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박성용 - >‘거룩한 삶의 탄생’을 위하여: 힘을 해체하기< -내면 여정에서 길을 여는 묵시...
(7) 박성용 - >‘거룩한 삶의 탄생’을 위하여: 힘을 해체하기< -내면 여정에서 길을 여는 묵시...
박성용
33 mins ·
>‘거룩한 삶의 탄생’을 위하여: 힘을 해체하기<
-내면 여정에서 길을 여는 묵시 4-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허파의 숨쉬기와 심장의 맥박소리에 따라 자기 삶을 다시 정위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별로 안내받는 것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긴 시간이 걸린 내 내면의 여정에서 얻게 된 삶의 통찰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상실과 무너져내림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인생이 리허설없는 직접 경험으로 이루어지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심성의 유약함, 지적인 판단의 불명확함, 욕망과 좌절의 혼란이 그대로 늦가을 서리 맞듯 내게 엄습해 오는 것을 통과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안전하지 않은 세상살이에 대한 불안과 마치 사냥개가 먹잇감이 되는 동물을 추적하듯 나를 추적해 온다는 두려움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서 시도하게 만든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힘의 소유,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 삶의 안정을 보여줄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이왕이면 남들로부터도 인정이나 약간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망으로 표현되었다. 사실 이는 실제로 삶에 있어서는 만족한 결과로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내 내면에서의 주된 에너지와 방향이었고 실제로 시간을 보내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도 대략 그러하였다. 결코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한 때는 꿈이 덕수상고 졸업후 은행장, 신학교 졸업후 목회자, 유학후 신학자...대략 그러한 공상에 대한 주류 에너지 속에서 삶의 파고를 견디고 안정적인 삶의 보장에 대한 생각들이 있었다.
그러한 나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고 결국은 어쩔 수 없는 다른 길로 관심과 에너지를 돌린 것은 바로 나 개인의 상실과 무너져내림의 경험이었다. 개인이 원하고 선택하는 것이 안 되거나 박탈당하는 상실과 그토록 그 당시 확실하다고 혹은 목표라고 생각된 명료한 표적이 흔들려 무너져 내림으로써 내가 설정한 은행장, 목회자, 신학자...등의 좌표들이 흐물흐물 녹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이제 생각해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수많은 죽음의 소식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주는 고통, 내 개인의 어둔 터널의 경험, 유학중에 만난 거대한 폭력의 현실 등과 같은 변수들이 내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여정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의 내적 여정은 크게 흔들리면서 때로는 무너지기까지 하면서도 그러나 꾸준히 걸으면서 뭔가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여리게나마 꾸준히 다가온 것은 세상의 중력에 대해 숨 쉬고 싶다는 가쁜 숨의 의식과 심장이 메어지는 상황에서 심장의 열정이 지닌 맥박에 대해 충실하고 싶다는 간절함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간절히 허파와 심장간의 공명에 따라 삶의 감각에 대한 주파수를 맞추는 것을 어느 틈에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경험에 주목하기’라 부르고 싶다. 이 이야기로 나가기 전에 이것이 중요한 맥락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영혼의 내적 여정에 있어서 내가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직면해서 성찰하고 저항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바로 힘(권력)에 대한 문제였었다. 삶의 두려움에 대한 안정성, 그리고 나에게 납득이 되고 또한 나의 지인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용공간으로서 사회적 지위에 대한 대답은 그러한 안정성을 답보하며 또한 명예롭게 까지 하는 힘의 추구였다. 취약한 내 에고의 지지기반과 그 에고의 확장에 대한 좋은 목표가 힘·권력에 대한 것이었고 지난 50여 년간의 내 생의 존재 이유의 주류 에너지로 작동해 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나에게 미국 유학시절에 권력에 대해 일상에서 실험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인사회가 백인이나 흑인으로부터 받는 일상생활에서 차별에 대한 긴장이었고, 특히 대부분 신학생들이 같은 나이 대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을 자녀로 키우고 있어서 애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거나 학부모회의 혹은 다른 관공서와의 일과 관련해서 많은 신학생들이 자신이 목회자라는 표시로 가톨릭 신부와 같이 로만칼라(Roman collar)를 하고 간다. 미국은 아무리 세속사회여도 성직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있었기 때문에 로만 칼라를 하거나 차에 심방중이라는 표시를 하면 다른 대우를 받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료 신학생들이 그런 자기 경험을 통해 존중받았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권고하는 것을 듣기도 하였다. 나는 이것이 특권(privilege)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특권을 포기하면서 수많은 황색인종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이 외골수여서 그랬었는지 한국의 어딘가로 부터의 지원이나 장학금 신청에 있어서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여야 하는 것이지? 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꼬박 십년동안 스스로 벌어 스스로 해결하는 어찌 보면 미련한 방식으로 유학시절을 견디어 냈다.
권력이나 특권이 모두가 가는 길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권력과 특권에 대해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내가 그 어떤 투사나 혹은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 되고자 하는 이념적 지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의 네트워크와 단체의 일에서도 보스가 아니며 보스없이 함께 일하고 공동지성의 안내를 받는 실무력을 자연스럽게 키운 것도 그러한 특권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 대한 실험에서 온 결과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실상 중요하게 나에게 그런 권력과 특권에 대한 인식이 나에게 가져온 것은 바로 영혼의 내면 작업에 대한 방향의 길을 서서히 터 주었다는 것이다.
동방박사의 길을 찾는 질문에 대해 헤로데왕과 예루살렘이 동요를 했다는 것은 나에겐 현실성없는 동화스런 느낌이 한 때 들었지만 결국에 요즘에 와서 다시 놀라워하는 것은 안전함과 확실함의 권력구조가 사실은 허구속에서 세워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내면의 여행자인 동방박사의 이 목격담이 현실은 아닐 수 있어도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비폭력 실천과 회복적 실천(restorative practices)에 몸담은 지난 15년간의 경험을 돌아볼 때 정확하게 내가 인지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국가보호라는 이름하에 군대의 기능, 경찰의 안전에 대한 직무, 공정한 판결에 대한 법원의 권위, 사회의 범죄자에 대한 교도소의 수감과 교정, 국민의 고통에 복무한다는 정치, 자유민주체제의 경제라는 성공신화의 대기업 등 국가의 세금이 들어가는 곳은 여지없이 그리고 권력이 구조화된 곳은 어김없이 공적으로 명시하는 안전함과 확실함과는 정말 상관없는 ‘속빈강정’이라는 곳임을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그토록 안정적이고 견고하고 확고하며 확실성이 보장된다는 사회 보장과 권력 체제가 그 근거가 미약하여 흔들리고 마구 무너지고 있다는 목격을 나는 하게 되었다.
영혼의 내적 여정에서 길고 긴 여정 후에 만난 이 혼란과 동요에서 난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 기도(pray)가 라틴어의 프레카리(precari)라는 ‘간절히 묻다’에서 나왔다고 말했듯이, 자신의 여정이 간절히 묻는 것으로 일관되게 길을 걸었다면, 그 ‘영혼의 간절함’이 권력을 동요시킨다는 이 통찰을 내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영혼의 소명’에 따라 길고 긴 여정을 움직여 가면서 한 번은 쉬고 싶었던 권력·힘·특권도 “소란하며 요동친다”는 것을 은밀하게 목격하고선 다시 걸을 수 밖에 없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을 얻게 되었다.
삶에서 경험한 상실과 무너져내림에 대해 어쩌면 약간은 의지할 수 있거나 조금은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라 오랫동안 기대해 왔던 안전을 위한 힘과 권력은 실제로는 영혼의 여정에 있어서는 “동요와 소란”을 불러일으킨다는 그 속성과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것은 가장 늦게 배운 교훈이기도 하다. 즉, 힘과 안정에 대한 그리움은 정확히 내가 추구하고 가야하는 길의 ‘방향잃음’의 명료한 이정표가 된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내가 한 때 의지하고 쉬고자 했던 것이 동요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그렇다면 영혼의 간절함과 그에 대한 탐구의 물음이 자기 삶을 일으켜 다시금 걷게 하는 것이 어떻게 더 가능하게 할 것인가가 내가 직면한 실존적인 질문이 되었다.
세상의 중력이 주는 삶의 파고에 대해 상실과 무너져내림이라는 심연의 밑바닥에로 내려갔을 때 내게 다가온 통찰은 이것이다. 심연의 물고기들이 바닥에 있는 모래알을 아가미로 흡수해서 다시 토해 내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아 유유히 헤엄치며 나아간다는 것이다. 내 허파가 아가미가 되어 심연의 바닥과 모래씹는 듯한 거칠고 딱딱한 일상 경험들을 수용하고 다시 내뱉으면서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모래를 통해 영양분을 얻고 눈물 나는 짠 경험들 속에서 산소를 공급받으며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여정에서 나는 힘에 대해 다른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안정과 확실함에 대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 ‘살아있음’에 대한 허파와 심장의 공명에서 새로운 존재감, 걷게 하는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으로부터 오는 대안적인 힘에 대한 감각이 다가오게 되었다. 그것은 민감함, 접촉함, 유연한 흐름, 그리고 주고 받는다는 연결의 감각, 빛과 어둠의 포용과 일치로부터 오는 감동의 흐름을 타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내면적인 것이고, 영혼의 민감성과 관련된 영역과의 접촉에서 솟구쳐 나오는 생생함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헤로데왕와 예루살렘도시문화의 동요를 통해 생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심연의 물고기처럼 삶의 무거운 중력이라는 압박속에서 허파와 심장이라는 아가미로 <존재에 대한 감각과 에너지를 얻고 자기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에 따라 지속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생의 의미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면적인 것이 힘이 있다는 것을, 그 힘은 삶의 성취에 대한 자기 궤도의 교정(correction)이 아니라 허파와 심장의 연결(connection)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나는 상실과 무너져내림을 통해 내가 계획하거나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삶의 모호함과 복잡함 앞에 다시금 삶의 신비를 배우고, 긴 여정으로 그동안 지친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길을 떠나자고 부르고 있음을 듣고 있다. 영혼의 간절한 그리움이 별을 다시 뜨게 하여 앞서 나가게 재촉하고 있다.
힘과 안정에서 다시 별의 인도를 받고 내면의 허파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면서 한가지 다가오는 것이 있게 되었다. 주변에 질문해도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 오히려 혼란과 소동이 일어나 나자신도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는 대상이 헤로데와 예루살렘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별에게 질문을 다시 돌려야 걷는 감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내면의 서치라이트이므로 별에게 다시 물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별에게 질문하면서 나의 온 세포는 어둠과 빛에 대해 민감해지는 삶의 수업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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