했다. 그동안 나온 조선근대사 책 중에서 이렇게 1차 사료를 집중적으로 본 책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외의 자료는 1차 사료가 아닌 2, 3차 자료를 참고하였는데, 다행히 여러 저자들의 책들이 있어서 팩트(facts)를 서로 확인(cross-check) 할 수 있었다. 외국어를 알더라도 외국의 다양한 1차 사료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 외국의 자료는 결국 2, 3차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시기의 연구 내용이 충분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근대사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청,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있던 열강의 움직임을 시간순으로(chronologically) 같이 본 것이다. 그동안 조선 근대사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나무를 제대로 보기도 어렵지만, 숲을 보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조선근대사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은 영원히 미로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고, 이는 우리가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책을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책을 직접 내게 되었다. 이 책을 보고 누군가가 더 좋은 책을 낸다면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조선근대사를 이렇게 조망한 책은 없다는 것이고, 이런 책이 한 권쯤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평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등의 책을 읽다가 당시 조선은 어땠는지 해당 부분의 조선근대사 책이나 논문을 보면,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보다는 실망을 한 경험이 많다. 조선근대사의 책이나 논문들은 거의 모두 오로지 조선의 내용만 다루고 있고, 그 당시 국제 정세나 당시 조선의 대신들이나 리더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백성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었다. 이처럼 이들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경제사 등의 책의 내용과 깊이에 비해 조선근대사 책이 오히려 입체적이지 못하고, 서로 중복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거나 특정 사항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그래서 조선근대사 책에서 말하는 조선근대사의 모습은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등에서 언급하는 조선근대사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 조선근대사 책에서 말하는 조선근대사의 내용이 훨씬 깊이 있고 체계적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엉성하고 조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론에서는 아주 거창하게 언급할 것처럼 하지만 본론이나 결론을 보면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거나 기존의 것과 차이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왜 그런가 하는 의문 내지 의심을 매우 오랫동안 해왔다.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인가, 왜 이렇게 연구의 깊이나 폭이 오히려 30-40년 전의 연구 논문보다 깊고 예리하지 못한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참고한 자료 중에는 1962년에 발간된 책도 있고, 1959년에 나온 논문도 있다.

조선근대사의 책이나 논문의 공통점은 1차 사료를 충분히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에도 그 내용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지 않고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일성록(日省錄)’을 자신이 번역하여 굳이 인용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게 하면 독자들이 그 내용을 저자가 제대로 번역한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56년 치와 승정원일기 56년 치, 비변사등록 38년 치 등 총 150년 치의 1차 사료를 출력해서 읽고 컴퓨터에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책과 학술논문, 석박사 학위 논문 등을 찾아서 읽고 정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에 입력한 원고의 분량은 A4용지로 약 4,300페이지에 달한다. 두 번의 축약 과정을 거쳐 이것을 A4 용지 500여 페이지로 줄여서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고, 사진도 지도도 싣지 못했다. 그랬다면 책이 아마 세 권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세 권 보다는 두 권이 독자들에게는 경제적이라 판단하여, 매우 무미건조하지만 두 권의 책이 되었다.

1차 사료 분석에서 특히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숫자이다. 각종 비용과 인구, 회계부 자료 등이 있는데, 그 중 비용 지출에 관한 내용은 당시 조선의 재정 규모, 정책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 판단하여 중시했다. 주요 경비 지출 내역은 왕실 행사 비용, 왕릉 이전 및 보수 비용, 장례식 비용, 궁전 건설 및 보수 비용, 군비 지출액, 홍수 · 가뭄 때 내려준 구휼금, 전염병 퇴치를 위해 내려준 금액, 청나라 칙사 대접 비용, 각 부처의 예산 규모, 금 · 은 · 돈 · 쌀 등 주요 자산의 전년도 이월 규모 등의 내역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수치 자료 분석은 조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책은 결코 하룻밤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하고, 그렇게 이 책을 본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분명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이 시기의 역사를 잘 모르면서 가르치려 들지 못할 것이고, 영화나 역사물, 소설 등을 보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스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국제법, 경제학, 헌법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와 책을 참고한 이유 또한 한 줄을 쓰더라도 추측으로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석을 달 때는 석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항상 생각하면서 그들의 귀중한 시간과 돈을 뺏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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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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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일치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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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시간순서대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역사흐름을 잘 파악할수 있는점이라 역사책으로 손색이 없네요. 필독서로 꼭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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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곰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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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분의 전문성이 부족합니다. 일반대학원 사학과로 가시면 팩트로 조져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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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stone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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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망할수밖에없었다




fact

'~카더라'에 지쳐있는 요즘이어서 그런가

팩트(fact)라는 단어가 주는 이 책의 매력이 있다.

물론 책에서 근거로 삼는 그 근거가 또 역시 그 시대의 '~카더라'~였을 수 있지만 작가의 의지를 엿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최소일 듯하다.




동시대 우리와 남을 함께 들여다본다.

우리만 보고 자책하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보며 욕하고 탓하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가 현재를 살며 과거를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그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몇 명에 가해지는 린치 말고도 참으로 그 당시 우리는 상대적으로 늦었고 둔했고 다른 것에 집중했구나.

서구와의 협약, 개방과 함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도 늦었구나.라는 아쉬움보다 어찌 그렇게 백성들을 힘들게 그냥 두었을까?

개방과 개혁이 싫었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끌고 왔던 그 올곧은 가치관과 사상으로 왜 백성들을 다독이고 돌보지 못했던 걸까?

성씨를 바꾸며 세상을 바꾼 새로운 사상이 그 힘을 다했거나 변화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틀렸다!라고 하기 싫더라도 '무엇이 중한지!' 변치 않아야 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왜 해내지 못했을까?

결국 끝내 새롭게 하지 못하고 망해버렸고, 다시 지금처럼 일어나는데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자들은 무슨 도움이 되었나?

힘든 것도 백성이고 망하는 것도 백성이고 다시 일으키는 것도 백성인데 그 백성은 '국민'이란 이름으로 바뀌기만 하고 혹시 여전한 건 아닌가 싶다.




과거에 매여 무덤을 고치고, 궁전을 보수하고, 맹목적인 타국에 대한 복종과 사랑으로 제사로 돈을 허비하며 겨우 그 타국 사람들에게 예의 바른 신하의 복종이란 칭찬을 듣는 것에 집중했던 그때가 왜 요즘.... 과거 탓, 타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 새로운 환경, 에너지 전략 등 새로운 가치로 나아가지 못하는 지금의 시대가 겹쳐지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과거의 백성, 지금의 국민을 보살피기 위해 머무르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뉴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그들이

자꾸 제일 높은 곳에 있으려 말고

우리의 맨 앞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이행기 #조선은망할수밖에없었다 #메이킹북스 #서평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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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누나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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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제목이 날 궁금하게 만들었다.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는 조선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 1850년부터 1905년까지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사료의 소개가 되어 있는 책인데, 스토리 식이 아니라 사건식으로 나열되어 있는 책이다.

사실 책 들어가는 말 보면 저자가 직접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재미로 보는 책이 아니다. 역사서가 재미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조선의 망함은 을사조약으로 인해 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을사조약이 조선의 망함의 시작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 문제가 무엇인지 사료들을 찾아보고 그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쓴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사신들이 중국과 일본을 가는데

사신들이 중국 말을 할 줄 모르고, 일본 말도 할 줄 모르는 사신들이 사신으로 갔다는 것이다. 예전 tv프로그램에서도 한번 다룬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책에서도 이렇게 언급되어 있어서 조선의 사신으로 가는데 그 나라의 문화나 언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가는 것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 당시의

조선 사신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역관배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책 내용이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서 그런지 책 내용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이야기들만 나열되어 있다. 이런 원인이 있었기에 조선은 안될 수밖에 없었구나를 생각하며 읽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 시대에 깨여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면 조선은 바뀌어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지금의 우리도 조금 더 정치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우리나라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나도 정치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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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2 
이행기 (지은이) 메이킹북스 2022-09-24
정가
18,000원



12,600원



8
100자평 0편
리뷰 2편
세일즈포인트 221
420쪽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총 2권)
신간알리미


책소개
조선근대사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청,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있던 열강의 움직임을 시간순으로 같이 보는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2권. 1권(1850년-1885년)에 이어 2권은 1886년-1905년의 20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 주변은 매우 복잡해지는데, 조선의 유생과 지배층은 유교 외 다른 모든 학문의 유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각종 개혁 정책에도 반대하는데, 지석영은 상소로 인해 4년간 유배를 가고,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아관파천 당일에 고종의 명령으로 종로 거리에서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고, 탁지부대신 어윤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도 잔인하게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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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권을 시작하며

1886년 조선
군사 1명 양성에 연간 최소 200냥과 쌀 10석이 필요 | 제2차 조러밀약과 고종 폐위주장 | “권력자들의 명령을 장님처럼” 따르는 조선 백성 | ‘조선대국론’, ‘유언사조’ ‘시사지무십관’ | 고종이 본 위태로운 조선 | 고종의 용기와 과단성 부족을 지적한 좌의정| 월급을 못 받는 관리들 | “어찌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 러시아 상인이 본 금광 노동자들의 삶 | 김규식, 배재학당, 육영공원, 콜레라

1886년 일본
콜레라 사망자 11만여 명 | 건축학회, 학교령, 교과서 검정제도, 관료임용제도 | 불공정조약 개정 회의 | 김옥균의 상소문 | 이홍장의 거문도 철수 협상 | 화물선 침몰 사고와 영사재판권 문제 | 헌법 초안 기초 작업

1887년 조선
“오늘날의 도적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합니다” |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지석영의 유배 | 조선의 독립에 비관적인 러시아·미국공사 |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부족하여 무덤까지 파고 있다” | 외교고문 데니의 활약 | 해외 공사 파견에 간섭하는 청 | 주미공사 파견과 청국에 항의한 미국 | 박정양의 신임장 단독 제정과 러시아 외무상의 보고 | 박정양의 귀국과 황현의 기록 | 외국 공사들의 반응 | 연무공원

1887년 일본
건전지, 수력발전소 | 일본적십자사 | ‘방어선’ 확장 | 조약 개정 반대 여론 | 시베리아 철도 건설 논의 | 헌법 교육을 받은 천황 | 보안조례 | 호예원 | 전자기파

1888년 조선
박영효의 ‘건백서’ | 궁전 공사비 50만 냥 |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오른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병조판서 | 러시아와 프랑스 정부의 대(對)조선 지침 | 외국인에 대한 소문 | 대궐 내에서 노름하는 군사 | “벙어리에 귀머거리, 소경까지 겸했으니” | “모리배들”에게 놀아난 화폐주조 | 조선이 청에 흡수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공사 | “마른 수레바퀴 자국 안에서 헐떡거리는 붕어보다” 심각한 백성 | 관직매매와 ‘벼락감투’ | “상인들은 낮으로 울부짖고 행인들은 밤으로 통곡하는데” | 무정부 상태 | 데니의 외로운 투쟁

1888년 일본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 ‘제국헌법’안 심의와 추밀원 | 전국이 초토가 되더라도 저항할 것 | 불공정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영국 | 물리학 용어의 번역 통일 | 롤 필름과 코닥 카메라 | 서태후, 해군 예산을 황실 별장 공사에 전용 | 데니, 《청한론》 발간

1889년 조선
제대로 안 되는 현지 보고 | 진주의 환곡, 징세 문제와 광양의 “반란” | 행동을 하지 않는 고종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출근을 거부하는 영의정 | “당장 부끄러움으로 죽고만” 싶은 호조판서 | 토목공사, 기도비용, 사치를 억제하라는 상소 | 평안감사의 사직상소 | 아직까지 세계 지도도 안 본 고종과 신하들 | “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놓인 조선 | 러시아 장교와 영국총영사가 본 조선 | 방곡령

1889년 일본
메이지헌법 발포와 선거법 | 오스트리아 교수가 강조한 조선의 중요성 | 서구의 메이지 헌법 평가 |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외무대신 | 징병제 개정, 육군사관학교 1기생, 히비야 공원 | 에펠탑과 엘리베이터

1890년 조선
“모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습니다” | 조선의 차관 도입을 막은 청 | 대왕대비 장례비 122만 냥 | “털끝까지도 모두 병이 든 것과 같다” |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백성들 | 속방의식을 본 외교사절 | 프랑스공사와 영국총영사의 보고 | 미국공사의 보고 | 러시아공사의 보고 | 원세개의 《사한기략》 | 끝없는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 | “거북의 등에서 털을 깎아내야 할 정도”의 재정 상태

1890년 일본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공포 | 조약 개정 방침 | 첫 중의원 선거, ‘교육칙어’, ‘불경사건’ | 주권선과 이익선 | 비스마르크의 퇴진

1891년 조선
돈이 없는 군부 |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마시고” | “과연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보십니까” | “과거를 설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 73년 전과 다름없는 과거의 문제점 | 천둥의 마지막 기록 | 조선의 관리를 “강도들”이라 부른 영국 인류학자 | 전 영국군 장교와 미국공사가 본 조선

1891년 일본
오쓰 사건 | 죄형법정주의와 사법부 독립 문제 | 시베리아 철도 착공 | 북양해군의 일본 방문 | 행정부와 의회의 충돌 | 삼국동맹, 독러 재보장조약, 러불동맹, 삼국협상

1892년 조선
“나라의 군대 위용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조정 백관들은 고식적인 의논을 능사로 삼고 지방관들은 탐학만을 일삼고” |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니” | “조석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몹시도 두렵습니다” | 좌의정이 지적한 당시 조선의 문제점들 | 11년 후의 러시아 민속학자 | 미국공사의 정확한 예측 | 청으로부터 20만 냥 차관 도입 | 함경북도와 평안도의 민란 | 동학교도의 삼례역 집결

1892년 일본
의회 해산과 총선거 |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 제국대학 교수 해임 사건 | GE, 디젤 엔진

1893년 조선
광화문 앞 ‘봉장규혼’ | ‘봉장규혼’ 비판 상소와 체포 명령 | 외국 군함들의 인천 입항 | ‘척왜양창의’ | 청국군 파견 요청을 제기한 고종 | 탐관오리와 조선왕조 | 동학교도들의 귀향 |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보아도 결국은 전혀 대책이 없고” | 무당과 점쟁이에 심취한 왕과 왕비 | 만석보 수세와 전봉준, 함경도 | 평안도와 황해도 민란

1893년 일본
정부와 의회의 타협 | 조선에 대한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육군참모차장의 조선과 청국 시찰 | ‘전시대본영’ 조례 | 군비의견서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메이지 천황의 후회 | 기타무라 도코쿠 |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

1894년 조선
고부군아 습격과 해산 | 고부민란에 관한 기록 | 주청 러시아공사의 보고 | “그의 사지를 찢고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 러시아공사가 본 동학난의 원인 | 파병 준비를 건의한 일본 임시대리공사 | 청국군과 일본군의 상륙 | 전봉준의 원정서 내용과 고종의 책임 | 전주성 탈환 및 동학도들의 귀향 | 미국공사의 보고 내용 | 조선의 마지막 사신, 걸어서 북경까지 | 일본의 개혁 항목 제시와 조선의 거부 |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 | 청일전쟁 개전과 고승호 사건 | 190년 만에 폐지된 명나라 황제 제사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 그리고 방해 세력 |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 일본을 의심하는 마음” | 도량형과 〈신식화폐장정〉 | ‘교환의 매개’ 기능을 상실한 엽전 | 경장을 알리는 고종의 교서 | 〈조일 잠정합동조관〉, 〈조일동맹조약〉 | 박영효의 사죄의 글 |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 발각된 대원군의 밀서 | 동학도의 2차 봉기 |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 전봉준 | 갑오개혁 비판 상소 | 일본의 개혁안 20개조 | 강원도와 황해도에서의 전투 | 김개남의 체포 | 홍범 14조 | 두 명의 탐관오리가 120만 냥 횡령

1894년 일본
중의원 선거와 야당의 승리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대본영 설치 | 청과 일본의 파병 통지 | 내정 개혁 추진 방침을 청에 통보 | 청, 영국과 러시아에 공동철병 중재를 요청 | 조선 내정 개혁을 거부한 이홍장 | 조선 내정 개혁안 확정 | 미국·영국·일본공사들의 움직임 | 일본에 유감을 표명한 미국 | 공동철병에 대한 러시아와 영국의 조치 | 제2차 절교서 | 베베르와 이홍장의 회담 | 청 해군의 실상 |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청 | 조선의 운명을 예측한 주청 러시아 무관 | 청, 조선에 군대 증파 | 영일통상항해조약 | 외국의 자국 침략에 대한 일본의 의지 | 청국 내의 주전론과 일본의 출전 명령 | 청과 일본이 조선을 공동 점령할 것을 재촉하는 영국 | 청일전쟁 | 고승호 사건과 영국 여론 | 대조선 정책 결정 | 일본 의회의 방향 전환 |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확전론과 야마가타의 소환 | 독일, 러시아,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청 |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 | 니콜라이 2세 즉위 | ‘사한기략’과 ‘속국’

1895년 조선
재산을 뺏기는 동학도 | 청나라 연호 사용 폐지 | 지방관의 저항으로 좌절된 징세 제도 개혁 | 회계법 | 이준용 모반 사건 | 독립경축 행사에 불참한 미국공사 | 베베르에 대한 고종의 신임 | 갑오개혁의 파탄 | 갑오개혁에 대한 고종의 불만 | 갑오개혁과 왕의 권력 | 갑오개혁의 반대 세력 | 죽음을 예감한 총리대신 | 콜레라 발생과 인구 변동 | 을미사변 | 민영준에 대한 프랑스공사의 보고 | 스기무라 서기관의 기록 |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한 고종 | 양력, 소학교, 단발령, 연호, 의복제도 | 춘생문 사건 | 미국무장관의 훈령 | 영국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선

1895년 일본
전염병으로 5만 3천여 명 사망 | 센카쿠제도 편입 | 일본은행, 조선에 300만 원 차관 제공 | 정여창 제독의 자결 | 러시아 무관의 일본군에 대한 평가 | 미국이 파악한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움직임 | 러시아의 삼국간섭 방침 확정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과 청국 내 반대 세력 | 양계초, 엄복, 담사동의 비판 | 일본의 환호와 삼국간섭 | 러시아 함대의 중국 집결 | 일본, 요동반도 포기 결정 | 군사 1백여 명의 자결 | 1만 4천 명을 희생한 대만의 저항 | 일본, 조선에 대한 간섭 배제 결정 | “빗물로 머리를 감고 불어오는 바람으로 목욕을 하면서” | 향후 10년간 전함 건조 계획 | 미우라 고로 임명 | 청의 차관 도입과 러시아 | 요동반도 반환 각서 교환 | 미우라의 을미사변 보고서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에 감사를 표시한 조선 | 대조선 불간섭 정책 | 요동반도 반환조약 | 대폭 증가한 다음 해 예산안 | 러시아의 마산포 관심 | 과학사

1896년 조선
단발령 반대상소 |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 단발령으로 인한 사회 혼란상 |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사회 혼란상 | “차라리 머리털을 보존하다가 (조선이) 망하는 편이 낫다” | 아관파천과 대신들의 처참한 말로 | 고무라 공사의 보고 | 단발령 철회 | 경인철도 부설권과 독립신문 창간 | 고무라-베베르 협정 | 경의철도 부설권 | “초조함과 근심은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산업이 날로 쓸쓸해지고” | 압록강과 울릉도 삼림벌목권 양도 | 내각 폐지와 의정부 부활 | 외국인과 외국정부가 본 조선 |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조선 | 당시 조선 주변의 상황 | 조선군의 실상 | 예산의 98%가 관리의 월급과 비용 | 고종과 신하들에 대한 러시아 측의 보고

1896년 일본
일본과 러시아의 대화 채널 | 조선과 관련한 조약 체결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한반도 중립화를 제의한 영국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와 39도선 | 민영환의 러시아 방문 | 민영환 일행의 방문 기록 | ‘동청철도’와 남만주지선 | 러-청 비밀동맹 조약과 동청철도 협정 | 일본의 해군 확장 계획

1897년 대한제국
김홍집 등을 “역적”, “흉적”으로 본 고종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도리어 전보다 심하니” | 독립신문의 ‘조선병’ 치료 방법 | 고종의 환궁 | 미국무장관의 훈령 | 백성의 원망을 듣는 암행어사 | 외부대신은 56일, 군부대신은 64일 | 고종의 결의와 단발령 취소, ‘광무’ | 러시아 외무상의 훈령 |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는 상소들 | 고종, 황제에 오르다 | ‘황제’에 반대한 서로 다른 이유 | 여전한 왕실 행사비 지출 | “상호 시기하고 의심하는” 군부 | 4만 호의 인구에게 1년에 5만 원도 큰돈 | 백성을 수탈한 지방군

1897년 일본
5연발식 무라타 총, 교토제국대학, 영화 | 야하타 제철소 | 러시아의 대일 정책 | 러시아의 현상 유지책 | 경봉철도 | 독일의 교주만 점령 | 러시아의 대련, 여순 점령 | 일본 외무성의 반응 | 독일의 해군증강책

1898년 대한제국
“조선 백성들은 몇백 년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아” | “나라의 재정은 꾸릴 방도가 없고” | 러시아의 철수 | 러시아와 프랑스공사의 본국 보고 내용 | ‘주막의 나그네’ | 장례비와 기민의 구휼비 비교 | 황국협회 | 최시형의 사형 집행 | 배신자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유럽전권공사의 사직의 변 | “필요한 때에는 … 잡세”를 신설 또는 증설할 수 있다 | 조약 이행을 강조하는 외부대신 | “글이 매우 외람”된 상소 | 경부철도 부설권 | “협회라는 것”의 활동 금지 명령에 “분통이 치밀어” 오른 윤치호 | 헌의 6조 | 독립협회 “혁파”와 박정양 등 파면 | ‘익명서 조작 사건’과 독립협회 간부 체포 | 만민공동회의 철야 시위, 독립협회 간부 석방 | 보부상의 습격과 독립협회 복설 | 외국 공사들의 회의 | 고종의 약속 미준수 | 독립신문의 사설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해산과 집회 금지 |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급한 탁지부 | 러시아·일본·미국공사의 보고

1898년 일본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한 러시아 | 양자강 연안 불할양 협정 | 독일 및 러시아의 조차 조약과 남만주지선 철도 부설권 | 일본과의 연합을 주장한 미국 해군 전략가 | 영국 식민상의 일본과의 동맹의사 | 니시-로젠 협정 | 미국 언론의 선동과 미국-스페인 전쟁 | 러시아와 영국의 철도 건설 상호 인정 | ‘무술변법’ | ‘무술정변’과 ‘백일유신’, 광서제 유폐 그리고 조선 | 담사동 | 강유위, ‘동아동문회’ | 영국과 일본 | 경봉철도 건설 차관계약 | 한반도 점령을 건의한 러시아 해군 제독 |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1899년 대한제국
학부 예산은 세출 예산의 2.2% | 독립협회 지회 활동도 금지 | “구보나 하는 능력”의 군사들 | 주미공사 부임 거부의 변 | 프랑스공사가 보고한 관직매매 | 빈번한 법령 공포 | 무덤가 돌 장식 비용의 반도 안 되는 교육비 | 러시아 해군의 마산포 측량과 토지 매입 시도 | 대포 소리,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경성 | 원수부 설치 | 대한철도회사 | 이승만의 탈옥과 체포 | 대한국국제와 홍범 14조 | 세금 체납을 “탄식”하는 고종 | “백성들이 …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 매일신문, 독립신문 폐간

1899년 일본
소학교 학생 346만 명, 수족관 | 의화단의 등장 | 루즈벨트 주지사의 연설 | 이토의 부국강병론 |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협정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 마산포를 원한 러시아 해군 | 남만주철도 건설 시작 | 제2차 보어전쟁 | ‘대한정책의견서’와 마산포 | 프랑스의 광주만 조차

1900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616만 원 | 각종 비용 항목과 금액 | 예산의 10%가 넘는 왕실 비용 지출 내역 | 땅에 떨어진 대신의 권위 | 내장원에 진 빚을 갚으라고 탁지부를 독촉하는 고종 | 고종 폐위 쿠데타 주모자 처형 | 마산포 조차 조약 |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해나가는” 군부 | “협잡꾼들”을 보내 세금을 걷는 황실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절박”한 경기도 | “위란이 곧 닥칠 형세입니다” |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신하들 | 귀임한 주일공사 | 족보 위조 | 가로등 3개 점등과 파리의 지하철

1900년 일본
세계의 주요 지표 | 선거권자 자격, 공중전화, 아드레날린, ‘무사도’ | 러시아 해군대학의 전쟁 도상 훈련 | 의화단의 난, 8개국 연합군, 러시아의 만주 점령 | 제2차 문호개방 선언 | 러시아의 한반도 분할론 | ‘북청사변선후책’과 일본의 만한 교환 제의 | 일본과의 비밀조약 체결을 제의 | 대한제국의 중립국안 제의 |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희망한 루즈벨트 | ‘국민동맹회’의 정부 압박 | 러-청 비밀협정 가조인 | 대한제국 중립화를 제의한 러시아 | 영국, 일본, 미국의 공동의 적이 된 러시아 | 독일, 함대건설법 통과

1901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907만 원 | 세출 예산의 약 20%가 황실 비용 |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일공사 | 이재수의 난 | 세금의 몇 배를 거두어들이는 봉세관 | 50일 묵는 데 2만 3천여 원 지출 | ‘저주받은 인민들’ | 200년 전에 살고 있는 신하들 | 경부철도 기공식 | 법집행이 안 된다 | “세금을 받아 낼 길이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다 | 고종의 세금 독촉 | “집들은 텅 비고 누더기를 걸친 굶주린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 “가죽을 벗겨 내고 뼈를 긁어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 신하들의 경고 | 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 | 백성은 쉽게 사형 당했다 | 유길준의 고종 폐위 쿠데타 실패

1901년 일본
야하타 제철소 완공 | 람스도르프-양유 협의 | 가쓰라 다로와 고무라 | 영국과 일본의 교섭 시작 | 베이징 의정서 | 배상금 포기 | 외무대신의 적극적 정책 | 영국의 동맹조약 초안 | 러시아와의 협상 우선을 주장한 이토 | 초조한 영국 외무상 | 외부대신의 일본 방문 | 이토의 러시아 방문 | 일본의 수정안 제시 | 서태후의 ‘변법상유’ | 유에스스틸, 노벨상, 로이터와 특약

1902년 대한제국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 “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가져가는 세금 | “말류의 폐단”을 걱정하는 내장원 경 | 즉위 40주년 행사 | 제2의 수도 건설 결정 | “통탄”하는 탁지부대신 | “사람마다 열 손가락은 피가 흐르고 입은 푸성귀 색깔이니” | “별다른 대책”이 없고 “나라 창고는 비어” | 행사비와 건축비에 148만 원 | 왕실 경비와 서경 공사비가 예산의 최소 25% | 제2수도 공사비에는 은화 55만 원, 수만 명 죽은 전염병 퇴치에는 “특별히 은화 3,000원” | 관우 외에 유비와 장비에게도 제사지냈다 | 지방 유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 여전히 중화사상에 잠겨 있는 1902년 10월의 대한제국 | 1년은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본 미국공사 |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본 러시아공사들 | 굶어 죽은 백성들에 관한 기록 | 유길준과 이승만 | 군부의 실상 | 두어 달 근무한 유럽공사와 황족의 해외 유람 보고 | 권력 투쟁 | 하와이 이민

1902년 일본
무선 기술 연구, 해외 유학생 수 1만 1천여 명 | 나쓰메 소세키가 본 일본 | 청의 대규모 일본 유학생 파견 | 동사 사고 | 영일동맹 | 동맹 조약 제1조에 관한 주영 일본공사의 설명 | 일본의 지위 향상 | 프랑스, 독일, 미국의 입장 | 만주 철군 협약 | 드러난 영국의 문제점들 |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권유한 프랑스 대통령 | 대한제국의 양도를 주장한 주한 러시아공사 | 동청철도 파괴를 주장한 참모들

1903년 대한제국
“빼돌리는 것이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 “정승의 직책은 한갓 이름만 있고” |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화를 만들어 내니” | 최소 열두 번 사직을 청한 외부대신 | 황성신문의 우려가 현실로 | 주일공사는 공석 중 | “귀머거리에게 듣는 일을 시키고 벙어리에게 말하는 일을 시키는” |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 가는 경상도 백성들 | “밥 짓는 연기도 거의 나지” 않는 전라도 | “떠돌다가 점점 죽고 말” 경기도 백성들 | “백성의 근심은 죽음보다 심한” 충청도 | 제2수도 건설 공사비에 짓눌리는 평안남도 | “흩어져 떠돌고 있는 무리가 줄을 잇고” 있는 함경도 | 제2수도 건설 공사에 추가 지출 | 청과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는” 백성들 | 대신들의 출근 불량 | 신라왕릉 보수 요청 상소 | 백동화의 폐단 |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 | 순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 | 이태리 총영사의 기록 | 미국 기자의 기록 | 전 러시아공사의 기록 | 러시아 민속학자의 기록 | 러시아의 경의철도 부설권 요구 | 러시아의 용암포 땅 매입과 영국, 일본 | 조차 조약 체결을 부인하는 대한제국 | 신뢰를 잃어가는 대한제국 | 경성-개성 철도공사 계약 | 일본의 개전을 바라는 황성신문 |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 | 러시아 영토로의 피신을 문의한 고종

1903년 일본
제2차 만주 철군 취소와 동청철도 완공 | 러시아 해군의 전쟁 예측 | 러시아 내 강경파의 등장 | 만주 철군을 위한 7개 항 요구 조건 | 전쟁 불사 결정과 영국공사의 보고 | 주청 러시아 무관의 강경론 | 러시아 황제의 강경책으로의 전환 | 청국 내 반청 세력 | 러시아 육군상의 일본 방문 | 개전론과 어전회의 | 대한제국을 넘겨줄 것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7박사 건의서’ | 알렌과 록힐의 설전 | 총리의 사직서와 원로들의 퇴장 | 주일·주청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 러시아에 6개 조 협약안 제시 | 러시아, 만주에 극동총독부 설치 | 일본과 러시아가 거부한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제의 | 러시아의 3차 철군 거부 | 일본의 제안과 크게 다른 러시아의 1차 회답 | 일본 내 반러시아 여론 | 고다마 겐타로와 도고 헤이하치로 |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과 일본의 2차 서한 | 더욱 커지는 반러 여론 | 러시아의 2차 회답 | 환영받지 못한 고종의 특사 | 개전을 결심한 일본 총리 | 주일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의 3차 서한 | 대한제국과 ‘보호 조약’ 체결 방침 확정 | 영국의 엄정중립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 포드자동차, 퀴리, 라이트 형제, 등대, 회전목마

1904년 대한제국
불안한 서울 민심 | 파천에 실패한 고종 | “어찌 야만인이라 하지 않겠는가” | 중립 선언 | 러일전쟁 발발과 황성신문 | 한일의정서 | 이때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 한일협정서 | 백성들이 “구렁과 골짜기에 나뒹굴 상황”의 함경도 | “민력이 이미 고갈”된 평안도 | “도탄에 빠진” 황해도와 “이산하는 실상”이 심각한 강원도 | “소요”와 “유랑”이 계속되는 경상도 | “약탈”과 “민란”의 충청남도와 “탄식”과 “기근”의 전라도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조석도 보전할 수 없을 만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 | “나라의 비용을 소모하여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 외교를 담당할 인재가 없다 | 파산 상태임을 알리는 탁지부대신들 | 부정부패와 “착취”가 일상임을 알리는 내부대신들 | 인재 육성이 없었다는 학부대신 | 1904년의 대한제국 | “오늘날 폐하의 백성들이 불쌍하고 가엽지 않습니까?” | 권한이 없는 의정부 | “폐하의 것”, “폐하만이 부유해질 리가 있겠습니까?” |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 “장기짝”처럼 교체되는 대신들 | 내시, 점쟁이, 무당을 가까이 한 고종 | 직급이 낮다고 면박당한 상소 |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 “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 손병희 | “자신만이 현명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 “성인군자의 학문에만 갇혀” 산 중국 사대부 | 두 명의 장례 비용이 예산의 최소 10% | “항상 그랬듯이 이 사람들은 주인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 실패한 의정부 중심의 국정 운영 시도 | 경운궁 화재 | 근무 기강을 질책한 고종 | “비옥한 땅을 그대로 버려두고 있습니다” | 해외 공관원들 철수 | 《독립정신》 서문 | 일진회에 대한 《매천야록》의 기록 | 민란 | 동학도 소탕을 명하는 고종 | 고위관리들의 도박 | “이 변고는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

1904년 일본
미국과 독일의 중립 선언 | 주일 러시아공사의 본국 건의 | 주일 미국공사와 러시아무관의 보고 | 러시아와 일본의 마지막 교신 |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에 중재 요청 | 일본, 개전 결정 | 여순 공격과 선전포고 | 외채 발행에 실패하면 일본은 붕괴된다 | 에드워드 7세와 시프 | 목표의 8배의 외채 발행에 성공 | 루즈벨트와 미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 | 영불협정 | 일본의 승전을 바라는 중국 신문들 | 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삼는다 | 루즈벨트의 강화조건과 독일 황제 | 고무라의 12개 조 강화 조건 | 요양전투 | 미국의 ‘한일협정서’ 인정 | 영국의 러시아 함대 견제 | 도거 뱅크 사건 | 러시아 민심과 레닌의 러일전쟁 비판 | 여순전투 |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 | 미쓰코시 백화점

1905년 대한제국
1월, “썩은 밧줄에 매달린 것 같고” | 2월, “언제 망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3월, “팔짱을 끼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 4월, “강제로 빼앗고 토색질을 감행하여” | 5월, “나라의 운명이 안착할 곳이 어디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 8월, “이는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무정부라는 것입니다” | 외국 공사들이 본 대한제국의 무정부 상태 | 한날에 올라온 4부 대신들과 협판들의 사직상소 | 경무사의 사직상소 | “집들은 모두 텅” 빈 함경도 | “물 없는 연못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 같은 평안남도 백성들 | “구렁텅이에서 죽어” 나뒹구는 황해도와 다스리기 번거로운 강원도 | 도둑이 극성인 충청남도와 “이미 구제할 수도” 없는 경상남도 | 경부선 개통 | 일본군을 위문하고 온 위문사와 특파대사 | 러시아 황제에게 밀서를 보낸 고종 | 신하를 비난하는 고종 | 신하들의 고언 | 루즈벨트 딸의 방문 | 영일동맹 조약 내용에 항의한 외부대신 | 의병 소탕 명령 | 450년 전에 사는 신하들 | 이토 도착 5일 전 대한제국 궁궐 내부의 실상 | ‘한일협상조약’ 초안 | ‘한일협상조약’ 체결 | 을사조약 비판 상소 | 외국공사관의 철수 | 민영환과 조병세의 자결 | 해외 공사관 폐쇄 | 1906년 세출 예산 796만 원 |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주기를 상소한 다섯 대신 | 고종이 신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례들 |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충청남도 관찰사의 사직상소 | 알렌, “너무도 오랫동안 무사안일의 세월을 보냈다” |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다

1905년 일본
대학의 독립과 학문의 자유 | 여순 전투 | 프랑스 무관의 러시아 해군 평가 | 피의 일요일 사건 | 대한제국 병합 의사 표명 | 독도 편입 | 봉천전투 | 비테, 대한제국 양여 등 종전 조건 제시 | ‘한국보호권확립’ 통과 | 중국신문, 일본의 승전을 기원 | 강화 조건과 제2차 일영동맹안 | 일본의 쓰시마해전 승전과 강화 협정 중재 요청 | 러시아 내 시위와 유혈 사태 | ‘중국혁명동맹회’, 일본과의 연대를 중요시 | 이승만의 석방과 미국 파견 | 주한 영국총영사,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건의 | 미육군장관의 일본 방문 | 강화 협상 시작 | 제2차 영일동맹 | 전쟁의 인적·물적 손실 |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고종의 밀서 |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 | 분노에 찬 일본 여론 | 루즈벨트와 고무라의 회담 | ‘만한시설강령’ | 영국,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지지 표명 | ‘10월 선언’ |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조선왕조 | 기아선상에 놓인 주미공사관원들 | 보호 조약 체결에 관한 고무라의 구상 | 만주 철병과 철도 인도 |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해외에 통보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이론 발표
책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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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이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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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2>,<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1> … 총 4종 (모두보기)
- 1962년 부산 수정동 출생 - 부산금성고등학교 졸업 -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및 동대학원 중남미지역연구학과 졸업(석사) - (주)대우 무역부문 근무 - 페더럴-모굴 코리아 근무




출판사 제공 책소개

1권(1850년-1885년)에 이어 2권은 1886년-1905년의 20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 주변은 매우 복잡해지는데, 조선의 유생과 지배층은 유교 외 다른 모든 학문의 유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각종 개혁 정책에도 반대하는데, 지석영은 상소로 인해 4년간 유배를 가고,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아관파천 당일에 고종의 명령으로 종로 거리에서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고, 탁지부대신 어윤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도 잔인하게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호조판서는 돈이 없어 아무 것도 못하고 있음을 상소를 올려 하소연하고, 병조판서도 돈이 없어 군사들에게 식량도 제대로 못 주는 현실을 하소연하고, 외교를 담당하던 외부의 경우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 왕조는 왕실의 각종 행사나 왕릉 이장, 장례식 등에는 예산의 10% 이상을 집행한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조차 “밥 짓는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데, 신하는 신라 왕릉의 개보수를 상소하고, 이토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도착하기 8일 전에도 조선의 신하들은 450년 전에 죽은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주장할 정도로 조선의 지배층은 옛날에 살고 있었다. 전라도 백성들조차 “사람마다 열 손가락은 피가 흐르고 입은 푸성귀 색깔”일 정도로 수탈을 당할 정도였으니,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 전체에서 성한 곳이 없었고, 어느 한구석도 나라로서 작동되는 곳이 없었다.

한편,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청, 독일 등은 조선을 분할, 공동점령, 중립화, 일본에의 양도 등을 주장하며, 조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협상을 진행한다. 그러나 조선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고, 외부대신은 1903년에 최소한 열두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고, 그해 말 고종은 러시아 땅으로 피난하는 것을 러시아 공사관에 문의한다. 이런 조선이 결국 1905년에 을사조약을 체결하는데, 이는 1904년 의정부 참정 신기선의 상소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신기선은 9월 상소에서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國必自伐, 而後人伐之”라 했고, 12월 상소에서는 “이 변고는 곧 백여 년 동안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진 것(是變也, 乃百年積漸而成者)”이라 했다. 즉, 조선은 그 무엇도 아닌 조선 내부의 문제로 인해 망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서평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당시의 사관(史官)이나 당사자들이 남긴 기록이 매우 중요한데, 조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료를 영어로 primary source라 하는데, “primary”의 단어 뜻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편찬한 영영사전에서는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else”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이들 자료를 기본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조선사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강준만 교수가 ‘한국근대사산책(인물과 사상사)’ 1권 서문에서 아주 솔직하게 1차 사료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1차 자료가 아니라 2, 3차 자료에 의존해 쓰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서 1차 자료까지 챙겨 읽는다는 것은 적어도 내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방법론상으론 비판을 받을망정 이런 시도가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할 사람이 많으리라’라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다."고 했다. 강준만 교수 외에 김학준 교수(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p.6-23), 신복룡 교수(한국사 새로 보기, 풀빛, 2001, p.215)도 책에서 1차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대부분의 2차, 3차 자료, 즉 책이나 논문은 대부분 primary source, 즉, 1차 사료를 거의 언급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주 단편적이고 극히 일부분만 인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자료인 조선왕조실록 등에 바탕을 두지 않고 과연 조선사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중요 문화유산이 아닌가.

이 책은 기존의 책이나 논문과 달리, 조선사의 경우 1차 사료를 기본으로 하고, 2차, 3차 자료는 선택적으로 참고했다. 많은 책과 논문에 1차 사료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성된 내용이 많았는데, 그런 것은 모두 이 책 내용에서 배제했다. 이처럼 이 책은 1850년부터 (어떤 내용은 1800년부터) 1905년까지 철저히 primary source에 바탕을 두고 서술되었는데, 이것이 기존의 조선사 책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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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lee8888 20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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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만 해왔지 사실 난 역.알.못. 이다.그래서 이 책이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야? 라는 말 밖엔... 조선은 정말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관료와 통치자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어린 시절 책장에 있던 위인전? 시리즈에서 고종은 불쌍한 왕이였던걸로 나와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생생히 기억나는 게 이완용은 친일파이며 정말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기재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인식 속의 그는 나라 팔아먹은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책에 의하면 고종실록에 기술되어 있길 그(들)는 고종이 시켜 어쩔 수 없이 을사늑약에 서명한 것으로 나온다. 단지 그들은 고종의 엄한 명에 의해 서명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종은 단지 불쌍한 황제로 알려져 있고 힘없는 충신들은 후대의 역적으로 몰려 자손들까지 욕먹고 있다. 물론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부패한 공무원은 맞으니 두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진짜 빌런은 고종이였는데 그는 단지 후대에 불쌍한 황제라 불리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셨을 작가님 대단하시다.

#조선은망할수밖에없었다2

#이행기 작가
56년 치의 철종,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38년 치의 비변사등록 외에 약 300여 권의 책,
250여 편의 학술논문, 90여 편의 석박사 학위 논문 등 총 640여 편의 참고자료

1904년 의정부 참정 신기선이 상소를 올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호소한 것이 예언이 되었고, 그것은 "백여 년 동안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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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간 오로지 주자학만 '정학'으로 숭상하고, 서양의 학문이 나 과학 등은 '인륜'을 해치는 '오랑캐'의 학문으로 철저히 배척하던 조 선이었다. 그런 오랑캐'나 '왜 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조선은 인재 육성도 하지 않았다. 세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부도난 재정, 세금이 들어오지 않자 개탄' 하는 고종, "오합지졸" 의 군사, 국제법도 외국어도 모르는 외부 대신, 중국도 따르지 않는3-4천 년 전 중국의 의복제도를 고집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차라리 머리털을 보존하다가 (조선이) 망하는 편이 낫다"던 유학자들, 능을 옮 기고 궁전을 증축•보수하고 각종 왕실 의례에 예산의 10% 이상을 지출 하는 조선 왕실. 그러나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는 굶주린 백성, 이것 이 1차 사료에 나타나는 조선의 모습이고, 이러한 것이 1905년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어느 사료에서도 이런 조선을 살리려는 조선 지배층의 행동은 볼 수 없었다.
- Pag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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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후 일본의 전리품이 된 조선이 해야 했던 것은 일본과의 전 쟁이었다. 그러나, 인구 3백만 명도 안 되던 대만은 청일전쟁 후 1만 4 천명이나 목숨을 바치며 일본에 항거했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이 아니라 고종의 명령에 따랐던 이완용 등 다섯 대신을 이른바 "을사오적 으로 낙인을 찍으며 이들에게 돌을 던졌다. 조선 지배층과 백성은 그렇게 조선 내부에 '역적'을 만들었고, 고종과 조선왕조는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런 조선왕조가 조선충독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으며 1945년까지 존속한다.
- Page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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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놓인 조선
1883년에 조선의 세관보좌관으로 임명돼 제물포에서 근무한 영국인 던간이 2월 중순(양 3월 중순)에 <차이니즈 타임즈>에 조선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서울 은 음모와 부패, 폭정, 지독한 야만이 끓어오르는 곳이며, 조선은 음주 와 쾌락에 빠져 있고, 정부는 완전한 파산 상태에 있으며, 조선은 "지옥 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있다고 했다.
- Page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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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장례식 비용지출 기록을 보면 122만 냥에 달한다. 그러나 백 성들의 삶은 고종 자신이 털끝까지도 모두 병이 든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고, 함경도 백성들의 러시아로의 탈주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 Page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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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백성들
함경도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자 7월에 고종이 북관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 국경으로 넘어가 사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것은 틀림없이 마구 긁어모으고 벗겨가는 학정을 견디지 못 하고 살던 땅을 떠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그런데 이것은 14년 전인 1876년 8월에 고종이 "기근에 시달리고 부역 에 고달프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이 무 려 몇천 몇백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라며 함경도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의 내용과 차이가 없다.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 Page 72

🏷조선의 관리를 "강도들"이라 부른 영국 인류학자
영국인 인류학자 랜도 가 1890년 말부터1891년 초까지 조선을 방문했다. 그가 본 조선 여성의 생활은 "노예의 생활"이었고, 조선의 관리들은 무자비한 강도들"과 같았다. 조선은 백 성들을 쥐어짜는 무서운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백성들이 돈을 벌면 관리들에게 모두 뺏기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조선인 의 말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 내용은 1886년 김옥균의 상소 내용과 다르지 않다.
- Page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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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점쟁이에 심취한 왕과 왕비
고종과 왕비가 무당이나 점쟁이에 심취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중 에는 조선 주재 공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것도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이 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데, 고종실록 8월 21일 자에 있는 전 정연 안효제의 상소는 아주 드물게 이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 Page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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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공사가 본 동학난의 원인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학난에 관해 5월에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보면, 관리들의 뇌물 및 착취가 큰 원인이었다. 국왕은 유약하고, 백성들 의 생활 개선, 제도 개선 등 중요한 개혁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조선 정부가 동학난을 진압하더라도 폭동은 머지않은 장래에 더 크게 일어날 것이라 했다.
- Page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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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의 매개' 기능을 상실한 엽전
오스트리아인 여행가 헤세 바르텍이 부산을 여행할 때 환율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부산의 짐꾼들의 가장 흔한 짐은 돈이었는데, 1달러를 바꾸면 엽전이 6천 개에 달했는데, 그 무게가 엄청났다. 따라서 그는 일본이 조선에 은화를 도입하면 부산 과 조선 전역의 가난한 짐꾼들은 돈벌이 수단을 잃게 될 것이라 했다.이러한 엽전의 환율과 무게 문제는 1903년에 조선을 여행한 러시아 인이 남긴 글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1903년에 러시아돈 100루블 어치의 엽전은 5만 개 이상으로 무게가 123kg에 달해 이를 운반하려 면 말 한마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이미 오래 전부터 엽전은 화폐의 기능 중 가장 기본적인 거래 비용을 줄여주는 '교환의 매개 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 Page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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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발생과 인구 변동
1895년 5월에는 평안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퍼지고, 기근으로 전국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 Page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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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선
왕비를 만난 적 있는 영국 여행가 비숍은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급히 경성으로 왔는데 그녀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너는 경성과 경기도, 황해도, 평양 등지를 여행 하면서,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 봐야 관리들에게 결국 돈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빈곤이 자신들의 "최선의 안전"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 Page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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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주변의 상황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은 몰락의 길로 가고 있었고, 미국은 조선에 중 립(무관심)을 지켰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로 통과하도록 9월 에 청과 동청철도조약을 맺음으로써 영국. 일본과의 갈등은 커져간다.
일본은 이런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삼국간섭 이후 청일전쟁 배상 금의 거의 모두를 육해군 확장을 위해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러시 아는 조선이 아닌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러시아에 매달렸다.
- Page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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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가져가는 세금
3월 2일에 탁지부에서 보고한 내용이 고종실록에 있다. ..백성들에 게서는 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기어이 준봉(14: 징수)하고는 자기 손 에 들어오기 바쁘게 빚을 주어 이자를 받기도 하고 팔아서 이득을 보기 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찰사는 규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라 했다.
-Page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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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본 러시아공사들
1885년 8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하여 1897년에 멕시코공사로 이임한 전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10월에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취소됨)에 왔다가 경성에 다음 해 4월까지 체류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본 대한제국은 여전히 혼란했고, 음모와 술수. 권력 남용이 횡 행하고, 백성을 쥐어짜는 것도 똑같았다. 군인의 수는 배로 늘어났으나 규율이 없고 복장은 남루했고, 관직은 연출이나 매매로 주어졌으며 교 체가 빈번했다. 또 백성이 내는 세금은 많아졌지만 국고에는 항상 돈이 없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쓸 돈이 없었다. 반면에 왕실의 사치품 구매 와 화려한 행사, 궁궐 수리와 신축, 사원•왕실묘의 건립과 내시, 점쟁이,무당 등에게 막대한 돈을 쓰고 있다고 썼다.주일 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도 대한제국의 국내 정치가 완전히 해체 되었고, 대한제국은 외국의 원조 없이는 스스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 Page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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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한일의정서 체결 다음 날, 알렌은 본국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피보호 국으로 한다는 조항에 고종이 서명했다고 보고했다. 3월 1일 황성신문 도 논설에서 한일의정서 체결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음 을 의미한다며 분노했다. 그런데 미국공사와 황성신문도 알았던 이 조약의 의미를 조약을 직접체결한 대한제국의 신하들과 고종은 몰랐을까?
- Page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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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상조약' 초안
이토가 고종을 알현하고 전달한 메이지 천황의 친서 내용은 '대한제국과 일본 장래의 안녕을 절망하는 진실된 마음을 친히 폐하에게 알리 기 위해서' 이토를 파견한다면서, 대한제국은 불행히도 아직 국방을 완비하지 못했고 자위의 기초도 굳건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동아시아 장래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양국이 뭉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에 명령해 방법을 세웠으니 경청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11월 15일, 이토는 고종에게 '한일협상조약(을사조약)' 초안을 제출하 는데 고종실록은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 를 접견하였다. 협약문 초안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날. 고종은 이토에게 일본이 외교의 실체를 취하더라도 사신의 왕래 등 형식적인 명목은 대한제국에 남겨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토는 외교는 형식과 실체를 분리할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외교 상황이 유지되 면 영토 문제 등으로 동양이 다시 재난에 빠질 수 있다며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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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비판 상소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이 협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라며 이토에게 위로의 칙어까지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서울 상가는 철시하고, 19일부터는 보호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 하라는 원로대신과 현직 관료, 지방 유생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타고, 이근택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조약 체결 다음 날 내부대신 이지용 등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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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신기선이 상소를 올린 날. 의정부 참정 윤웅렬도 상소를 올려 당시의 위급함을 경고한다. 고종실록에 있다. . 요즘 여러 신하들이 아린 말 이 절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폐하가 마치 믿는 이가 있는 것처럼 들은 체 만 체하니 신은 참으로 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현재 민심의 소동은 뜨거운 철판 위의 벌레 같 고 외적의 침노에 대한 급박함은 두 호랑이가 고깃점을 놓고 싸우는 것 과 같습니다. .."라 했다.이처럼 신하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극언까지 동원해 가면서 고종이 분 발하여 나라를 바로잡기를 바랐다. 그러나 52세의 고종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손을 대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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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비판 상소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이 협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라며 이토에게 위로의 칙어까지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서울 상가는 철시하고, 19일부터는 보호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 하라는 원로대신과 현직 관료, 지방 유생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타고, 이근택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조약 체결 다음 날 내부대신 이지용 등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 Page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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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주기를 상소한 다섯 대신 고종실록 12월 16일 자에는 참정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 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등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가 있다.
"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 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 일 뿐입니다.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 17일 ... 신들 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 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공사가 어전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 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은 전제국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6)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 하였습니다. …. 대사가 궁내부 대신 이재극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 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 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를 전하였습니다. ... (대사가) 곧 이재극에게 다 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 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 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대신뿐입니다. 주무대신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 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 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 삭할 곳은 법부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 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 이 자리에서의 사실 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을 '나라를 팔 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 못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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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 속히 법사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라며 자신들은 그날 밤 고종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음을 구체적으로 아됐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 로운 때에는 오직 다 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 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 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며 책임을 신하에 게 돌리고, 자신이 나서서 신하를 보호할 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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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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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37 :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2, 이행기 저, 2022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몇년 전 시중의 베스트셀러 중에 화제인 책인 "지리의 힘(2016)"이라는 저서가 생각난다. 그 책에서 우리는 한 국가의 지리적, 환경적 요인이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게 한 역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세계 다양한 국가들의 면모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가운데, 특별히 우리 "한국"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우리 독자들에겐 당연히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강대국들의 경유지가 되었다.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지만, 이처럼 절박하게 우리의 운명을 함축한 문장도 잘 없을 것이다. 중국, 러시아를 위시한 대륙 세력과 미국, 일본, 영국을 위시한 해양 세력의 갈등과 충돌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근대사의 그 처참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한반도는 두 개의 체제로 분리되어 있으며, 더욱이 두 체제간의 갈등이 정전 협정하에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언제든 국제 정세가 변함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급기야 북한의 핵무장 선언으로 이어진 갈등이 해법이 보이지 않고,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닺고 있는 양상마져 띄고 있어 전쟁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와 비슷한 반도 국가는 태생적으로 숙명을 안고 산다. 자신의 힘이 강성해지면 주변 국가들에게 그 투사력을 미치기 위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는 자신의 국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이웃 국가들에게 종속적이 되는 숙명 말이다. 과거 폐망의 역사를 걸었던 "조선"왕국은 그 후자의 극단적 지점을 잘 보여준다.

2. 저자의 의도...


저자는 정식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한국 역사, 특히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연대의 역사적 비평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본 연작을 편찬하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 시기는 사실 우리 민족의 가장 암흑기에 해당하고, 처참한 삶의 기록들이 가득한 부끄러움이 가득한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작을 집필하고자 하였으며, 그 의도가 왜곡되지 않도록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의 고증에 촛점을 맞춘 방대한 주석에 각별히 신경쓴 작품이다. 저자가 가지는 문제의식은 "조선의 망국사에 대해 통렬히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도 언제든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 다만 그 과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비판과 반추를 통해 향후의 그것을 방지하고자 함에 그 의의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본 작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이와 같은 의도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에서 본 작의 시도는 시의적절하다고 동의를 한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본 작의 서술에 있어 "편년체"에 가까운 구성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도별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주목하는 사건들을 나열하며 그 긴박한 국제 정세와 대비하여 무능한 조선왕조의 실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권에 해당하는 본 작의 서술년도는 1850~1905년으로 가장 그 대비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이다. 잘 알다시피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의 건국 이념이라는 정치적 명분에 가로막혀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점점 멀어지고, 소위 "신문물"로 대표되는 제도적, 학문적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의 통치 기반마져 무너지는 것이 이 당시의 가장 큰 실정이다. 이 실정의 디테일한 부분을 서술하는데 있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세부 사건들을 나열함으로써 그 고증에 촛점을 맞춘 부분이 돋보인다.

또한 대외 세력의 간섭이라는 멸망의 또 한 축을 기술하는데 있어,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내적 상황 또한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외 정책으로 어떻게 조선을 이용하였는지를 상세히 기록한다. (이 부분 또한 분노의 지점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양국의 감정이 안좋은 부분들은 이 지점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대외적으로 뻗어나간 적보다는 한반도 내에서 머물러 있던 역사가 훨씬 길며, 설령 영향력을 외부로 투사할 경우에도 점령과 정치적 목적보다는 "방어"의 측면을 위주로 해온 역사가 대부분이라, 대외적으로 주변 국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일본과 중국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국가간 행위에 있어 그 이유는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의 그것을 분석하여 향후 또다시 드리워질지도 모르는 위협을 우리가 인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명확히 자신의 서술 지점, 즉 "사관"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으로 대비되는 중립적 사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어떠한 사료를 발췌하고, 어떤 맥락을 부여하여 기술하는 가는 철저히 그것을 편찬하는 "사람"의 생각을 담을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반영한 역사적 서술은 애초에 "환상"에 가까운 불가능이라는 말이다. 다만, 그 서술을 대중들이나 여타 관련 학자들에게 평가를 받을 때, 그 의도가 시의적절하지 않거나 다수의 의견에 위배된다면 그것 자체로 평가를 받고 나머지는 받아들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의이다. (대신 광범위한 논의는 반드시 사족으로 달려야 한다.) 이 책의 저자와 동조할수도, 또는 반대의 입장에서 의견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십수년전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시도처럼 자신들의 본의를 교묘히 숨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일종의 "사기"에 가깝다.)

4. 아쉬운 부분...

이 책은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책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나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독자들이라면, 저자가 소개하는 조선 왕조의 실정에 대한 대목들에게 정말 뼈아프게 다가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곧 그에 대비하여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마져 느낄 수 밖에 없도록 매섭게 파헤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저자의 의도가 가지는 오류의 위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라면, 저자의 서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기술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며, 이는 곧 그 주장의 신빙성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로도 본작에 대한 주변 평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극도의 불호에 가까운 평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책에서 그 진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의의를 반감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을 앞세운 저자의 용기있는 시도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반드시 역사책이 전공자들만의 독점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동의하지 않는다.)

5. 나오며...



모든 국가의 정치 세력들은 자국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위대함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다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내포하게 할 수 있으며, 국가주의 차원에서의 통치 기술의 편의성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지식인들(언론 포함)의 사명이다. 견제받지 않는 힘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국가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대중들을 기만하는 선전을 역사학적으로 시도한다면, 그에 대한 비판과 다른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존경과 신뢰를 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사회는 결코 그렇지 못한 행보를 보인것이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시도들, 과거 이병도 씨를 위시한 "친일사관"에 가까운 실증주의자들, 그리고 아직도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논쟁에 사로잡혀 한쪽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싶은 세력들마져 언론에서, 미디어 매체에서, 더욱이 극우 유투버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생각을 논의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구 시대적인 전체주의 논리에 가까운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그런 현실에서 저자의 이번 이야기는 그 지식인들의 의무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좋은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후일에도 더 나은 작품으로 연작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조선은망할수밖에없었다 #이행기 #메이킹북스 #조선 #역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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