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10) 김사량 ‘빛 속으로’ - 경향신문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10)
김사량 ‘빛 속으로’
2012.02.03 20:11
잊혀진 작가, 은폐된 식민지 타자를 빛 속에 드러내다
나는 식민지 시대의 작가와 작품 열편을 뽑으면서 마지막으로 김사량이 있다는 점이 든든했다. 그는 오랫동안 남과 북에서 제외되고 잊혀진 작가였다. 1973년 재일 문학가들에 의해 일어판으로 <김사량 전집> 5권이 출판되었고 1987년에 북에서, 그리고 1989년에 남에서 뒤늦게 그의 작품집이 나왔다. 김사량은 재일동포가 아니며 일제 말의 중국 망명과 해방 이후 월북, 전쟁 참여와 행방불명 등으로 극적인 현대사의 폭풍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남도 북도 아닌 재일작가들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사량(金史良)의 본명은 시창(時昌)이었고 1914년 평양에서 주물공장을 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형 시명은 교토 대학을 나와 조선총독부의 관료가 되었고 미군정 치하에서 전매청장을 지냈다. 김사량은 평양고보 5학년 재학 중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뒤 1933년 사가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문우들과 함께 일본의 파시즘에 맞선다는 의미의 동인지 ‘제방(堤防)’ 동인이 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쓴 처녀작 ‘토성랑’을 발표했다. 조선예술좌에 대한 일제 검거로 ‘토성랑’을 각색하여 공연한 김사량도 체포되어 두 달간 구류를 살았다. 1939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최창옥과 결혼하고 같은 해 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 김사량은 ‘문예수도’에 실었던 일본어로 쓴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이 되어 주목 받으면서 한글과 일본어로 조선과 일본의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예비검속으로 50일간 구류되었다가 남방군의 종군작가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했다. 이듬해 한글과 일본어로 작품집 <고향>을 내고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신문 잡지에 연재한다. 평양에 돌아와 이효석이 있던 평양대동공전 독어 교사로 부임한다.
1945년 봄, 중국대륙의 조선학도병 위문단에 동원되어 중국에 파견되었을 때 탈출하여 옌안의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하고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 선전대에 가담했다가 일본이 패전한 뒤 귀국한다. 이때의 경험을 나중에 보고문학 <노마만리>로 정리하여 발표한다. 서울에서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그린 희곡 ‘호접(胡蝶)’을 단성사에서 공연하여 해방된 조국의 대중을 고무한다. 1946년 평양으로 귀가하여 북조선예술가총연맹의 국제문화부 책임자가 되었고 장편소설 <마식령>을 발표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6세의 김사량은 종군작가로서 인민군과 함께 남하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 의한 인민군의 급박한 후퇴 때에 강원도 원주를 지척에 둔 남한강 부근 야산에서 ‘가슴이 답답하다’며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한다. 김사량이 그 부근 어느 산기슭이나 골짜기에서 외롭게 숨져갔을 거라는 추측만 남아있을 뿐이다.
1955년 그의 재북 시절에 발표된 작품집이 평양에서 나왔으나 이후 남로당계와 소련파, 연안파 등의 숙청과 배제로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일본 작가 오다 마코도의 회상에 의하면 1970년대 초 평양을 방문했을 때 작가동맹 관계자에게 김사량의 가족 면담과 그의 작품 열람을 문의했으나 그런 작가는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1971년에 암파서점에서 <김사량, 그 저항의 생애>가 출판되었고 1973년에 재일 작가들인 김달수, 김석범, 안우식, 이회성, 임전해의 편집으로 일어판 <김사량 전집> 5권이 하출서방신사에서 간행되었다.
내가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이 1985년 12월이었다. 광주항쟁 기록을 대표집필하고 나서 공안당국에 체포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때마침 날아든 베를린 제3세계 문화제의 초청장을 받고 ‘당국의 권유’로 외유에 나서게 되었다. 유럽을 거쳐서 미국으로 갔는데, 광주항쟁 당시 수배 중에 미국으로 밀항하여 ‘한국청년연합’(한청)을 조직하고 있던 망명자 윤한봉과 만나서 한청 산하의 문선대 ‘비나리’를 창립하고, 뉴욕에서 만난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의 초청으로 일본에 들렀던 것이다. 나는 도쿄와 오사카, 교토 등지에서 재일동포의 좌우 중도를 아우르는 청년문화단체인 ‘우리문화연구소’와 문선대 ‘한우리’를 창립하며 6개월간 체류했다. 여기서 여러 인사들을 만났고, 김사량과 관련된 재일 문학가들과 만났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뒤늦게 김사량의 <노마만리>와 <전쟁종군기>를 읽었다. 작가 이회성은 김사량의 기록물 ‘바다가 보인다’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내가 읽은 김사량은 조선과 일본을 넘어선 동아시아의 당대 보편성 속으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식민지의 ‘우물 속을 벗어난’ 젊은 루쉰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 그의 그의 작품 ‘빛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작품은 서울의 하숙집에서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하룻밤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단편으로 1940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물론 그가 수상 후보가 되었던 데는 미묘한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조선작가가 일본어로 쓴 소설을 주목해줄 필요가 있었을 테고, 다른 하나는 일본 지식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버린 ‘타자’의 존재에 대하여 놀랐던 것이다.
김사량의 자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빛 속으로’에는 제국대학 학생으로 빈민가의 노동자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에 나온 남(南) 선생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일본 아이들이 자신을 내지인으로 알고 미나미(南) 선생으로 부르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기보다 내심 편안함을 느끼면서 조금 갈등하는 정도였다. 아이들 중에 유별나고 정서가 불안정한 야마다 하루오가 있는데, 그 아이는 남 선생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사실 하루오는 조선인 어머니 정순과 일본인 야마다 한베에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던 것이다. 하루오는 자신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조선인을 미워해야 한다는 자의식에 잡혀 있었다.
하루오의 아버지 야마다 한베에는 거칠게 살아온 건달로 조선인 아내를 천대하고 폭행하면서 데리고 살았다. 그들의 이웃으로 빈민가에 사는 조선인 노동자 이군은 남 선생이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 화를 냈고 가엾은 조선 여인 정순을 학대하는 일본인 야마다나 그 아들 하루오를 모두 미워한다. 일본인 남편의 칼에 찔린 정순이 빈민 구호병원에 실려오고, 남 선생은 그녀의 남편이 얼마 전 예비검속으로 구류 당했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함께 지낸 야마다 한베에라는 걸 알게 된다.
나중에 남 선생은 여자에게서 야마다 역시 조선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혼혈아였음을 알게 된다. 하루오의 갈등이 깊어지면 아이는 제 아비처럼 비뚤어진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었다. 나는 조센징이 아니라고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소년 하루오의 내면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따스한 숨결이 고동치고 있었다.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이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조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쫓아다녔다. 그것은 ‘어머니의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그리움일 것이다.” 결말에서 하루오는 이 다음에 무용가가 되고 싶다면서 환한 조명 불빛 아래서 춤을 추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은폐되고 일그러진 정체성을 그야말로 빛 속에 드러내어 당당해지고 싶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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