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13편>독립정신 속의 친일정신
허구인물 전우치 2015. 10. 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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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한제국 사람들은 일본에게 깊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다.
1871년 일본 유신정부를 이끌던 3대 거두 암창구시(岩倉具視 이와쿠라 도모미), 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오쿠보 도시미치), 목호효윤(木戶孝允 기도 다카요시)은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사절단으로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 사이 1873년 8월 서향융성(西鄕隆盛 사이고 다카모리)은 정한론을 내세워서 일본 천왕의 승인을 받아 냈다. 그러나 마침 귀국한 사절단은 정부에 복귀하여 지금은 내치에 힘을 써 국력을 기를 때라면서 서향융성이 추진하던 정한을 중단시켜 버렸다.
서향융성의 1873년 8월 정한이 좌절되었 때는 완전히 막부가 사라진 뒤였음으로 과거 막부에서 생활하던 무사들은 생계의 수단이 사라져 힘든 고비였다. 여기에 1873년 징병제도를 발표하였다. 징병령 실시는 무사 집단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였다.
서향융성은 녹아도현(鹿兒島縣 가고시마)으로 돌아가 군사학교를 설립해 2만여명의 학생들을 길러 내면서 사냥으로 소일하였다. 그 사이 서향융성과 함께 정한을 추진했던 강등신평(江藤新平 에토 신페이)이 좌하현(佐賀縣 사가)에서 정한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1874년 7월 궐기하였다가 패배하였다. 1876년에 무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폐도령을 내리자 이번에는 웅본현(熊本県 구마모토)에서 무사들이 신풍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저항에 나섰지만 진압 당했다.
유신정부는 서향융성의 사학교가 급속도로 커지자 우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77년 1월 말 녹아도현에 있는 육해군 무기들을 타지역으로 이전하려고 하였다. 사학교 학생들이 반발하며 운반 준비를 하던 무기고를 습격하여 탈취하고 파견 나온 관리들을 억류하였다.
이로 인해 서남 내전이 발발하여 1877년 2월 15일 1만3천명의 사학교 출신 병사들이 북진을 개시하였다. 초기 유신정부는 서향융성과 사학교 병사들을 구분하여 서향융성은 살려 주는 쪽을 택하였으나, 1877년 9월 24일 전투중 서향융성의 죽음으로 무사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승만은 서향융성이 서남 내전에서 승리하였다면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 망했을 것이기에 서향융성의 군대를 격파한 일본 정부에게 대한제국 사람들은 깊이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1
서향융성 군대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의 유신정부는 이승만의 말과 다르게 오히려 아에 오래 전부터 정한에 적극적이고 치밀했다. 서향융성이 마지막 무사 집단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정한론을 갑자기 주장했다면, 이승만이 대한제국 국민이라면 조선을 지켜 줬으니 고맙게 여기라던 일본 유신정부는 정한론 개념을 수립했고, 광오하기까지 했다.
1867년 마지막 막부 세력인 에도 막부의 수장 덕천경희(徳川慶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서 통치권을 일본 왕에게 넘긴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일본 전국 통치권을 장악하여 왕권 중심의 유신정부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일본 유신정부는 1868년 재판(裁判) 천본구좌위문(川本九左衛門 가와모토 구자에몬)을 조선에 보내 왕정복고 정부가 수립됐다면서 선문서계(先問書契)를 접수하려고 하면서 이후 대수대차사를 정식으로 파견할 것임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선문서계에 황제를 지칭하는 황(皇)과 황제가 내리는 조서라는 뜻의 칙(勅)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점이 문제가 되어 접수를 거부 당했다.
1868년 11월 유신정부는 천왕 즉위식이 끝난 열흘 뒤인 21일에 통구전사랑(樋口鐵四郞 히구치 데쓰시로)를 대수대차사, 천본구좌위문을 간수에 임명해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1868년 12월 19일 부산항에 입항한 일본의 대수대차사는 서계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동래부사 정현덕은 전달하려는 서계가 정해진 형식에 맞지 않다고 하여 접수를 거절하였다.
동래부사 정현덕은 대마도주가 전례가 없었던 좌근위소장이라는 관직명을 사용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관직명에서 평(平)자 뒤에 조신(朝臣) 두 글자를 붙힌 것은 격식에서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지만,2 세종 때부터 대마도주는 평조신을 칭해 왔기 때문에 평조신 호칭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조선이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는 조선이 쇠로 만들어 준 직인이 아닌 일본이 자체로 직인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과3 청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황(皇)과 칙(勅)의 단어 사용이 기존의 서계 형식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오쿠보 도시미치), 암창구시(岩倉具視 이와쿠라 도모미)와 더불어 유신정부를 주도하던 목호효윤(木戶孝允 기도 다카요시)은 1869년 2월 상순에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선의 무례를 따지고, 만약 조선이 불복하면 무력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대조선의견서'를 삼조실미(三條實美 산조 사네토미)와 암창구시(岩倉具視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냈다.4
1869년 5월 유신정부군이 마지막 남은 막부였던 덕천막부(德川幕府)에 승리하면서 무진전쟁을 끝으로 왕실제도에 걸림돌이 될 막부의 위험을 제거하였다.
무진전쟁 종전 2개월 후 설치한 외무성에서 1870년 4월에 태정관 판관에게 대조선 3개조를 건의 했다.5 1조는 일본의 국력이 강해질 때까지 조선과 교섭을 중지하고 철수하는 것으로, 단점은 러시아의 남하와 역대 천황이 정한했던 공적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2조는 목호효윤을 정사로 해서 부사 및 기타 관원 너댓명을 뽑아 전함 2척을 동원하여 조선과 개국 교섭을 해서 조선이 거부하면 전쟁을 해야 하며, 그 전쟁은 이름 없는 폭동이 아니라 삼한을 다스렸던 신공황후의 정한 업적을 잇는 위업이라는 것이었다. 3조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니 청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청국과 동등한 관계를 맺어서 저절로 조선이 일본의 아래에 놓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872년 1월 14일에는 삼산무(森山茂 모리야마 시게루), 길강홍의(吉岡弘毅 요시오카 고우키), 광진홍신(廣津弘信 히로쓰 히로노부)을 사절단으로 조선에 파견하면서 아에 천자(天子)라고 쓴 서계를 보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일본 유신정부가 서향융성의 정한론을 막았다는 이승만의 말과 다르게 일본 유신정부는 벌써 서향융성이 정한론을 내세우며 서남 내란을 일으키기 1년 전인 1876년 2월 28일 운요호로 함포 공격을 가하며 침략하여 조선과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맺는 것으로 정한론을 실행해 옮겼다.
정한론은 왕권 정치로 복귀한 유신정부가 왕권 강화나 국수주의로 흘렀을 때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주제였다. 목호효윤은 1869년 2월 상순에 보낸 같은 편지에서 부산항을 점령하면 금과 은 등의 이익이 있다고 하면서,6 조선 땅은 고대 신공황후가 왕국을 세워 다스렸던 곳이기에7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이유라고 밝혔다.8
그런데 독립정신에 나타난 강화도 조약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은 이 조약이 일본의 무력 침략에 이끌려 강제로 체결당했는데도 우호적이었다.
이승만이 일본에 우호적이면서 심지어 대한제국 사람은 일본에게 깊이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친일 성향에는 우선 이승만 자신이 대동합방론에서 감명마저 받았었다고 밝혔던대로,9 박영효를 지원하면서 대한제국 내정에 간섭하던 항옥성복(恒屋盛服 쓰네야 세이후쿠)과 조선 학교들에 돈을 주면서 일본인 교사들을 파견하고 있던 동아동문회의 공작에 넘어 간 독립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서 몇몇의 친일적 인사들의 영향이 있었다.
여기에 이승만에게 친일 성향을 심어 준 또 하나의 세력은 바로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기독교계의 친일적 사고는 독립협회에도 전반적으로 퍼졌다. 미국으로 피신한 서재필도 감옥에 있는 이승만에게 미국 선교사들의 친일 논리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10
미국 선교사들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매우 낙관적으로 보았다.11 일본이 대한제국의 교육에 열성적이고 개화를 돕고 있으니 대한제국은 일본에 협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대한제국 인구가 1,500만명 수준이니 20만명 규모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고, 일본이 우수한 무기를 지원해 주고 잘 지휘만 해주면 일본군이 러시아군과 싸울 때 대한제국 군대가 후방에서 국경을 지켜낼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대한제국은 식량 생산이 많기에 대한제국 국민과 일본군을 모두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러시아는 대한제국 국민에게 복지를 안 해 줬지만 일본은 복지 정책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대한제국과 일본은 같은 운명으로 일본이 흥하면 대한제국도 흥하고, 일본이 망하면 대한제국도 망한다고 여길 정도였다.12
미국 선교사들이 러시아는 대한제국 국민의 복지 정책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러시아를 대신해서 대한제국 국민의 복지를 실현해 줄 것이라고 말한 점에 비추어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들과도 접촉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이승만은 배제학당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에게서 친일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은 서양인으로서 대한제국과 일본간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에는 별 관심이 없이 무조건 러시아가 나쁘다는 당시의 서구 여론에 따른 반러시아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승만은 같은 동양인보다는 피부색이 다른 서양인이 더 나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은 주변국간의 힘의 균형 보다는 우선은 같은 동양인인 일본을 도와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도록 해야 한다는 짧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도 역시 당시 친일파들의 특징인 백인 러시아에 대한 매우 강한 증오감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러시아와의 개전 초기인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게서 전쟁 조력을 끌어 내려는 일본과 강제로 맺은 한일의정서에13 관한 대한제국 사회의 우려를 꾸짖으면서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성한 한일의정서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일본이 수십년간 대한제국을 개화해 주려고 했는데도 거부한 것은 대한제국 관민들의 잘못이니 책망 받아야 하고, 한일의정서야 말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존중해서 대한제국의 강토를 지켜 주기로 한 것이니,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호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 사람들은 마땅히 일본에 빚을 졌다고까지 주장하였다.14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미국 언론에 처음 한 발언도 자신은 친일 대변 단체 일진회를 대표해서 미국에 왔다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이 잘 해 주고 있을 때 빨리 개화해서 교육 받고 벗어나자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독립정신을 마무리한다.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잘 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와 힘의 비교 우위를 판단하면서 정한(征韓) 단계를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조선 및 대한제국이 일본과 체결한 조약들의 흐름이 일본의 단계별 정한의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개화나 교육으로 식민지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최후기에 가장 유용한 선택은 새로운 무장세력이 등장하여 무기를 공급해 줄 나라를 확보하고, 강력한 비정규전 전투를 전개하면서 무기 공급 국가를 전선으로 끌어 들여 연합 작전 단계를 달성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과거를 가정해서 돌아 본다면, 대한제국은 이승만과는 반대의 선택을 해야 했다. 어차피 힘이 없어서 일본에게 무너질 것이라면 아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일본과 싸워서 공동의 승리를 쟁취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면 이질적인 조선을 직접 통치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보다는 차라리 독립국, 최소한 자치구로 남겨 둘 여지라도 있었다. 협상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만주를 차지해도 동질적인 조선을 마저 차지해야만 중간에서 지리적으로 차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주 식민지를 지켜 낼 물품 공급기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만 했다.
실제로 일본은 대한제국 멸망후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일본에 식량을 공급할 식량기지로 삼았고, 북부는 만주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전기와 공산품을 공급할 생산기지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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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일본이 수십년간 대한제국을 개화해 주려고 했는데도 거부한 것은 대한제국 관민들의 잘못이니 책망 받아야 하고, 한일의정서야 말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존중해서 대한제국의 강토를 지켜 주기로 한 것이니,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호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 사람들은 마땅히 일본에 빚을 졌다고까지 주장하였다.14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미국 언론에 처음 한 발언도 자신은 친일 대변 단체 일진회를 대표해서 미국에 왔다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일본이 잘 해 주고 있을 때 빨리 개화해서 교육 받고 벗어나자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독립정신을 마무리한다.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잘 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와 힘의 비교 우위를 판단하면서 정한(征韓) 단계를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조선 및 대한제국이 일본과 체결한 조약들의 흐름이 일본의 단계별 정한의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개화나 교육으로 식민지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최후기에 가장 유용한 선택은 새로운 무장세력이 등장하여 무기를 공급해 줄 나라를 확보하고, 강력한 비정규전 전투를 전개하면서 무기 공급 국가를 전선으로 끌어 들여 연합 작전 단계를 달성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과거를 가정해서 돌아 본다면, 대한제국은 이승만과는 반대의 선택을 해야 했다. 어차피 힘이 없어서 일본에게 무너질 것이라면 아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일본과 싸워서 공동의 승리를 쟁취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면 이질적인 조선을 직접 통치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보다는 차라리 독립국, 최소한 자치구로 남겨 둘 여지라도 있었다. 협상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만주를 차지해도 동질적인 조선을 마저 차지해야만 중간에서 지리적으로 차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주 식민지를 지켜 낼 물품 공급기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만 했다.
실제로 일본은 대한제국 멸망후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일본에 식량을 공급할 식량기지로 삼았고, 북부는 만주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전기와 공산품을 공급할 생산기지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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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116~117쪽, 이때에 아라사가 또한 사신을 보내어 원산에 이르러 우리 정부에 통상조약을 청하거늘 또한 듣지 않았으나 서양의 세력이 점점 핍근하여 세상에 공론이 분운한지라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동래에 이러러 통상 약조를 청구하여 왈 '지금 일본이 각국과 통상하여 세상 형편을 본즉 옛적 모양으로 혼자 지낼 수 없으니 불가불 상통하여야 견딜 것이오. 상통하자면 정치와 풍속을 일신하게 변혁하여 새법을 모분하기 전에는 또한 부지하지 못할 줄을 깨달은 고로 날마다 서양법을 모본하기에 관민이 일심하여 점점 개명에 나아가는 효험이 벌써 적지 않은지라 귀국도 우리와 같이 타국에 왕래를 통하여 부강을 도모 하는 것이 심히 옳다'하고 동래 부윤에게 청하여 그 글을 정부에 올렸더니 정부에서 곧 물리치며 일러 왈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글을 받고자 아니하니 그 사신을 주어 끌어 내어 쫓으라' 하는 지라 일본 사신이 부득이 물러가니 일본 정부에서 다시 교섭 하려다가 마침내 효험이 없었으며 1870년에 하방의질이가 들어 와서 다시 시험하다가 또한 이루지 못한지라 그후 1875년 9월에 일본 군함 2척이 청국 치푸따에서 조선 해변에 지나다가 강화 근처에 내려 배에서 먹을 물을 길을 새 근처 백성들이 보고 법국이나 미국 군사로 알고 일시에 총을 놓아 맹렬이 치거늘 일병이 대단 격노하여 일제히 내려서 인민을 겁박하고 촌락을 불 놓은 후에 곧 물러가 장기에 이르러 그 사실을 고하니 이때에 일본 정부에서 당론이 일어나 혹은 조선을 치자고도 하며 혹은 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하여 시비가 분운할 새 서향륭성이 살마패 영수가 되어 급히 쳐 없애자는 주의로 심지어 군사를 일으켜 정부를 핍박하기에 이르매 정부에서는 하는 말이 지금 곧 군사를 보내면 조선을 파하기는 심히 쉬우려니와 이긴 후에 마땅이 후환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정돈하자면 지금 세력으로 이로 적장치 못할 것이니 쳐 이기는 것이 우리의 이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부터 군사를 잘 길러 후일에 일할 힘을 준비하며 일변으로 조선을 호의로 권하여 다행이 들으면 부국강병할 도리로 동심합력하여 서양 형세를 막는 것이 참 일체로 완전한 계책이오, 말일 듣지 아니하면 다시 군사를 들어 치는 것이 늦지 아니하다 하여 서향륭성의 계책을 듣지 안는지라 서향이 대병을 일으켜 정부를 몰아내고 자의로 행하리라 하여 전후 7달 동안을 큰 전쟁이 되었으매 이 일에 인연하여 죽은 사람이 2만여명이오, 허비한 재정이 2천만원 가량이라 필경 서향이 패하고 평화를 주창하던 편장이 이기어 조선에 큰 병화가 이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양국의 다행이라. 이때에 우리나 정부서는 이런 위급한 형편에 처한 줄을 짐한 이들이 혹 있었던지 모르거니와 전국 백성은 아무런 줄 모르고 꿈속에서 지낸지라. 만일 이 전쟁이 생기게 되었더먼 임진 이후 큰 전쟁이 또 한번 되었을 것이니 우리 나라의 이해는 어떠하였을런지 질정할 수 없었거니와 서향의 뜻인즉 가히 망령되다 이를지라. 남의 4,5천년 옛나라를 이렇듯 무인지졍같이 여기고 어찌 패하지 않기를 확실히 장잠 하였으리오. 일본 정부에서 그 주의를 좇지 아니함은 과연 장원한 계책에 밝히 보았다 이를지라. 어두운 이웃나라를 극력하여 깨우쳐서 합력하여 보전하자 함은 우리 나라 신민들이 일본에 대하여 깊히 감사히 여길 바로라. [본문으로]
- 고종실록 1869. 12. 13,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현덕(鄭顯德)의 장계(狀啓)를 보니, 훈별(訓別) 등의 수본(手本)을 낱낱이 들면서 아뢰기를,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달(平義達)의 서계(書啓) 중에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이라고 써 왔는데, 비록 이러한 것들로 끌어댈 만한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평(平)자 아래에다 조신(朝臣)이라는 두 글자를 쓴 일은 이전에 없던 일이니, 격식에 크게 어그러져 있습니다. 그러니 임역(任譯) 등으로 하여금 엄하게 책임을 추궁하고 타일러주어 수정해서 바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직명(職名)이 이전과 다르게 된 것은 벌써 일상적인 규례가 아닌 만큼 300년 동안 약조를 맺어온 본의가 어찌 이러하였단 말입니까. 특별히 말을 만들어 개유(開諭)해서 서계(書契)를 수정하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본문으로]
- 위의 책 [본문으로]
- 木戶孝允伝記編纂所, 木戶孝允文書 第三, 日本史籍協会 1931, 239쪽,大村益次朗宛書翰 明治二年正月上旬 一過日も申上候通征韓之一條得と御高案之上御勇決奉願度 征韓と申候而も只初發より干戈を以相征し候譯に而は無御座今日皇國御國是と相定り候處を以宇內之條理を被爲候御儀,是に相戾り候ときは直に以干戈御征伐被爲遊候而至當至極之事と奉存候元來大政御一新之御一新たる所以は. [본문으로]
- 外務省編, 大日本外交文書 第三卷, 日本国際協会 1940, 144~145쪽,對朝鮮三箇條伺ノ件辨官御中, 外務省.朝鮮國探索御用彼地ヘ被差遺候もの共今度歸府仕いさる申立候趣も有之右に付當省見込三條左に陳啓仕候.1.先般黃政復古幕府を廢レ萬機御親裁の旨彼國ヘ報知の書翰嚴原知藩事より先つ寫を以差示候處黃の字勅の字等是迄幕府文書に不相見後に府喋々議論を起三年の星想を經今以不敬至極の儀に御坐候右は御國體を辱レめ候義に付右を議論の根低となレ戰端を可開辭柄十分有之候間速に其用意に及度と申唱候もの可有之候得共未た勅使を被差遺候と申譯にも無之元萊謬例を存レ居候對州の使价執次後迄の事に付此廉而巳を擧候て戰端を開候譯には至間敷と被存候間左の條々を以想伺候.1.朝鮮國の義固陋未開物産寡少には候得共寛裕貿易を開候得は御國人のため相應潤澤も可有之歟乍去寬裕貿易を爲開候迄には前文の如も國風故多少の擧動を費さす候ては頑固の政裕決て破れかたかるヘくと擧存候間寧ろ被れか此度拒絶いたレ候を期會となレ朝鮮の交際を廢止レ對州の私交をも爲相鎖兩國の間音問を絶レ倭館の人數爲引拂風馬牛不上關涉ものに御一定の方可然歟左條得は對州の謬例も自然に廢沮レ差向佛都合も有之間敷歟尤右は鎖國の古習に陷り且魯國の深謨容易に呑倂本朝は其際に到り空手傍觀に陷り烈聖の遺烈豊臣氏の餘光德川氏の周旋千載の交誼も一朝に斷絶レ悲嘆かりなぎ儀に候得共廟議結せす良謨無之歲月櫏延よりは實に止を得す御國力充實迄の間は卻て御据置の方と存候事但本文の通絶交いレ條得ば對州は格別の御扶助無之候ては國計難相立候事.1.右交信廢止の義不可然候はゝ兼て欽差の命を奉レ居候事極急速に木戶從三位御呼上にて同人之正使被命嚴原藩知事ヘ副使被命其他外務省官員四五名使節職務を分課レ肥前肥後兩藩に堅军の軍艦所特の趣に付右二艘とも朝鮮御用被命前書官員兵隊とも乘組御一新の報知擯斥の廉論破幷開港開市兩國往來自由の條約を興候義懸け合候樣皇使被差遺候一條火急に御處分油之度右御入費凡拾萬にも及可申か右は條理上に於ての我利御分解御候得は不得止事と奉存候勿論軍艦威を以差迫候とも被方不伏に候はゝ不得巳干戈を被用候場合に至り可申候其節は在昔神功皇后御一征の雄績を被爲繼候御偉業も日を刻レて可相立決て貿名暴動の擧に有之間敷被存候事.1. 朝鮮を支那に服從レ其正朔節度丈け受居候事に御坐候就ては先支那之 皇使を被遺通信條約等の手順相整其歸途朝鮮王京に迫り皇國支那と比肩同等の格に相定り候上は朝鮮は無論に一等を下レ候禮典を用候て彼方にて異存可申節有之間敷萬一猶不伏の筋も候はゝ和戰の論に及候とも遠き靑國と通信相整候上は壬辰の役明軍朝鮮を援候樣の事容易に被行まレく所謂遠く和レて近く攻るの理にも可有之歟尤支那通信は朝鮮交際より急務とも不被存候得共朝鮮御懷撫の趣意より論候得は最可急手順と存候事右三條の內何れか御決定被下度此節に到り更に御因循にては益御國辱を來可申と存候此段相伺候也. 午四月. [본문으로]
- 木戶孝允伝記編纂所, 木戶孝允文書 第三, 日本史籍協会 1931, 232쪽,大村益次朗宛書翰. 明治二年正月上旬 朝廷之御力を以主とレ兵力を以韓地釜山附港を被爲開度是元より物産金銀之利益は有之間敷却而御損失とは奉存候得共. [본문으로]
- 神功皇后摂政前紀, 日本書紀 神功(じんぐう)皇后は、軍船を率いて新羅に進んだ。新羅王は降伏し、(王子の)微叱己知波珍干岐(みしこちはとりかんき)を人質に差し出した。それを聞いて高麗(こま=高句麗)と百済(くだら)も服従した。神功皇后は三韓(新羅、百済、高句麗)を従属させ、新羅からお戻りになった。神功皇后摂政紀5年3月条 新羅王の朝貢の使いがきた。本当は、以前に人質として差し出した(王子の)微叱己知波珍干岐(みしこちはとりかんき)を取り返すのが目的であった。皇后を騙して王子を新羅に逃れさせた。新羅の使いは殺された。神功皇后摂政紀46年3月条 (伽耶諸国の一国)卓淳(とくじゅん)国に使いを出した。この国の王(こきし)は百済から「日本(やまと)の使いが来たら知らせてくれ。」と言われていたので、日本の使いと卓淳国の家臣は一緒に百済に行った。百済王は非常に喜んで日本の使いに贈物をした。神功皇后摂政紀47年4月条 百済と新羅が同時に朝貢してきた。新羅の貢物は多く、百済の貢物は少なかったのでわけを聞くと、日本に来る途中で百済の貢物を新羅が奪ったという。皇后と誉田別尊(ほんたわけのみこと=即位する前の応神天皇)は使いをお出しになって新羅を責めた。神功皇后摂政紀49年3月条 軍勢を派遣して百済とともに新羅を討って、加羅の7国を回復した。忱彌多礼(とむたれ=済州島)を百済に与えた。百済王は毎年春秋に日本に朝貢することを約束した。神功皇后摂政紀50年5月条 百済の使いが来朝した。皇后はお喜びになって(伽耶の)多沙城(たさのさし)をお与えになった。神功皇后摂政紀51年3月条 百済が朝貢してきた。皇后は「私が親しくする百済は天の賜物である。恩恵を与えよ」とおっしゃられた。神功摂政紀51年即年条 百済に使いをお出しになられ、「百済とは深く長い友好を続けたい。」と伝えた。百済王と王子は忠誠を誓った。神功皇后摂政紀52年9月条 百済の使者が来朝し、七枝刀(ななつさやのたち=奈良県天理市の石上神宮に今につたわる七支刀)をはじめ、数々の宝を献上した。 [본문으로]
- 木戶孝允伝記編纂所, 木戶孝允文書 第三, 日本史籍協会 1931, 233쪽,大村益次朗宛書翰. 명치2년정월상순. 朝廷に而巳蝦夷之利を御貪り無之候得はいか樣とも手段は相立可申韓地の事は 皇國之御國體上立候處を以今日之宇內之條里を推候譯に而東海に光輝を生レ後はニゝに始り候事と愚考仕候若レ一干戈を相交候ともは必急迫に不致凡年々之入を定め一地步を占め候上は得と後來の掠了を立其力之可續ものを以無倦怠盡力仕候とは必兩三年を不出レて天地大一變實行相擧り萬世不拔之.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43~44쪽 The amount of undercover intrigue in that period passes belief. The Japanese were especially active. Using the reformist Korean nationalists who had sought refuge in Japan, they undertook to make friends with the Independence Club members in the new Privy Council. They posed as the real champions of Korean independence, warning that Japanese help was needed against Russia, China, and the Western imperialists. A number of the expatriates returned from Japan to Seoul and commenced spending money freely to entertain the Privy Council members. Rhee was too young and inexperienced to be wholly aware of their aims or of the source of their funds. He had many secret talks with these men concerning the formation of a Dai Dong Hap Bang a Confederation of all the Peoples of the Great East. The program was an early forerunner of Japan's later plan for an All-Asian Co-Prosperity Sphere. Gradually the expatriates revealed that their plans called first for Il Lo Chun Chainga.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and then for II Mi Chun Chainga war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Japan, they argued, was doing all it could to protect the Far East against Western encroachment. China and Korea must join with them in this holy cause. They showed Rhee extensive manuscripts, mapping out detailed plans for these two wars. He was deeply impressed by the motives they professed, for it was all too clear that the East was indeed being inundated by the West. 첩보 활동 규모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는데 그 시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적극적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개혁가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했는데, 그들은 새로운 중추원 안의 독립협회를 친우로 만드는데 착수했다. 한국 독립의 진정한 대변자임을 자처하면서, 러시아, 중국, 서양 제국주의자들과 맞서는데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경고하였다. 망명자들 일부가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와 중추원 의관들을 대접하는데 돈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전혀 목적이나 돈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이승만은 대동아 전민족의 연합 '대동합방' 성립에 관련된 이 사람들과 많은 비밀 대화를 나눴다. 그 계획은 나중에 일본의 '전아시아 공영' 계획을 위한 일본의 초창기 선구적 안이었다. 점차 망명자들은 먼저 러시아 일본간의 러일전쟁과 이후 미국과 일본간의 미일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계획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이 극동 아시아를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이 성스러운 대의에 그들과 함께 동참해야 한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광범위한 육필 원고들, 이 두 전쟁에 대한 매우 자세하게 세워진 계획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그들이 공언한대로 동양이 참으로 서양으로부터 침식당하는 것이 매우 확실하기에, 그 동기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72쪽, A few months before his pardon, he received a letter from Philip Jaisohn, the founder of the Independence Club, who was then in America. Dated April 6, 1904, the letter read: So far Japan is on the right side and waging war for the principle which every civilized being must uphold and support. I sincerely hope God will be with the nation which fights for righteousness and civilization . . . Japan or any other nation cannot help Korea unless Korea helps herself and is willing to be helped by another. If Korea continues to act like a child she will surely become a part of some other nation. 이승만은 특사를 앞둔 몇 달 전에 미국에 있던 독립협회 창설자 서재필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1904년 4월 6일자로 되어 있는 편지를 읽어보면: 현재까지 일본은 올바르며, 모든 문명인들이 유지하고 지지해야 할 원칙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신이 고결함과 문명을 위해 싸우는 국가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일본 또는 어떤 나라도 한국이 스스로 돕고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한 한국을 돕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한국이 어린 아이처럼 행동을 계속하면 다른 나라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본문으로]
- HOMER B. HULBERT, KOREAREVIEW VOLUME4 74~77쪽, on the twenty-third of February the Korean and Japanese governments through their proper representatives signed a treaty of offensive and defensive alliance. Of course there is no use in discussing the degree of spontaneity with which the Korean government entered into this compact. It was, as the Koreans say, a case of halsu epso; but if we look at it from a democratic standpoint and ask what the majority of the Korean people think about it we shall get another aspect of the question. The present chaotic state of the national finances and of popular discontent show something of what Russian influence has accomplished in Korea ; and the people are coming to realize the fact. They are passionately attached to the theory of national independence. This word independence is a sort of fetich to which they bow, but they think that independence means liberation from outside control alone, forgetting that genuine independence means likewise a liberation from evil influences within, and that liberty so far from being carte blance to do as one pleases is in truth the very apotheosis of law. What Korea wants is education and until steps are taken in that line there is no use in hoping for a genuinely independent Korea. Now, we believe that a large majority of the best informed Koreans realize that Japan and Japanese influence stand for education and enlightenment and that while the paramount influence of any one, outside power is in some sense a humiliation, the paramount influence of Japan will cause far less genuine cause for humiliation than has the paramount influence of Russia. Russia secured her predominance by pandering to the worst elements in Korean officialdom. Japan holds it by strength of arm, but she holds it in such a way that it gives promise of something better. The word reform never passed the Russians' lips. It is the insistent cry of Japan. The welfare of the Korean people never showed its head above the Russian horizon but it fills the whole vision of Japan; not from altruistic motives mainly but because the prosperity of Korea and that of Japan rise and fall with the same tide. Korea has reached a definite crisis in her history. If Russia wins, Korea will become a small fraction of that heterogeneous mass called the Holy Russian Empire, for by signing an offensive and defensive alliance with Japan Korea becomes the foe of Russia and this will be all the excuse Russia needs for seizing the whole peninsula in case the war terminates favorably for her. Having made this alliance, therefore, it is the business of all Koreans both official and nonofficial to bend every energy to the securing of a Japanese victory. Korea has never had a better chance than the present to disprove the statements of those who say that the Koreans are a decadent people and lacking in stamina. Those who know best are aware that with a proper incentive and proper leadership the Koreans of the northern and eastern provinces would fight magnificently. They have not had an opportunity to show what they are made of since the days of the Taiwun kun when in 1866 they defeated the French in Kangwha and in 1871 when they held a little fort on that Island against an over whelming force of Americans and died every man at his post rather than give up their position.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there are some twelve or fifteen million people in Korea. From this number an army of two hundred thousand could be raised. Such an army properly fed, clothed, paid and led would prove a powerful weapon in the hands of the Japanese. Korea produces enough rice and other food stuff to feed both the Korean people and the Japanese army and when once the Russians were driven out of Manchuria the Japanese army could leave behind them a competent Korean army to safeguard the frontier. This army at first under Japanese leadership would be a better military school than any built in Seoul, it would inspire the Koreans with self-respect and would soon break down the prevalent notion that military rank is inferior to civil rank [본문으로]
- HOMER B. HULBERT, 위의 책,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그들의 적합한 대표들을 통해서 공수동맹조약(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가 이 맹약에 가입하는데 있어서 자발적인 범위의 논의는 없었다. 이것은, 대한제국인들이 말하기를, 「할 수 없소」라는 경우로, 그러나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아 대한제국인 대부분이 이 맹약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질문의 다른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국가 독립론에 열성적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는 심사숙고하며 론을 말한다. 이 독립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고개 숙이는 일종의 숭배이지만, 그들은 독립이라는 뜻을 순수한 독립은 사악한 외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것을 잊은채, 외부의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혼자 있음을 뜻하고, 만족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보다는 차라리 자유는 사실 법의 신성함이라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인이 원하는 것은 교육으로 단계들이 방향대로 진행되기 전까지는 순수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희망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최고의 대한제국인 지식층 거의 모두가 일본과 일본인들이 교육과 계몽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 외부 세력은 굴욕감에 빠지고, 일본 최고의 영향력은 러시아의 최대 영향력보다는 진정 굴욕감 유발이 훨씬 더 줄어드는 요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러시아는 대한제국 관료들 속에서 최악의 요소를 이용해서 우위를 확보했었다. 일본은 군사력으로 그것을 억제하고 있지만 보다 더 나은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저지하고 있다. 개혁이라는 단어는 결코 러시아인의 입술을 통과한 적이 없다. 일본의 끈덕진 눈물이다. 대한제국인의 복지는 러시아인 지평선 위로 머리를 보인적이 없었지만 일본의 모든 전망이 채워주고 있는데, 크게 이타적인 동기들에서가 아니라 한국의 번영과 일본의 번영이 같은 흐름으로 성하고 쇠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역사상 분명한 위기에 봉착했다. 러시아가 이긴다면, 대한제국은 신성러시아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질적인 작은 일부가 될 것이고, 일본과 공수동맹 조약을 맺은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적이 되어 전쟁이 나면 순조롭게 끝내고 모든 반도를 점유할 구실이 될 것이다. 체결된 이 동맹이 있음으로, 그러므로, 모든 대한제국인의 공식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일이다. 대한제국은 누군가 대한제국인은 쇠퇴하고 원기가 부족하다고 말한 성명서를 반박할 더 좋은 기회를 지금처럼 가져 본 적이 없다. 최고라고 알려진 그들은 적절한 동기와 적절한 지도력으로 북쪽 국가와 동쪽 국가들이 장엄하게 싸우게 되는 대한제국을 알고 있다. 1866년 강화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했을 때와 1871년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맞서 섬의 작은 항구를 사수하다가 주둔지를 포기하기 보다는 모두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대원군의 날들로부터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갖지 못해 왔다. 대한제국에서 살고 있는 1,200만에서 1,500만명을 기억해야 한다. 이 숫자는 20만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지불하고, 이끈 군대는 일본인의 손으로 강력한 무기로 향상시킬 수 있다. 대한제국은 대한제국인과 일본군 모두를 부양할 수 있는 쌀과 다른 음식물들을 충분하게 생산하고 있기에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 낼 때 일본군은 후방에 능숙한 대한제국 군대를 국경 수비대로 남겨 둘 수 있다. 이 대한제국 군대는 처음에는 일본의 지휘 아래 있는 것이 서울에 지어진 어떤 곳보다 더 나은 군사학교가 될 것이고, 대한제국인의 자존심을 고취하고, 머지 않아 군대 계급이 열악한 시민 계급이라고 널리 퍼진 관념을 깨부술 것이다. [본문으로]
-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본문으로]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175~178쪽, 이 약조를 조인하여 세상에 반포하매 각국이 일본의 후의를 칭찬하여 혹은 이르기를 일본이 대한으로 인연하여 여러 번 힘 쓰다가 이번에 다시 전쟁하여 아라사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독립을 보호하는 주의를 그지지 아니 하니 그 의리의 실상됨은 가히 알겠다 하며, 대한 관민들은 말하되 일본이 우리 국정을 찬조하는 권리가 있다하여 장차 국권을 전혀 주장코자 할지라 우리 백성이 마땅히 일어나 반대해야 이 약조를 물시하리라 하고 혹은 각 문에 방을 붙히고 혹은 백성을 선동코저 하며 혹은 외부 대신의 집에 폭발약을 던지니 일본 공사가 군사를 보내어 보호하며 부상을 잡으로라고 자주 우리 정부에 조회하는지라 인하여 스스로 정된되었으나 아직도 이 약조의 성질을 자세히 아는 자 적어서 종시 불평한 생각을 품는 자 불소한지라 『그 관계를 대강 말할진데 일본이 토지와 국권과 황실을 보전하게 한다 하며, 정치를 찬조한다 함이 실로 우리 독립권리에는 손해가 불소함이라. 이 약조만 가지고도 일본이 대한을 어떻게 대접하든지 못랄 것이 없을지니 헛일 함만 높여 주는 것이 외향으로는 일본의 생광을 낼대로 내고 속으로는 모든 권리를 낱낱히 잡고 앉음이 어찌 일본의 상책이 아니리오. 이 약조를 인연하여 일본의 권리가 어디까지 미칠 것은 우리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오, 이것을 알진데 이렇게 되는 것이 또한 책망이 대한 관민에게 있는 줄을 더욱 알아야 할지라. 거의 수30년래로 남이 어떻게 잘 대접하였으며 바로 권면하여 주어 좋은 기회가 얼마나 있었으며 진심으로 도와 줌을 몇번이나 있었기에 종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점점 못되게만 하여 남이 번번이 전쟁하여 붙들어 주기에 이르니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남을 부족타 하리오. 지금에 일본이 종시 독립면목을 존중히 여기며 강토를 완전히 보호하기 담보한다 하니 이는 일본이 대한에 대한 후의라고도 하려니와 또한 가국의 공론이 있음을 인연하여 세상에 면목을 빛내는 주의가 얼마쯤 있음이라. 우리가 마땅히 일본과 각국에 대하여 얼마 빚진 줄로 생각하고 하루 바삐 벗기를 도모할지라. 만일 이 뜻을 생각지 못하고 도리어 남을 원망하는 듯이 자라다가가는 마침내 남의 기회만 좋게 하여 주어 필경 세상에 반포하되 우리가 이렇듯 힘써 대한을 도와 주었으되 대한은 도리어 우리를 원수로 대접하며 종시 독립하기를 힘쓰지 못하니 장차 어떤 나라를 다시 청하여 무슨 화란을 일으킬런지 모를지라 할진데 누가 홀로 나서서 그렇지 아니함을 증거하리오. 그런즉 우리가 지금 와서 일본을 밉게만 여기면 우리에게 해가 되가 되고 일본의 이로운 기회만 주는 것이니 사람마다 이 생각을 파한 후에 또 일본을 전혀 고맙게만 알고 수치되는 줄을 몰라 붙들어 주기를 바라서 약한 계집이 남편에게 의지하듯 하여 따로 설 줄을 알지 못할진데 이는 남의 신세를 감사히 여겨 그 집에 종이 되어 섬기려 함과 같은지라 내 몸이 남과 같이 넉넉하게 되어 전일 은인을 도리어 도와 주게 되는 것이 참 사람의 입신하는 근본이 되리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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