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9

[정동칼럼]대한민국 대학교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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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대한민국 대학교수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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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18 20:33:04 수정 : 2018.12.18 20:35:02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24세 노동자 김용균씨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다시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끔찍한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남북화해도, 선거법 개정도 소용없는 일이 될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대학에서도 극심하다. 대학들의 ‘할리우드액션’ 탓에 생긴 일부의 오해와 달리, 새 강사법으로 비정규 교수에 대한 비상식적 착취가 개선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교원 신분을 갖게 되어 법으로 좀 보호된다는 의의는 있지만, 강사로 임용된다는 것은 연봉 1000몇백만원짜리 안팎의 계약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요’ 대학 정규직 교수의 연봉은 대략 1억원이니 약 10배 차이가 난다.

그래서 지금의 강사법 논의에서 빠진 게 있다면 정규직 교수들의 고통 분담과 교수사회의 개혁이다. 엉망이 된 한국 고등교육의 거의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정부가 노력해도 대학의 변화 없이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도 불가능하다. 고등교육 개혁은 사학법 개정과 대학의 공공성 강화로 달성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사회의 재‘민주화’가 절실하고 그것은 교수사회의 변화 없이 불가능하다. 강사 대우와 대학원 공동화 문제만 하더라도, 후속세대를 위한 학술펀드의 조성이나 60세 이상의 임금피크제 등 정규직 교수들이 ‘사회적 대타협’과 비슷한 정신으로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안 하거나 못한다.


정규직 교수로 일한 지 13년, 누워 침 뱉는 격이지만 조금 겪어본 교수사회는 희한했다. 분야·세대·학교별 차이가 있어 일반화하기 쉽지 않지만 자경문 삼아 대한민국 교수에 대해 몇 마디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규직 교수의 주류는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중후반 학번의 남자, 서울과 영남 그리고 소위 SKY와 미국 유학 출신들로 구성돼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학계의 각종 ‘장’, 즉 총장·학장·교무처장 등과 각종 연구원 원장, 학회 회장 등의 자리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크게 보아 그 의식과 행동양식은 70~80 민주화세대의 그것과 유사할 것인데, 정규직 교수들은 더 개인주의적이며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들 주류는 연구재단 시스템과 신자유주의를 대학에 착근시켰고, 정부 또는 사학재단과 결탁하여 (결과적으로) 한국 대학을 병들게 한 장본인들이다.


대학(원)생 때 순진한 내가 상상했던 교수란 존재는 진보적이면서 참여적인 자유주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교수는 별로 없었다. 이젠 더 없다. 유물처럼 조금 있는데, 언론과 명망가 때문에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진보적 자유주의자인 척하는 교수는 좀 많겠지만, 시민사회의 평균과 비교할 때 정규직 교수들의 평균적 의식은 확실히 ‘우저(右低)’라 생각한다. 만약 정규직 교수로만 투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선거를 했다면? 아마 홍준표나 안철수가 당선됐을 것이다.


70~80 정규직 중 상당수는 ‘개구리 올챙잇적’을 기억할 필요도 없이 ‘졸정제’와 고도성장 시대의 혜택을 입어 빨리 교수가 됐다. 그래서인지 망측한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문한국(HK)사업의 후과나 기타 행태는 ‘사다리 걷어차기’에 다름 아닌데, 후배나 제자들이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받고 학교당국에 욕을 당하며 불안정한 삶을 전전하는 데 문제의식이 없다. 혹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 마모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정규직 교수직을 진짜 생득 신분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갑질’이 자주 일어난다.


이에 비해 90년대 학번 이후부터의 정규직 교수들은 좀 다른 것 같다. 이제 그들은 중상층(upper middle) 소시민 이상·이하도 아니다. 선배 세대와 달리 ‘진보, 참여’나 ‘지식인’ 같은 부담스러운 가치나 자의식에서 벗어나 단순한 직장인으로 바뀌었다. 은·금수저 집안의 학벌 엘리트, 짧은 시간에 논문을 다량 생산할 수 있는 멘털 또는 오타쿠 기질과 사회성을 겸비한 경우들이 많겠다. 그들도 어렵게 구한 ‘좋은 직장’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소심한 ‘범생이’다. 당연히 대학당국과 사학 이사장들은 그런 사람을 뽑길 선호한다. 또는 그렇게 예스맨으로 성장(?)하게끔 조교수·부교수들을 ‘강하게’ 키운다.


근래 상위 10% 계층이 ‘좋은 직장’을 위시한 모든 것을 독식·세습하는 불평등 구조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아마 앞으로는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여돼야 배출 가능한 정규직 교수 또한 10% 계급 출신 중에서만 ‘간접 세습’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셀프 개혁’은 어려울 듯하다. 지난 20여년간 자본과 사학재단들이 대학교수 집단 전체의 권익을 감퇴시켜 왔는데, 이는 엄청난 부작용도 수반했다. 그래서 건강한 개혁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단결하는 방법밖에 없는 듯하다. 만약 대학원생노조와 비정규교수노조의 조직률이 지금의 3배가 된다면? 아마 교수사회도 변하고 대학의 공공성의 길도 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아, 갈 길이 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182033045&code=990308&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csidx87579e10a5d002a96ffda631dd941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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