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6
이재봉. 베트남 파병: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4)
이재봉의 평화세상
베트남 파병: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4)
5. 북한의 필사적 대응과 파병
1965년 3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고, 그에 맞서 북베트남을 가장 화끈하게 도운 나라는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베트남에서 싸운 셈이다.
1965년 3월부터 미국의 베트남 침공이 본격화하자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1965년 5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원조를 결의했다. 1965년 7월 남한의 첫 번째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된 후엔 북한도 그 규모에 상당한 무기와 장비들을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1966년 8월 남한의 두 번째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되자, 조선로동당은 북베트남 정부가 요구한다면 지원 병력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1966년 10월 당대회에서 김일성 수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자기 자신들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으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하면 우리는 지원군을 보내서 참전할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추종국보다 먼저 남한 군대를 수만 명이나 월남에 파병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북베트남을 돕기 위한 북한의 ‘모든 가능한 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북한은 미국과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에 맞서 북베트남에 공군 병력을 보냈다. 1966년 9월 조선로동당과 베트남노동당 군부 대표들은 <북베트남에 대한 파괴 전쟁 중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싸울 다수의 북한 조종사를 보내기 위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66년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북한은 베트남의 미그-17 (Mig-17) 부대를 담당할 조종사들을 보낸다.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 베트남에 충분한 전투기가 준비되면 북한은 베트남의 두 번째 미그-17 부대를 담당할 조종사들을 보낸다. 1967년 중 북한은 조종사를 준비하고 베트남은 전투기를 준비하면 북한이 베트남의 미그-21 부대를 담당할 조종사를 보낸다.....”
이와 관련해, 미국 국무부는 1967년 8월 북한에 파견되었던 폴란드 군사전문가의 정보를 바탕으로 그 무렵 북한이 북베트남에 30명의 조종사와 미그-21 전투기 10대를 보냈다고 확인했다. 남한이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추가로 파병하는 것을 막으며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북한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북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해 연구한 일본 학자는 북한이 1966년 말부터 1972년까지 약 800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둘째, 북한은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1966년 10월부터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무장침투 및 공격행위를 급격하게 늘렸다. 1966년부터 주한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전사 편찬관 겸 분석관으로 일했던 이문항의 ≪JSA-판문점 (1953-1994)≫에 따르면, ‘북한 무장침투와 공격사건’이 1950년대엔 1년 평균 2건이었지만, 1960-66년엔 1년 평균 22건으로 늘었고, 1967년엔 195건으로 급증했으며, 1968년엔 573건으로 엄청나게 폭증했다.
1966년 말부터 비무장지대 주변에서 거의 매일 밤 총격전이 일어나는 가운데, 1967년 1월 동해에서는 남한 해군함정이 북한의 해안포 사격에 침몰 당했다. 5월엔 비무장지대 바로 아래의 미군 막사 2개가 폭파당하고, 8월엔 유엔사 구역 내의 미공병단 막사가 공격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베트남에서의 전투가 치열해지면 한반도 비무장지대에서의 무장침투나 무력충돌도 증폭되었던 것이다.
1968년 1월엔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한 청와대 습격 사건과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두 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파견했고, 그 이후 남한은 베트남에 추가 파병을 하지 않았으니 북베트남을 돕기 위한 북한의 ‘모든 가능한 노력’은 일단 성공했던 셈이다.
나아가 1968년 11-12월엔 120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남조선 혁명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여 거의 두 달 동안 남한 토벌대와 게릴라전을 벌임으로써 “1968년 한 해는 한국 휴전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가 되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뒤 거의 1년 동안 미국과 협상을 벌이다 결국 미국의 치욕적인 사과문을 받아내고 1968년 12월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돌려주었다.
북한의 심각한 공격행위는 1969년에도 이어졌다. 4월 15일 미국해군 EC-121 정보정찰기가 동해 쪽 북한 영공에서 북한 전투기에 격추 당해 승무원 31명 모두 바다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 다음날 미국과 소련의 해군함정들이 주변 해역을 수색했지만 생존자나 시신을 전혀 찾지 못했다.
닉슨 (Richard Nixon) 행정부는 그 정찰기가 북한 연안에서 4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비행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핵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북한 근해로 급파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많은 구축함과 폭격기들을 남한에 보냈다.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다양한 징벌 방안을 검토했다.
북한 영공 밖의 항공기 격추하기, 미군 정찰기를 격추한 전투기가 소속된 공군기지 공습하기, 북한 영해 안팎에서 잠수함 어뢰로 북한 군함 공격하기, 원산항 봉쇄하기, 비무장지대에서 핵대포로 공격하기 등 온갖 방안의 장단점을 비교해봤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세계 어느 바다에서든 북한 선박이 있으면 붙잡아 보복하자며 네덜란드 깃발을 달고 아프리카에서 홍콩으로 향하는 북한 선적 (船籍)의 화물선까지 찾아냈다.
특히 닉슨은 절대 가만있을 수 없다고 회의 때마다 강조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베트남에 발이 묶여 있는 터에 소련 및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북한과의 새로운 전쟁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북한에 대한 정찰 비행을 계속하되 북한 영공 50마일 밖에서 전투기 호위를 받으며 실시하라는 문서에 서명했을 뿐이다. 북한이 앞으로 또 공격할 수 있으니 만일의 사태를 위한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그럼에도 북한의 공격은 이어졌다. 8월 17일 미군 헬기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훈련하다 우발적으로 북한 영공으로 넘어가 격추 당해 3명의 승무원이 부상당한 채 북한군에 붙잡혔다.
4일 뒤인 1969년 8월 21일 닉슨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일성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비합리적 공산정권 중 하나다. 만약 북한이 다시 도발하면 우리는 보복할 것이다. 보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북한의 도발보다 더 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주미 소련대사에게도 전달했다.”
북한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10월 18일 주한미군 4명이 비무장지대에 매복해있다 북한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죽었다.
미국은 8월 17일 격추된 헬기의 승무원들을 돌려달라고 북한과 협상을 벌였지만 북한은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고려하겠다고 했다. 미국의 방침은 북한에 ‘유감’을 표명하거나 ‘실수’로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사과’한다는 말은 반드시 피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10월까지 협상에 진전이 없었다. 11월엔 사과문에 서명은 하되 승무원들을 돌려받는 즉시 ‘범죄행위 (criminal act)’는 부인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3개월 반이 흐른 12월 2일에야 미군 3명을 돌려받았다.
미국의 협상 대표는 즉각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헬기 승무원 3명의 석방을 위해, 유엔군사령부가 북한이 통제하는 영토 ‘깊숙이’ ‘침투’시킴으로써 ‘범죄 행위’를 자행했다는 성명에 서명했다.”
1968년 12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 굴욕적 사과문에 비굴하게 서명했던 악몽이 1년 뒤에도 되풀이된 것이다. 북한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북베트남을 도우며 미국에 치욕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공격 때문에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69년 계획을 세우고 1970년 실행에 옮기려던 주한미군 2만명 철수를 1971년으로 미루어야 했다.
6. 요약 및 결론
1960년대 베트남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첫째, 이러한 침략전쟁에 남한은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한편으로는 미국의 신임을 통한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미국의 줄기찬 요구와 은근한 압력에 따라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이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미국의 파병 요청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남한 밖에 없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남한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또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기가 쉽지는 않다. 두 가지 성격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한국 정부의 집요한 파병 요청을 미국 정부가 수용한” 측면이 크다면, 나중엔 “미국의 압력이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1966년 남한의 추가 파병을 위한 미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주한미국대사조차 인구비율로 따지면 남한이 미국보다 2-3배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고 항의할 정도였다.
둘째,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수당을 받은 용병이었다. 남한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긴 했지만 분명히 미국 정부의 돈이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제국주의 침략을 돕기 위한 것이었든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든, 미국 정부가 인정하듯 한국군들은 미국의 용병이었다.
셋째,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남한의 육군과 해병대는 남베트남 편에서 그리고 북한의 공군은 북베트남 편에서 싸웠다. 북한은 북베트남을 도우며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끊임없이 무력침투를 했다.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비롯한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다양하고 빈번한 공격 행위나 도발은 미군의 발목을 붙잡으며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한의 베트남 파병 효과나 영향을 얘기할 때 미국과의 공조로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는 주장은 재고해보는 게 바람직하다. 온 세계가 비난한 침략전쟁에 미국 이외엔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용병으로 참전함으로써 오히려 미국의 ‘괴뢰나 하인’으로 간주된 측면이 크다. 특히 남한 전투부대가 1966년 8-10월 유엔의 깃발을 들고 베트남에 상륙한 것은 침략전쟁과 무관한 ‘유엔의 권위를 남용’한 것으로 남한의 시각이나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보여주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따른 미국의 군사 지원으로 안보를 튼튼히 다졌다는 주장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이 북한의 지속적인 무력침투를 불러와 오히려 전쟁의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특히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기습공격에 미국의 억제가 없었다면 남한의 보복에 의한 남북 사이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7. 연재를 마치며
<베트남 파병: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을 연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반세기나 지났지만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남한 사회의 무지와 왜곡 그리고 억지는 사라지기 어려울 것 같다.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정전협정 65주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가했다. 방청석에 질문 기회가 주어지자 베트남 파병 군인 출신이라는 어르신이 난동을 부리다시피했다.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으로 남한이 베트남 ‘패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주장 같았다.
1965년부터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자 초등학생이던 나는 난생 처음 위문편지를 써야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파월 장병 아저씨께” 자유를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 많으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는 파병 찬가를 불러야 했다.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익산을 포함해 여기저기 ‘베트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베트남전에 참가해 조국의 위상을 드높인 참전 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다. 베트남엔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 위령비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는데.
베트남에 참전했던 소설가 황석영은 1975년 <무기의 그늘>이란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암시장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략을 보여주는 내용 때문에 정부의 탄압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 다시 시작하다 또 중단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1985년에야 2권짜리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남한의 독재정권들은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소설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막았던 것이다.
1995년 이른바 김영삼 문민정부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베트남전 파병은 용병을 보낸 것”이란 취지의 강연을 했다가 군부와 여론의 반발에 해임되었다.
1998년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베트남을 방문해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두 나라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 마저도 야당과 보수 언론의 반발을 불렀다. 2001년엔 서울을 방문한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사과 비슷하게 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역시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사과가 아닌 유감 표명 정도다.
우리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 또는 식민통치와 관련해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며 사과하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그런 우리는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을 침략해 양민 학살을 저지른 것에 대해 언제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억지와 역사 왜곡을 중단하고 베트남에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을까?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1986년부터 ‘도이모이 (Doi Moi)’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적으로 전개해왔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는 연평균 6-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도 베트남식 개혁개방에 관심 갖는 배경일 것이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