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 교수 "스스로 '정의롭다' 는 정권은 정의롭지 않아"
중앙일보 2019.01.23 06:30
백성호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vangogh@joongang.co.kr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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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김정탁(65ㆍ신문방송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최근 『장자』를 출간했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 때 송나라 출신의 사상가다.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 인물이며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었다. 그래서 흔히 노자와 장자를 합해 ‘노장 사상’이라 부른다. 김 교수는 그런 ‘장자’를 무려 15년간 파고들었다. 집필에만 4년이 걸렸다. 금ㆍ토ㆍ일에는 밤 10시 이전에 연구실 문을 나선 적이 없다. 식음을 잊은 김 교수에게 학교의 수위 아저씨가 자신이 먹을 빵과 우유를 갖다 준 적도 있었다. 김 교수는 “이제는 공자나 맹자가 아니라 ‘장자’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신문방송학과 교수인데도 15년 동안 '장자'에 천착한 이유를 묻자 김정탁 교수는 "장자야말로 진정한 소통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김상선 기자
‘장자’, 한마디로 어떤 인물인가.“장자는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개인의 행복’을 말한 유일한 사상가였다. 다른 학자들은 부국강병을 말했다. 법가(法家)와 병가(兵家)가 그랬다. 진시황이 법가와 병가를 채택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지 않았나. 또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는 너무 인위적인 도덕으로 사람을 묶었다. 예를 들면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가 그런 거다. 생각해보라. ‘인ㆍ의ㆍ예ㆍ지’를 지킨다고 인간이 과연 행복해지겠나.”
도덕이 없다면 삶의 기준도 없어지지 않나. 그럼 ‘장자’에는 도덕이 없나.“자연을 보라. 자연에 ‘인ㆍ의ㆍ예ㆍ지’같은 도덕이 있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굉장히 편안해지지 않나, 행복해지지 않나. 장자가 말하는 도덕은 이런 도덕이다. 자연스러운 거다. 인위적이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연적 도덕을 이미 가지고 있다.”
김 교수는 “인위적인 도덕을 너무 강조할 때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야’ 혹은 ‘우리는 정의로운 정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정의로운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100% 순도의 정의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계속 공격해야 한다. 끊임없이 비판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전체적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건 동그라미를 끝없이 깎는 형국이다.”
제자백가 중 유일하게 개인의 행복을 강조한 장자.
동그라미를 끝없이 깎는다는 게 뭔가.“가령 둥근 원(圓)이 있다. 인위적인 도덕, 인위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원을 더욱 둥글게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순도 100%의 원을 추구한다. 그걸 위해 동그라미를 계속 깎아 나간다. 결국 어떻게 되겠나. 모가 생기고 만다. 완벽한 동그라미를 만들려고 하다가 오히려 모가 나는 꼴이다. 조선의 당파 싸움도 그랬다. 노론은 순도 100%를 추구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끝없이 공격했고, 상대방 의견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모가 났다.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 뭐라고 말을 하나.“그냥 자신의 삶으로 드러날 뿐이다. 얼마 전 청와대 대변인이 ‘문재인 정부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게는 ‘우리 정부는 애초에 정의롭다’는 말로 들렸다. 진정 정의로운 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장자적 관점을 가진 내게는 무척 안타까운 대목이었다.”
김정탁 교수는 ’큰 지혜는 너그러워 화합하고, 작은 지혜는 촘촘해 편가른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법(法)’이란 글자를 한자로 썼다. “삼수(三水)변에 갈 거(去)자가 합해졌다. 무슨 뜻인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라는 뜻이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인위적인 도덕이나 100% 순도의 이데올로기로 변질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럼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게 된다. 그럴 때는 작은 시시비비를 따지며 싸움만 벌이게 된다. 대신 큰 시시비비를 놓치게 된다.”
큰 시시비비가 뭔가.“전체와의 균형이다. 이제는 ‘합리적 사회(rational society)’에서 ‘화리(和理)적 공동체(community)’로 옮겨가야 한다. ”
‘장자’의 심장을 딱 한 글자로 꼽으면.“‘놀 유(遊)’다. 『장자』는 ‘내편(內篇)’‘외편(外篇)’‘잡편(雜篇)’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내편’은 장자의 직설로 본다. 그 ‘내편’의 첫째편 제목이 ‘소요유(逍遙遊)’다. ‘외편’의 마지막이 ‘지북유(知北遊)’다. 유(遊)에서 시작해 유(遊)로 끝난다. 장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건 ‘유(遊)’다. 다시 말해 유유자적한 노님이다. 중국 미학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이 ‘유(遊)’다.”
김정탁 교수가 중국 현지에서 발간된 '국학십전'의 '장자' 중 오류 부분을 책갈피로 표시해 놓았다. 김상선 기자
김정탁 교수가 '장자'를 풀이한 기존의 책들에 대한 오류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유(遊)’는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건가.“아니다.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유(遊)’다. 원래 인간의 노동은 신성했다. 자연과 인간을 잇는 매개였다.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의 개념이 왜곡됐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노동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노동은 ‘나’를 구현해가는 수단이다. 이게 산업시대에 들어와 ‘먹고 사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노동(Labor)’이 ‘워크(Workㆍ일)’가 되고 말았다.”
‘노동’이 ‘워크’가 되면 어찌 되나.“산업시대의 워크에는 ‘자기 영혼’이 없다. 자기 영혼이 없으니 자아실현도 없고, 자기 만족도 못 한다. 그래서 대중예술이 등장했다. ‘너, 돈 많이 줄 테니까 보람은 찾지마. 대신 자아실현을 통한 만족감은 영화 같은, 다른 데서 찾아봐.’ 결국 인간은 자기 내면을 통한 만족을 찾지 못하고, 대중예술을 통한 타자화된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타자화된 만족, 문제가 있나.“그런 만족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원히 목마르다. 인간은 결국 일을 하면서 끝없이 소외당하고 만다.”
김정탁 교수의 연구실에는 붓이 걸려 있었다. 그는 "'장자'를 풀어내는 과정이 내게는 개인적으로 수도의 과정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산업시대의 ‘워크’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했다. “‘워크’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시대에 쓰인 개념이다. 그걸로는 새로운 시대를 헤쳐갈 수가 없다. 이제는 일이 ‘워크’가 아니라 ‘플레이(놀이)’가 돼야 한다. 일에서 자기 만족도 찾고, 보람도 찾아야 한다.” 그는 구글의 사옥 명칭을 보라고 했다. “‘워크 스테이션’이 아니라 ‘플레이 스테이션’이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사회에서는 ‘워크’가 아니라 ‘플레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게 장자가 말한 ‘유(遊)’다.”
‘장자’는 꿈결 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상당히 현실적이다. “‘장자’는 100% 순도, 100%의 완성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순도가 70%여도 좋다. 다만 이게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실천적이다. ‘장자’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모순투성이의 일상을 중시한다. 『장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아파서 울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리면 아파서 운다.’ 무슨 뜻인가. ‘자연의 결’을 따라서 살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비틀스의 존 레넌 일화를 꺼냈다. 존 레넌이 어렸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존 레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친구들은 다들 ‘의사’‘변호사’‘정치인’‘예술가’라는 식으로 답했을 터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존 레넌은 “선생님께서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김정탁 성균관대학(신문방송학과) 교수가 10일 서울 성균관대학교 호암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최근 원고지 1만 5000매 분량의 莊子 내편을 출간한 김 교수는 ’큰 지혜는 너그러워 화합하고, 작은 지혜는 촘촘해 편가른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우리는 모두 이 물음 앞에 서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다시 말해 ‘어떻게 살고 싶은가?’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동트는 길목에서 김 교수는 장자의 ‘놀 유(遊)’자를 내민다. “땔감은 한 번 타고 없어진다. 불씨는 다르다. 끝없이 전해져 이어진다.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게 땔감의 삶이다. 불쏘시개 인생이다. 타고나면 허무하다. 그러니 불씨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게 ‘유(遊)’할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워크’가 아닌 ‘플레이’를 통한 자아실현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김정탁 교수의 팁-'장자'를 통해 화 다스리는 법
『장자』의 ‘외편’ 중 산목(山木)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느닷없이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쿵!’하고 충돌했다. 배가 기우뚱했다.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그는 “야, 이놈아. 배 좀 똑바로 몰아!”하고 소리칠 참이었다. 그런데 상대편 배가 조용했다. 자세히 보니 빈 배였다. ‘아하, 빈 배였구나!’
다시 강을 건너가는데 또 다른 배가 와서 ‘쿵!’하고 부딪혔다. 이번에도 배가 출렁했다. 그는 ‘또 빈 배려니’하고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편 배에 타고 있는 사공이 보였다. 순간, 화가 솟구쳤다. 그는 “배를 똑바로 몰아!”하고 상대방에게 마구 퍼부었다.
배를 타고 한참 가던 그는 의문이 생겼다. ‘첫 번째 배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두 번째 배는 왜 화를 냈을까?’ 잠시 궁리하던 그는 ‘아하!’하고 깨달았다. “빈 배는 상대가 없었고, 두 번째 배는 상대가 있었구나.”
김정탁 교수는 ‘빈 배’ 일화에 담긴 메시지를 짚었다.
“우리가 만날 화를 내는 이유가 뭔가.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상대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한번 살아보라’고 말한다. 그렇게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비워진다. 화를 낼 일도 없어진다. 상대가 없으니까.”
김 교수는 장자의 이런 메시지를 한 글자로 표현했다. ‘허(虛)’. 비어 있다는 뜻이다. 그는 개인적 해석임을 전제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교의 공(空)은 절대적 개념이다. 일반 사람이 다가서기 쉽지 않다. 반면 장자의 ‘허(虛)’는 상대방을 두고 들어간다. 더 쉽고, 더 구체적이다. 그게 ‘장자’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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