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행의 역사저널
영화 『말모이』가 관람객 100만을 넘어 흥행 가도를 이어가고 있다. 자고로 반도에서 반일 마케팅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2월 예정인 『자전차왕 엄복동』은 그 릴레이를 무난히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
.
문제는 그런 반일 마케팅의 이면에는 우리도 모르게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역사왜곡은 물론이고, 국민적 증오의 감정을 소비케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치부하려는 세력들의 얄팍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
『말모이』 를 보면, "우리말이 금지된 1940년대"라는 타이틀로 광고가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말이 금지된 적은 없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의거 일본어 상용화가 장려되고 보급운동이 있었던 시기를 그렇게 말하면 왜곡이 된다.
.
.
말모이 조선말 사전은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편찬을 시작했다가 핵심멤버들의 사망과 망명 등 유고 사태를 맞이하면서 거의 완성단계에서 좌절하고 만다.
.
.
그러다가 계명구락부라는 단체에서 말모이 사전의 남은 원고를 찾아 받아 사업을 이어가는데, 몇번의 재정난 끝에 다시 조선어학연구회로 넘어갔다가, 최종적으로는 조선어학회에서 이를 간수하게 된다.
.
.
아이러니하게도 말모이 사전은 친일파 육당 최남선이 주도한 조선광문회와 계명구락부에서 만든 사전이고, 계명구락부는 돈을 대던 회원들이 1930년 후반부터 친일로 변절하면서, 더이상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시발 사전이고 뭐고 때려치운 뒤 결국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여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 동조하게 된다.
.
.
이 사업을 이어받은 조선어학연구회 역시 사전 편찬사업을 주도하던 박승빈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순회 강연반 연사에 선임되어 강연활동을 벌였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이 된다.
.
.
영화 『말모이』에서는 사전편찬에 참여한 인사들이 민족혼에 부들부들 주화입마된 애국지사로 그리고 있지만, 실상은 대부분 일제 말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극로, 정인보, 오세창, 변영로 등)
.
.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어학회 지하에 보관된 10년간에 걸쳐 수집했다던 방대한 자료들은 사실 친일로 변절한 계명구락부 소속 위원들이 모은 자료인데다 자료 대부분은 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사전 표제어 카드이다.
.
.
이렇게 방대한 10만의 어휘를 수집해놓았다고 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뜻풀이하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전편찬 작업은 결국 조선어학회로 공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
.
영화 『말모이』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사전간행 사업이 갖가지 고초를 받게 되고, 주인공 판수는 사전 원고를 지키려다 우체국 창고에 숨긴후 총에 맞아 죽는 걸로 나온다.
.
.
그러나, 일제는 사전편찬 사업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모이 사전 편찬사업이 진행되던 1911년에 총독부의 취조국에서 시오카와 이치타로(鹽川一太郞)를 주임 담당 사무관으로 하여 국일문 혼용 『조선어사전』을 관제편찬하기도 하였다.
.
.
영화에서는 1911년 말모이 사전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이며,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가 간행한 사전은 『조선말 큰사전』이다.
.
.
영화에서처럼 소매치기 전과자 출신 포함 6명이 동네 만화방 같은 곳에서 모여 만들지 않았고, 전국에서 기라성 같은 대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든 사전이다.
.
.
이 사전은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일제의 공식 허가를 받아 박문출판사(대동인쇄소)에서 200여페이지 조판이 된 상태로 교정작업 중에 있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사업이 공중분해 된 상태로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
.
원고는 분실하였다가 해방 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발견되어 1947년 10월 9일에 그 첫째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조선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간행하게 된다.
.
.
『말모이』 한편 보고 느닷없이 애국자가 되신 분들이 많은데, 역사는 영화나 드라마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