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6

“400년전 조선처럼 특정 동맹국 택일은 위태로운 길이죠”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400년전 조선처럼 특정 동맹국 택일은 위태로운 길이죠”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400년전 조선처럼 특정 동맹국 택일은 위태로운 길이죠”


등록 :2021-07-04 19:15수정 :2021-07-04 19:17
강성만 기자 사진


[짬] 국민대 중국학부 김영진 교수

김영진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임진왜란-2년 전쟁 12년 논쟁>(성균관대 출판부).




중국 정치를 전공한 정치학자 김영진 국민대 중국학부 교수가 최근 낸 책이다. 천쪽 가까운 벽돌책으로 주석만 150쪽이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부터 중국 원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한 1600년 9월 말까지 조선과 일본, 명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훑었다. 임진왜란은 보통 일본군의 침략과 완전철수를 기준으로 7년 전쟁으로 간주하지만 실제 군사적 대결은 2년에 그쳤고 전쟁 전후로 3국 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끊이지 않았다. 책의 부제처럼 2년 전쟁에 12년 논쟁이 펼쳐진 것이다.


“전통 시기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고 싶었어요.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다 다루는 것은 제 능력 밖이라 삼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임진왜란을 선택했죠. 6년 전에 책을 쓰기로 하고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의 원자료에 바탕을 둔 통사가 어디에도 없더군요. 임진왜란 전문가인 일본 학자 기타지마 만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저자) 교수도 중국 쪽 자료는 별로 참고하지 않았어요.” 정치학자인 그가 한·중·일 삼국의 정책 결정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통사’를 쓴 이유다.


<임진왜란-2년 전쟁 12년 논쟁> 표지.


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 캠퍼스에서 만난 저자는 “이번 책은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얼마나 좁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전쟁 기간에 우리 스스로 쉽게 선택해 정책을 결정했다고 많이 생각하지만 실제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이 말처럼 책은 당시 조선의 정책 결정이 원군을 보낸 종주국 명과 원군 지도부의 의도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원군 요청부터 쉽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이 침략하고 20일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명에 알리기로 결정했고 또 명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한 것도 4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쟁 전에 명에 알리지 않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독자 외교’를 한 게 걸려 선뜻 결정을 못 내린 것이다. 원군이 평양전투에서 이기고 시작된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에서도 조선은 명의 의도를 뒷받침했을 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명의 강압적 요청에 밀려 조선침략의 주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에둘러 요청하는 진주문까지 명에 보냈다. 조선이 명 조정에 보내는 감사편지조차 번번이 원군 지휘부 검열에 가로막혔다. 전쟁 초기 원군을 지휘한 경략 송응창은 명 직제로는 차관급 정도였지만 조선에서는 선조와 동급이었단다. 그는 서울 수복 뒤 세자 광해군에게 남하해 군대 선발과 요새 설치 등의 임무를 수행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조선 영의정 이하는 송 경략의 부하였죠. 유성룡도 그를 송어르신이라고 호칭했어요.”


저자는 이 책이 임진왜란 참전 3국의 원 사료를 바탕으로 쓰인 첫 통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임진왜란 기록을 노트 열 몇 권에 정리하고 다음에 중국 <신종실록>을 보고 책의 뼈대를 잡았어요. 이어 임진왜란 때 활동한 삼국 정책결정자들의 문집을 거의 다 읽고 스토리를 구성했어요.” 그는 “3~4년 전에 서울대 고문헌 자료실에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지휘한 손광의 문집 <요강손월봉선생전집>을 찾아낸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손광에 이어 조선 문제를 총괄한 형개의 문집 <경략어왜주의>도 2004년에 처음 공개됐는데 제가 연구에서 처음 활용했죠. 우리는 사신들이 중국에 다녀와서 보고한 글이 개인 문집에 많아요. 최립이나 신흠 등 당시 외교문서 담당자들의 문집에도 (임진왜란 정책 문건들이) 많이 실렸죠.”

왜군 침공 3년전~명 원군 철수까지
한·중·일 3국 원사료 살핀 첫 통사
‘임진왜란-2년 전쟁 12년 논쟁’ 출간
“조선이 직접 왜군과 협상했더라면…”

독일 유학중 주제바꿔 중국정치 박사
“앞으로 17세기 동아시아 질서 연구”

일본군에 맞설 힘이 없던 조선은 원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명 군대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 자국군의 피해를 줄이는 게 중요해서다. “중국 입장에서는 조선 남부 해안에 왜군이 주둔하는 상황 자체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어요. 강화가 진행되면서 명 주둔군도 줄었고 이들이 먹는 식량도 조선에서 일부 부담했거든요. 종주국이라면 군대를 보내 속국을 보호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는 이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명이 조선 입장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죠. 명 조정이 조선을 고려한 비중을 굳이 따지자면 30% 정도였죠.”


전쟁을 더 빨리 끝낼 방법은 없었을까? “조선이 군사 역량을 모아 왜군을 빨리 몰아내는 게 최선이었지만 당시 조선은 그럴 힘이 없었어요. 그때 조선은 외교에서도 명의 권위 뒤에 숨었어요. 전쟁 초부터 왜군은 조선에 대화를 제의했지만 조선은 직접 협상하면 왜군이 더 많은 요구를 하지 않을까 우려해 명 뒤에 숨었죠. 적어도 전쟁 1년 뒤 왜군이 남해안으로 물러났을 무렵에는 적극적으로 외교에 나서 협상력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여러 정황상 그때 조선이 협상에 나섰더라도 일본이 영토분할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타협하고 물러났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그런 의지를 보였다면 명도 눈감아줬을 거고요.”


그는 4백 년도 더 된 역사가 지금 왜 중요한지를 책 에필로그에서 밝혔다. “특정 동맹국에 의존한 안보는 일시 효과적일 수 있으나 구조적인 불안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맹국에 도전하는 신흥 강대국이 나타났을 때 늘 국론 분열을 겪으며 기존 동맹국 편을 드는 보수적 선택을 해 신흥 강국의 일차적인 침략 대상이 됐어요. 이런 패턴은 병자호란에서 한국전쟁까지 유사하게 반복됐어요. 저는 주어진 하나의 동맹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과 공유된 가치를 바탕으로 다수 지원세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우선 자기 힘을 키우고 자주적으로 지원세력을 확보해야죠. 최근 확대된 미중간 패권 경쟁에서도 양자택일은 역사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아시아 시야에서 전쟁을 조망하는 게 전쟁의 실체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예로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들었다. “명 조정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어요. 이순신이 전쟁 초기 해상에서 왜군을 막은 덕분에 명은 자국 해안 방어에 덜 신경 쓸 수 있었죠. 만약 이순신이 막지 못했다면 육로를 이용한 명 원병 지원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일본 수군이 서해안에 진출해 요동반도에 상륙했다면 명이 조선으로 군사를 보내는 게 훨씬 어려웠겠죠.”


김영진 교수 뒤로 그가 이번 책 저술을 위해 봤다는 임진왜란 정책 관련자들의 문집 사본들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1994년에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중국의 중앙과 지방관계’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문은 경희대 영문학과에 다닐 때부터 독학으로 익혔단다.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받은 석사 학위 논문은 중국 공산당을 만든 리다자오의 마르크시즘 수용을 다뤘다. “1988년에 마르크시즘을 공부하려고 독일에 갔는데 마르크시즘이 시대에 뒤처진 것 아닌지 회의가 들더군요. 독일의 마르크시즘 연구 역사가 길어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자신감도 없었고요. 마침 1980년대 들어 중국이 부상하고 독일에 중국 사람도 많이 돌아다니고 해서 독일에서 중국어를 새로 배워 중국 정치를 파고들었죠.”


그가 6년 전에 낸 <중국, 대국의 신화-중화제국 정치의 토대>도 집필에 10년 가까이 걸렸다. 다음 저서가 궁금했다. “병자호란과 청나라 건국 등으로 이어지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살피려고 해요. 이 시기는 중국과 내몽골, 만주, 신장, 일본, 조선 등 동아시아 근대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002074.html?fbclid=IwAR0uhr5_R6qXydzKU7--NeGwhshFvFjL81C_siyPmx2KNLc7SgwQo7DDzRI#csidx3b5105da692b86cb96a8875694f7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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