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6
05 황선 "평양서 낳은 딸, '겨레'라고 이름 지었어요"
"평양서 낳은 딸, '겨레'라고 이름 지었어요"
"평양서 낳은 딸, '겨레'라고 이름 지었어요"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11/2] - 평양서 아기 낳은 통일연대 '황선' 대변인
박인규 기자
2005.11.02 18:21:00
"평양서 낳은 딸, '겨레'라고 이름 지었어요"
박인규 : 안녕하십니까?
황선 대변인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우선 득녀를 축하드리고요.
황선 대변인 : 고맙습니다. (웃음)
박인규 : 예전엔 삼칠일, 그러니까 21일이 되기 전에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건강은 괜찮으세요?
황선 대변인 : 네. 어제로 삼칠일이 끝났고요. 다행히 아주 건강합니다..
박인규 : 아직도 붓기가 남아 계신거 같은데요.(웃음)
요즘 미국 국적을 갖기 위해 미국으로 원정출산을 간다고 빈축을 사고 있는데 황대변인 같은경우에 본의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평양에서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둘째딸을 낳으셨는데, 보통 그럴 때 만감이 교차한다, 그런말을 하고 그러잖아요.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을 꺼 같아요? 어떠셨습니까? 아기 낳고 느낌이?
황선 대변인 : 일단 60년만에 아기를 북에서 낳는게 처음이라고 해서 너무 운이 좋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고요. 일단 아기 고향이 합법적으로 평양이 된 거잖아요. 남북관계의 진전이 없이는 안됐으니까 그런걸 상징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 기쁘고 아기가 앞으로 누릴 세상을 낙관적으로 의미하는 것 같아서 이게 길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더 기쁩니다.
박인규 : 역시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이라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시는 것 같군요.(웃음) 지난 25일에 돌아오셨는데 아기 이름이 그 때까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아기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야 하느냐 관심이 많았는데, 아기 이름은 지었습니까?
황선 대변인 : 아기이름 겨레라고 지었구요. 이번 월요일에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박인규 : 윤씨니까 윤겨레. 한씨이면 한겨레가 될 뻔 했네요.(웃음) 어느 분이 지으신거에요?
황선 대변인 : 아기아빠가 최종 결정을 했습니다.
박인규 : 지명수배 상태라고 해도 연락은 되시는 모양이네요?
황선 대변인 : 그것 때문에 연락이 잘 안되어서 아기 이름을 짓는게 많이 늦어졌습니다.
박인규 : 아기아빠가 아기는 봤어요?
황선 대변인 : 아직 못 봤습니다. 사진으로.. 인터넷이나 언론에서 관심이 많으셔서 그런 것을 통해서 보셨다고...
박인규 : 하나 궁금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 "윤겨레", 평양에서 낳은 남한 아이. 국적이 남한이 되는거죠? 대한민국이 되는거죠?
황선 대변인 : 네에. 대한민국이구요. 이중국적취득이나 원정출산 얘기가 더불어서 나온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남북 공히 속인주의라고 해서.
박인규 : 북한 국적을 자동으로 준다는 이중국적은 될 수 없겠네요.
황선 대변인 : 네에. 원정출산에 그런 속에서 나온 얘기인 거 같습니다.
박인규 : 10월 10일이 출산 예정일 일주일 앞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예전같으면 한 달앞에도 떠나기를 겁나 하는데 어떻게 평양까지 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황선 대변인 : 일단 아리랑공연과 평양참관의 길이 9월 10월 활짝 열려서 많은 분들이 주변에서 평양을 많이 다녀 오시고, 아리랑 공연이 너무 멋있다. 이런 감동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해 주셔서 저도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요. 제가 워낙 만삭의 몸이니까 부모님 시부모님들을 대신해서 보여드리고 싶다. 그래서 보내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그 때 즈음에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갔는데 병원 선생님께서 평양 정도는 갔다 올 수 있다... 이것도 남북관계의 진전을 의미한거죠? 예전 같으면 평양씩이나? 평양 정도는 갔다와도 된다. 이래서 얼씨구나 하고 갔습니다.(웃음)
박인규 : 의사가 못 간다고 했으면 못 가셨겠네요?
황선 대변인 : 네에. 물론이죠. 사실 의사선생님의 허락없이는 갈 수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예정일이 앞으로 일주일 뒤다. 말하자면 출산 예정일이 그렇게 된겁니까?
황선 대변인 : 수술예정일이 일주일 뒤였고, 출산 예정일은 그 보다 더 뒤.
박인규 : 그럼 평양에 가신 지 몇 일만에 아기를 낳게 되신 거예요?
황선 대변인 : 바로 당일날 낳았는데요. 가서 동명왕릉을 참관하고 계단이 많이 있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만류를 했는데,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걸어가는 도중에 약간 진통이 오고 제가 자꾸 걸음이 늦어지고 하니까 그곳에 나오셨던 북측 분들이 눈치를 채시고 저를 병원으로 옮겼죠.
박인규 : 그러시다면, 아리랑을 보시다가 아기를 낳으신건 아니네요?
황선 대변인 : 아닙니다. 이미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이미 피가 비친다. 빨리 수술을 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랬구요. 근데 저는 아리랑을 봤으면 좋겠다... 진통 간격이 아주 짧지 않기 때문에 약간 지연되는 주사를 맞구요. 다시 아리랑 공연장에 구급차와 더불어서 갔다가 한 반정도 봤는데 다시 진통이 와서.
박인규 : 상당히 위험했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 당시?
황선 대변인 : 그래서 배를 가르고 나니까 작년에 제왕절개 수술을 했었거든요. 그 자리가 파열이 오기 시작해서 얇은 막 상태로 지탱하고 있었다. 약간만 더 진통이 세게 갔어도 파열이 와서 산모랑 애기랑 쇼크사 할 수 있는 아주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구요.
박인규 : 평양산원이 대표적인 산부인과병원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양산원에서 의사선생님이라던가 간호사분들은 잘 해주시던가요?
황선 대변인 : 남쪽에서 평양의 산모가 처음 분단사상 애기를 낳았어도 남쪽의 의료진들과 당국과 모두 정성을 보여줬을 꺼 같구요. 그런 것처럼 북에서도 가능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작년에도 제왕절개를 수술을 받으셨다니까 어떻습니까? 산모를 다룰 때 문화적 차이도 있었을 거 같은데?
황선 대변인 : 일단 남쪽하고 차이는 의료기술적인 차이는 아닌거 같구요. 사회제도의 차이인거 같거든요. 북이 사회주의이다보니까 일단 의료진들이 모두 알아서 한다는 건데요. 남쪽 같은 경우는 수술을 한 후에도 병 바라지나 산후 바라지를 집안 식구들이 하는데, 북 같은 경우에는 의료진이 다 해야 하는.. 그리고 저 뿐만아니라 모든 산모가 그렇구요. 간병인과 가족은 병실에 들어오지조차 못하더라구요.
박인규 : 그 보름동안 시부모님들은 같이 계셨습니까? 남한으로 오셨습니까?
황선 대변인 : 계셨어도, 하실 일도 없고 너무 무료하실 거 같고, 일단 참관일정은 마치시고 그 다음날 내려가셨습니다.
박인규 : 그럼 남한 주민으로는 혼자계셨는데 낯설다고 할까? 그런 건 없었어요?
황선 대변인 : 거기있는 산모들이 모두 똑같아서 별로 그런 건 없었고, 오히려 그럴까봐 일부러 신경을 더 많이 써주셨거든요.
박인규 : 1인실에 계셨나요?
황선 대변인 : 네. 저는 1인실에 있었구요. 간호사 언니들이 제 방에서 같이 잤어요.
박인규 : 원래 그런 겁니까? 아니면 특별 대우를 해 준 겁니까?
황선 대변인 : 아니요. 층마다 간호사실이랑 호출기랑 이런 것들이 다 있기는 한데 저 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남쪽 산모기 때문에 최대한 건강해서 가야 한다. 해서 중간에 쓰러질 것을 염려하셔서 침대아래에 자리를 펴서 누워서 주무시더라구요.
박인규 : 북한 산모들과 얘기를 나눠 보실 기회는 없었겠네요?
황선 대변인 : 가볍게 인사를 한 정도였지 깊게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박인규 : 25일날 "겨레"가 된 둘째딸하고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와 보니까 놀라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보도진들도 많이 나와 있었는데 그런 예상은 하셨습니까?
황선 대변인 : 관심은 있을 꺼라는 생각은 하긴 했는데요. 그렇게 굉장할 줄은 정말 몰랐구요. 특히 기자진들의 취재 경쟁에서도 느껴지긴 했었는데, 다른 분들.. 저희 지인들이 기뻐하는거.. 어떤 어르신께서는 통일 운동을 좀 하신 분 같은데 저한테 전화를 해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계속 울기만 하시더라구요. 이걸 굉장히 감동깊게 보시고 제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은 자체가 그 분에게는 굉장히 감동있는 일이었나봐요. 그 전화를 받고 나서는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저의 출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감동이 됐다는게 참 스스로 대견 스럽기도 하고..(웃음)
박인규 : 저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쪽의 여성이 북쪽에 가서 한 생명을 만들어서 돌아왔다. 통일운동의 씨앗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본인이 하든 안하든 간에 의미있는 사건이라는 생각은 들더라구요. 그런데 일부는 황선씨가 보통의 한국의 사람들보다 약간 다른 말하자면 한총련의 일원으로 국가보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북한 갔다와서 감옥 생활도 하셨고, 지금도 통일연대라는 단체에서 대변인으로 활동을 하시다보니까 이른바 기획출산이라는 아니냐? 말하자면 이런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시는 분들도 꽤 있으신거 같아요?
황선 대변인 : 네에. 북에서는 그런 생각을 못했었는데요. 남쪽에 와 보니까 국가 경계선을 넘고 가족들을 만나니까 그런 논란이 인터넷상에서도 좀 되고 그랬었다. 이런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런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저를 너무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시는 거 같애요.(웃음) 출산이나 이런 것들을 사람이 의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진통오는 것도 그렇고 오히려 의도적이었다면 그 때 정말 몇 분 상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아기랑 산모랑 다..
박인규 : 바로 낳았으면 안전하게 낳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황선 대변인 : 네에. 그렇게 죽을 수도 있었다는..그런 걸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아찔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오히려 계획적이었으면..(웃음)
박인규 : 지나고 보니까 일주일 뒤니까 아무 걱정없이 갔다 와라..말씀해 주신 그 의사분의 책임이 크네요.(웃음)
황선 대변인 : (웃음) 그런거 보다는 저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구요. 남쪽에서 얌전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거 같은데..(웃음)
박인규 : 있었으면 이렇게 뉴스가 되지 않았겠죠..
황선 대변인 : 네에..(웃음)
박인규 : "겨레" 위로도 딸이라고 들었는데..?
황선 대변인 : "민" 백성 민자를 써서..외자입니다.
박인규 : 딸딸이 엄마가 되셨군요..년년생으로..물론 둘 다 이쁘겠지만 딸이 어떻게 커줬으면 좋겠다? 벌써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빠른 거 같기는 한데..그래도 그런 생각이 드실 것 같아요.
황선 대변인 : (웃음) 글쎄 많은 분들이 그런 질문을 하시고.. 제가 또 딸을 잘 키워야 된다? 이렇게 부담을갖는 것 만큼 아기도 어렸을 때부터 부담이 꽤 될 것 같아서 약간 염려스럽기도 한데요. 어쨌든 이름을 "겨레"라고 지었던 것처럼 "겨레"가 축복해준 것을 잊지 않는 아기가 됐으면 좋겠구요. 이름을 부르는게 일상적이잖아요.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나보다 우리, 민족, 겨레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작은 것도 나누면서 사는 그런 아기로 컸으면 좋겠어요.
박인규 : 우리를 생각하면서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겁니다. 아마..
황선 대변인 : (웃음)
박인규 : 우선, 남편이 아직 둘째딸을 직접 보시지 못했다고 했는데, 99년 한총련 의장 당시 7년째 지명수배를 하고 있는데..애초에 지명수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황선 대변인 : 97년도 당시에는요. 한총련이라는 대학생단체가 적을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규정이 됐거든요. 김영삼 정부시절이죠? 그 때 되고 난 이후에는 97년도부터는 학생회회장으로 총학생회회장으로 당선이 되면 그 당선자는 무조건 국가 보안법 수배자가 됐었거든요. 당선된 순간부터 아기아빠가 99년도 명지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그 순간부터 98년도 겨울이죠. 그 때부터 지명 수배자가 됐습니다.
박인규 : 무슨 활동을 해서가 아니라 한총련의장이라는 이유자체로 보안법을 어기게 된 건가요?
황선 대변인 : 그렇죠. 법의 논리로 맞지 않는건데, 구체적인 행동과 상관없이. 자격자체가 그렇게 된다는.. 그게 가장 직접적인 수배생활을 하게 된 이유죠.
박인규 : 일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전폐논란이 많기는 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법도 법인데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냐? 황선씨 같은 경우에는 98년도에 북한도 갔다 오셨고, 남편되시는 분도 어쨌든 학생운동도 하시고 계시고..
말하자면, 국가 보안법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확신때문입니까? 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황선 대변인 : 글쎄요. 악법도 법인데 없애야 할 법이니까..(웃음) 없애야 할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국가보안법. 예전에 조봉암 선생님께서 평화통일을 주장하셨다가 사형을 당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얘기되면 어처구니 없는 얘기인데 90년대까지 반미에 대한 입장이나 자주, 이런 얘기들을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됐었죠. 그 때 국가보안법 위반이 됐던 사람들이 현재 정치인들까지 미국에 대한 입장이 분분한 속에서 현재 2005년 현재에도 그런 입장을 예전에 가졌었다는 것. 지금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배자가 된다거나 구속이 된다는 이런게 예전에 조봉암선생님이 겪어야 했던 어처구니 없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거 같구요.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이런 몰상식한 일화들은 계속 될 게 뻔하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구요. 이미 제가 평양을 합법적으로 다녀오고 국가분계선을 애기를 낳고도 합법적으로 넘고 98년도와는 다르게 많은 법적 제제를 받지 않잖아요. 국가보안법이 형평성을 잃었다. 그런데 법 앞에 평등이라는 것은 법이 갖는 목숨과도 같거든요.
박인규 : 본인의 소신과 양심상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황선 대변인 : 형평성이 무너지기 시작한 법은 이미 법으로써의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두 분 다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하셨는데, 어떻게 부부가 되셨는지?
황선 대변인 : 제가 범측 대변인을 했었거든요.
박인규 : 결혼은 언제 하신거예요?
황선 대변인 : 작년 초에 했습니다. 중간에 제가 수감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편지도 돌려돌려 주고 받고 하면서 서로 변함이 없었고, 계속 만날 수..
박인규 : 말씀을 들어보니까. 단순히 부부 더하기 동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두분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황선 대변인 : 지향하는거요? 지금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웃음) 6.15 공동선언 있지 않습니까?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평양가셔서 국방위원장과 함께 발표하신 6.15 공동선언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저희가 지향하는거.. 90년대부터..
박인규 : 6.15 공동선언이 빨리 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약간 개인적인 질문인데, 남편도 수배중이고 7년째..본인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감옥에도 갔다 오시고..부모님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드실거같애요. 시부모님두 그렇고..친정부모님두 그렇고..자식들 고생하는거 보기 힘들거든요..어떤 소신이 있다하더라도..어떻게 이해를 해 주십니까? 아니면 갈등이 있습니까?
황선 대변인 : 지금도 많이 힘드실거라고 생각하구요. 이해는 하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 사위를 보는 심경이 굉장히 힘드실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해는 많이 하십니다. 이 일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에 대해서 얘기는 안하세요. 예전에는 많이 배신감도 느껴 하셨고, 저의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제가 방북하고 하는 것에 대해 많은 배신감도 많이 들어하셨고, 경찰이셨거든요.
박인규 : 경찰이셨어요? 그럼 상당히 갈등이 있었겠네요?
황선 대변인 : 제가 방북할 때도 사실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것이 아버지 문제였는데요. 제가 재판과정에서 진술을 하는 것, 이렇게 생활하는 것. 신념을 갖고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지금은 많이 이해해 주시고, 박수를 쳐 주십니다.
박인규 : 아버님은 그런 일로 불이익을 당하신 적은 없습니까?
황선 대변인 : 공개적으로 드러내놓으시지는 않으셨는데, 아버님께서 사표를 쓰셨습니다. 명예퇴직형식으로..그만 두셨습니다.
박인규 : 보안법 때문에 수배 당하고 있는 분들이 몇 분이 계시죠?
황선 대변인 : 지금 한 30명 정도..
박인규 : 그 분들이 한총련 관련해서만..? 일단 국가보안법 문제가 풀려야 한다..?
황선 대변인 : 네에..풀리지 않고는 힘들겠다..생각을 합니다.
박인규 : 통일 운동을 하시는 분에 대해서 일부분의 시각은 북한을 너무 좋게만 보는게 아니냐? 라고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통일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약간 균형 감각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구요. 98년도에는 비합법적으로 다녀오셨고, 이번에는 1박 2일 예정이었지만 14박 15일이 되셨는데, 잠깐의 경험으로 북한을 다 알 수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7년의 시차를 두고 북한을 보면서 뭔가 달라졌다고 느껴지시는게 있던가요?
황선 대변인 :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 하기 앞서서요. 7년전과 비교해서 오늘 2005년 남쪽이 북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달라졌다.(웃음)
박인규 : 남한이 북한을 보는 견해가 달라졌다?
황선 대변인 : 북에 대한 정보, 수준, 정보의 질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하고요. 예전에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은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었잖아요.(웃음) 그런 것 또한 정보의 질이 바뀌면서 예전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북에 대한 정보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지적을 드리고 싶고, 일단 북에서 느낀 것은 남쪽을 향해서 문이 활짝 열렸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왜냐하면 그 때 98년도 당시에는 대학생이라고 들어가는 저를 보는게 남쪽사람들을 보는건 유일한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아주 신기해하고, 지금은 호텔에 가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남쪽사람을 보는게 아주 옆집사람 보는 것처럼 흔한 일이예요.
박인규 : 남한에 대한 거리낌이라던가 낯설어함이 없어졌다?
황선 대변인 : 네에..많이 없어지고, 대하는 것에 대한 경직심등도 없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박인규 : 서로 많이 이해를 하게 된 거네요?
황선 대변인 : 네에..
박인규 : 일각에서는 인권문제를 많이 얘기하거든요. 예를 들면, 강제 수용소라든가, 이런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게 아니냐? 라고 보고 있거든요.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하고 계세요?
황선 대변인 :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리 사회에서 국가 보안법이 이어령비어령인것처럼 국제사회에서 또한 이렇게 적용하고 인권이다..이런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박인규 : 인권의 적용이 보편적이지 않다?
황선 대변인 : 네에.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예를들면 기독교식 인권을 이슬람사회에 강요하는 것이 아주 비인권적인건데 한 사회에서는 그게 인권인 것처럼 또 얘기가 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식 인권은 사회주의적 인권을 강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회자되는 인권상황이 있지 않습니까? 처벌을 한다거나 끓는 용광로에 사람을 밀어서 죽인다거나 이런 얘기들을 들어보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자체가 붕괴됐어야지 된다고..
박인규 : 신빙성이 떨어진다.?
황선 대변인 : 네에..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박인규 : 그래도 북한이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황선 대변인 : 제가 엿 본 일부분에서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어려운 건 사실인거 같애요. 생활자체가 어렵지만 보편적인 인권에 기본을 지키려는 노력은..사회적인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박인규 : 일부 문제는 있겠지만 적어도 인권을 아주 무시하는 나라는 아니다? 라는 뜻입니까?
황선 대변인 : 사회적 인권이 느껴지는 것 같거든요. 산원에서도 그렇고..
박인규 : 두 딸을 키우시면서 통일운동도 계속 하셔야 할 거 같은데..앞으로 통일운동이 어떻게 된다고 보십니까?
황선 대변인 : 통일운동이요? 일상이라고 생각하구요.
예전처럼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정주영씨 예를 들 수도 있을 거 같은데..자기가 가진 것 중에 많은 것을 내놓고 하면 되는 거다..라는 거죠.(웃음) 암살이나 목숨을 내 놓을 각오를 하고 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박인규 : 거창하게 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하자..?
황선 대변인 : 네에..
박인규 : 앞으로 두 딸 잘 키우시고, 통일운동에도 많이 기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황선 대변인 : 네에..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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