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1812 한완상3 성육신담론과 평화 - 평화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3



성육신담론과 평화 - 에큐메니안



성육신담론과 평화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3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 승인 2018.12.18 01:04


성육신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초월자 신이 육신의 존재로 역사와 사회 현실 속으로 육화된 혈신의 사건이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과 역사 현실을 변혁 시키시는 실천 동력이다. 신이 역사 속으로 육화(肉化)되어 어둡고 삐뚤어진 역사 현실을 정의롭고 평화로운 현실로 바꿔내는 역동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육신 사건, 삐뚤어진 역사 현실을 바꿔내는 역동적 사건

그래서 예수가 세상에 오신 때는 참으로 잔인한 로마 황제 권력이 총칼과 법의 힘으로 약자들과 꼴찌들을 경멸하고 능멸했던 때였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고 황제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때였다. 어둡고 살벌한 벌거벗은 권력이 갑질 악행으로 인간을 괴롭히던 때였다. 그 곳에는 평화도 공의도 없었다.

이런 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의 구체적 역사 상황이었다. 누가복음(2:13-19)은 예수탄생을 알린 천군천사들의 메시지가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하찮은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였기에 밤새 노동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던 목자들에게 하늘이 알린 메시지는 매우 뚜렷했다. 어두운 땅에 평화의 새 질서가 동터온다는 소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었다. 다시 말해, 땅의 평화 없이 하늘의 영광이 없음을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성육신은 추상적 담론이 아니다

그런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당시 처지에 주목해보자. 그는 화려한 궁전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가정의 안방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세상의 신분으로는 일종의 ‘미혼모’로 따돌림 당했던 젊은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것도 집 안방에서가 아니라 동물의 밥그릇에서 태어났다. 그런 비천한 처지에서 태어났음의 아픔을 성찰해야 한다.

▲ Incarnation ⓒhttps://www.crossroadsinitiative.com/media/articles/wonder-of-the-incarnation-st-gregory-nazianzen


그러니 예수는 당시 ‘지극히 작고(the least)’, ‘꼴찌(the last)’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예수의 아바(Abba)가 로마 황제의 신분과 견주어 너무나 낮고 천한 신분으로 오신 셈이다. 그러기에 예수탄생을 성육신(incarnation)으로 신학적 추상화를 해선 안 된다. 추상화에는 아픔이 없다. 철저하게 자기 스스로를 종의 신분으로 낮추고 비워내는 케노시스(kenosis)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높으신 영광의 하나님이 낮고 천한 을(乙)과 병(丙)과 정(丁)의 아픔을 스스로 당신의 아픔으로 여기셨다. 낮고 천한 자와 동고(同苦)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육신 사건은 일종의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성육신의 감동, 역사변혁의 실천으로

역사의 삶 자체가 이 같은 창조주의 감동적 자기 비움의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예수 오심을 신학자들은 성육신과 자기 비움의 감동적 실천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감동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열린 밥상 운동이나 온전한 치유운동을 통해 예수는 억울한 인간 고통을 치유해 주셨다.

성육신이 케노시스로 이어지면서 예수는 말만으로(saying) 꼴찌들과 작은자들을 위로하신 것이 아니었다. 말로 깨우치는데 그치지 않고 큰 한 걸음 더 나아가 을, 병, 정들을 온전한 주체로 새롭게 세워주셨다. 나아가 악의 구조를 사랑으로 무력화 시켰다. 참으로 감동적 변혁을 불러 일으키셨다.

이 같은 감동적 변혁은 그가 처참하게 처형당했던 형장이었던 골고다 언덕에서 놀랍게 육화 실천되었다. 처형의 아픔이 극도에 달했을 때, 예수께서는 자기를 조롱하고 능멸하고 손에 못 박고 또 참으로 허리를 찌른 갑질 하는 권력을 용서해달라고 아바에게 간원했다. 헌데 이 간구의 깊은 뜻을 한국 신학자들은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지배세력의 갑질 악행자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희생자 예수는 간구했다. 이 같은 예수의 원수사랑 실천 기도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도무지 이 예수의 기도는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예수를 핍박하고 능멸하고 죽인 가해자들은 그들의 악행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치(無恥)상태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들이 폭행을 정상적이고 정당한 행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제는 아이히만 재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기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해자들의 악행과 그것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정당화했던 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예수께서 옳다고 수용한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은 사사로운 개인처벌이 아니었다. 악행을 일상적으로 자행하게 한 나치악의 구조와 문화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악행의 용서는 그 악성의 해체에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용서 기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원수사랑을 악의 용서로 둔갑시킬 수 있는 지배이데올로기의 그 악성은 단호하게 해체시켜야 한다. 나아가 원수로 하여금 그 악의 영향력 또는 이데올로기 주술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의 이 기도에서 예수의 이데롤로기 비판을 읽어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역사예수를 만나보지 못했던 예수 동시대의 인물 바울이 제시한 이 문제에 대한 탁월한 지혜로운 지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침은 예수의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지혜로운 지침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로마서(12:20-21)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발선(發善)의 시작은 평화만들기를 시작하는 것

원수가 주리고 목말라 할 때 그 고통을 덜어주는 사랑실천을 하게 되면, 마침내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숯불을 머리에 두게 되면, 그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은유이다. 상대방 원수가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는 선행을 하게 된다면 곤혹스러운 느낌이 들 것이다. 그간 그 원수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자기의 양심이 녹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두 원수 간의 증오기간이 깊고 길었을 경우 그들 간에는 서로 악마화 하면서 발악(發惡)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가르침을 선제적으로 실천을 하게 되면서, 악마화와 발악 작동이 중지하게 된다. 지속적인 선제적 원수사랑이 이어지게 된다면 마침내 발악은 발선(發善)으로 질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놀라운 효험이 예수의 원수사랑 실천의 효과인 것이다. 필자는 이 감동적 발선효과의 한 토막을 평양에서 체험했다.

발악이 중단되고 발선 과정이 작동되면서 원수 관계는 해체된다. 그리고 샬롬의 프로세스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이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예수 평화 만들기로 바울은 해석한 것이다. 이제 <이는 이>, <눈은 눈>이라는 보복 행위는 중단시켜야 한다.

예수께서 나사렛 메니훼스트(Manifest)에서 이사야의 원문에 적혀있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 선포’ 부분을 빠트린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예수 선교는 바로 발선선교요, 발선선교는 바로 평화만들기 선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 요소이다.

그렇다면 예수선교의 본질이 선제적 원수사랑 실천에서 제대로 드러난다는 진리를 과연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 특히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오늘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온 몸으로 절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제적 발선 실천은 예수부활 사건과는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가?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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