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조체 한자 이야기 (2)
한자를 많이 다루다 보면, 정자(대표자)와 이체자(이형자, 속자 등등) 문제에 골머리 썩을 일이 많고, 구자체 한자의 정자에 대해 알려면 '강희자전'을 자주 참조해야 하고, 강희자전의 글자체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그 연원을 알자면 또 명나라 목판 글자체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는데... 명나라 인쇄 문화에 대해 연구나 개설서는 종종 있지만, 그 글자체를 속 시원히 분류해서 잘 풀어준 것은 또 별로 없더라고요..
그렇다면, 답답하면 내가 친다, 답내친의 정신으로 명대 목판 서적 자료집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요..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요.
그러기 전에.. 먼저 '명조체'란 말, 그리고 명나라 인쇄 문화의 앞 이야기(전사前史)를 살짝 훑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사실 다케무라 신이치란 사람이 쓴 '명조체의 역사'(明朝体の歴史, 竹村真一著, 思文閣出版, 1896)란 좋은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명대 목판 글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아쉽게도 주로 일본 명조체의 역사에 대해서 해설한 책입니다. 서술이 좀 답답하긴 하지만, 아주 성실한 좋은 연구서입니다. 이 책 덕분에 전근대 일본 명조체의 역사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었어요. 인겐(은원隱元) 선사가 일본에 전해준 만력 시기 중국 대장경은 지금 일본에 고스란히 잘 남아있어서 그쪽도 확인할 수 있어요 (링크는 댓글에..) 일본이나 중국 쪽 근현대 활자체에 대해선 제가 무지하니, 자세한 것은 관련 전문 서적을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건, 강희자전으로 대표되는 구자체 한자이건 일본과 한국의 근대 명조체이건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명나라 목판 인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저는 어디까지나 명대 출판물의 글자꼴에 집중하는 걸로...
그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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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체
명조체는 명나라의 글자체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명조체가 이름 그대로 곧 명나라 때 사용되었던 글자꼴인 것일까?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짚어두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 우리가 쓰는 다른 수많은 단어처럼 ‘명조체’도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인쇄 용어로 사용되다가 수입된 용어이다. 즉 일본어로 ‘민초타이(みんちょうたい)’라고 읽는 ‘명조체(明朝体)’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근대 일본에서 만든 용어이다.
- 명조체란 어떤 글자체인가? 세리프(selif) 즉 획 끝에 작은 장식적 돌출부가 있는 폰트를 가리킨다. 가장 표준적인 인쇄체로서, 가독성이 높아 본문 글자체로 주로 쓰인다.
- 정작 중국에서는 세리프 있는 인쇄체 한자를 보통 ‘송체자’(宋体字)라고 부른다. (’송체’宋体 혹은 ‘송자’宋字라고도 함) 명체(明体)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현대의 인쇄체 글자가 아닌 정말 과거 명나라 시대에 썼던 글자체를 가리킨다.
-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한자 문화권의 근대 인쇄가 시작되었던 시기인 19세기 말 20세기 초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중국과 일본 모두 근대와 더불어 출판이 서양식 활자 인쇄 시스템에 의해 재편되었다. 1910년대 항저우(杭州) 출신의 딩산즈(丁善之)와 딩푸즈(丁辅之) 형제는 획이 가늘어 새기기 쉽고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전통적 해서체 붓글씨의 맛을 겸비한 ‘취진방송체’聚珍倣宋體 활자를 개발했다. (취진聚珍 즉 취진판聚珍版은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든 목활자 서적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따서 활자를 아름답게 칭한 것이다. 방倣은 따라한다는 뜻. 즉 방송체는 송나라 글자체를 본받아 만든 글자체라는 뜻이다) 이들이 세운 회사는 중화서국中華書局에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중화서국이 중국의 국영 출판사가 됨에 따라 이 글자체는 중국 현대 인쇄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게 된다. 물론 인쇄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여러 독자적 서체가 발전하여서, ‘방송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는 예전처럼 크지 않다. 그러나 중국 인쇄 역사상 목판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최초의 시대라는 의의를 중시하여, 중국에서는 인쇄체 한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송’이라는 이름이 널리 채택되게 되었다.
- 일본 또한 메이지 시대 개화기에 들어서며 서양식 인쇄기에 알맞는 일본어 표기용 활자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일본어는 가타카나 및 히라가나 이외에 한자 표기의 비중도 대단히 높다. (인쇄물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자가 절반 이상 사용되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전근대 시기 지식의 주요 매체였던 한문 서적의 한자체가 근대 일본 활자체의 근간이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중국 복건성 출신의 고승 인겐(隠元은원)이 일본으로 건너와 선종의 일파인 황벽종黃檗宗을 일본에서 크게 일으킨 바 있다. 이때 그는 중국 명대 만력萬曆 시기에 간행된 대장경을 일본으로 가지고 왔는데, 나중에 황벽종의 선승禪僧인 테츠겐(鉄眼철안)이 이 만력판 대장경을 바탕으로 대장경을 간행한다. 이 황벽판 혹은 ‘철안’판 대장경은 에도 시대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이 글씨체가 바로 ‘명나라의 글씨체’ 곧 명조체이다. 이것이 근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인쇄체인 명조체로 발전하게 된다.
- 일본의 근대 인쇄 기술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의 한글 명조체는 일본 명조체를 참조는 하였으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이어서 비록 일본 한자 및 히라가나(가타카나) 명조체와 형태상 상관은 없는 것이나, 그 이름만은 일본의 그것을 계속하여 쓰고 있다. (현재는 ‘명조체’보다 본문 서체임을 의미하는 ‘바탕체’라는 이름을 주로 쓰게 되었다.)
한자를 별로 노출시키지 않는 한국의 일상 문자 생활에서 한자 명조체를 마주칠 일은 예전처럼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위상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한자의 표준 글자체가 ‘강희자전’에 수록된 대표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희자전’은 이름 그대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된 것이지만, 그 글자체는 명대에 성립된 목판 인쇄체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렇다면 명나라 때 목판 인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한자의 모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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