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9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

등록 :2014-02-21 19:20수정 :2015-12-22 15:20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를 지난 8일 오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마련한 쉼터인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만났다. 김 할머니는 “어릴 땐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이젠 눈물도 마르고 웃을 일도 없다”며 초탈한 자세를 보였고, ‘소원이 무엇이냐’, ‘가장 기쁠 때가 언제였나’ 등의 질문에는 “아이고, 희한한 걸 다 묻네. 그런 거 없다”고 반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세월이 약이란 말은 틀렸다. 시간이 가도 절대로 아물지 못하는 상처,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막막해지는 아픔이 있다. 다른 이의 끔찍한 상처를 목격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경악하고 격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충격에도 익숙해진다. 오래된 미결 서류처럼 우리 마음 한구석으로 밀쳐진 아픔이 “역사의 상처”라는 상투적인 문구로 화석화되는 동안, 깊은 화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헤벌어진 상처에선 선홍의 피가 통곡처럼 새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처음 세상에 터져 나온 것이 1991년, 그사이 대통령이 다섯번 바뀌고 국민소득이 7천달러에서 2만4천달러로 올랐지만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원점을 맴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하는 수요집회도 1114번째, 이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55명뿐이다.

“맨날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테레비고 신문이고 입이 아프도록 죽도록 말해 놓으면 그 말은 다 어디 가삐고 한두마디 나오고 그저 ‘김복동 위안부’, ‘위안부 김복동 할매’… 이기 머, (내가) 위안부라고 선전하는 거밖에 더 되나 말이다. 안 그래?”

서울 연남동 위안부 피해자들의 쉼터에서 만난 김복동 할머니는 짐짓 볼멘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1926년생으로 올해 나이 88살. 부산에서 장사를 해서 혼자 먹고살 만큼은 되었지만 위안부 피해자로 얼굴을 드러내면서부터 일가붙이며 이웃 주민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자식도 남편도 없는 독신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2010년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 기거하고 있다.



배고프면 뭐 사먹으라 준 엄마의 1원

-1992년 정부에서 위안부 피해를 신고하라고 할 때 선뜻 신고를 결심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신고를 안 했지, 내가 신고를 안 하면 저놈들 나쁜 짓 한 거 어떻게 알겠노. 말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신고한 건데. 차라리 (신고)하지 말고 딱 들어앉아 있었으면 다른 사람 다 모르고 살았을걸. 신고하고 여기저기 방송국에서 오고 테레비에 나오고 하니까 알 사람은 다 알아버리고… 아이고 할머니, 그런 줄 몰랐드만 거기 갔다 왔다네, 하니까 영 친구들도 만나기 싫고 고향에도 있기 싫고….”



신고를 할 때까지 가족·친지 누구도 김복동 할머니가 “거기” 갔다 온 걸 알지 못했다. 해방 뒤 겨우 살아 돌아온 딸에게서 차마 상상도 못할 일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평생 가족에게도 발설을 않은 채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릴 적 고향에선 어떻게 사셨나?

“고향이 경상남도 양산이다. 딸만 여섯, 내 위로 셋, 내 밑에 동생 둘 있었고. 내가 국민학교 원서 받아놓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 어릴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 앞으로 땅이 좀 있었는데 가난한 소작인들이 아버지더러 보증을 서달라고 하니 맘 좋은 아버지가 그거 보증 섰다가 재산을 뺏기게 된 기라. 왜놈들이 하는 일이니 안 뺏길 도리는 없고. 그 화를 맨날 술로 달래더만 결국 돌아가셨다. 엄마 혼자 도저히 농사를 못 짓겠으니 나더러 학교 그만두고 동상을 돌봐다오… 그래서 4학년 때 학교 관뒀다.”



동생들 업어 키우면서 일제 공출로 배를 곯아야 하는 살림이었지만, 짬이 나면 친구들이랑 어울려 자치기, 땅따먹기도 했다. 어린 김복동은 조신하게 공기놀이를 하기보다는 사내아이처럼 뛰어노는 왈가닥이었다. 그즈음, 군·면마다 여자아이들을 몇십명씩 모집한다고 소문이 났다. 시집간 사람은 안 끌고 간다고 해서 이집 저집에서 웬만한 여식들은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그때 언니들도 시집가신 건가?

“형들은 열여덟, 열아홉에 시집을 갔지. 그 당시 남자는 징용, 징병 나가삐고, 시집보내려고 하면 신랑감이 없는 기라. 돈 없어서 남의 집 머슴살이 하던 노총각, 몸이 불구가 돼서 장가 못 간 사람. 그런 사람이라도 (일본에) 끌려가는 것보단 낫다 해서 다들 혼인시키고. 그때 장가간 사람들은 땡잡았지.”

-그때 언니들처럼 서둘러 시집을 가셨으면 좋았을걸.

“나는 뭐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나이가 어려서.”

-몇 살 때 끌려가신 건가?

“만으로 열네살. 우리 집에 일본 순사하고 반장하고 와서는 데이신타이(정신대) 가야 된다는 기라.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야 된다고. 우리 엄마가, 나이도 작은 게 일을 할 수 있겠나 하니까 배우면 된다고, 시집갈 나이가 되면 집으로 보내준다고 하더라고. 안 가면 식구들 다 추방하고 재산도 뺏는다고 하는데 어쩌겠나. 공장 가서 설마 죽기야 하겠나 싶어서 ‘엄마, 내가 갈게.’ 그랬지.”


-어머니랑 헤어질 때를 기억하시나?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엄마가 돈 1원을 구해 와서 내 치맛말기에다 꿰매 넣어 주면서 공장 가서 배고프면 이걸로 뭐 사먹어라 하셨지.” 같은 마을에서 세명이 끌려갔는데 부산 제1부두의 커다란 창고에 내리니 20~30명의 다른 처자들이 와 있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다시 배를 갈아타고 화물칸에 실린 채 몇 달을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닿은 곳이 대만을 거쳐 중국 광둥이었다.

-시모노세키까지 갔는데 공장으로 바로 안 보내고 또 어딜 보내나 의심하지 않으셨나?

“시모노세킨고 어데고 그때야 어떻게 아나? 어디로 가는지 말을 안 해 주니까, 뭐 공장 간다니 공장 가는 줄 알았지. 어디가 어덴 줄 어떻게 알겠노.”


불쌍하다고 먹을 걸 주고
앉아만 있던 군인도 있어…
안 보면 죽고 못 살고
보고 싶어 죽는 게 정이지
난 그런 정은 모른단 말야

맨날 했던 말 하고 또 해도
그 말은 다 어디 가삐고
그저 ‘위안부 김복동 할매’…
일본이 한결같이 저러고 있으니
응어리가 풀리는 걸 모르겠어


죽으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죽지

-그럼 공장 직공이 아니라 위안부로 끌려온 거라는 걸 언제 아셨나?

“(답답하다는 듯) 거기 가서… 그런 일을 시키니까는 알았지. 이게 아니구나.”

-방 안에 일본 군인이 들어올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모르지. 처음에 광둥에 가니까 사령부에서 나왔다던가. 높은 놈들이 쫙 앉아가지고 몸 검사를 하더라고. 군의관이 와가지고 ‘몇 살 묵었노?’ 하더니 만 열네살밖에 안 된다고 즈그들끼리 고개를 갸우뚱해쌓더만. 그래도 뭐 어떻게 하겠어. 오도 가도 못하는 거. 검사 다 하고 데리고 가는데, 방이 칸칸이 있더라고. 희한하다 방이 칸칸이 있네 하면서 들어가니 그날 저녁부터 오는 기라.”

-첫날부터 그럼 여러 명이?

“아니지. 첫날엔 한 명만.”

-그럼 그날 다른 방에서도 다 똑같은 일이 벌어진 건가?

“그렇지. 다 똑같은 일이.”

-다음날 같이 간 사람들과 만났을 때 어땠나?

“셋이서 죽자 했지. 죽으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죽지 싶어서 내가 가지고 온 1원을 꺼냈지. 거기 일해 주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불러다가 1원을 주면서, 마시고 (먹고 쓰러지는 시늉 하며) 요러는 거 주라고 하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말이 안 통해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배갈을 한 되 가지고 와서 컵을 갖다 놓으면서 이거 마시고 물 마시라는 거야. 나는 술 냄새고 뭐고 모르겠는데, 친구가 보더니 이거 틀림없는 술이다. 그래서, 술 먹어서 죽냐 하니까 술 먹고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



한 모금 마시니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게 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셋이서 술병을 다 비우고 실신해 있는 걸 위생병들이 달려와서 위세척을 하고 살려냈다. 며칠간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겨우 살아나자마자 본격적인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토요일에는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요일에는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평일에는 주말에 못 온 사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광둥을 거쳐 홍콩,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자바, 방콕, 싱가포르까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트럭에 실려갔다가 또 영문 모르고 끌려다니는 생활이 8년간 반복되었다.



-그 시대에 열네살이면 왜소했을 텐데… 초경은 언제?

“그게 그때까지 없었어. 거기 가서 했지.”

-미성년자 유인 납치에 감금과 집단 강간인데…(한숨) 거기서 ‘위안부’라는 명칭은 들어봤나? 각자 어떻게 불렸나?

“위안부는 못 들어봤고, 각자 이름으로 불렸지. 방방에 이름 붙여놓고. 내가 김가라서 난 ‘가네모라 후쿠요’. 명패 아래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놓는데 어떤 데는 나무가 없어서 포장을 쳐놨어. 기다리다가 포장을 쳐들면 다 보여요.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거기 있는 동안 집에 편지를 쓸 수는 없었나?

“없어, 일절 없어.”

-군인들도 편지는 쓰지 않나?

“(언성을 높이며) 편지는 즈그 집에나 쓰지, 우리도 쓰게 하나? 우리가 어떻게 부칠 거야? 그런 자유가 있었으면 무슨 걱정을 하겠어?”


-그러면서 어떻게 견디셨나? 어린 나이에 8년이나 외딴 곳에 갇혀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하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상상이 안 된다.

“말을 해도… 당한 사람 아니고는 몰라. 말로는 모른다고….”

-그때 제일 큰 소원이 뭐였나?

“하이고, 별 희한한 걸 다 묻네. 그 당시엔 소원이고 뭐시고 그런 생각도 못 해봤다고. 언제나 끝나나 이것도 모르고. 그냥 날 새면 오늘인갑다. 해가 가는지, 달이 지는지….”

-그 어린 나이에, 여성 생식기는 정말 연약한 부위인데. 이게 무슨 굳은살 박이는 데도 아니고.

“굳은살이… 배긴다. 처음엔 피가 나고 걸음도 못 걷고 막 형편없었다고. 그러면 약 바르고 치료하고, 좀 나으면 또 시키고. 오랫동안 그러니까 감각이 없어지더라고. 내가 감각을 몰라. 몸을 씻거나 할 때도 만져보면 아무 감각이 없어.”

-나중에라도 병원엔 가보셨나? 의사들은 뭐라던가?

“아무 탈이 없다는 거야. 근데 자손을 못 놓지. 굳어질 대로 굳어졌는데 무슨 자손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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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위안부를 사랑하는 군인 얘기도 나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었어. 즈그들도 타관에 나온 거고 우리도 끌려가 있으니까 불쌍하다고, 먹을 걸 갖다주기도 하고. 어떤 군인은 그냥 앉아만 있다가 가기고 하고. 즈그는 그랬어도, 난 정이라고는 통 모르고 살았어.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

-그럼 그 이후에도 살면서 좋아한 사람이 없었단 건가?

“없어. 사랑이라고는 난 못 느끼고 살았어.”

-몸만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드신 거네. 살면서 가장 기쁜 때는 언제였나?

“(벌컥 성을 내며) 기쁜 게 어딨노? 뭣이 기쁘네? 난 누가 노래하는 것도 시끄럽고, 노는 것도 싫고, 어디 가서 말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다 싫어.”

-그래도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좋은 날도 있었을 것 아닌가?

“돈 잘 벌면 좋았지. 벌어서 살기 답답한 사람들 다 퍼주고 할 때.”

-정이 없다면서 답답한 사람은 왜 퍼주시나?

“마음이 약해서 외로운 사람을 보지를 못하는 거지. 그게 어디 정인가.”

-그게 어떻게 다른가? 그럼 정은 뭔가?

“안 보면 죽고 못 살고, 보고 싶어 죽고, 그런 게 정이지. 난 그런 정은 모른다 말이야.”



갇힌 방에서, 열네살 소녀는 자신의 몸에서 감각을 거두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방식이었을지 모른다. 몸의 감각을 닫고, 마음의 빗장도 닫았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진공의 나날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된 줄도, 일본이 패망한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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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끌려갔던 싱가포르에서는 미군이 들이닥쳐 포로수용소로 끌고 갔다. “벌레가 허옇게 디비진” 밀가루죽을 먹으면서 몇 달을 지냈던가, 다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보내졌다. 1939년 열네살에 끌려가서 스물두살이 되어 귀국할 때까지 그는 한 번도 자기 몸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죽거든 산에다 뿌려줘, 나비 되어 날아다니게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는 “협정의 해석과 실시에 대한 분쟁 발생시, 정부의 외교적 의무와 중재회부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반세기가 되도록 정부는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정부가 일본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권리보호에 대한 정부의 헌법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라는 “부작위” 판결을 내렸고, 이듬해인 2012년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큰 진전은 없다. 지난해 5월, 정대협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공개질의서를 보냈지만 지금껏 청와대의 공식 답변은 받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적 있으신가?

“없어. 찾아온 적도 없고. 옛날에 (한일협정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거를 잘 해결해줬더라면 지금까지 이런 고생은 안 할 텐데… 그러니 박정희가 해결 못한 걸 그 따님이 대통령이 됐으니까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떡하라는 말 한마디 없으니 도대체 대통령이 혼자 된 대통령인가. 국민들이 대통령도 만들고 국민들 어려운 거 살피라고 만들어 놓으니까. 민주주의 국가가 요새 가만히 보면 독재주의로 돌아가는 거 같애. 그러니께는 요새는 사람들이 ‘안녕하십니까?’ 물어보면 ‘안녕 못합니다!’ 이게 인사야.”

-일본이 점점 군국주의로 가니까 해외에서도 일본에 대해서 여론이 안 좋은데, 이럴 때 다른 나라랑 힘을 합쳐서 일본을 압박하면 안 될까?

“그래 말이다! (손으로 글 쓰는 시늉) 그렇게 좀 쓰라 말이다. ‘왜 우리 정부 가만있느냐, 다른 나라에서도 힘을 쓰는데 정부가 앞으로 나서서 힘 좀 써주길 바란다.’ 그런 말 좀 쓰라고! 그런 건 하나도 안 실으면서….”

-꼭 쓰겠다.(웃음) 그동안 많은 사람들한테 억울한 얘기도 하시고 유엔이나 미국, 일본, 프랑스, 해외 각지를 돌며 폭넓은 연대의사도 받아내셨으니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지 않았나?

“요즘 수요집회 나가면 작게는 500~600, 많게는 700~800명씩 오니 자리가 비좁아. 그럼 좀 기운이 난다. 이제는 좀 알아주나 싶고. 그래도 나는 항상 억울하다. 20년을 싸워와도 일본이 한결같이 저러고 있으니 응어리가 풀리는 걸 모르겠어. 잘못한 거를 잘못했다고 사죄만 해준다면… 죽기 전에 하루라도 맘 편히 살아보고 싶은데.”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그 꼿꼿함이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이 무망한 세월의 흐름을 마지막 안간힘으로 버티고 계신 걸까. 나지막이 여쭤보았다.

“솔직이 이거… 돌아가시기 전에 해결될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더 이어갈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해결 안 난 채로 하나둘 돌아가시는 동료 할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시겠다.

“아이고, 잘 갔다 싶지. 해결도 안 나는 거 오래 살아봤자… 나도 오늘 저녁에라도 가고 싶어.”

-…고향 어머니 산소 곁으로 가고 싶으신가?

“아니. 나는 죽거들랑 불에 태워서 훨훨 뿌려주라고 했어. 누가 돌볼 거라고 묘를 만드나. 그래서 저 산에 훨훨… 물에다 던지면 물귀신 된다니, 산에다 뿌려주면 훨훨 나비가 되어서 온 천지 세계로 날아다니고 싶어.(웃음)”

인터뷰 내내 웃지 않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난해 3월, 김복동 할머니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전시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전세계 여성들을 위한 ‘나비기금’을 발족했다. 일본 정부에서 배상금을 받으면 전액 기부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일제 군국주의를 “위안”하라고, 조국 번영과 경제성장을 “위안”하라고, 국가의 이름으로 결박 지었던 그의 영혼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지만, 난 아직 그를 날려 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야만의 목격자로서 우리는 여태껏 그를 위한 증인석에 제대로 나서보지 못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625292.html#csidx17b2d0ffae0f24a8557a486ddaa5e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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