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1711 이은선 - <대학 교수직을 떠나며(3)- 새길을 생각하며 > 이번 학기로 세종대 교육학과 교수직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
(14) 이은선 - <대학 교수직을 떠나며(3)- 새길을 생각하며 > 이번 학기로 세종대 교육학과 교수직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
이은선
24 November 2017 ·
<대학 교수직을 떠나며(3)- 새길을 생각하며 >
이번 학기로 세종대 교육학과 교수직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만나는사람들이 여러가지로 인사를 주신다. 그런데 반응이 약간 놀랍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면 공부와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많이 놀으라고 하신다. 이 말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제일 재미있어 하고 놀고싶은 놀이가 공부이고 연구인데...
벌써 시작한지 두 주가 넘어가는 아들과 그 동료들의 연극 <워킹 홀리데이 Walking Holiday>를 여러가지 일로 어제야 보러갔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말하고, 분단을 말하며 통일과 DMZ을 말하지만 그 어느 이야기보다도 이들 젊은 연극인들이 그 연극을 올리기 위해서 지난 일년 여 한반도의 서쪽 허리 파주 DMZ부터 동쪽 끝 고성까지 3백 킬로를 몸으로 걸으며 가로지른 이야기가 정말 마음을 울렸다. 이 한반도가 얼마나 뼛속까지 분단과 상처와 전쟁과 뿌리뽑힘의 이야기로 뒤덮혀 있는지를 깊이 인식시켜 준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내가 더 정진하고 가고 싶은 학문 방법과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슈타이너의 책 제목에 이런 것이 있다. <젊은이여, 앎이 삶이 되도록 하라!> 여기에 더해서 나는 <사람들이여, 삶이 앎이 되도록 하라!>, 이 두 가지의 길을 통합하는 일을 위해서 나는 새길을 가고자 하고,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려는 것이다. 그 새길의 이름을 나는 "생각하는 집사람"(denkende Hausfrau)의 길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아탑에서 나와서 보다 진솔하게 더욱 더 삶과 앎과 만나고자 껍질을 또 한 번 벗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을 살도록 창조되었어. ... 우리는 이 인간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지.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런 장소도, 오피스도, 타이틀도 없어. 모든 거짓은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영원한 진실, 진정한 삶과 느낌은 자리가 없지!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거야. 너는 그것을 공격했기 때문에, ... 나는 죄를 지을 수 없고 그것과 더불어 거짓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은 내가 사랑하는 한나 아렌트의 박사 후 첫 작품 <라헬 파른하겐-어느 유대인 여성의 삶>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라헬 파른하겐이라는, 18세기 유럽사회에서 한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그만두고 유럽인으로 동화하라는 사회의 요구에 맞서서 저항하는 삶을 살아냈던 그 내밀한 속내를 라헬 자신의 편지 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포기하라는 사회적 불의와 폭력에 맞서서 라헬은 이 글에서처럼 진실을 위해서는 자신들은 변방인과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그것을 감수하자고 친구에게 편지글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렌트는 여기서도 더 나아가서 그러나 "진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현실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서 아렌트 자신도 그때까지 빠져있던 오랜 심리적 게토에서 걸어나온다. 그리고 그때까지 외면했던 20세기의 자기 민족이 처한 현실도 돌아보고, 결국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념비적인 작품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다. 그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인간의 조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신의 삶> 등, 나는 이러한 모든 작품들이 그녀가 상아탑의 전문 교수로서가 아니라 'denkende hausfrau'(사고하는 삶의 사람, 집사람)으로서 쓴 작품들이라고 여긴다.
그녀가 젊은 시절 심리적인 게토 속에 있을 때 그녀의 애인이기도 했던 하이데거의 개념이기도 한 이 '집사람'의 개념을 나는 스위스에서 공부할 때 <열림에로의 발걸음Schritt ins Offene>이라는 기독교 페미니스트 잡지에서 만났고, 아이들 둘을 데리고 힘들게 박사학위를 마무리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한국에 가서 꼭 그렇게 살아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원함과 다르게 곧바로 교육학과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30년을 일하면서 지내왔다.
이 '생각하는 집사림'의 이야기를 나는 다시 조선 유교 선비들의 삶에서도 깊이 만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오늘과 같이 그렇게 배타적으로 나누지 않고 집과 가정과 매일의 일상의 삶에서도, 그리고 나라와 정치와 우주를 염려하는 일에서도 하늘의 도를 실현하는 일을 최고로 생각해온 사람들, 그 일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고, 그 윤리와 도덕의 일을 인간 최고의 일로 여기며 자리와 명예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서 고투해온 사람들, 그 일을 비록 당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소수였지만, 조선선비들의 삶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이제 오늘날은 기독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 일에 좀 더 몰두해서 해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전공이고 일이며, 그 삶의 실험에서 얻어지는 열매를 말과 언어로 세상에 전하는 일을 나의 직업과 전공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이 일을 나는 '집언봉사'(執言奉辭, 말을 얻어서 말씀에 봉사하다)의 일로 표현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말을 얻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나의 삶이 그 터전이어야 하고, 그래서 그 삶이 더 진솔하고 성실해져야 한다. 또한 그렇게 말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더 여유가 있어야 하고, 세상과 크고 깊게 만나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한정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나는 그 일 앞에서 항상 설래왔고, 지금도 많이 설랜다.
나는 이 일을 한국여성신학자로서 한국적 여성신학의 일로 알고 해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여성들의 삶이 이미 그래왔고, 유교 여성들도 남성선비들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나는 이해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말로 표현해낼 여유가 많이 없었고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 나는 정말 천은으로 감사하게도 여건이 좀 더 갖추어져 있다. 감사하게도 교직에서 30년 일한 덕분에 나라로부터 연금도 받을 것이고, 부모의 은공으로, 그리고 남편과 함께한 지금까지의 특혜받은 연구자 생활로 다방면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동서의 책들과 문서들과 언어들, 사람들도 쌓여있다. 남편과 자식들도 비교적 편안하니 나도 이제 그들과 더불어 우주와 세상에 대한 염려에 좀더 몰두할까 한다.
나는 오늘 집사람, 주부들이 모두 밖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몸의 생물학적인 구별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생각하는 집사람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용이하게 널리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유영모 선생님은 '우주는 숨쉬는 아기'와 같고 우리는 아기때문에 아플 수도 없는 엄마처럼 그렇게 우주에 대한 염려로 몸건강히, 마음 편히, 얼을 불살라서 말숨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여성적인 표현이고, 이제 여성이 잘 할 수 있다. 여성들은 그 일에서 온갖 어려움을 보다 더 잘 참고 인내할 수 있으므로.
지금까지 남성들만이, 남성선비들만이 갈 수 있었던 그 길을 나는 지금 여성선비로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성찰하는 주부로서 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실험이 얼마나 성공할런지 정말 보고싶다. 이와 더불어 또한 나의 이러한 실험으로 우리 가족과 교회와 나라와 우주가 좀 더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한가족처럼 따스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좀 더 몰두할 한 반도의 생명평화운동이고, 통일운동이며, 종교와 예술, 교육운동이기를 바란다.
이 길을 겸허히 가기 위해서 대학을 떠난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하시는듯 하늘이 또 말씀을 주신다. 최근에 읽은 <주역> 췌괘 해석에서 다음의 글귀를 발견하고 참 좋다고 생각했다. '참된 성인의 뜻은 천하에 성실과 진실이 드러나기를 꼭 원한다'(王者之志 必欲誠信 著於天下).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 길에서 성실(誠)과 진실(信)이야말로 참으로 나의 길잡이가 되고, 방식이며, 목표라는 것을!
이제 여기서 길어진 저의 변을 마쳐야겠습니다. 말씀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 친지가 있고, 한반도와 우주 안에 있으니 참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한 번 성실히 해보겠습니다.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긴 길을 읽어주신 모든 페친들께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함께 합니다! 함께 갑니다!
166Chung Hyun Kyung, Yipyo Hong and 16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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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soon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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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양 "놀고 싶은 놀이가 공부이고 연구"라고 하시니... 하아~, 부럽습니다.
정말 좋은 결과물들이 맺혀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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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박혜인 유영모 ...우주는 숨쉬는 아기 아~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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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목사님 지난 번 보내주신 책을 어제야 학교 우편물에서 찾았읍니다. 정말 고생하셨고 저의 통일운동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읽고 연락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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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soonhyun replied · 1 reply
이은선 반갑습니다. 제주도에서 사시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보내주신 글의 이남순님의 제주도 구상은 저도 평소에 좋게 생각해왔습니다. 이렇게 송선생님을 통해서 다시 만나니 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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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sil Han 이은선교수님~!
새로운 깨달음 주어 감사합니다.♡
인용한 말 중에...…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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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우리 멋진 여성을 진리 가운데로 깨임을 주시려고 몸부림치시는 모습 봅니다. 살아보니 나이를 먹어가니 변화됨도 깨달음도 알게되네요....
이제 더 넓게 가르쳐주시니 고맙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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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중조 "denkende hausfrau"에 생각이 멈춰집니다,, 교수님!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 (무당 취급도 못 받는 용문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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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김미혜 진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현실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 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가네요.
모쪼록 생각하고 바라던 일들이 즐거움으로 이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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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kyung Song 이은선선생님~~!!!
선생님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새로운 삶의 길이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고 등대처럼 주변을 밝히시며 앎이 삶이 될 수 있게 곁에 있는 이들을 독려하시며 어깨동무하며 또 그렇게 살아볼 수 있도록 힘이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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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Inza Valéry Lim 교수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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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김영철 가슴에 울림을 주는군요.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하고 이제 새로운 10년을 살아야할 저에게도 좋은 지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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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한창섭 삶과 앎이 소통되고 일치되는 것을
추구하시는 모습에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배워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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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uk Ham 우주에서 숨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인 우리가 함께 기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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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신경하 구구절절이 감동받으며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새 출발에 희망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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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김대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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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 Park 늘 존경스러운 걸음걸음을 응원합니다 삶이 배움이되고 배움이 삶이되도록 저도 애쓰고싶네요 정말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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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장솔 교수님 저도 응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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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와 솔아 반갑다. 잘 지내니? 연락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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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철 'denkende hausfrau'(사고하는 삶의 사람, 집사람)로 살고자 한다는 각오.여러모로 그 이미지를 그려보게 됩니다. 그중 'Hausfrau'라는 표현이 선듯 긍정적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있습니다. 소위 '현모양처'라는 이미지가 제겐 더 가까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좋은 이미지가 삶으로 표현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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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철 replied · 2 replies
원혜덕 하신 말씀 모두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제까지 해 오셨던 일이지만 새롭게 앎과 삶을 만나시겠다는 말씀도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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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Nan Choo 이교수님께서 큰 꿈과 비전을 가지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며 성실하게 살아오신 이교수님의 꿈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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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황윤겸 존경하옵는 교수님
교수님의 살림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 또한 더 존경스럽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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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희 함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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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은 이은선교수님,
이정배목사님과 함께 의미있는 일 하심을 지겨보며 또한 더 공부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자리를 자유로이 내려 놓으시는 선생님의 결단에 응원을 보내 드립니다.
제가 감히 선생님의 깊은 뜻은 이해 못하지만 선생님은 잘해내실 것 입니다. 지금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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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아 예 선생님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앞으로도 자주 뵈요. 편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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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Hyun Kyung 축하합니다. 저도 그 길을 함께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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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replied · 1 reply
문경란 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감동입니다. 새길교회에 더 자주 오셔서 좋은 말씀 나눠주세요. 은퇴를 축하드리며 멋진 삶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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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란 replied · 2 replies
Shant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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