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와 민간 협력 농촌현대화 모델, 당곡리협동농장
지자체와 민간 협력 농촌현대화 모델, 당곡리협동농장
황재성 | jaesung.hwang@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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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와 민간 협력 농촌현대화 모델
당곡리협동농장
지난 2006년 2월 10일, 지금은 황해북도로 행정구역이 바뀐, 당시 평양시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강남군 당곡리협동농장의 허허벌판 위에 섰다. 강남군은 예로부터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곳으로, 연신 불어오는 강한 흙바람에 제대로 눈 뜨기 조차 힘들었다.
매서운 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남측 대표단은 시설채소를 위한 온실 부지, 벼농사 협력사업을 위한 농지, 마을 안길, 협동농장 농장원들이 거주하는 살림집 등을 둘러보며 사업 추진을 위한 기초조사에 들어갔다.
남북협력사업으로는 최초로 북한 농업생산의 가장 기초 단위라 할 수 있는 협동농장에서 농업기반 조성과 농촌현대화 사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농업생산 기초 단위 … 협동농장 대상 최초 사업
1996년 창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창립 이래 다양한 대북 인도지원 활동을 추진해왔다. 활동 초창기에는 긴급구호차원의 식량지원 사업을 주로 펼쳐왔지만, 2000년부터는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복구(Rehabilitation) 지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농업 지원분야에 있어서는 북한에 절실히 필요한 기본적인 농기자재 지원과 더불어 평양시 사동구역, 평안남도 대동군, 황해남도 신천군 등 3개 지역에 농기계수리소를, 2004년 7월에는 평안남도 강서군에 농기계 조립 생산을 위한 ‘우리민족·금성·동양 농기계공장’을 설립하였다.
2005년부터는 북한 조선농업과학원과 공동으로 평양시 용성구역에 3ha규모의 벼농사 시범재배를 진행하여 북측의 재래농법(밀식재배)의 변화와 농업 생산성 향상의 계기를 만들었다.
당곡리협동농장 지원사업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결집된 사업으로, 2006년부터 경기도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지자체의 전문 인력과 재원 그리고 민간단체의 대북교섭력과 사업경험이 결합되어 큰 시너지가 발휘되는 새로운 대북 지원사업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종합적인 농촌현대화 사업 시도
당곡리협동농장은 여의도의 약 2.4배 넓이로 총 700ha의 농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곡리 전체 주민은 980세대, 7,500여 명이며, 이중 농장에는 750세대, 4,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협동농장은 11개 작업반(벼농사 7, 채소 2, 축산 1, 기계화 1)과 분조당 15~20명으로 구성된 총 31개 분조를 조직하여 운영(벼농사 21, 채소 7, 축산 2, 기계화 1)하고 있었다.
협동농장내 각 가구가 개별적으로 경작하여 생산물을 처분할 수 있는 텃밭은 평균 20~30㎡ 규모로 대부분 마늘을 재배하고 있었다. 당곡리협동농장의 주생산물은 벼와 마늘, 옥수수, 채소로, 육묘용 비닐을 사용해 호박, 고추, 파, 마늘, 배추, 양배추 등을 육묘 중이었으나, 육묘용 비닐이 매우 노후되어 햇빛 투과율과 보온효과가 낮고, 순도가 낮은 종자 사용과 육묘상 관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당곡리협동농장에서 진행된 농촌현대화사업은 크게 벼농사와 시설채소 등 농업지원사업과 농업 기술 및 농기계 수리 기술 이전 등 농업 역량 구축 사업, 5.7km에 이르는 농로 포장, 도정공장 및 농기계수리공장 건설 등의 농업기반조성 사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리 진료소, 마을회관, 유치원, 소학교 등에 대한 신축 및 개보수, 농장원들이 거주하는 살림집 154세대에 대한 신축 및 개보수 등 환경 개선사업 등을 복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단순한 농업협력사업을 넘어 북한 주민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종합적인 지역개발 협력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처음부터 3개년의 중기(中期)계획을 세부적으로 수립하여, 3년 후 북측이 자립하여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사업의 추진방식은 남측의 일방적인 지원을 지양하고 남측이 기술과 자재를 지원하고, 인력과 시공 및 관리 등은 북측이 책임지는 공동협력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남측 민간단체들의 사업 파트너인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와 현지 강남군 인민위원회, 당곡리 협동농장관리위원회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협조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사실 현지 강남군 인민위원회와 당곡리 협동농장관리위원회, 그리고 북측 주민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2006년 2월만 하더라도 북측은 현지 주민들의 노동 현장을 남측 관계자들에게 공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벼농사와 채소 육묘 재배용 온실을 건설하기 위한 부지 정리 작업의 경우 남측이 일정한 방식으로 부지 정리를 요청하고 호텔로 돌아가면, 북측은 밤새 협동농장 노력(인원)을 동원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남측 인원이 아침에 현장을 방문하면 마치 밤새 요술이라도 부린 듯 남측이 요구했던 수로나 부지 정리가 되어 있었다.
북한 현지 주민들 마음을 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점차 서로에 대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북측은 낮에도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북측은 협동농장의 농장원들과 갈비뼈가 드러난 소에 쟁기를 연결해 부지 정리를 하는, 포장되지 않은 모습을 남측에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현장 모니터링 차원에서 남측은 현지 작업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고, 사진기가 조금이라도 작업 중인 농장원쪽으로 돌려지면 촬영을 제지하거나 사진기를 확인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현장의 작업 여건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한 바람에 농기자재들이 날아가기 일쑤였고, 골조를 세운 비닐하우스는 역시 강한 바람 때문에 비닐을 씌울 수가 없었다. 일정에 쫓기는 남측 인원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남과 북의 현장 인력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 시작했다.
결국 해가 뜨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바람이 덜하다는 당곡리협동농장 지배인의 오랜 경험을 믿고 새벽 5시부터 현장 작업을 진행했다. 아무래도 이동과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북에서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진행하고, 때로는 현장에서 밤을 새우며 일하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남과 북은 점차 신뢰를 쌓아나갔다.
농업 기술 이전에 있어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2006년 초만 해도 북측은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이어져온 그들만의 농법과는 다른 낯선 방식의 작물 재배 방법을 믿지 못했다. 협동농장의 입장에서는 행여 한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던 당곡리협동농장 지배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남과 북이 공동 경작한 100ha에서 남한의 평균 생산량을 능가하는 정보당 평균 5.12t을 수확함으로써, 오히려 북측이 2007년 사업으로 당초 합의한 200ha를 400ha로 늘려 공동경작을 제안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당곡리협동농장에서 진행된 농촌현대화사업은 남과 북이 공동협력을 통해 지속가능한 북한의 지역단위 종합개발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어 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기초 정보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사업계획을 바탕으로 북측 파트너와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상호 신뢰가 사업의 성공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향후 남북 개발협력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남북관계 악화로 인해 농업 협력 사업을 포함해 대부분의 남북협력사업이 중단된 요즘, 가끔씩 오전 작업을 마치고 남과 북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리고 가을 논에 고개 숙인 황금색 벼들을 수확하던 날 북측 사람들과 얼싸 안고 같이 깡충깡충 뛰던 그 때의 기억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하루빨리 남북 관계가 정상화되어 다시금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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