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30
브나로드운동(─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나로드운동(─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나로드운동(─運動)
근대사사건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브나로드 운동 신문기사
분야근대사유형사건시대근대
정의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개설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
내용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계몽운동의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브나로드’로 애칭되었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서울의 학생과 지식청년, 문화단체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학생이 방학 때 실시한 귀향계몽운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 천도교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서도 1926년 여름방학 때 귀농운동(歸農運動)을 폈는데, 이것 역시 학생에 의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배경하에 각급 학교 학생은 학생 서클 조직을 이용,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6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들은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고, 그 해부터 농민을 계몽하는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9월 경찰에 발각되어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다시 교외활동으로 개학중에는 수원 인근에 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며 문맹퇴치운동을 계속하였고, 방학중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선배 졸업생들과 제휴하여 농촌개발을 위한 여러 가지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상록수운동(常綠樹運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은 당시 어느 학교를 다니든간에 우리 나라 학생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한말에 한글을 전용한 《독립신문》이 발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국권상실 이후 식민통치의 억압으로 한글연구활동이 중단되어 오다가 3·1운동 후 일제가 회유책으로 내세운 이른바 문화통치를 이용해 1921년 처음으로 한글학자들이 조선어연구회를 만들고 기관지로 월간 《한글》(1927. 2. ∼1928. 10. )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주년)을 맞는 1926년에는 그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학계와 언론계와 각종 잡지계가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정을 보았고, 1933년 10월 19일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자인 한글을 민중에게 보급해야겠다는 필요성이, 민족독립운동을 목표하였던 당시의 문화운동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라 1928년 8월 창간 8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제지, 좌절된 적이 있었다. 그 다음 해 조선일보사가 여름방학을 이용, 제1회귀향남녀학생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제4회 때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는 구호를 내세웠고, 교재로 《한글원본》(4주간용)도 펴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의한 동아일보사 브나로드운동의 금지와 함께 조선일보사의 이 운동도 함께 중지되었다. 동아일보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개한 이 운동의 경과는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이 운동은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는 고등보통학교 4,5학년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강연대,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써서 신문사에 보내는 임무를 맡은 학생기자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학생조직과는 별도로 조선어연구회 이름을 바꾸어 1931년에 새로 조직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후원을 얻어 3회에 걸쳐 전국 주요 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으며, 만주의 간도 지방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이 강습회 역시 총독부의 방해로 계속할 수 없었다.
김윤경(金允經)은 그의 《한국문자급어학사 韓國文字及語學史》에서 이 때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한 지역과 일자, 강습을 담당한 학자의 이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제1회 때 37개 지역, 제2회 때 46개 지역, 제3회 때 40개 지역에서 개최한 것으로 기록하면서, 제3회 때는 개최된 지역이 40개이였지만 총독부의 금지조처로 당초에 계획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포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사는 학생계몽대에서 쓸 교재로 《한글공부》(3주간용)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은 한글을 가르치는 일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각 지방에 나간 학생들은 야학을 개설하고 한글 이외에도 위생·음악·연극도 지도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을 겸하는 민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4년간에 걸친 이 운동의 성과에 관한 통계는 앞에서 든 김윤경의 저서와 정세현(鄭世鉉)의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에 실려 있는데 두 통계에 차이가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운동은 단일조직이 아니라 계몽대·강연대·강습회·기자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통계작성에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브나로드운동으로 애칭되었던 청년학생들의 민중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에 있어 민중계몽을 통한 민족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언론계와 조선어학회·청년학생이 힘을 합쳐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주목할 만한 문화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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