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신천학살
- 신은미님은 그의 북한방문기에서 신천학살박물관을 방문하였을 때 박물관의 설명을 그대로 믿고,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글을 썼다.
- 통일운 동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그 단계는 벗어나야 될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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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볼 책:
황석영 <손님>
한화룡 <전쟁의 그늘>
한성훈<전쟁과 인민>
그러나 이 사건은 기독교계열의 우익과 공산주의 좌파가 서로 보복학살을 저질렀던 불행한 역사였다. 보통 빨치산하면 지리산 일대에 있었던 좌익 게릴라를 떠올리지만, 1946년 이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을 피해 구월산을 근거지로 우익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1950년 10월 13일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황해도 신천, 재령, 안악 지역의 우익 인사를 살상했다. 재령에서는 우익이 봉기를 일으키자 후퇴하던 인민군이 봉기를 진압하고 우익대원과 기독교인들을 반동분자로 처형하기도 했다. 인민군 후퇴 이후 유엔군이나 국군이 들어오지 않은 치안공백 사태에서 우익 기독교 청년들은 그들을 탄압했던 좌익 인사들과 가족들을 보복 학살했다.
재령읍의 반공봉기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노동당원 2,000명을 체포해 해당 면의 치안대에 인계했다고 한다. 보복학살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1950년 12월,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혀 인민군이 다시 황해도에 내려오자 신천일대에서 보복학살을 저질렀던 기독교인과 우익 청년들은 월남했다. 1945년 말에 월남했던 다수의 청년들은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로 모였는데, 영락교회 청년회가 나중에 '서북청년회'로 발전하게 된다. 서북청년회의 우익청년들은 군과 경찰에 들어가서 극우테러에 신명을 바쳤다.
1992년 템플턴 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는 기자회견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까지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에게 감화받은 서북청년단 청년들이 제주 4.3 토벌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서 야만적이고 잔인한 학살을 저지른데 대해서는 눈을 감을 때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황석영 소설 <손님>에서 주인공인 류오섭 목사를 인솔하던 북한 지도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끼리는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모두 외세의 탓이라고 해둡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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