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7

동학란·혁명·농민전쟁…이름 짓기 / 이이화

[길을 찾아서] 동학란·혁명·농민전쟁…이름 짓기부터 ‘백가쟁명’ / 이이화



[길을 찾아서] 동학란·혁명·농민전쟁…이름 짓기부터 ‘백가쟁명’ / 이이화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73
수정 2011-01-20 19:25펼침

역사학자 이이화

1989년 9월 출범한 ‘동학농민전쟁 1백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백추위)에서는 우선 ‘동학’ 관련 역사 용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많이 쓰는 용어로는 동학란을 비롯해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또는 혁명·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했다.

  • 동학란은 왕조시대의 용어로, 민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일테면 ‘역적질’을 했다는 것이다
  • 동학혁명은 천도교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동학이 주도해서 혁명을 추구했다는 의미다. 박정희군사정권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 동학농민전쟁은 농민이 주체세력이었지만 동학이란 조직 또는 평등사상을 포용했다는 의미를 주고 있다. 
  •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이 결합해서 혁명을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썼고 남쪽의 진보학계에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곧 그 운동 주체는 생산대중인 농민이란 것,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존재를 배제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답습한 것이다.

먼저 이런 여러 용어를 두고, 역사학자·정치학자·사회학자들을 모아 1890년 6월 토론회를 열었다. 각기 주장을 폈으나 결론이 날 턱이 없었다. 다양한 학문 경향을 추구하는 풍토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도 탈 잡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인 소장학자들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바꾸어 썼다. 나는 동학은 외피보다 인간존중사상과 봉기과정에서 나타난 조직동원 등의 사실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으로 쓰기로 했고, 이 용어를 백추위에 반영했다.

그러면서 ‘동학’을 주제로 다룬 시와 소설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동학농민전쟁이 학문적으로 정리가 안된 사정과 사료 발굴이 미흡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작품들은 너무 당혹스러울 정도로 혼란을 빚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소설의 반역사성’이란 제목으로 평론을 썼다.(1987년 <역사비평> 창간호) 대상 작품은 최인욱의 <전봉준>, 이용선의 <동학>, 서기원의 <혁명>, 유현종의 <들불>, 박연희의 <여명기> 등이었다.

이들 소설들은 대체로 지배계층의 부정부패, 민중에 대한 압제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통틀어 말하면, 봉건체제가 갖는 제도상의 모순을 분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 왜 지배세력의 착취가 일어날 수 있는지, 
  • 왜 노비·백정의 불평등 관계가 성립되었는지, 
  • 왜 지주와 소작농민의 불균형 관계가 빚어졌는지 등에 대해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한결같이 동학이란 종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농민적 코스’를 소홀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 탓으로 농민통치라 할 집강소 활동을 소홀하게 다루거나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또 농민군들이 척양척왜를 내건 것과는 달리, 금광 개발권의 독점이나 사치품의 범람 등 외국세력의 경제 침탈 양상을 아주 무시하거나 가볍게 다루었다.

<전봉준>에서는, 전봉준이 비복 2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거나 동학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봉기했다는 따위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동학>에서는, 최제우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최시형을 ‘신사’(神師)로 호칭을 했고, 집강소의 농민통치를 무정부 상태로 보면서 농민군을 “무식한 상것들-농민들 뿐이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혁명>에서는, 전봉준의 부하들이 그의 사랑채에서 잠을 잤다든지, 그를 포악한 인물로 그리면서 그의 부하가 된 양반의 아들은 아주 덕스런 사람으로 그리고 있었다.
<들불>에서는, 최제우가 천도교를 만들었다든지, 전봉준을 선비 출신으로 부안접주라 하기도 하고, 김개남을 두고는 자기 성명도 쓰지 못하는 까막눈이라고도 하고, 손화중을 두고 땅밖에 팔 줄 모르는 순수한 농투성이라고 했다.
 <여명기>에서는 전봉준의 아버지를 두고 구실아치로 효수(梟首)되었다고 하면서 전봉준이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복수를 하려고 봉기했다고 했다.
그밖에도 당시 홍주목(충남 홍성)에 감영이 있었다든지, 감사를 ‘나으리’나 ‘도백’으로 표기한다든지, 전봉준에게 ‘영감마님’이라 부른다지 하는 따위 용어의 시대성을 무시하고 있는 표현들이 줄거리에 쭉 깔려 있었다.

이들 남쪽 소설보다 앞서 1980~86년 북한에서 나온 구보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1988년·도서출판 공동체)에서는 줄거리 설정에 무리가 있긴 했으나 기본 시대 흐름이나 고증은 비교적 흠이 적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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