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제4차 학술회의] 이승만 박사의 독립전략 :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 > 관련논문/출판물 |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4차 학술회의] 이승만 박사의 독립전략 :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 > 관련논문/출판물 |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4차 학술회의] 이승만 박사의 독립전략 :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전 육사교수)



Ⅰ. ‘미국을 친구로 한 독립’은 이승만의 필생의 염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독립 전략은 ‘미국을 친구로 하여 독립한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을 하고 또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동맹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그리고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는 이 전략은 이승만의 신념으로 굳어 미국의 변신과 냉대로 인한 계속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미국을 친구로 하여 독립한다는 전략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반도의 주변 열강 중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과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까지 치르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단지 미국만 한국에 대해 별다른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으므로 동맹을 하여도 독립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강들의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모든 항구가 반년 동안 얼음이 녹지 않으며, 동서양에서 전쟁이 동시에 터지면 군대를 보내기 어려워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항상 얼지 않는 항구를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승만의 이 우려는 일본이 패망하자 현실화 되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북한에 공산괴뢰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그 결과 국토가 분단되어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오직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중국은 더 이상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본이 청국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일본은 1910년에 한국을 합방하게 된다.


이승만의 미국을 친구로 하여 독립한다는 전략은 이러한 사정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생각은 올리버가 쓴 자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승만이 생각하던 독립투쟁의 방법은 그가 1919년 7월 5일 임시정부에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당분간 우리는 미국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집중적인 노력이 아니고는 효과를 볼 수 없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미국국민들의 관용심과 공평성을 크게 신뢰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정의를 향한 강한 이상주의와 남을 배려하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유학 시절 수년에 걸쳐 미국역사를 공부한 이승만은 미국이 자유를 갈망하는 민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격려한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그런 신뢰 외에 동양에서 태어나고 동양의 학문을 익힌 이승만은 극동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일본 세력이 언젠가는 미국과 충돌할 것으로 확신했다. 미국의 국익 보호와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런 이유들로 그는 독립운동은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승만이 미국을 친구로 한다는 전략은 단순히 미국이 영토적 야심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민주정치야말로 각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킬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정치제도란 것을 인정하고 미국의 앞선 정치를 배우기 위해서도 미국을 친구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미국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백성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 내용들은 전국에 배포되어 누구나 알고 지키며 시행하게 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같은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힘없는 백성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한 나라야 말로 행복하고 평화롭다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상낙원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나라의 흥망성쇄는 정치제도에 달렸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정치를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독립정신, pp. 162-165). 또한 이승만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미국과 같은 기독교국가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기독교적 평등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 믿음은 성경에 대한 믿음과 같은 차원에서 개인 신념화 또는 종교화 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바로 이 대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필생의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생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사실은 한국을 포기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동양의 평화는 일본을 통해 실현하고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익에 한국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미국을 친구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둘째, 이승만의 미국을 친구로 하여 독립한다는 전략은 개인적 신념화 되어 그 어떤 역경과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승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은 단순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며 그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어떤 역경에서도 종교적 신념을 버릴 수 없듯이 종교적 신앙과 같은 차원에서 갖게 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 또한 어떤 역경에서도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을 친구로 한다는 독립전략 역시 종교적 신념화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끊임없는 좌절과 불리한 국제정치적 여건과 주변 인물들의 끊임없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 신념을 지키는 내면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이 대전략은 이승만이 1904년에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될 때 시작하여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때 결실을 맺게 된다. 이승만이 사실상 독립운동을 1904년부터 시작하였다고 인정한다면 그의 독립운동은 바로 이 대전략, 바로 미국을 친구로 하여 독립한다는 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1953년에 끝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건국활동은 그의 독립운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건국 자체가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이승만은 “우리 백성들이 ...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면 외국친구들도 우리를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는 평생을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Ⅱ. 1900년 전후의 국제 및 한반도 정세





이승만이 태어난 1875년 전후의 시기는 서양의 열강들이 폐쇄적인 중국과 일본 및 한국에 대하여 통상을 이유로 개방을 압박하고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무력으로 협박을 가하거나 전쟁을 개시하는 등 역사적 격동기에 해당한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은 아편전쟁으로 대표되는 전쟁을 수단으로 청국을 압박하여 강제로 여러 항구를 개항하고 특정지역을 조차하는 등 청국의 존재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군함을 파견하여 1854년에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이것이 1868년에는 명치유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그 후 근대화에 성공하여 19세기 말에는 이미 세계열강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은 일본에 국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국토가 분단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이 시기가 한국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할 절호의 기회였으며 서구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고 개혁개방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독립을 보전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무능한 집권세력으로 인해 그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1860년에 동학이 창시되었으나 이 동학이 종국에 가서는 청일전쟁의 빌미가 되었으며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에 고종이 즉위하였으나 대원군의 폐쇄정책으로 인해 한국은 오히려 문호개방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1871년의 병인양요를 비롯하여 열강의 문호개방요구를 무력을 동원하여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근대화의 기회를 상실하고 급기야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겨우 1854년에 개항을 한 일본이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이 때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882년에는 청국의 조언을 받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Korean-American Treaty of Amity and Commerce)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것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최초의 조약이었다. 이 때부터라도 집권세력이 정신을 차리고 독립을 위해 국부를 창출하고 군비를 서둘렀다면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집권세력이 청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찌들어 우왕좌왕하는 동안에 일본은 국력을 키워 청국과 러시아를 전쟁을 통해 물리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한국을 피보호국으로 만든 다음 1910년에는 합방을 통해 한국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청소년 시절에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의해 한국의 국권이 흥정되고 유린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승만은 약육강식의 국제경쟁을 두고 “세상은 의로운 것과 악한 것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큰 전쟁판이라 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우선 교육을 받아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국가를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한국의 독립이 위태롭고 급기야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암울한 경험을 통하여 이승만의 독립에 대한 사상이 함양되고 신념화되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게 되는 1897년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게 된다.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이 위태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영한사전 집필을 중단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게 된다. 이 역시 이승만이 독립에 대해 얼마나 큰 가치를 두고 있으며 또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증명한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 초록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런데 만일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 역시 집권세력의 무능으로 인해 주권을 상실하게 된 것을 얼마나 통분해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고백이다.


심지어 이승만은 외국인의 도움조차 독립정신에 위배된다고 하여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쓴 자선전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체포된 후 미국공사와 경무청의 고문관은 내가 고문을 당하거나 부당한 형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매일 감옥으로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나는 이런 일은 독립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그들의 간섭을 싫어했다. ... 나는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역시 이승만의 독립에 대한 정신이 투철함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승만의 독립에의 열망과 독립을 위한 전략은 직접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한국의 운명이 그에게 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사상과 전략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Ⅲ. 1904년 미국 특사 파견의 의미





이승만의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는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1904년의 미국 파견이다.


이승만은 1898년 말에 설립된 중추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일하고 있었는데, 그 때 박영효를 대신으로 천거하였다가 고종의 분노를 사게 되어 1999년 1월 2일 중추원 의관직을 박탈당하게 되고 급기야 1월 9일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시사 잡지 및 기타 서적을 통해 미국의 민주정치를 흠모하게 된다. 1904년이 되어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승만은 석방되는데 그것은 그 때 잠시 개혁세력이 집권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정을 이승만은 자신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국민족당은 잠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 일 중의 한 가지는 나를 석방해 주는 일이었다. 내가 서울감옥의 문밖으로 첫걸음을 딛고 나왔을 때 한국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소멸되었고 승전한 일본군은 한국의 목을 쥐고 급속히 힘을 더하고 있었다. 일본은 온 세상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선포하여 서방국가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은 한국을 그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자 그들이 보호한다고 하던 그 생명 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민족당은 그들이 일본에게 배반당한 것을 갑작스럽게 인식하고 나를 특사로 미국과 유럽에 보내 그 나라들의 원조를 구하도록 하려고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러시아군을 패배시키는데 기여하였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배신하여 오히려 한국의 주권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다. 청국과 러시아를 전쟁을 통해 축출한 일본은 이제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욕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 사정을 자신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전에는 한국정부(조선왕국)가 나의 원수였는데 내가 석방된 후에는 한국의 독립을 주창한다고 하던 일본 사람들이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한국과 맹우관계를 맺었는데, 한국군이 그들을 도와 러시아를 패배시키자 그들은 그들의 맹우를 배반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남은 소망은 오직 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다. 일본군을 물리칠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우방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유지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우방이란 미국을 말한다. 당시 미국 외에 믿을 만한 외국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 거는 기대는 일찍이 1982년에 맺은 한미수호조약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조약의 내용 중에 조약 당사자 중 어느 한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다른 나라가 도움을 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승만과 당시 권력을 잡은 민영환과 한규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정을 올리버가 쓴 이승만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은 정부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개화파 민영환과 한규설을 만난 후 그들도 자신처럼 사태의 흐름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 안에서는 일본의 야욕에 제동을 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승만처럼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해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을 설득하여 일본의 야욕을 물리쳐야 한다고 민영환과 한규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 1년 전부터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한미수호조약의 상호방위 조항 발동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하에 놓여 있던 고종은 그들을 공식사절로 임명할 수 없었다. 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쏟던 민영환과 몇몇 인사들은 이승만의 파견을 결정했다. 학생여권을 발급받은 이승만은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에 보내는 훈령을 가방 밑에 숨겨 장도에 올랐다.





이미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있던 일본은 한국의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국은 독자적 외교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비밀리에 특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국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간의 사정을 이승만은 자신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공과 한 장군은 황제에게 나를 주미공사로 임명하도록 권했으나 일본사람이 반대하기 때문에 황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민공이나 민족당에서 어느 누구를 해외로 보내도록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민공은 비밀리에 나더러 국외로 나가라고 권해왔다. ...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바로 미국에서 러일간의 평화회의가 열릴 것을 알고 있었고 그곳에 한국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미국이 한국을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1882년에 체결한 한미수호조약에 근거하여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이것은 이주영 교수가 관찰한 바와 같이 문명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주영 교수는 이것을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확실하게 편입시킨” 문명사적 전환이며 “조국을 전통적인 문명적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 유대를 맺게 함으로써 일찌감치 ‘팍스 아메리타나’ 시대에 적응하려 했던 선구자”였다.


둘째, 이것은 이승만이 가진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노선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승만은 이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둥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과 영국이 외교적 협상을 통해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응하는 것이라든가 또는 일본이 러시아와 협상하여 한국에서의 이권을 조정하는 것은 외교가 국익을 보호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경험이라고 보인다. 이승만은 외교의 중요성을 그의 『독립정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라가 고립되어 있으면 강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어느 나라도 약한 나라라고 하여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나라가 먼저 국제법을 어기지 않고 다른 나라들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각국과 친밀히 지낸다면 다른 나라도 우리나라를 우방으로 대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는 우리가 요청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이 스스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셋째, 이승만이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미국의 선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주로 선교사와 의사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진심으로 한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한국을 도와줄 용의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기독교 목회자이거나 신자들이었는데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승만은 이들이 전혀 악의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미국과 상호원조조약을 맺었으니 미국이 그 조약상의 의무를 다 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면 흔쾌히 도와줄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이승만이 미국을 친구로 선택한 것은 미국이 단지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제도를 흠모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에 그리고 있는 미국은 “백성들이 백성들을 위한 백성들에 의해 수립된 정부”이며,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며, 중앙정부의 권리를 설정하거나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모든 백성이 투표하여 득표한 수에 따라 결정”하는 민주정치이며,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여 “영원무궁한 자유의 기초를 세워 세계일류 문명국가로 발전”하였으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원리에 따라 정치제도가 설립되고 국민들의 권리도 규정하였으며, 노예해방을 선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은 나라다. 이승만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평등하게 대우하는 효과는 실로 엄청나며, 그 근본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권리를 확실히 지킨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이 한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1904년 말에 미국으로 떠난 것은 일시적으로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나 단지 아직 한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가진 모든 특성을 고려할 때 미국을 친구로 하는 것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과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불리한 국제정세와 미국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그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Ⅵ.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승만의 좌절과 기적 같은 성공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짝사랑이라고 할 만큼 일방적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항상 좌절로 끝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도 미국을 친구로 결국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변함없는 집념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과 같은 확신에 있었다. 이승만은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나 정부와 전국의 소위 유력자들은 모두가 친일적이었다. 1882년 체결한 한미수호조약은 한갓 어리석은 외교적 제스쳐에 지나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그 조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어리석고 순진한 탓이었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줄곧 냉대만 받았다. 그 이유는 미국의 세계전략이 바뀌어 미국은 이미 1882년에 맺은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04년의 미국 특사로 파견될 때부터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크게 보아 세 번의 좌절을 맞보게 된다. 사실상 미국은 한국을 버렸으며 이것은 이승만의 외교적 역량으로도 풀기 힘든 것이었다. 국익을 추구하는 국제관계의 냉엄한 현실 앞에 이승만은 속수무책이었다.


첫 번째 좌절은 그의 최초의 대미 외교 업무인 1904년의 비밀특사 임무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받고자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으로 비밀리에 파견한다. 파견되기 전에 고종이 이승만을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이승만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민영환이 만들어 준 문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난다.


1904년 11월 4일 인천항을 떠난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에 미국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다. 그리고 1905년 하와이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잠시 들린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의 소개장을 받아 8월 5일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는데 성공한다. 루즈벨트는 이승만 일행이 제출한 청원서를 보고난 후 이 서류를 한국 영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미 동양의 평화를 일본에 맡기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위해 육군장관 태프트가 일본에 파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으러 가는 길에 태프트 미 육군장관이 이승만 일행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준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와이를 떠난 태프트는 7월 29일 이미 토쿄를 방문해 태프트-카츠라 비밀협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기대는 번번히 좌절되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더 이상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승만은 직감한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할 때 한국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아야 하고 특히 광복군이 무장하여 대일본전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일전에 소련을 참가시키기 위해 소련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야망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을 바로 독립시킬 의사가 없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게 전쟁이 끝나면 한국에 대해 4대강국에 의한 약 2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구두로 약속하였다. 이승만이 접촉한 미 국무부의 한국 담당자 알저 히스는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상해의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한국의 광복군은 무장하지 못하여 대일본전에 참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은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이 1882년에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한 조약상의 의무가 있으며 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미국의 국제전략상 한국은 이미 지원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미국무부 관리들은 한국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을 동맹국으로 격상시켜 소련의 팽창정책에 맞서기를 원했다. 참으로 냉엄한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미국의 눈에는 한국인들은 자치의 능력이 없고 따라서 독립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이러한 편견을 고쳐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해방 후 즉시 독립할 자격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건국을 향한 노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주영 교수가 명확하게 정리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좌우합작세력의 방해를 극복하고서야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소련은 피터대제이후의 숙원인 부동항을 얻기 위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공산화를 획책하였고, 이에 협조한 미국은 한국에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며,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승만만이 홀로 총선거에 의한 건국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드디어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의 개인적 집념과 신념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는 능히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이승만이 없었다면 4.19도 없었으며 5.16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의 세 번째 좌절은 건국 이후 북한의 공산군이 남침한 6.25동란 때 겪은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의 국군이 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방어할 최소한의 무장을 미국에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승만의 건국 목표는 한국군을 양성하여 북한의 공산군을 무찌르고 자유통일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을 무장할 힘이 없어 이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무엇보다 큰 좌절을 6.25동란 때 겪게 된다. 이승만은 이번 전쟁이야말로 무력으로 통일을 성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당연히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겁낸 미국은 전쟁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휴전을 원했다. 이승만은 통일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미국의 휴전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이승만은 독단적으로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한다.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은 1953년에 한미방위협정을 맺고 동맹국이 된다. 이로써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는 이승만의 집념은 완전한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지만 미국을 친구로 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동서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비록 통일은 성취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만으로도 기적같은 성공이며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자유통일을 성취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이승만은 전쟁 중에 북진통일을 외쳤지만 그 핵심은 북한 동포를 해방하고 자유를 북한으로 확산시키는 자유통일이다. 우리는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인 한미동맹을 굳건히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이승만의 위대한 전략,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는 전략을 실천하고 성공하여야 한다.








Ⅶ. 이승만의 위대한 유산





이승만은 일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승만은 일찍이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변 강대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경험하였고 급기야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어 일본의 식민지로 망하는 것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참담한 심정을 이승만은 자신이 쓴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0년 6월에 있은 졸업식에서 나는 윌슨 박사로부터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그날이 나의 준비단계를 종말짓는 날이었는데, 나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한국은 내가 나가서 일을 하여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일본에게 병합되었으므로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동맹국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이 전략에 따라 미국을 동맹국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다. 19세기 말 일본이 스스로 한국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선언케 하였으나 한국은 독립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이승만은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의 권리를 회복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자주독립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자주독립이라는 말을 하기에도 수치스러움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상황은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도 동일하게 재연되었다. 한국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강대국에 의해 한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을 친구로 독립한다는 전략을 끝까지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이 원하던 통일된 조국이라는 완전한 독립은 얻지 못하였으나 미국을 친구로 하는 절반의 독립은 성취하였다. 이 절반의 독립이 그 당시로서는 기적과 같은 성공이며, 이 절반의 독립이 한국인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완전독립을 향한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승만이 추진한 북진통일의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는 한미동맹을 더욱 더 굳건히 발전시켜 자유통일을 기필코 성취하여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만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을 잘 지키고 또 발전시켜 기필코 미국을 친구로 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승만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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