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30

브나로드 운동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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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 운동

최근 수정 시각: 2018-10-22 05:00:05


분류
일제강점기


В народ 運動

1930년대 초반 일어난 민중 계몽 운동.


1. 개요2. 성과와 한계3. 영향과 기타



1. 개요[편집]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기사



배우자! 가르키자! 다함께 브나로드!!


브나로드라는 말의 어원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인층에서 "민중 속으로 (В Народ)"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몽 운동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민중 계몽 운동의 고유 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는데 하필 러시아어라 공산주의 운동으로 오해받기도 해서 단어만 차용했다고 누누이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는 2차 대전 전이라 체코가 자유주의 국가니까 체코어라고 우기는 방법도 있다.[1]

이미 1920년대부터 지식인 계층과 종교계 등에서 농민들을 상대로 계몽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이라 칭하는 운동은 동아일보의 주도로 일어났다. 한편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학생운동이 어려워진 학생들도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고 민중들을 계몽하는 쪽을 선택하면서 운동에 호응하게 된다.

1931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명칭 아래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민중 계몽 운동을 독려했다. 구체적으로 여름 방학 기간 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봉사 활동을 하고 야학을 만들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한글을 교육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의욕적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해 야학을 통해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시국 강연, 위생 강연 등의 강연 활동도 진행되었으며 이런 활동상을 수기와 기사 등으로 알리는 학생 기자들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2. 성과와 한계[편집]


1931년부터 34년까지 진행된 브나로드 운동은 1,320처에서 5,751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97,598명에게 강습을 진행했다.특 히 1934년에는 만주·일본 등 국외까지 이 운동이 확산되기까지 했다. 배부된 교재는 무려 210만 부나 되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에는 명백한 한계도 있었다. 애당초 한글을 가르치는 것에 일제는 의심의 눈으로 이 운동을 주시했다. 한편 일제가 브나로드 운동을 일시적으로 용인한 건 학생 운동의 힘을 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이 운동을 통해 농민의 계몽 뿐 아니라 학생들의 사상 선도도 꾀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편집장이었던 이광수의 주의사항에서 볼 수 있다.



지방에 있는 동지들과 협력하여 이 운동을 건실하게 할 것.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지방 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할 것.

동포에 대한 봉사이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

건강에 유의할 것.


이런 당부는 브나로드 운동을 철저히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지않으려는 의도였다지만 한편으로 일제에 순응적인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2]. 그리고 브나로드 운동은 국가적 지원이 결여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되는데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서 목표로 했던 문맹퇴치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끝났다. 1945년 문맹률 조사에서 문맹률이 무려 78%에 달해서 1930년 문맹률 77%(일본 국세 조사)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 이를 반증하며, 한반도에서 문맹 퇴치는 1945년 광복이 되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지고 나서야 실효를 거두게 되었다.

3. 영향과 기타[편집]


비록 공식적인 브나로드 운동은 4년만에 막을 내렸지만 지식인층의 민중 계몽 운동의 전통은 계승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에는 쇠퇴했지만 대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의 농활이 브나로드 운동을 계승했다 볼수있다.

소설가 심훈 은 브나로드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브나로드 운동의 장려를 위해 소설을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록수(소설)이다.[3]


[1] 체코어로 하면 V Národ다. 같은 슬라브어 계통이라. 참고로 폴란드어로는 W Naród로 '브나루트'가 된다.[2] 사실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즉 정치성이나 독립 운동을 완전히 배재하고 순수한 교육 계몽 운동으로 진행하는 주의 사항 같은 경우,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공개적인 대중 운동의 특성상 합리적인 전술로 볼 여지는 있다.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상황이나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성향 등을 생각하면 특별한 지침이나 주의 사항이 없는 한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독립 운동의 성향을 강하게 띌 수 밖에 없는데, 비밀 조직을 통한 지하 운동도 아니고 공공연히 이뤄지는 대중 운동에서 독립 운동의 성격이 드러나버리면 당연히 일제 당국에 의한 엄청난 탄압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참여자의 정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대중 운동의 특성상 일단 탄압의 대상이 되면 회피하거나 저항할 수단조차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궤멸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보면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공개적 운동을 통한 독립 운동은 시작하자마자 탄압에 의해 운동 역량을 대부분 손실하는 것이 불가피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꼭 독립 운동을 하려거든 지하 운동으로 비밀리에 하고) 공개 운동 자체에서는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독립 운동의 성격을 전혀 포함시키지 말고, 대신 장기적으로 독립 운동 및 독립 국가 건설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교육 계몽 활동에 초점을 맞추자는 전략 자체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저 발언을 한 사람이 이광수라는 것(...) 이광수의 행적을 볼 때 해당 주의 사항이 '독립 운동의 전술적 고려' 보다는 '일제에 대한 타협이나 굴복'으로 읽히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저 발언을 이광수가 아닌 여운형이 했다면 '국내파 독립 운동 지도자로써 현실주의에 기반한 합리적 행동 지침' 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3] 등장인물인 채영신은 최용신이라는 당대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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