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7

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 제자들 - 대구동학연구회

스크랩] 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추연창 (淵庵) 14.04.29 234
[동학농민운동의 명칭변화]라는 글은 이이화의 논문이다.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라는 글은 어느 블로그에 실린 것으로 강준만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유영익등의 동학연구명칭
을 둘러싼 논쟁들이 정리되어 있다
[농민전쟁]이란 명칭의 유래를 찾아보는 논문은 첨부, 이 논문에는 1940년 이후 유물론자들과 북한에서의 동학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있다. /동학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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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출처 http://blog.naver.com/gustk37/150024827654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지음, 출판-푸른역사(2000.06.01)


1. 1894년 당시

1) 농민군 측
동학교도라는 뜻의 東徒, 의로운 일을 위해 일어난 병사라는 뜻의 의병이라 불렀다. 이 둘을 합쳐 동도의병이라 하기도 했다.
2) 당시 민씨세력과 개화파 정권, 일본군, 그리고 유림측
한결같이 비적(匪賊)·비도(匪徒)라 불렀다. ‘도둑떼’ 또는 ‘도둑의 무리’라는 뜻이다. 무력 과 폭동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왕권에 맞서 봉기했다는 뜻이
다. 예전의 수많은 민중봉기 나 홍경래 농민전쟁과 차별성을 두지 않고 동일시하려는 시각이다.
3) 황현 : ‘東匪’

2. 식민지 시대
1) 박은식
동학농민운동을 역사사건으로 최초로 다룬 사학자는 박은식이었다. 그는 1915년 중국에서 간행 한 『한국통사』에서 ‘甲午東學之亂’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동학교도
의 발호를 적고 “대개 동학당에는 본래 정치사상과 혁명의 성질이 포함되어 있으나 많은 것이 비천한 무뢰배나 어리 석은 무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난폭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엄격하고 잔인했던 종래의 계급 관념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또한 개혁의 선구자라 말할 수 있다.”라고 기술하였다.

2) 1922년 모스크바 극동노력자 대회 보고 논문
“양반 중심의 조선왕조체제를 마감하려는 계급투쟁과 농민의 정치적 혁명의 요구이다”라고 이해하고 “동학란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수세기에 걸친 침탈로부터 억
압당해온 민중들이 연합 해 일으킨 폭동이다.”라고 언급하였다. 농민폭동이라 정의한 것이다.

3) 불교사학자 황의돈
1922년 잡지 <개벽>에서 ‘갑오혁신운동’이라 이름을 붙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술하였다. 그 는 “실패가 되었다! 자유를 위하여! 평등을 위하여! 규호하고 분기하던
갑오혁신운동은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허사가 되었다! 잔약 고통의 양민계급을 구제키 위해 불의횡포의 귀족계급을 응징키 위하여! 용전하고 활약하던 전봉준의 계획
도 그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라고 쓰면서 전 봉준의 거사를 최초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실증적 연구를 뒷받침하지는 못했다.

4) 계몽사학자 장도빈
1926년 서울에서 <갑오동학란과 전봉준>을 써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전봉준이 주창 한 옛것을 뜯어고치고 새것을 정립하며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궁색한 이
를 돕는다(革舊鼎新 拯 貧濟窮)라는 여덞 자는 실로 전봉준이 가긍한 민중을 위해 대사업을 경영하는 마음을 나타냈으 니 동학란의 정신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일본군과 항쟁한 실상을 전해주었다. 최초로 민족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5) 김상기
김상기는 근대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사학자로 1931년 <동아일보>에 36회에 걸쳐 ‘동학과 동학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하였다. 여기에는 동학의 원인과 배경, 그 발생과 결말 등 사 건의 전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는 농민군에 맞선 인물에 대해 “민포의 수괴로는 지평의 맹영 재, 천안의 윤영렬, 태인의 임병찬 등이 그 주요
분자였다.”라고 쓰면서 본격적 실증연구의 기 반을 이룩하였다.

6) 일본인 학자
일본의 대표적 동학 연구학자인 기쿠지(菊池謙讓)도 ‘동학당의 난’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동학당의 난이, 농민군의 주체적 역량으로 주도된 것이 아니라
대원군과 민비의 정권 쟁 탈과 청나라의 조선 지배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보면서 반봉건적 반침략적 요소를 애써 배제하거 나 생략하였다.

7) 오지영의 <동학사>
동학란, 동학군이란 용어로 표기하면서 그 봉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8) 정읍군지에 실린 <전봉준 실기>
동학란 또는 ‘동학란 수괴 전봉준’으로 표현하였다. 오지영의 <동학사>와 함께 동학에 초 점을 맞추어 기술했다.

9) 천도교의 <천도교창건사>
갑오운동 또는 동란으로 표현하면서 “갑오운동의 실패로 말하면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외국의 내정간섭이며 동학당 내부가 일치하여 먼저 경성을 곧바로 쳐 올라오지
않고 충청도 일대에서는 그해 9월에야 겨의 거의하여 대세를 잃은 것이 원인이다.”라고 써서 실상에 접근하였다. 하지만 농민적 속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고 동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10) 사회경제사학자 이청원
1937년에 펴낸 <조선역사독본>에서 갑오혁명이라 명명하고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같이 동학 천국운동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동학이라는 종교를 외피로 하고 대중은
자기의 계급적 이데올 로기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도 농민적 지향을 강조하였다. 농민전쟁에 계급투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또 이는 중세 독일의 농민전쟁
이 기독교를 외피로 하면서 봉건 영주를 타도하 려 했다는 엥겔스의 시각을 도입한 것이기도 했다.

3. 1945년 이후 북한학계
1) 북한에서는 그 성격을 반봉건 반침략 또는 反帝라고 규정하여 이청원의 논리를 한 걸음 진전 시켰다. 그래서 1945년 겨울 초등학생용 문고판으로 <갑오농민전쟁>을
펴내 전국에 돌렸다. 이 것이 해방 후 최초로 출간된 관련 저작이다 그 뒤 북쪽에서는 거의 농민전쟁이라는 기본 시각에 서 ‘갑오농민전쟁’이라 불렀다. 그들은 갑
신정변을 부르주아 혁명, 갑오개혁을 부르주아 개혁 이라고 규정하면서 농민전쟁이 폭동의 수법으로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지향했다고 본 것이 다.

2) 1980년 <조선전사>
1980년에 집필이 완성되어 간행된 <조선전사> 근대편에서는 1894년(갑오) 농민전쟁이라고 써놓 았다. 농민군이 봉건제도를 반대하는 투쟁과 외세 침략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힘차게 벌였으나 그 한계를 “당시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해서 농민들은 민족 부르주아의 영도를 받을 수 없었고 더구나 노동계급의 영도는 생
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런 뒤에도 이런 기본 시각을 변함없이 이어져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등으로 표기하 면서 그 혁명성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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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5년 이후 남한 학계
1) 김상기, 오지영 : 동학에 대한 연구자가 거의 없었다. 김상기, 오지영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 는 수준에 머물렀고, 동학난’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 5·16 군사정변 후 : 정작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기묘하게도 5·16 군사 쿠테타 뒤였다. 군 사정권은 정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혁명은 동학혁
명과 5·16 군사 쿠테타 둘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박정희 개인의 견해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학접주여서 어릴 적부터 동학에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념탑 등에 반영되었다.
1963년에는 정부 주도로 황 토재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졌고, 1973년에는 정부의 후원으로 천도교에서 공주 우금재 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동학
혁명이란 용어는 천도교에서도 수용되었다. 따라서 농 민은 동학에 끼여들 틈이 없었는데 농민을 삽입하면 계급투쟁적 성격이 강해진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이선근
등 어용사학자들의 협조가 컸다.

2) 한우근 : 학계에서 이를 한 걸음 진전시킨 이는 한우근이었다. 그는 1971년의 <동학란 기인 에 관한 연구>에서 ‘동학란’이라 썼고 그 뒤에 사건 전개를 적은 책
에서는 ‘동학농민봉기’ 라 쓰면서 전쟁과 혁명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러면서 종교인 동학을 외피로 하면서 농민 지향성 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용어와 성격규정
에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김용덕·김의환 : 그 뒤 70년대에 김용덕·김의환 등은 1894년 이전의 과정을 ‘동학운동’, 뒤의 과정을 ‘갑오동학혁명’이라 불렀다.

4) 최현식 : 80년대에 들어 최현식은 이를 따라 ‘갑오동학혁명’이라 불렀다. 이들은 농민적 지향을 소흘히 다루면서 갑오라는 간지와 동학혁명을 적당히 절충해 사
용했다. 농민적 지향과 계급투쟁적 의식을 적당히 섞어서 박정희씩 명명에 따른 것이다.

5) 역사문제연구소 :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동학 1백주년 기념사업을 벌이면서 전초단계 로 관계학자를 초청해 용어토론회를 벌였다. 최초의 공식적인 토론자
리였다. 이때에 ‘갑오농 민전쟁’, ‘동학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등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 었다. 이 자리에서도 통일적 용어 사용을 합
의한 것은 아니었다. 각가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 토론회에서 주목할 점은 농민적 지향을 본질로 보려는 시각이었다. 하나의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문제연
구소에서는 이를 토대로 ‘동학농민전쟁’으로 쓰기로 합의하였다. 곧 농민적 속성과 동학적 요소를 절충하려는 의도였다.

6) 1990년대 : 90년에 들어서는 대체로 크게 네 가지 용어가 사용되었다.
첫째는 ‘갑오농민전쟁’이다. 정창렬·신용하·우윤 등이 이른 논문제목으로 내걸었다.
둘째는 ‘동학농민전쟁’이다. 이이화·신영우 등이 이를 주장하였다.
셋째는 ‘1894년 농민전쟁이다. 이는 한국역사연구회 중심으로 5개년 계획에 따라 펴년 <1894 년 농민전쟁연구>에서 나타난다.
넷째는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등 여러 단체의 이름으 로 사용한 것이며 학술적 용어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여
전히 ‘동학혁명’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갑오동학운동’으로 쓰기도 한다.

7) 일본 및 중국 :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으나 ‘갑오농민전쟁’이 주류를 이루고 있 으며 중국에서는 ‘갑오전쟁’이라고 불러 청일전쟁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있다.

5. 고등학교 교과서의 용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1974년부터 국정으로 펴내서 여러학자의 다양한 견해를 개진할 여지를 없앴다. 유신체제 수호의 일환으로 만든 정책에 따른 것이다.

1) 1974년
처음으로 간행한 국사교과서에서는 큰 제목으로 ‘동학의 성장과 농민군이 봉기’로 달고 ‘안으로는 붕괴되고 있는 조선 봉건사회를 부정하여 자율적 개혁을 도모하
였고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을 몰아내려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2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여 기술하면서도 동학군, 농민
군, 그리고 ‘농민의 동학운동’ 등으로 용어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확한 역사용어를 제시하지 않았다.

2) 1982년
1982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펴낸 국사교과서에서는 앞에 ‘동학운동’으로 제목을 달고 동학의 교세와 집회 등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다음으로 ‘동학농민운
동’이라는 제목아래 ‘대대적인 농민운동의 성격을 띠어갔다’라고 적었으나 ‘운동’등이라는 용어로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반봉건 반침략의 기본 성
격을 설명하면서도 ‘운동’이라는 용어를 써서 부드럽고 온건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3) 1996년
1996년 간행한 국사교과서는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도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동학의 인간평등사상과 사회개혁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하였고, 포접제의 조직은 농민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형태의 농민운
동은 농민전쟁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라고 썼다. 여기에서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지속적으로 으병의동으로 연결되었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나 그 치
열성을 온건한 표현으로 대치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끝에 그 성격을 “동학농민운동은 안으로는 봉건적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분작 등 개혁정치를 요구하였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라고 규정하였다. 조금 진전된 내용기술이나 본문의 분량은 여전히 원고지 10장 정도였다.
이들 교과서의 내용기술은 정권의 속성과 맞물려 있었다. 그래서 조금씩 용어 사용을 달리하면서 여러 견해를 잡탕으로 만들어 놓고 또 분량 등에서도 소흘히 다루었
다. 이 중학교 교과서의 기술도 거의 여기에 따르고 있다.

전쟁인가? 혁명인가?
결론을 말하면 현재 용어의 통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각자의 주장과 견해가 팽팽히 맞서 있어 쉽사리 다른 용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당분간 혼란
을 겪으며 사용될 것이다. 역사 용어와 성격 규정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 해석은 90년대에 들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학과
농민 그 둘 중에 어느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보느냐는 것이다. 농민을 기본 동력으로 보느냐, 동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느냐가 오늘날 풀어야할 과제일 것이다. 또
전쟁과 혁명을 어떻게 절충해 사용하느냐도 하나의 과제이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말할 때 전쟁, 이념적 지향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는 혁명으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
으로 본다.(165-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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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2권 5장의 내용일부( 266쪽부터 279쪽)를 요약, 발췌
http://theacro.com/zbxe/free/828815

동학농민전쟁 이후 전통적 유교적 세계관 및 위정척사론적 관점에 근거해 <농민진압군> 측의 순절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다수 조성되었다. 특기할만한 예외로 "우리
나라의 평민혁명"이라고 한 박은식의 평가가 있으나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 주류시각은 아니었다.
1963년 박정희가 선거용으로 전북 정읍 덕천에 갑오동학혁명기념비를 세운 것을 필두로 평가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후 70년대 접어들면서 전혀 다른 평가를받기에 이른다.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난' -> '혁명' -> '운동' -> '농민혁명'의 과정을 거치는데 국정국사교과서의 기술형식은 1895년부터 1960년대까지를 1기,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2기로, 80년대 이후를 3기로 구분해 나눌 수 있다. 1기에서는 왕조질서 및 기존체제를 어지럽힌 비적의 소요로 인식했다. 2기에서는 (농민이 아닌) 동학
교단을 주체로 보며 동학란에서 '동학혁명'으로 표기가 격상되었다. 80년대 이후인 3기에는 반란도 혁명도 아닌 '동학운동'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다 90년대 이르러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민중사관적 평가가 내려지게 된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요약생략)

유영익의 주장
유영익은 민주주의, 사회주의 및 민중주의의 원류로까지 평가하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이하 강준만이 전하는 유영익의 말.

제자들
" 갑오농민봉기는 오히려 보수적 복고적인 민중운동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저자는 근래 남북한 학계에서 1894년 정봉준 등이 주도한 농민봉기를 '동학혁명', 혹은 '1894년 농민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반봉건' '반제
국주의'의 진보적 민중운동으로 성격 지우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껴왔다. 솔직히 저자는 이러한 통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결론부터 앞세운다면 저자는 전
봉준이 주도한 1984년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벌인 '무장개혁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대원군
을 받는 새 정부를 세우려 했던 (좁은 의미의) '정치혁명'이었으며 제2차 봉기는 전봉준 등이 대원군과 협의하여 일으킨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본격적 '의병'운동이었
다고 생각한다."
유영익은 1894년 당시 농민군이 제작, 사용했던 구호, 격문 등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동학운동의 성격을 재구성하면서 "농민군이 내건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 구호에
서 보듯 동학운동은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에 의거하여 일어난 보수적 애국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박노자-하원호의 논쟁

박노자 역시 동학에 근대적 혁명성을 부여하려는 학계 일부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농민전쟁을 유교적 충군애국적 지향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하원호 : "혹시 농민전쟁을 전봉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유교적 근왕주의운동이라고 보는 어느 보수 학자의 말을 그대로 믿은 탓일까? 전봉준의 사고방식을 문제 삼는
그 학자에게 대다수 농민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 보이지 않았듯이 박노자도 마찬가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박노자 : "동학운동과 1894녀의 농민봉기의 연구에 유영익이 기여한 바를 순수 학술적인 차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각의 민중파 사학이 이미 서구화한 오늘날 우리들의 '혁명' 의식에 맞춰 100년 전 동학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뜯어고치고 자료 근거조차 미약한 동학의 '토지분작
요구'를 무리하게 강조하여 동학을 공산혁명처럼 묘사하는 것은 문제"
"'동학의 혁명화'는 서구 근대의 '혁명'을 준거틀로 한만큼 서구중심주의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하원호 : "박노자는 1940년 발행된 <동학사>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지영의 소설이라고 보고 그 내용을 전면부인하면서 전봉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농민전쟁 자체를 유교적 근왕주의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 <동학사>에 나오는 농민 요구사항 중 '평균분작'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분작'을 소유권의 균등분배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경작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
도 있다."
"박노자는 <동학사>를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를 택했기 때문에 당연히 '평균분작'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이미 농민전쟁 이전의 토지문제에 대한 수많은자료가 있고 농민전쟁 연구자들의 주장도 사실은 이에 근거한 해석이다. 물론 한때 지나칠 정도로 근대적 의미에서 '평균분작'을 비롯한 농민전쟁의 지향을 해석하고
근대화 운동의 일부로 규정짓기도 했지만 현재의 연구는 이런 한계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동현의 주장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오지영 등 농민군 지도부는 개혁의 전범을 안에서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팎으로 유교적 전통질서를 다시 세우는 보수적 복고적 구국방안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또 하나의 외세 청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 으며 썩은 민씨 척족 정권 대신 대원권 정권을 다시 세우려 했다."
" 전봉준이 남긴 기록을 비롯한 당대 문건들에서는 오히려 보수의 최고봉 대원군과의 밀약과 같은 복고와 보수의 목소리만이 넘쳐흐른다. 이런 점에서 봉기가 유교라
는 전통 가치에 바탕한 보수적 의거 내지 무장개혁운동이었다는 '갑오농민봉기'론이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배항섭의 주장
민중운동이 전근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붕괴를 촉진함으로써 그 사회의 근대를 진전시키는 역할 등을 하였으나 민중운동 자체가 근대사회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
다.
지금까지의 연구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계급환원론 또는 경제구조환원론적인 시각이며, 민중이 가진 독자성과 운동에 내재한 고유한 리듬을 분석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또한 전봉준의 생각이 농민군 대중 모두의 생각일 수 없다. 어떤 점에서 민족위기를 외면하고 계급적 모순에 입각해 사적인 분풀이를 한 농민군 대중들의 의식세계야
말로 더 민중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농민전쟁을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 의거였다는 견해도 '영웅주의적' 이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김용옥의 주장
'갑오농민전쟁'이란 개념은 '동학란' 못지않게 '잘못된 개념'으로 북한 학자들의 유물사관에 의하여 날조한 개념을 무반성적으로 차용한 결과 생겨난 개념일 뿐이다.
동학혁명은 농민전쟁이 아니라 신분이나 직업이나 계급으로 규정키 어려운 다중일 뿐이다. 북한학자들이 굳이 '농민'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 혁명의 참여자들을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의 혁명역랑을 아직 갖지 못한 봉건질서 속의 농민으로 규정해야만 직선적 발전사관과 후대의 공산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봉건사회가 아니었음에도 봉건이라 하고 농민이라 해서 낙후할 것이 없었는데도 낙후하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역사인식이다.

출처(ref.) : 정치/사회 게시판 - 동학농민혁명 성격논쟁 :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제2권에서. - http://theacro.com/zbxe/free/828815
by minue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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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1,2]의 지은이 표영삼

"동학혁명의 성격 :  [동학혁명]으로 보는 우리 입장은 동학의 개혁운동의 연장선으로 동학혁명으로 보지만,  [농민전쟁]으로 보는 학자들은 대부분 동학과 갑오년 혁
명을 별개의 사건으로 끊어서 분석한다. 그러다보니 경세유표나 정약용의 영향, 실학의 관련성 등을 연관시켜서 설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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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첨부                               
 1940년대 후반 유물사가들의 동학농민운동 인식-소위 농민전쟁설의 원형을 찾아서-오영섭.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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