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에는 '토왜(土倭)'라는 용어가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이 준동하였다.
"지금은 형편이 불리하니
우선은 저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다.
언젠가 우리도 떳떳하게 독립할 날이 온다."
그때부터 토왜들은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며
현명하고 신중한 척하였다.
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식민지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거였다.
오늘날에도 도처에 '토왜'들이 날뛴다.
신문사에서,
국회에서,
정부 기구 안에서,
대학에서,
회사에서
'토왜'들이 신중함을 가장하고,
지혜와 온건함을 자랑하며,
저희들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안에서 '토왜'를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나라는 예로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초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수십 배 강한 중국을 의식해야 하고,
우리보다 적어도 몇 배는 강성한 일본을 끼고 살았다.
그래서 이 나라 안에는 지레 겁을 먹고
큰 나라에 매달려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토왜'가 항상 나랏일을 결정하라는 법은 없다.
우리 안에도 훌륭한 지도자가 있고,
자각한 백성/시민들이 많을 때면
그 자들의 목소리는 놀란 자라 목처럼 쑥 들어가곤 하였다.
21세기야말로 다시 한 번 크게 판을 바꿀 때이다.
우리와 일본의 격차는 눈에 띄게 좁혀졌다.
1910년 당시 양국의 격차가 2천 대 1이었다면
지금은 2대 1 또는 3대 2가 되었다.
겁을 내지 말라.
상대가 여전히 무례하고 비상식적으로 나온다면
거기에 대항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도대체 무엇이 겁이 난다고 '토왜'는 아직도 저 야단인가.
일본의 정객들은 잘 알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우리와 그들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매우 줄어들었고,
이제 자칫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깊이 염려한다.
아베 정권에 이어서 스가 정권도 이러한 고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들로서는 더 늦기 전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도 아니라면 한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저들의 속생각이다.
이것은 일본의 어느 한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국가전략이다.
앞으로, 양국 관계가 엎치락 뒷치락하는 일은 여러 번 되풀이 될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한일 양국의 관계는 앞으로 꽤 오랫 동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저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또는 다시 저들에게 완전히 예속될 때까지
양국의 대립과 반목은 그치지 않는다.
갈등과 대립이 우리의 일상사가 될 전망이다.
적잖은 '토왜'를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우리 자신의 처지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리 안의 '토왜'를 청산하는 작업,
이것은 우리의 미래가 달린 실로 중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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