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3

Vladimir Tikhonov [진정한 '사회의 진보'란 무엇인가?]

Vladimir Tikhonov

[진정한 '사회의 진보'란 무엇인가?] 

한국도 요즘 미국처럼 '소송의 공화국'이 돼가고 있고 구미권도 '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 우리들의 일상의 대부분은 꼭 성문법, 법률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법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적 통념', 즉 '...해도 된다/안된다'에 대한 다수의 암묵적 동의 같은 것입니다. 한 번 쉬운 사례를 들겠습니다. 저는 운동의 태부족 등의 문제들이 있어 요즘 몸이 많이 불어난 부분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웬만한 지인을 만나면 꼭 어김없이 '요즘 몸이 좀 커졌다'는 걱정 섞인 (?) 지적을 듣곤 합니다. 첨엔 당황도 하고 내심 불편도 했지만, 요즘 같으면 초면에 상대방의 나이부터 확인하는 '연령주의'처럼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하고 되도록이면 신경을 쓰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한데 노르웨이 같은 경우엔, 20년 동안 살아왔는데도 한 번도 "뚱뚱하다"는 소리를 누구로부터도 들은 바 없습니다. 부부나 애인, 절친 관계면 모를까 그 이하의 관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면 이건 '체형에 의한 차별'로 이해가 되고 절대 용납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이건 법률이 아닌 암묵지, 즉 사회적 통념입니다. 노르웨이의 그 어느 법률에도 "남의 체형을 논하지 말라"는 말은 당연 없습니다. 그냥 다들 상식적으로 아는 부분이죠. 
암묵지/통념은 절대 영구불변한 건 아닙니다. 계속 바뀌는 것이고 사실 많은 경우에는 좋은 쪽, 즉 각자의 권리나 존엄을 존중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뀝니다. 100년 전의 통념이란 양반의 10대 초반의 도련님이 늙은 노복 출신의 하인에게 언어적으로 하대해도 당연시되는 것이었는데, 요즘 "Ch일보"의 자제 분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전수를 대하다가 들통이 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대한제국이나 일제 시절의 농촌 사회라면 '문제'도 안될 행동인데, 인제 '문제'라도 되니 우리 통념들의 세계가 좀 바람직한 쪽으로 바뀌어간단 증거입니다. 아니면 해방기의 죽산 조봉암 선생이 본부인 김조이 이외의 '작은 마누라'와 동시에 살림을 따로 차리고 아이도 낳게 해 키운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땐 비판자들에게도 지지자들에겐 그런 것까지 그다지 큰 '문제'로 보이지 않았지만, 요즘 같으면 분명 반응은 다를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사건은 물론 검찰에 의해서 기소되지 않았지만 (아니, 그가 기소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순진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있기나 하나요?) 적어도 사회에서 '물의'를 빚고 삼성이 '사과'라도 형식적으로나마 했는데, 몇십년전 같으면 재벌의 호색 행각은 그냥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이 운동을 게을러 하는 뚱뚱보들이야 여전히 지적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세상이 좀 나은 방향으로 가긴 가는 모양입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큰 진척을 이룬 것은 '신체 자유', 즉 신체적 폭력을 위요한 통념들의 세계입니다. 15년 전에 제가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 체벌 폐지의 필요성에 대한 강의를 하고 구미권에서의 체벌 폐지의 역사를 열거해도, "체벌없이 학급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반응은 꽤나 일반적이었습니다. 일반 교사 분들도 아니고 '참교육'을 실천하시려는 일부의 전교조 교사 분들이 그러셨다는 것이죠. 요즘은 학교에서 체벌하면 그냥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그나마 교권을 빙자한 폭력을 당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좋은 시절이 드디어 왔는데, 10여년전만 해도 이게 투쟁의 목표에 불과했습니다. 인제 다음의 단계는 학교가 아닌 집안에서의 부모에 의한 체벌의 근절, 그리고 체대 등 폐쇄성이 강한 소사회들에서의 물리적 폭력의 근절인데, 여태까지의 노정으로 봐서는 이 과제들도 한국 사회가 마음만 먹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 체벌의 점차적 정지는, 꼭 '의식 (암묵지, 통념)의 변화'에만 의겨하지 않었습니다. 사회적 합의도 점차 바뀌어나갔지만, '인권 조례' 등도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문법과 불문율의 발전은 대개 병행하는 경우가 많고, 인권 친화적 입법의 역할이란 아주 큽니다. 지난 번에 '배민'이 중국 공민들의 밀집 지역으로 배달 갈 경우 추가 요금을 요구했을 때에는 제가 그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부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순간 절실히 느낀 것입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흑인인 미국 원어민에게 '미안하지만 우리 학부모들이 백인 강사를 원한다'라고 채용을 거절하는 학원 주인이나 '중국인 출입 금지' 문구를 문에 거는 가게 주인을 형사처벌할 길이 막막합니다. 실효성이 있는 법이 제정되고 몇 개의 판례라도 생기면 '인종 차별' 관련의 통념의 변화에 커다란 탄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사회의 진보'라는 것은 바로 법률의 진화 등이 뒷받침하는 이런 암묵지, 통념들의 점차적 '축적'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오래 걸리고 가끔 가다가 그 느린 템포는 개인으로 하여금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게끔 합니다. 예컨대 부하에게 반말투로 명령을 내린 뒤에 부하가 당연히 (?) 머리를 약간 숙여 "네, 알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을 예상하는 상사 등을 볼 때에 "이러면 절대 안된다는 게 언제끔 통념이 될까"라고 자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한 번 바뀐 통념을, 아주 나쁜 정권들도 다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죠. 박근혜가 집권해도 학교 체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록 천천히 이루어진다 해도 암묵지, 통념의 진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의 진보'입니다. 느리게나마 그런 진보가 이루어져 가는 이상 특정 사회에 대해 그래도 낙관할 수 있죠. 제가 그래도 한국 사회에 대해 장기적으로 낙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