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3.1운동백주년을 앞두고서 2017년 결성된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개신교)의 학술 포럼에서 기독교측 발제의 하나로 처음 발표되었다(‘3.1운동 백주년의 성찰과 과제, 2018년 12월 20일, 정동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12호). 에큐메니언의 연재를 위해서 약간의 보완과 수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
오늘 우리 시대의 독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3.1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는 1919년 3월 1일 당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그 진행 상황을 기록하는 한편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및 시민과의 연락을 담당했던 천도교인 이병헌(李炳憲, 1896-1976)이 쓴 책이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40주기(1959년)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당시 선언서 서명자 33인뿐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관계했던 17인 중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운동 전후의 사정과 진행과정을 정확히 알리기 원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을 이룬 후 각종 사회단체는 물론 학술단체까지 모조리 해산시켜서 남은 것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단체만 간신히 잔명을 유지했고, 그래서 그때 “우리민족이 오직 의지할 곳은 종교 신앙밖에 없었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전한다.(1)
1876년 조일조규(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의 개방과 더불어 일본은 점점 더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 군대는 벌써 해산시켰고,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를 설립하여 국유지를 먹고 민간소유 토지를 침범하였다. 그 이전부터 조선의 토지를 다른 외국인들에게는 매매하지 못하도록 금하면서 고리대금으로 사들이고, 제일 먼저 국유지를 정비한다고 하면서 “역둔토를 모두 개인소유로 하고”, 지방의 ‘공유재산’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재산으로 편입하는 등 땅을 먼저 장악해 갔다고 한다.(2) 이에 더해서 참으로 인상적인 서술은 “도시마다 유곽제도를 만들어 매춘부를 두어서 젊은 청년을 미혹케” 했다는 것인데, 당시 일본여자들이 많이 건너와서 ‘매음’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본받아 시골서 순진한 처녀들이 이 유곽으로 몸을 팔기 시작하여 도시마다 공창제도”가 생겨서 사람들이 망국한을 모르게 하고 풍기를 극도로 문란케 했다는 것이다.(3) 나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공창과 유곽제도가 허용되어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 모집도 그 일환이었다는 변명을 하게 하는 근거를 여기서 본다.(4)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된 것은 당시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송병준(宋秉畯, 1857-1925) 등 나라를 팔아넘긴 어용 지도자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그와 같은 불의와 불법, 죄악을 저질렀는지 하는 것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피살되기(1909년 10월 26일) 전에 송병준은 한일합병에 대한 의견을 이토에게 제출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지 않으면 동양평화는 어려울 줄 아오니” 하면서 “하늘이 주는 이때”를 놓치지 말라고 합병을 서둘러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어서 이완용은 합병의 가능성을 묻는 일본에 대해서 “단결이 못된 국민이라 그리 큰 난관은 없을 줄 아오”라고 했고,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관렴이 없고 단지 각자가 자신보호에 급급하고 ... 불교는 산간에서 절을 지킬 따름이라 신도가 없고, 유도는 차차 글 읽는 사람이 줄고 ... 예수교와 성교 천주교는 불란서 계통과 미영계통이 남한을 차지하고 독일계통이 북한을 차지하였는데 ... 한국 사람으로는 그 지도급에 있는 사람이 그리 큰 인물이 없으며,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인데 ... 이 종교 역시 정부의 탄압으로 힘을 못 쓸 것이요 더욱이 무력으로 진압한다면 평온할 것이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完全) 또는 영구(永久)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문구를 제1조문으로 하는 조약이 맺어진 것이다.(5) 이렇게 나라를 판 사람들은 작위를 받고 ‘은사금’(恩謝金)도 받았지만 그 양의 많고 적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일었고,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그들을 한국 대신들로 있을 때보다 멸시하면서 ‘너는 너의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백작도 과분하고 돈 백만 원이면 족하다’는 식으로 대우했다고 『3.1운동비사』는 전한다.(6)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언술이다. 지금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해보려는 노력 대신에 그것을 넘기는 명목으로 매국인사들은 “동양평화”라는 큰 담론을 끌어들였고, 우리 국민들은 “단결”을 잘 하지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각기 자기보호에만 급급하니 괜찮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종교에서의 자립과 자존도 먼 이야기이고, 힘과 “무력”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니 염려할 것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서술은 오늘 분단 70년 이상의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 보인다. 즉 오늘 우리의 정치인들이 전시작전통수권도 가지지 못한 자국 군대를 보면서도 한반도의 전쟁방지와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그 환수를 반대하고, 그래서 성조기와 이스라엘 기까지 들고서 시위하는 한국 개신교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찌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변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굴종적이고 비굴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종교의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책임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당시는 그래도 ‘우리가 의지할 곳은 종교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오히려 우리 삶과 사회의 문젯거리가 되었고,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3.1운동은 ‘종교운동’이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종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서 그 일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오늘 우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묻게 된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지난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3월까지 총 23차에 걸쳐서 촛불시위를 이끌어왔던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그것으로써 “촛불혁명”을 이룩했고, 세계가 놀라는 방식으로 정권을 바꾸고 이후 한국 사회와 역사의 나아감에 대해 다시금 희망과 신뢰를 가지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아서 우리 삶과 미래를 위한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는 것은 종교나 교회가 아니고 우리의 시민이 아닌가? 촛불혁명을 치르고 사람들은 이제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름의 주인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주 말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시민 촛불의 새 정권이 들어선지 2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다시 느끼는 것은 그 처음 희망과 소망이 많이 빛바래간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한 군데 편안한 곳이 없고, 종교는 오늘의 부패한 길에서 돌아설 줄을 모르고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과 소외는 깊어만 간다. 2018년 남북 정상의 4.27판문점 선언 이후 급물살을 타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특히 미국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패권주의적 개입으로 한반도 운전자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모두 자주와 자립, 민주와 평화, 평등 공동체 의식의 퇴행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곧 3.1 독립선언 백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우리 삶의 정황 앞에서 앞서 서술한 대로 한일병합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10여년의 혹독했던 일제 무단정치가 있었지만 그 쇠사슬을 끊고서 폭발한 3.1운동이 어떠한 정신에서 이룩된 것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새롭게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일은 오늘 우리 시대의 독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묻는 일이 될 터인데, 특히 이 과제를 당시 큰 역할을 수행했던 제 종교들의 핵심 사고에 주목하면서 수행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한국 개신교가 3.1운동 정신의 형성과 진행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늘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현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그로부터 어떠한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겠는지를 탐색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본 연구는 그러나 단지 좁은 의미의 기독교 신학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특히 3.1운동이라는 한민족의 “성업”(聖業)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이해가 보다 다원적이고 통합학문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 3.1운동이 가지고 있는 여러 중층의 다원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3.1운동 정신으로부터 우리가 핵심적으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다원성의 통합과 화합에서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맥락에서 본다면 3.1운동 정신을 살펴보는 일이란 단지 기독교 신앙의 미래를 위한 일만이 아니라 우리 종교 자체의 나아갈 길을 전망해 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반도 3.1운동 정신 안에 지금까지 이 지구 생명체가 꽃피어왔던 인류의 핵심 종교의식(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동학, 천도교, 대종교 등)이 두루 녹아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한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개항 이후 계속 이어져온 여러 구국운동과 그 속에서 표명된 독립과 자주, 민주와 평화, 평등의 사상이 하나로 집결되어 터져 나온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한 정치적 시위나 표피적인 사회운동이 아니라 오랜 문명사적 전개 가운데서 종교 사상사적 뿌리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한다.
3.1운동 발발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로 밝혀주는 박은식(朴殷植, 1859-1925)에 따르면, 1919년 우리 민족의 3.1 독립운동은 “세계의 혁명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기원”이 된 사건이다. 그 운동은 그러나 단지 그날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특히 일본이 러일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1904년 대한제국의 국토와 물자, 인력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위해 맺은 한일의정서 이후 “하루도 그친 적이 없었고”, 3.1독립운동 이후부터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라의 안팎이나 원근의 구별도 없이 전체가 활동하고, 일치하여 약동하며, 끓는 물에도 뛰어들고, 불속을 밟으면서도 만 번의 죽음을 불사”한 경우라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람이 안중근(1879-1910)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안중근이 생겨난 것이고, 이완용을 칼로 찌를 이가 이재명(李在明, 1886-1910) 한 사람이었지만 이후로는 몇 천 명의 이재명이 나온 것이어서 세계의 민족들이 한국 민족을 “인식”하게 되었고, “독립의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서로 이구동성으로 ‘한국’을 거론했다고 한다.(7)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촛불혁명의 사상적 모태로 인정하는 이러한 3.1운동이 어떤 종교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살피는 일에서 크게 세 단계의 동서문명적 만남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17세기 후반까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 속에 있던 조선이 서구 근대문명과 만나면서 몇 차례의 사상사적 개혁과 개벽, 창발이 이루어졌고, 나는 3.1운동은 그러한 흐름과 전개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여긴다. 그 개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8)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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