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語
李氏朝鮮は清国の従属下にあり漢字が重視される一方、ハングルは軽視され、公文書でも採用されることもなかったが、李朝末期(1886年)になって開化派と朝鮮国の日本人顧問である井上角五郎の協力により、朝鮮で初のハングル使用の新聞・公文書(官報)である『漢城周報』(1886年創刊)が発行された[36]。
また、李氏朝鮮では一般人(特に女子)のための教育機関は皆無で、当然義務教育制度もなく大多数の朝鮮人は読み書きができない状況だった[37][38]。しかし日本統治下になると、朝鮮総督府により学校教育における科目の一つとしてハングルと漢字の混用による朝鮮語が導入されたため、朝鮮語の識字率は一定の上昇をみた[39]。
1911年に朝鮮総督府は、第一次教育令を公布し、朝鮮語は必修科目としてハングルが教えられることとなった[40]。朝鮮語の時間以外の教授言語としては日本語が使用された。総督府は1912年に、近代において初めて作成された朝鮮語の正書法である普通学校用諺文綴字法を作成し、1930年には児童の学習能率の向上、朝鮮語の綴字法の整理・統一のための新正書法である諺文綴字法を作成し、それを用いた。識字率の上昇によってハングルで書かれたタクチ本が1920年代から1930年代にかけて流行した[41]。
日中戦争以降、総督府は日本軍の兵士として朝鮮人を動員することなども視野に入れ、朝鮮人の"皇民化"を進めた[42]。しかし、1938年の第三次教育令でも朝鮮語教育は廃止されていない。「第八十六回帝国議会説明資料」(1944年12月、朝鮮総督府)によれば、1938年には「国語を解する朝鮮人」の割合が前年度の8%弱から13%強にまで伸びて(1943年末で22%)いる。1945年8月以降のアメリカ軍による占領が始まった当時、「南朝鮮の12歳以上の総人口の78%はハングル文盲とのであった」とのアメリカ軍の簡易調査もある[43][44]。普通初等学校への就学率は1910年で1.0%、1923年で2ケタ台にのり11.2%、1935年で21.7%、1943年で49.0%であった[45]。
太平洋戦争下の1942年10月には、朝鮮語学会の主要メンバーが治安維持法違反で逮捕されるという事件が起こった(朝鮮語学会事件)、これは上海の大韓民国臨時政府と連絡をとりあっていたメンバーが朝鮮語学会を仮装組織としていた事で逮捕されたものであり(16名に対して予審を申請(予審申請のうち2名は死亡)、14名を起訴猶予、3名を不起訴)、朝鮮語の研究や普及の活動について検挙されたものではない[46]。
日本による統治の末期には、「学校の会話で朝鮮語の使用が罰せられた」との証言もある[47]が、これは朝鮮総督府の指導、指示によるものではなく、朝鮮語が日常会話や新聞などから完全に排除されたわけではない[48]。実際に朝鮮総督府においても、1921年から1945年の日本統治終了に至るまで、朝鮮語能力検定に合格した職員を昇進・給与において有利に処遇していた[49]。
なお、1943年時点で、日本語を解する朝鮮人は1,000人当たり221.5人(「朝鮮事情」1940-1944年版)で、8割の朝鮮人は日本語を話すことが出来なかった[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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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치시대의 조선 - 조선어 // 위키백과사전
이씨 조선은 청나라의 종속하에 있으며 한자가 중시되는 반면, 한글은 경시되고 공문으로도 채용 될 수 없었지만, 이조 말기 (1886 년)되어 개화파와 조선국의 일본인 고문 인 이노우에 카쿠 고로의 협력으로 조선 최초의 한글 사용의 신문 · 공문서 (관보) 인 '한성 주보」(1886 년 창간 )가 발행 된다. [36]. //
또한 이씨 조선에서는 일반인 (특히 여자)을위한 교육 기관은 전무, 당연히 의무 교육 제도도없이 대다수의 조선인은 읽고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37] [38]. 그러나 일본 통치하에되면 조선 총독부에 의해 학교 교육 과목의 하나로 한글과 한자의 혼용에 의한 조선어가 도입 되었기 때문에 조선어의 문맹률은 일정한 상승을 보았다 [39]. //
1911 년 조선 총독부는 1 차 교육령을 공포 조선어 필수 과목으로 한글을 가르치는되었다 [40]. 조선어 시간 이외의 교수 언어로 일본어를 사용했다. 총독부는 1912 년 현대에 처음 만든 조선어 맞춤법화하고, 보통 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고 1930 년에는 아동의 학습 능률 향상 조선어 철자법의 정리 · 통일 위한 새로운 맞춤법 인 언문 철자법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했다. 문해력의 상승에 의해 한글로 쓰여진 택지 책이 1920 년대부터 1930 년대에 걸쳐 유행 한다. [41]. // 한글 표기의 「매일 신보」(1945 년 8 월 14 일) //
중일 전쟁 이후 총독부는 일본군 병사로 조선인을 동원하는 것 등도 시야에 넣고 조선인의 "황민 화 "를 진행했다 [42]. 그러나 1938 년의 3 차 교육령에서 조선어 교육은 폐지되지 않는다. "86 번째 회 제국 의회 설명 자료」(1944 년 12 월 조선 총독부)에 따르면, 1938 년에는 「국어 (일본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의 비율이 전년도의 8 % 미만에서 13 % 이상 까지 늘어나 (1943 년 말 22 %)있다. 1945 년 8 월 이후 미군에 의한 점령이 시작된 당시 "남한의 12 세 이상 인구의 78 %는 한글 문맹이었다"는 미군의 간이 조사도있다 [43] [44 ]. 보통 초등학교에 취학 비율은 1910 년 1.0 %, 1923 년에 2 자릿수에 풀 11.2 %, 1935 년 21.7 %, 1943 년 49.0 %였다 [45]. //
태평양 전쟁 하에 1942 년 10 월에는 조선어 학회의 주요 멤버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어 학회 사건) 이것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락을 마주 잡고 있던 멤버가 조선어 학회를 가장 조직하고 있던 일에 체포 된 것이며 (16 명에 대한 예심을 신청 (예심 신청 중 2 명은 사망) 14 명을 기소 유예 3 명을 불기소) 조선어의 연구 및 보급 활동때문에 검거 된 것은 아니다 [46]. //
일본에 의한 통치 말기에는 「학교의 대화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면 형벌을 받았다 "고 증언도있다 [47] 그러나 이것은 조선 총독부의지도,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선어가 일상 대화나 신문 등에서 완전히 배제 된 것은 아니다 [48]. 실제로 조선 총독부에서도 1921 년부터 1945 년 일제 종료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능력 검정에 합격 한 직원을 승진 · 급여에서 유리하게 처우하고 있었다 [49]. // 또한 1943 년 시점에서 일본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은 1,000 명당 221.5 명 ( 「조선 사정 "1940 - 1944 년판)으로 80 %의 조선인은 일본어를 할 수 없었다 [50 ]. //
https://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7%B5%B1%E6%B2%BB%E6%99%82%E4%BB%A3%E3%81%AE%E6%9C%9D%E9%AE%AE#%E6%9C%9D%E9%AE%AE%E8%AA%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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