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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은이), 김경원 (옮긴이) 위즈덤하우스 2016-10-05
전자책 8,900원
9
100자평 9편
리뷰 15편
세일즈포인트 1,554
236쪽
책소개
2016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수상작. 사회학자는 연구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이와 같은 통상적인 사회학적 방법론과 시선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서술 역시 기존 사회학자들이 흔히 취하던 관찰자적, 학술적 서술이나 판단, 단정적 어투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그 옆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놓을 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저자의 관심사이자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흔히 거론되는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등이거나, 우리 곁에 흔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주변인(복장 도착자, 조직 폭력배, 거리의 연주자, 방치된 아이들, 가정폭력의 희생자 등)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사회구조적 차원으로 손쉽게 치환하여 분석하거나 폭력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삶을 만들어 낸 곡절과 개인의 역사, 사회적 폭력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눈에 띄지 않던 보통 사람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시화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면을 곰곰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에세이이자 사회학적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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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 독자에게 드리는 글
머리말-분석 안 되는 것들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모여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토우(土偶)와 화분
이야기의 바깥에서
길 위의 카네기홀
나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
웃음과 자유
손바닥의 스위치
타인의 손
실유카 나무에 흐르는 시간
야간 버스의 전화
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축제와 망설임
자신을 내밀다
바다의 저편에서
시계를 버리고 개와 약속하다
이야기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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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일 것이다.
P.60~61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나아가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기반을 이루는 서사는 단 하나가 아니다. 애초에 자기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이다. 세계에는 가벼운 것이나 무거운 것, 단순한 것이나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사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 어떤 행위나 장면이 즐거운 술자리인지, 악질 성희롱인지, 우리는 그때마다 정의 내린다. 다양한 이야기와 ‘화법’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_60~61쪽「이야기의 바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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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81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자기가 있을 곳에 대한 이야기는 다 나왔다고 할 만큼 새로운 맛이 도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역시 자꾸만 되돌아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있을 곳이 문제로 떠오르는 때는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든지, 아니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든지, 둘 중 하나다. 따라서 있을 곳은 늘 반드시, 부정적인 형식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라면, 있을 곳이라는 문제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조차 없다. 있을 곳이 문제가 되는 때는 반드시 그것이 ‘없을’ 때에 한정된다.
소수자(minority)라고 불리는 사람들, ‘당사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들 소수자나 이른바 ‘보통 시민’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이나 가족이나 인간관계 등으로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때만, 잡다한 일에 마음이 얽매여 눈코 뜰 새 없을 때만, 우리는 있을 곳의 문제를 잊고 지낼 수 있다. 우리에게 있을 곳이란 없든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 문제를 잊고 있을 뿐이든지, 둘 중 하나다.
_80~81쪽「나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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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소수자는 ‘재일 코리안’, ‘오키나와인’, ‘장애인’, ‘게이’라는 식으로 언제나 손가락질당하고, 딱지가 붙여지고, 지목 당한다. 그러나 다수자(majority)는 ‘일본인’, ‘내지인’, ‘건강한 사람’, ‘이성애자’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딱지가 붙여지고, 지목 당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재일 코리안’의 상대어라고 하면 편의적으로 ‘일본인’이라는 말이 끌려 나오지만, 애초부터 이 두 단어는 같은 평면 위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쪽은 색깔에 물들어 있다. 이에 반해 다른 쪽은 다른 색깔에 물들어 있지 않다. 이쪽에는 애당초 ‘색깔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한쪽에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일본인이라는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애초에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바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_166쪽「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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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7~168
…사회에 의해 물들여지고 딱지가 붙여진 존재가 ‘평범해지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실은 그것이야말로 다양한 차별 반대 운동이 지닌 하나의 커다란 목표였다. 우선 처음 내세워지는 운동의 목표는 딱지를 떼어 내고, ‘무징표’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피차별 부락 문제는 ‘거기에서 태어났다/거기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 의한 차별이다. ‘자, 그러면 다들 그곳을 떠나서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가면 어떤가?’ 누구라도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가슴 쓰라린 일이다. 애초부터 그것 자체가 늘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번 붙여진 딱지를 간단하게 벗겨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딱지가 붙여진 채 딱지의 가치를 전도시키고, 딱지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품는 것, 이것이 평범함이 된다. 한마디로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딱지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딱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_167~168쪽「평범하고자 하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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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6
인터넷 속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로 우리는 ‘타자’를 무서워하는구나 싶다. 거기에는 까닭도 없고 근거도 없는 공포가 충만해 있다. 동시에 그 반동으로 음습하고 병적인 증오가 가득 차 있다.
언제나 떠올리는 것은 오가와 사야카가 그려 낸 것 같은, 타자와 함께 즐기는 ‘축제적’이라고 할 만한 행복한 만남이다. 물론 오랜 기간에 걸친 필드워크의 과정에서 끔찍하게 싫은 일이나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실로 즐거운 듯) 묘사해 낸 것은 축제처럼 흥청거리는 길 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로부터 들은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그것은 단지 불행한 만남의 형식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뚜렷한 공포를 동반한 폭력적인 체험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는 법이다.
만남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_176쪽「축제와 망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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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P.97Ci_____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모찌모찌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모찌모찌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모찌모찌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찌모찌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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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 (사회학자, 『세상물정의 사회학』 저자): 이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심판관의 관점에서 판정내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학자’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그는 타인의 삶을 팔짱끼고 구경하는 관찰자가 아니다.… 슬픈 목소리, 비장한 목소리, 서러운 목소리, 항의하는 목소리, 비꼬는 목소리 말고 인간은 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인간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모두 담긴 듯한 이 책은 인생극장과 너무나 닮아 있다. 사회학자가 사람들의 삶을 기술하려면,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인생의 특성에 걸맞아야 한다. 만약 인생이 단편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라면 그 단편을 기술하는 언어 역시 단편의 모자이크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시 마사히코는 섬세하게 인생의 단편을 모자이크 하며 이 책을 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와 마음속으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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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기시 마사히코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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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일본 리츠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교수. 전후 오키나와의 노동력 이동과 아이덴티티, 피차별부락의 구조와 변용, 사회조사방법론, 생활사 방법론 등을 주로 연구한다. 국역된 저서로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망고와 수류탄》, 《거리의 인생》, 《처음 만난 오키나와》 등이 있다.
옮긴이: 김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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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인하 대학교 한국학연구소와 한양 대학교 비교역사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이화 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했다. 동서문학상 평론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후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번역 작업과 한겨레교육문화센터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로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공저)가 있으며, 역서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곤란한 성숙>,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가난뱅이의 역습>,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단편적인 인생의 단편적인 서사
길 위의 기타 연주자, 이민자, 조직 폭력배… 분석할 수 없는 부스러기 이야기를 담다
이 세계 도처에 굴러다니는 무의미한 단편에 대해
그 단편이 모여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세계에서 다른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2016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수상!
오랜만에 독서를 끝냈다는 것이 아쉬운 책과 만났다. _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
이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의혹을 던질 뿐…. 그리고 잠자코 옆에 있어 준다. 언제까지나… 돌멩이나 강아지처럼. 내게는 이 책이 필요하다. _소설가 호시노 도모유키
이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타인의 삶을 팔짱끼고 구경하는 관찰자가 아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모두 담긴 듯한 이 책은 인생극장과 너무나 닮아 있다. _사회학자 노명우
사회학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쓰다
사회학자는 연구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이를 위한 주요 방법론으로 인터뷰나 통계 자료, 사회학 이론 등을 사용하는데, 이로 인해 전문적이고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띤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이와 같은 통상적인 사회학적 방법론과 시선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서술 역시 기존 사회학자들이 흔히 취하던 관찰자적, 학술적 서술이나 판단, 단정적 어투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그 옆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놓을 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저자의 관심사이자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흔히 거론되는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등이거나, 우리 곁에 흔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주변인(복장 도착자, 조직 폭력배, 거리의 연주자, 방치된 아이들, 가정폭력의 희생자 등)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사회구조적 차원으로 손쉽게 치환하여 분석하거나 폭력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삶을 만들어 낸 곡절과 개인의 역사, 사회적 폭력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눈에 띄지 않던 보통 사람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시화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면을 곰곰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에세이이자 사회학적 저술이다.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이 책은 모든 개인의 삶에는 의미 있고 완결적인 서사와 줄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애초에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이며, 각자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완결적으로 보이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 그러한 이야기를 모아 세계를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사람들의 구술은 종종 말을 더듬고, 문장이 되지 못하며, 기억의 오류나 허장성세로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이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들은 그대로 그들이 살아온 평탄하지 못한 삶과 세계를 보여 준다. 인터뷰에서 저자가 드러내는 감정의 혼란함이나 착각과 오독은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의 대상화된 동정심이나 편견을 고스란히 비추어 준다.
‘평범한’ 사람(일본인, 남성 등)은 애초에 별도의 (주로 부정적인) ‘딱지(labelling)’나 경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주변인과 소수자(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여성, 장애인, 게이 등)는 사회가 붙인 ‘딱지’를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여러 차별 반대 운동은 바로 이를 목표로 한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딱지가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한 점에 주목한다. 딱지가 붙여진 채, 딱지의 가치를 전도시키고, 딱지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품는 것, 이로 인해 또 다른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딱지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딱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보통 생활의 기록
개인의 생활사를 구술 채록하는 가운데 떨어진, 분석할 수 없는 부스러기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는 저자의 ‘무의미함’에 대한 애착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애당초 우리가 각자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단지 무의미한 우연으로 이 시대, 이 나라, 이 동네, 나 자신으로 태어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은 단지 허무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 타인, 세계의 결여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평범함’에서 벗어난 무의미한 단편을 곱씹을수록 세계를 좀 더 새롭고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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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9.0
람람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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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을 제외하곤 푹 빠져서 읽었다. 몰이해도 폭력적인 이해도 없이 상대를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장마다 묻어난다. 개인적으론 사길 잘 했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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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Soul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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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할 것만 같았던 사회학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 책. 읽는 내내 따듯했다. 울컥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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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킹킹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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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을 공부하는 사회학자는 참 매력적인 일이라고 새삼 느끼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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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20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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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브님의 속도전으로 번역된 것 같다는 의견에 동감합니다.개인적으론 두 번째 장이 제일 영감을 준 것 같아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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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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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고 따뜻하면서도 사회학적인 시선이 잘 묻어나 있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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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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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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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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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오래된 뮤직비디오 한 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영국 록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음악도 영상도 멋있지만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애절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 후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소수자라는 비애가 그의 음악성을 증폭하지 않았을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소수자 문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유난히 그런 문제들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귀를 사로잡았다. 중학교 때 일본에서 온 친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했을 때, 고등학교 때 친구가 가족 내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내 마음은 평소보다 세게 뛰었다. 대학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성 소수자, 장애인, 재외 동포, 이민자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여성 문제는 나와 무관하지 않지만, 성 소수자, 장애인, 재외 동포, 이민자 문제는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 오키나와 문제도 관심은 있지만 상관은 없다. 다수자이면서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건 괜한 오지랖이나 외부자의 관음증이 아닐까. 이 또한 당사자에게는 폭력이 아닐까. 그런 고민이 나를 늘 괴롭혔다. 나는 재일 코리안이나 피차별 부락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해, 또는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해 누가 보더라도 다수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마음에 보잘것없지만 공부를 해 왔다. 또한 일이나 사생활 면에서 그런 사람들과 맺은 관계도 점차 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점에서 역시 나는 다수자일 수밖에 없다. (p.179)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소수자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다.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복장 도착자, 조직폭력배 등이 저자의 연구 대상이다. 저자는 소수자가 아니다. 일본인이고, 건강한 사람이며, 이성애자이고, 남성이다. 그런데도 소수자 문제를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말을 흐린다. 대학 졸업 후 공사장에서 막노동꾼으로 일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학창 시절 친구들한테 미움을 샀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도 정답은 아니다. 저자는 대체로 다수자이지만 때때로 소수자다. 저자는 무정자증이다. 사람들이 자녀들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물을 때 저자는 폭력을 당하는 듯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저자에게 아이를 가진 사람은 다수자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아이를 가진 사람의 행복을 짐작하지만, 아이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의 불행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만이 아니다. 배제된 경험, 차별당한 경험, 고통을 겪은 경험이 더 적은 쪽이 다수이며, 다수는 소수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다행히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에 있어서 다수자이거나 소수자일 수 있고, 다수자로 살 것인지 소수자로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소수자로 살기를 택했다. 재일 코리안, 장애인, 성 소수자, 여성 문제에 대해 평생 모르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기꺼이 관심을 가지고 사는 길을 택했다. 소수자들의 눈에는 그가 다수자로만 비치겠지만, 저자는 삶에서 다수였던 경험보다 소수였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규정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누가 다수자이고 누가 소수자일까. 이 또한 정답은 없다. 한쪽에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일본인이라는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애초에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p.166) 저자는 이제까지 만난 소수자들을 연구 대상이 아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연으로 본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돌멩이를 아무것이나 주워 바라보면서 '이 드넓은 지구에서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이' 나에게 주워 올려진 '이' 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과 무의미함'에 전율하고 감동했던 것처럼 그들과 만난 것에 감사한다. 그렇기에 논문이나 책에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조차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 책은 여러 이유로 버려야 했지만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버려질 뻔한 이야기를 모았다고 해서 낮추어 보면 곤란하다.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흔히 거론되는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등을 취재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어 일본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학자로서 연구를 하면서 느끼는 딜레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구해가는 이유 등도 자세히 나와 있다. 현대 사회는 상이한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소수자 문제에 무심한 다수자는 소수자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까닭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기 쉽고, 이는 공격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꾼다.나도 꿈꾼다. 프레디 머큐리의 이력에 동성애자라는 말이 나올 필요가 없는 세계, 어린아이가 외국 학교에서 차별받지 않아도 되는 세계,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미움받지 않아도 되는 세계, 장애가 있거나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2등 시민이 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과연 그런 세계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니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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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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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고 읽은 지는 그래도 좀 되었는데 리뷰는 처음 남기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소중하게 만든 책을 틈틈이 겨우 일별하고, 남들이 보는 곳에 글을 보일 자격이 있는 지 조금 자신이 없네요. 게다가 틀리거나 부족한 글을 써서 잘못된 영향을 줄까 걱정도 되고요. 그런데, 이 책이 좋아서 저같은 다른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 무엇인지 정리도 해보고 싶었구요. 요즘에 책에서나 현실에서나 '잘 안다'는 사람이 좀 많아서 지치는 감이 있었어요. 세상이 작은 것들도 그렇게 분명하거나 단순한 것 같지 않은데, '답'을 준다는 것을 표방하는 책이 많아서요. '나를 따르라' 이런 것 있죠. 그럼 '당신도 잘 모르잖아요. 차라리 같이 의논해봐요'라고 말하고 싶기도 해요. 언제부턴가 '잘 모르는' 하지만 물론 '제대로 모르는' 책을 찾았던 것 같아요. 이 책 뒷껍데기에 '이 사회학자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심판관의 관점에서 판정을 내리는 (...)사회학자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써있었어요.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었죠. 내용도 그랬어요. 자신이 뭘 모르는지 돌아보는 사회학자의 모습이었죠. 반가웠어요. 물론 초짜라서 모르는 건 아니구요. 지식이 차고 넘쳐서 사실 작정하면 책한권 분량의 지식은 금방 모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쓰여진 책이 아니고, 지은 사람의 오랜 인생이야기가 켜켜이 베어있는 책이 좋은 거 같아요. 사람인생이 짧지만, 한사람에겐 전부인 세월이죠. 그 세월과 시간의 힘에 의지하여 있는 책이 좋아요. 이 책에서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가요. 자신의 경험을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해왔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요. 좋은 책을 보면 그게 어떤 분야이든 이 사람이 그 분야를 어떻게 연구하고 다루고 있는 지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회학이 제 전공은 아니라도, 저자가 그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대하여는 저에게 충분히 응용해 볼 수 있습니다. 그점에 관하여도 배운 점이 많아요. 마지막으로 특히 교수님들이 쓴 책 중 이 분이 과연 여기 써진 것과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책이 있어요. 물론 '책대로'살기는 불가능한 경우도 있겠지만, 인생과 본인의 말이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읽다 맛이 떨어져요. 저도 책으로밖에 이분은 모르지만, 이분은 본인의 말과 행동이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정도면 스포일러 없는 유익한 리뷰가 되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리뷰에 정해진 양식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 확실하다는 지식들도 사실은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이 그 점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는 주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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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북스 20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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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개인의 삶.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분명히 나름대로 반짝거리고 있는 하나하나의 삶. 문제가 생기면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혼자 어떻게든 해결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 책을 읽고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돕고 용서하는 사회에 대해 한참 생각해보았다.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사회학자인 저자가 학문적 방법론이 아닌 가만히 보고 듣는 방식으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떠한 편견도 권위의식도 없이 개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는 저자의 태도가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구조화하여 설명할 수 없는, 부스러기에 가까운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이 이토록 마음에 와닿는 것은 결국 인간은 전부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한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설명되어질 수 없는 이야기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앞만 보고 달릴 것이 강제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중 누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훗날 아쉽지 않은 삶이었다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역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인과 기쁨을 나누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문득 이런 다짐도 해본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일이 두렵고 마음을 전하는 일이 어렵지만 조금씩 조금씩 더 연결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단순히 정리될 수 없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개개인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소중히해야겠다는.
www.instagram.com/vivian_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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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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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 물러서서 인생을 되돌아보라, 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되돌아 볼 필요가 없을 때나 (예방적인 차원에서) 위안을 주는 말이다. 괴로운 순간에, 고통스러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그 상황을 조금 더 덜 괴롭고 덜 절망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려고 하는 환상과 노력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자유다. 그것은 유일한 자유이면서, 도피처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람이 자유다. 이 말은 선택지가 충분히 있다든가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버티고 있는 꽉 막힌 현실의 끝자락에서, 딱 한 가지뿐인 무언가가 남겨져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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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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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무의미한 인생의 의미‘
이 책을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줄 여겼더니, 알라딘 이력을 뒤져보니 올 초였다. 완독을 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린 셈. 지인의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소장용이라는 느낌에 중고로 구매했는데, 어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역시 사길 잘했어였다. 추천한 지인은 뒤로 갈수록 별로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좋았다. 기시 마사히코의 다른 책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이 책을 읽고 다시 확인한 점은, 내가 이런 류의 담담한 문체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란 사람은 정작 호들갑을 떠는 부류에 가까운데, 왠일인지 글은 너무 유려하거나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거나 심지어 건조한 문체 쪽이 더 끌린다. 바꾸어 말하면, 시시콜콜 구구절절 휘황찬란 미사여구, 이런 글들을 칭송하기는 하나 아주 선호하지는 않는 듯.
아무튼, 기시 마사히코의 글은 수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게 만드는 동력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학자들이 곧잘 빠져드는 ‘학자연‘하는 잘난 척이 없어 보인다. 그의 글에는 어려운 용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지적 우위를 자랑질하는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든다. 글이 어렵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술술 읽히지만도 않는다. 그의 문구들은 읽고 나서 쉬어 가는 템포를 던져 준다. 너도 이런 생각 해봤니? 못 해 봤으면 한 번 해볼래? 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써보려 한다.
정확히 반백 살이 넘은 후로, 전에 없이 인생의 허무함을 자주 느낀다.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살아봤자 무슨 기쁨이 있을까, 더 산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해낼까.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실현해 보려 한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어떤 계기로 딱 접었다.
지금은 ‘자살‘을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삶을 더영위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들 뿐.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67년생이다. 그가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쓴 것은 2013년과 2014년으로 반백 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무수한 인생들, 특히 거리의 인생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저자가 50년이 채 되지 않은 자신의 인생과 50년보다 짧거나 긴 여러 인생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걸러낸 생각을 말한다.
˝되풀이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누구나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든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적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191)
‘이럴 리 없었던‘ 자신.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혹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우리는 ‘어떤‘ 자신을 꿈꾼다. 그 꿈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는 듯하다. 또한 하나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그 꿈대로 삶이 나아가지도 않는다. 일류 대학만 가면, 대기업에 취직만 하면, 고시에
합격만 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내 집만 생기면 등등등.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문제는 삶이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살고 또 살아야 한다. ‘이럴 리 없었던‘ 자신과 더불어.
그럼 왜 살아야 하지.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 더욱 수렁이고 더욱 미로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되도록 ‘의미‘ 따위 묻지 않는다. 그냥 산다.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니까.
˝우리 인생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대단한 천재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완전한 육체도 아니다. 보잘것없는 자신과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214)
˝무의미한 우연˝이지만 그럼에도 이 인생에 실낱 같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음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5)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날마다 아내를 보러 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그 아내분은 우리 엄마보다 훨씬 젊은데 치매가 일찍 오셨고 치매 속도도 빨라 언어와 운동 감각을 거의 잃고 온종일 누워 계신다. 요양원은 경기도 양주 장흥. 어르신이 사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다. 자차를 쓰지 않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두 시간이 걸려 요양원에 오신다. 어르신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다. 어르신은 점심 시간에 맞춰 요양원에 당도해 아내와 점심을 함께 먹고(도시락을 싸 오신다) 한 시간 넘게 말 없는 아내 곁에 앉아 계시다 집으로 돌아가신다. 어느 날엔가, 날마다 오는 것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어르신께 물었다. 어르신의 대답은 이랬다.
˝집에서 돌보던 때에 비하면 전혀 안힘들어요.(어르신은 늘 존대어를 썼다) 내가 다리 성해서 날마다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내가 날 못 알아보고 내가 다녀갈 줄도 모르지만, 그게 어떤 때는 마음 아프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보고, 내가 기억하면 되지. 내가 오래도록 기억해야지 하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면 다리에 힘이 생겨요.˝
나는 어르신의 말에 눈과 가슴이 동시에 뜨거워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내 어미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만, 내가 다년간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아프지 않은, 병이 들지 않은 이들은 말한다. 저렇게 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렇다. 저리 사는 내 어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날마다 아내에게 다녀가는 어르신이 한 말처럼 내게도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다. 엄마의 저런 삶조차 하나의 삶이라고.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기억하면 된다고. 나 또한 기억을 잃으면 내 자식이, 자식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엄마를 돌본 나를 기억해 줄 거라고. 삶의 기억은 그렇게 순환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엄마가 환히 웃는 시간은 고작 15분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것조차 금세 까먹지만, 엄마의 이 삶도 기꺼이 껴안게 되었다. 또한 아직 멀쩡하다는 인간들이 잘 저지르는 시건방진 동정과 안쓰러움에서 약간 놓여날 수 있었다.
기시 마사히코의 책은 내게 이런 이야기와 사색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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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다 20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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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무민(無+mean)세대’라는 신조어를 보았다.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 경쟁, 책임감, 강박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의미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지향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기성세대의 관점에서는 낙오자란 낙인을 붙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한다. 인생은 살아볼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과연 그 가치, 의미라는 것의 척도는 무엇일까. 누군가 나에게 삶에서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인생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뚜렷한 성과도 이루지 못한 채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삶의 연속이 쌓인 것이다. 그래서 시답지 못한 특별한 가치가 없는 듯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간다. 예전에는 억지로라도 유의미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라 강요받고 억지 목표가 조금의 성과로나마 보답을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지 모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억지스러운 유의미보다는 자연스러운 ‘무민‘에서 더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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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eyre 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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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쯤 되면 뭐든 좋을 줄 알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노련한 직업인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저녁에 퇴근하면 따뜻한 인간관계 안에서 고이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형편없다. 업무에서 생기를 찾기 어렵고 관계에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 행복하고 싶다고 고민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요즘 나의 고민은 행복보다는 의미다. 어쩌면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단 하나의 변화가, 희망이 없다는 뜻,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허무한 미래를 가늠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기시 마사히코의 말에 눈물이 솟았다. 행복은 무슨! 우리는 너무 행복을 우상화하며 산다. 꼭 행복해야 할 것처럼 간절히 매달린다. 그러나 행복은 거의 없다. 목숨 값의 디폴트는 ‘이럴 리 없었던’ 나 자신의 허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자칫 산만한 책이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의 생각의 단편을 여기저기 그러모았다고나 할까, 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다채로이 반짝인다. 작열(灼熱)이 아니라 ‘반짝임’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첫인상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그가 수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들을 ‘단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이야기가 그 사람을 그답게 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늘 삼가 조심해야 한다.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저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존경할지. 성심을 다해도 폐가 될 수도, 지극히 무례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생(生)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조약돌 같다. 어디에나 있어 하찮은, 단 하나뿐인 파편. 우리는 기본적으로 홀로 살아간다.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고통은 그 누구도 함께 겪을 수 없다. 그저 옆에 가까이 있어줄 뿐. 그때 생은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놀라움을 경험한다. 그의 세계가 내게 닿았을 때 열리는 또 다른 세계.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공간과 감각이 열린다.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나, 사람과 맞닿을 수 있음의 기쁨이 이렇게 찬란하다는 건 무엇일까. 생의 메커니즘은 혼란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외톨이는 가득 행복하기 어렵다. 맞닿을 수 없어서, 언제나 2프로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우연으로, 운으로 결정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무력하나, 그저 살아가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어쩌면, 나의 무의미한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쯤, 도박을 걸어야 할 순간이 온다. 아주 가끔, 이성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순간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전율한다. 아주 드물다. 한 번은 붙잡았고 몇 번은 놓쳐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전 생애를 걸어야 했던 순간, 그때의 떨림이 눈앞을 흐린다.
단언컨대 그 순간은 누군가가 내 삶을 “아름답다” 말해주었을 때였다. 살면서 그런 순간은 아주 희귀하게 온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일생을 지탱한다. 살아야 할 한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순간은 영원이 되고, 반짝이는 단 한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도 짧은 생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누군가가 내 삶에 닿는다면, 그리고 “아름답다” 말해 준다면, 이 생의 단편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지도 모른다. 기시 마사히코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러 전하고자 한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까, 모든 생의 단편은 이토록 간절하다.
전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아무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조리 우리 눈앞에 있으며, 언제라도 볼 수 있다. 이것 자체가 내 마음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단편적인 서사를 하나하나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대함’ 앞에서 언제나 압도당한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중략) 그리고 거기에서 빗겨 나는 사람, 또는 ‘빗겨 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귀여워’, ‘잘생겼어’, ‘축하해’, ‘참 잘했다’, 그리고 ‘사랑해’ 같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덧없는 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반복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매우 마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진정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그렇다면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일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다. (중략) 따라서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 (중략) 패배하면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때, 단 한 사람의 ‘천재’를 낳기 위해 그 일이 필요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올바름이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제발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원한다. 사회가 그것을 들어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향해 언어를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누구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격도 타인의 몇몇 인격을 모방해서 합성한 것이다.
그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정말로 작은 조각 같은 단편적인 것이, 단지 맥락도 없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이것도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 같은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별 볼일 없고, 대단치 않고,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나간 인생 속에서 진절머리 날 만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노래하는 노래는 됐고, ‘시시한 자신과 어떻게든 맞붙어 타협해야 하지, 그것이 인생이야’ 하는 노래가 있다면,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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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그녀 20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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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사전에서 <사회학>의 정의를 찾아 보았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난 뒤, 실은 <사회학>이라는 용어에 방점이 찍혔다. 어렴풋이 알 듯하지만 정확한 정의가 뭔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추천사에 철학지 지바 마사야는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기묘한 '바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대단한 모험은 아니다. 기묘하게 단편적인 장면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사회. 한순간 반짝이는 이질감.'
이 추천사로 책에 대한 호기심이 더 높아진 게 사실인데, 아마도 사회학 이라는 용어가 가진 '여러가지 사회 현상의 통일적인 관계'에 썩 어울리는 추천사가 아니었나 싶다. '기묘한 바깥'이라는 말이 이 책과 가장 어울린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생각한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1967년 생으로 사회학자이다. 오사카 번화가를 자주 어슬렁거리며 재즈와 동네 책을 좋아한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면서 <동화와 타자화>,<거리의 인생> 등의 책을 썼다. 저자는 '사회학자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화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이 책 역시 저자가 만난 사람들, 길거리의 이야기이다. '콕 집어 내세울 만한 주제나 내용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글자 그대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생각한 책입니다.'라고도 적었다.
이 책의 제목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것, 그게 책 속의 글들과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개개인의 삶이란, 어떤 큰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어찌 보면 자잘한 에피소드들의 묶음 일 테니까. 저자 역시 그 부분을 집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일본인 저자이다 보니, 책 속에 담긴 에피소드들이 간혹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아 낯설기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한 사회 안에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 읽으면서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저자의 어슬렁거리기는 실제로 길거리를 넘어서 인터넷 속의 블로그까지 이어진다. 내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적고, 그것을 누군가 읽고 생각하고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짜릿해진다. 젊은 사람, 연륜이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거창하게 사회학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밑줄 그으며 읽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이 책이 내게 알려 준 게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론 삶의 지혜를 다른 누군가의 글을 통해 배우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밑줄 그은 부분을 많지만 다 옮겨 본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밑줄 그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르니까.
-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한,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뜯기는 것 같다. 우메다 번화가에서 옷깃이 스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보통의` 이야기를 붙안고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인생의 이야기가 구술 채록의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조차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런 이야기가 딱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p29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본래 `우리`에게조차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잃어버리지도 않고 단절당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무언가일 뿐이다. p34
-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중략)
소수자(minority)라고 불리는 사람들, `당사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들 소수자나 이른바 `보통시민`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이나 가족이나 인간관계 등으로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때만, 잡다한 일에 마음이 얽매여 눈코 뜰 새 없을 때만, 우리는 있을 곳의 문제를 잊고 지낼 수 있다. 우리에게 있을 곳이란 없든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 문제를 잊고 있을 뿐이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있을 곳이 없다. 비록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있어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깥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p80-81
-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무언가로 상처를 입었을 때, 무언가에 상처를 입혔을 때, 사람은 우선 입을 다문다. 꾹 참으면서 견딘다. 또는 반사적으로 화를 낸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노려보기도 한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한편 웃을 수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의 반사적인 웃음도, 당사자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는 자학적인 웃음도, 나는 둘 다 인간의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실현 같은, 말만 그럴듯한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거대하고 용장한 서사 속에 없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람이 자유다. 이 말은 선택지가 충분히 있다든가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버티고 있는 꽉 막힌 현실의 끝자락에서, 딱 한 가지뿐인 무언가에 남겨져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p97-98
-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행복을 믿은 탓에 행복에서 길을 벗어나 버렸을 때는 이미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경우가 있다. p108
- 돌이켜 보면 정말 한심하고 별 볼일 없는 문제로 끙끙댔구나 싶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때때로 상상해 본다. 잘생기고, 행복하고,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남에게 칭찬받고, 평안하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인생을...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지금 현실적으로 그러하듯, 매일 무사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부족한 것 투성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것 투성이다. 그것은 껄끔껄끔하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 p115-116
-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격렬한 통증을 뇌에서 꺼내서 건네줄 수는 없다. 우리의 뇌 속으로 찾아와 느끼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섹스를 하고 있을 때에도 상태의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 부둥켜안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그저 각자의 감각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p138-139
-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p170
-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양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본 올바름이다. 이것이 타자에게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이비 의학에 빠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자기 자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할 때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올바름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다. p201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나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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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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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관점에 갇히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런 인간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태도는 인간적이지만 불편했다. 책의 말미에는 표정을 굳히다 못해 찡그리며 읽었다. 내가 가진 젠더 감수성으로는 읽기 힘들었다. 부제를 미리 읽고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다. 깊이 있는 사회학을 원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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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본시인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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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
1.왠지 저자 이름만보고 당연히 여성이라 생각했다.
2.미니멀리즘과 관련있을 법한 표지 탓에 내용도 그려려니 했다.
(심지어 난 목차까지 확인을 끝낸 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했다)
3.그래도 일본은 좀 사정이 나을거라 기대했다. (이렇게 까지 개인이 단절된 사회는 더 없을것이라)
저자가 이미 서두에 풀어 헤쳐 고백했듯이 이 글이 무슨 감동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목적도 있지않기에 난 단지 책이 잡담에 그치려나 했다. (실은 그 보다 더 알 수없는 구조)
정의를 던지는 틈에서 벗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본인의 안일함에 깜짝 놀라게 될지 모른다. 내가 그러했듯이. 인간이 학습이라는 멋들어진 명목으로 끊임없이 세뇌받는데 가끔 이런 글이 엉뚱하게 반기를 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도대체 명확히 알 수 없는 지루한 상황에 그것이 지루하다고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처럼 작가는 상황을 철저하게 외면하지 않고 오지랖을 선사한다.그게 친절인지 오만한 행동인지 구별할 기준이 될 이성조차 반응이 없다.
그 처럼 주절거리는 나는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도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타인과 대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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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드려요 - mizzle
마이페이퍼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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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5-10메뉴
20210510 #시라는별 35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 허수경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나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허수경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를 절반 가량 읽었다. 대체적으로 슬프다. 시인이 죽기 2년 전에 출간된 시집이라는 걸 알고 읽어서인지 허 시인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가 특히 더 그랬다.
이 시는 지난 번 소개한 <엄마의 나의 간격>처럼 존재의 원초적 고독을 노래한다. 우리 모두는 별개로 존재하는 섬이다. 허수경 시인이 ‘섬이 보내는 편지‘라 하지 않고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라고 쓴 까닭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연에서 나는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일찍이 정현종 시인은 <섬>이라는 짧은 시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라고 말했다. 정 시인이 사람 간의 소통 열망을 노래했다면, 허 시인은 사람 간의 소통 불가를 꼬집는다. 서늘한 통찰이다. 서늘한데 또 뭉클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신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소통을 염원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하려 해도,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가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섬과 섬 사이의 간격처럼 절대 메워지지 않는다. 메울 수 없기에 그 간격을 허수경 시인은 ˝세기의 차이˝이자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고독˝이라 부른다. 원초적 고독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책이 있다.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독하다. 뇌 속에서는, 우리는 특히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는 않는다.˝(132)
˝격렬한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가장 또렷하게 자기 자신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수도꼭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을 하나하나 전부 눈으로 쫓아가듯,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이 가능하다. /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난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1초1초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 그러나 고통뿐 아니라 애초에 신체적 감각을 느끼는 일 자체가 내가 나한테 얽매여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134)
고독은 허수경 시인의 말처럼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이기도 하나, 기시 마사히코의 지적처럼 내가 나임을 오롯이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나의 고독을 모른다. 나의 고통을 모른다. 나의 아픔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나 나나 그리 쓸쓸하게, 그리 처절하게, 그리 헛헛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서로가 알아봐 줄 수 있다. 비록 창백하게 빛나는 별이고 잊혀질 손이고 사라질 섬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 시인의 말따나 짤막한 안부 인사 뿐일지도. 고독이 고독에게 악수를 청할 때, 그 손은 꼬옥 잡아주자. 비록 실오라기 같은 공감밖에 나눌 수 없다 해도, 악수를 하는 그 순간만큼 뜨거워질 수 있을 테니까. 따뜻함이 피처럼 온몸으로 퍼질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순간의 힘으로 영원을 사는 존재들이니까.
지금은 오월의 싱그러움에 기대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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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2-08메뉴
"티셔츠만 입고 있어도 여자잖아. 우리 오카마는 이렇게 화장을 하고 한껏 꾸며 봐야 겨우 오카마 밖에 될 수 없으니까." 난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이라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수수하게 티셔츠만 걸쳐도 여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
우리 남자는 더 나아가 '어느 쪽에 속하는 성性인가?'를 생각하는 과제조차 면제받고 있다. 남자는 마음껏 '개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우리 곁에서 여성들은 '여자로 있다.'
자, 그렇다면 사회에 의해 물들여지고 딱지가 붙여진 존재가 '평범해지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형태를 취하는 착취가 있다. 그리고 본인을 걱정한다는 식으로 억지로 책임을 떠맡기는 듯한 개입이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양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본 올바름이다. 이것이 타자에게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문학의 집에는 여러 개의 입구가 있습니다. 계단과 양 옆의 기둥까지 갖추고 있는 정문이 있지요. 그 문으로 들어갈 때는 마치 궁전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또한 옆문도 있습니다. 더 소박하고 더 개인적인 문.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그들은 혼자 다니지요.
그리고 뒷문이 있습니다. 부엌으로 바로 들어가는 문, 요리사와 접시닦이,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문이지요. 그곳은 항상 소란스럽습니다.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바로 그 문이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제가 이용한 문입니다. 늘 서로에게 말을 건네면서요.
이제 여러분에게 건넵니다.
존 버거
2009년 7월
공감 (13) 댓글 (0) - =====
김동현의 내 인생의 책 구독
④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기시 마사히코
2020.12.30 20:39 입력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 관장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012302039025#c2b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기혜경의 내 인생의 책]④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연구과정에서 구술을 통해 취득하게 된 이야기들 중 분석할 수 없는 작은 일화와 단편들을 모아서 써내려간 책이다.
사회학자는 흔히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 패턴을 살핀 후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통계 데이터나 역사적 자료, 사회학적 이론을 통해 들추어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성소수자, 노숙인, 마사지 걸, 이민자, 조직폭력배 등이 들려준 일화를 그 어떤 평가도 배제한 채 풀어놓는다. 또 이렇다 할 줄거리가 있다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책에 담고 있지도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화자들의 목소리가 담고 있는 분노와 슬픔, 울분과 비애, 항의와 같은 다양한 감정의 결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close
한 사회의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그렇다고 방관하지도 않는 태도로 전달하고 있는 책은 서로 다른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결정과 판단들은 그 나름의 이유와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각각의 이야기들이 가진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민한 문장으로 의미 없는 부스러기 같은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소중한 삶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경쟁자를 넘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받는 현대사회 속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만나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타인은 경쟁하거나 밟고 지나가야 할 대상이 아닌 한걸음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서서 존중해야 할 대상임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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