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학생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승인 2018.03.07 14:30 댓글 1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인터뷰]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 전향 ‘우파 386’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영화 ‘1987’ 개봉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이 영화를 관람한 뒤 “6월 항쟁 이후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해서 여한으로 남게 된 6월 항쟁을 완성시켜준 게 촛불항쟁”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를 탄핵한 뒤 ‘촛불혁명’을 통해 들어선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6월 항쟁의 연장선으로 본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학생 운동권이 주도한 민주항쟁은 과연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었을까?
‘민주열사’ 칭호를 단 박종철, 이한열 등 운동권, 그들은 누구인가? 미래한국은 22일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과 전화 인터뷰에서 민주항쟁의 성격과 이를 주도한 전대협 운동권 세력의 실체에 관해 들었다. 이 부원장은 87세대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냈던 전향한 ‘우파386’이다.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 전향 ‘우파 386’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 전향 ‘우파 386’
- 영화 ‘1987’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논의가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대공수사처 등 진실을 은폐하려는 측과 밝히려는 측의 갈등, 그 과정에서 민주화에 눈떠가는 시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박종철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 고문당해 사망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이한열도 독재권력에 저항,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정의감 넘치고 순수한 학생으로 그리고 있는데요.
박종철은 PD계, 이한열은 NL계입니다. 막스레닌주의, 공산주의로 무장한 지하 서클에 속한 사람들이었어요. 단지 민주화를 바란 순수한 학생들이 아닙니다. 김철홍 장신대 교수가 얼마 전 펜앤드마이크에 기고한 ‘1987년 실제와 영화, 그리고 2017년’ 글에서 정확히 잘 설명하고 있어요.
- 대중적으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87체제를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당시 민주화 운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화 운동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 다수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두 가지의 민주주의 형태가 있어요. 80년대 소위 민주화 운동이라는 건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와 상관이 없습니다. 전혀 다른 체제를 지향한 것이지요. 80년대 학생운동은 확실하게 공산주의 운동입니다.
- 그 당시 학생운동 특징은 어떻습니까.
1985년 말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이전까지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운동의 지도사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그 혁명노선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이지요. 1985년까지 학생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학생운동은 주사파가 장악하여 학생운동의 대세를 형성하게 됩니다.
주체사상의 학생운동 내의 수용 과정은 1983년에 학원가에 유포되었던 <예속과 함성>이 그 시작이었는데요, 1985년 9월 당국에 의해 구미 간첩단 사건의 주범(主犯)으로 밝혀진 김성만, 양동화 등이 북한 혁명론을 남한의 학생운동에 소개한 것입니다. 이들은 책자에서 한국은 1945년 이래 미국의 식민지이며,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은 미국에 의해 양성·조종되는 괴뢰정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자는 당시 학생운동에 큰 충격이었어요. 그러나 아직 이런 주장이 학생운동 내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수용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의 단재사상연구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 김영환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집중적으로 청취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는 남한 혁명론을 토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본격 제기합니다.
이는 1960년대의 통혁당, 1970년대의 남민전 이후 최초의 조직적 형태를 띤 반(反)제국주의 세력의 등장이며, 학생운동을 모태로 출발하는 것으로는 최초였어요. 한국 사회의 주적(主敵)을 미 제국주의로 규정한 김영환 그룹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삼민투 NDR론(민족민주혁명론)과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여 그 세력과 영역을 넓혀나갔습니다.
1980~90년대 한국 학생운동은 전대협과 후신인 한총련이 주도한 시대였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격렬하고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 SBS 영상뉴스
1980~90년대 한국 학생운동은 전대협과 후신인 한총련이 주도한 시대였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격렬하고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 SBS 영상뉴스
이들은 <반제민중 민주화 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소책자를 학생운동권에 광범위하게 전파했습니다. 이제까지 학생운동은 주요한 운동의 대상, 즉 주적이 독재정권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독점자본이라고 봤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적은 미국, 다시 말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있다고 본 겁니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 반미운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386 핵심 운동권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의 주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안이한 대응이 키운 오늘의 현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전두환 전 대통령 4·13 호헌 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 투쟁은 학생운동의 대명사가 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대협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1980~90년대 한국 학생운동은 전대협과 후신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약칭)이 주도한 시대였습니다. 한국 학생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격렬하고 규모가 압도적이었지요.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은 학생운동권이 전면에서 주도적으로 끌어갔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형식적으로 투쟁 지도부 역할을 했지만 대중동원력과 투쟁의 강고성에서 학생운동에 필적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명동성당과 시청 앞을 점거하고 시위를 주도한 것은 각 대학 총학생회였어요. 연일 각 대학교 총학생회는 학교별로 학내 시위를 벌이고 오후에 맡은 지역으로 이동해 가두시위를 조직했습니다. 학생시위대들은 ‘호헌(護憲)철폐, 독재타도’를 전면에 내걸고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고요.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일반 시민들의 동참을 가져왔습니다.
삽시간에 시청 앞이 시위대에 점령당하는 것은 당시 일상적인 풍경이었어요.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이전 학생운동권이 시민과 유리된 과격한 구호를 전면으로 내세우던 경향과는 달랐습니다. 시민들과 일반 학생들의 정서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투쟁구호와 방식을 고수했지요. 학생들의 시위와 일반 국민들의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호헌 방침을 철회하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민주화의 진전을 이루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 전대협의 신화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1987년 6월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었고, 민주화의 진전을 이뤄낸 주역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학내시위와 가두시위는 수많은 학생운동의 투쟁 영웅과 지도부를 탄생시켰고요. 이들은 6월 투쟁 과정에서 노련한 대중선동가이자 대중투쟁의 지도부로 성장했습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국회의원, 당료, 실무자, 보좌관 등 여권 곳곳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생운동 지도부가 대한민국 여당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진출해 있는 것이지요. 이들은 이제 변방의 소수가 아닙니다.
언론계, 출판계, 문화계, 법조계, 여성계, 시민운동 단체, 노동운동계, 농민운동계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지지 그룹을 가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전대협 출신의 학생운동 그룹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라고 평가해도 과장이 아니에요. 따라서 이들이 과연 어떤 사상과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행로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 문재인 정부의 특성을 보면 전대협 세대의 특징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전대협 세대의 특징은 북한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관대합니다. 국제사회가 그 심각성을 공감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 문제에 어느 누구하나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촉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북한인권 문제는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요. 반면에 미국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적대적입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오욕과 굴절로 얼룩진 수치의 역사라는 좌파들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요. 그런데 이들의 이런 관점과 태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현실 인식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좌파적 사회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고, 3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근본이 바뀌지 않은 채 곳곳에서 집단적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해 권위주의적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며, 사회가 선진화를 위해 치르는 대가 정도로 생각해 관대하게 바라봤습니다. 좌파적 사회운동에 대한 주류사회와 지식인 사회의 안이하고 무사 안일한 대응으로 인해 이들은 우리 국민들의 인식의 혼란을 효과적으로 이뤄 냈다고 볼 수 있지요.
다수 국민들은 좌파적 사회운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잘 깨닫고 있지 못해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 핵심에는 아직도 1980년대식 좌파적 사고에 절어 있는, 이제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된 세력의 편향된 인식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Tag#386#486#586#학생운동#운동권#좌파운동권#공산주의운동#공산혁명#1987#민주화운동#박종철#고문치사#전두환#호헌#전대협#한총련#문재인#청와대#북한#김정일#김정은#김일성#북한정권#종북#친북
저작권자 © 미래한국 Weekl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