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한국병원 체험기 1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06.22 14:02
수정 2021.07.07 21:56
영암을 국제 의료관광지로...
새로 태어난 영암한국병원
5월23일 저녁 6시경, 자전거를 타고 구림천을 따라 죽정마을에서 구림마을 쪽으로 내려가는데 골목에서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차와 나는 동시에 급정거를 해서 접촉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넘어졌고 아파서 신음을 했다. 상대 운전자는 차에서 나와서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운전자: “내가 잘 못했는가요?” / 나: “우리 둘 다 급정거 했어요.” “그런데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요. 손 좀 잡아 주세요.” / 운전자: “집에 데려다 줄까요?” / 나: “자전거가 있으니 그냥 밀고 갈께요.”)
미국서 가져 온 내 자전거
집에 가서 쉬는데 많이 아팠다. 다음날 한 시간 걸려 버스를 타고 목포한국병원을 찾아 갔다. X-ray를 찍어보니 늑골이 네 개 골절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영암병원에 갈 생각을 않은 이유는 5년 전에 입원했을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고열로 입원했는데 일주일 간 매일 항생제 주사로 놓아서 후에 내 몸에 부담이 컸다. 또 간호사가 주사를 잘 못 놓아서 손이 퉁퉁 부어올라 그 후유증이 아직도 손등에 남아있다. 그 때부터 영암병원은 못 갈 곳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대신에 목포한국병원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갈비뼈 한 개가 폐를 찔러서 피가 고였기 때문에 폐에 튜브를 삽입해서 고인 피를 빼내는 수술을 했고 일주일 이상 걸려 빼냈다. 튜브 제거 후 영암 병원으로 옮겼다. 연기해 놓은 화이자 백신 2차 접종을 맞아야 함으로 접종 장소인 영암실내체육관 가까운 영암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까 이전의 영암병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밝은 모습의 영암한국병원이 있었다. 젊고 기백있는 원장님의 진단을 받으면서 좋은 느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원 중에 몇 건의 상황이 발생했다. 주말에 화장실 쓰레기통에 묵은 휴지들이 높이 쌓여서 악취를 내고 있는 것이 비위를 상하게 하여 심한 구토를 유발했다. 또, 매끼 먹는 약이 일요일에는 왼 일인지 내가 받지를 못했는데, 그 날 저녁에 또 크게 구토를 했다. 월요일에 원장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고했다. 그리고는 목포병원으로 돌아갈 까 하고 있는데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말끔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파랑색 비닐봉지를 들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휴지통을 깨끗하게 해놓았다.
새벽에 병원 건물 밖에 나가 걷기를 하는데, 흐르는 면사포 같은 구름에 살포시 가린 월출산 봉우리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큰 비전이 내려왔다. 미래의 영암에 대한 것이었다. 공업단지가 없는 영암에 ‘국제 의료관광지’와 ‘호남의 의료센터’로 구성된 독특한 ‘의료단지’가 생긴다는 가슴 벅차는 상상과 영암한국병원이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큰 그림이었다. 필자가 환자의 입장으로 영암한국병원을 체험 하게 된 사건과 영암이 ‘영성 관광지’로 빛나기를 바라온 영암홍보대사로써의 마음이 아우러지며 일어난 일이다.
영암한국병원 뒤 주차장에서 보는 월출산
영암한국병원은 이 세상의 어느 병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산과 크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월출산이 병풍같이 두르고 정기를 뿜고 있다. (아침에 새벽 공기와 더불어 병원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월출산의 영기를 받는 것은 치유와 각성을 촉발한다. 병원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선물이다.) 둘째로, 이 병원에는 오남호 원장님을 비롯한 스탭 모든 분들의 성실하고 합리적인 팀웤이 있다. (미국의 비합리적인 의료 시스템과 천문학적 의료비, 삭막한 병원 분위기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아주 신선하게 느껴지고, 아직 부족한 여러 부분들이 빨리 채워져 갈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해준다.) 셋째로 이 병원은 영암의 건실한 군민들과 영암을 사랑하는 군수와 유지들의 감성적 품 안에 세워져 있다.(모든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영암군과 군민의 체감은 56년간의 해외 생활을 하고 6년 전부터 영암 군민이 되어 살아 온 필자가 유심히 보고 느끼는 부분이다.) 영암은 외국 사람들이 전통적인 한국 정서와 2,200년의 마한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또 왕인 박사의 존재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 쌍방에 감동을 주는 화해의 지역이다.)
~ 영암을 국제 의료관광지로...
우리나라의 의료관광은 2016년 의료해외진출 및 외국인 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급격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자랑하고 있다. “외국인 환자 수로 양적인 성장을 따져보더라도 2009년 60,201명에서 2018년 378,967명으로 연평균 22.7%의 증가율을 보였고 유치국가도 139개국에서 190개국으로 확장하였으며, 향후에도 외국인 환자의 국내 유입은 지속될 것” 이라 한다. (참조: Korean Journal of Medicine, “한국의 의료관광 발전과정, 현황과 정책, 저자 임영이)
한국 의료관광은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많이 오고, 러시아에서도 오고, 환자의 80%가 암 때문에 한국을 찾는 경우라 한다. 이들이 한국을 선호하는 이유는 한국은 높은 의료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비스가 뛰어나고, 유럽에 비해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한국 의사와의 상담비용은 약 60달러 정도인데 비해서 유럽의 경우, 의사와의 상담비용은 350 달러부터 시작된다 한다.)
저렴한 가격과 함께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정서와 카자흐스탄 정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병실에 와서 밤을 새기도 하며, 환자들은 치료 중에도 혼자가 아니라 느끼며, 주변인에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상량하고 배려 깊은 한국 병원의 병실 문화가 유럽 의료관광과 대조된다는 사실 이 외에도, 의료관광을 유치하고 있는 한국 병원들은 무료 통번역이 있어 신속한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며, 최근에는 한-카 무비자 협정 체결이 되어 있어 한국방문이 쉬워진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한다.
의료관광으로 오는 외국인 환자들이 한국에 와서 일인당 쓰는 비용은 숙박, 치료비를 포함해서 3천만 원 이상 1억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니 대단한 액수다. 영암군이 특별 부서를 만들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영암의 꿈을 대폭 확장하여 국제 의료관광을 유치하게 되면 국내 관광 명소로 성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 환자와 보호자들이 월출산의 기운을 받으며 영성 체험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전력을 다하여 노력해 볼 만한 일이다.
- 김반아 (영암군 국제홍보대사)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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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영암 ##영암 국제의료관광 ##월출산의 정기
5월23일 저녁 6시경, 자전거를 타고 구림천을 따라 죽정마을에서 구림마을 쪽으로 내려가는데 골목에서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차와 나는 동시에 급정거를 해서 접촉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넘어졌고 아파서 신음을 했다. 상대 운전자는 차에서 나와서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운전자: “내가 잘 못했는가요?” / 나: “우리 둘 다 급정거 했어요.” “그런데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요. 손 좀 잡아 주세요.” / 운전자: “집에 데려다 줄까요?” / 나: “자전거가 있으니 그냥 밀고 갈께요.”)
미국서 가져 온 내 자전거
집에 가서 쉬는데 많이 아팠다. 다음날 한 시간 걸려 버스를 타고 목포한국병원을 찾아 갔다. X-ray를 찍어보니 늑골이 네 개 골절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영암병원에 갈 생각을 않은 이유는 5년 전에 입원했을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고열로 입원했는데 일주일 간 매일 항생제 주사로 놓아서 후에 내 몸에 부담이 컸다. 또 간호사가 주사를 잘 못 놓아서 손이 퉁퉁 부어올라 그 후유증이 아직도 손등에 남아있다. 그 때부터 영암병원은 못 갈 곳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대신에 목포한국병원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갈비뼈 한 개가 폐를 찔러서 피가 고였기 때문에 폐에 튜브를 삽입해서 고인 피를 빼내는 수술을 했고 일주일 이상 걸려 빼냈다. 튜브 제거 후 영암 병원으로 옮겼다. 연기해 놓은 화이자 백신 2차 접종을 맞아야 함으로 접종 장소인 영암실내체육관 가까운 영암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까 이전의 영암병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밝은 모습의 영암한국병원이 있었다. 젊고 기백있는 원장님의 진단을 받으면서 좋은 느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원 중에 몇 건의 상황이 발생했다. 주말에 화장실 쓰레기통에 묵은 휴지들이 높이 쌓여서 악취를 내고 있는 것이 비위를 상하게 하여 심한 구토를 유발했다. 또, 매끼 먹는 약이 일요일에는 왼 일인지 내가 받지를 못했는데, 그 날 저녁에 또 크게 구토를 했다. 월요일에 원장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고했다. 그리고는 목포병원으로 돌아갈 까 하고 있는데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말끔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파랑색 비닐봉지를 들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휴지통을 깨끗하게 해놓았다.
새벽에 병원 건물 밖에 나가 걷기를 하는데, 흐르는 면사포 같은 구름에 살포시 가린 월출산 봉우리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큰 비전이 내려왔다. 미래의 영암에 대한 것이었다. 공업단지가 없는 영암에 ‘국제 의료관광지’와 ‘호남의 의료센터’로 구성된 독특한 ‘의료단지’가 생긴다는 가슴 벅차는 상상과 영암한국병원이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큰 그림이었다. 필자가 환자의 입장으로 영암한국병원을 체험 하게 된 사건과 영암이 ‘영성 관광지’로 빛나기를 바라온 영암홍보대사로써의 마음이 아우러지며 일어난 일이다.
영암한국병원 뒤 주차장에서 보는 월출산
영암한국병원은 이 세상의 어느 병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산과 크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월출산이 병풍같이 두르고 정기를 뿜고 있다. (아침에 새벽 공기와 더불어 병원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월출산의 영기를 받는 것은 치유와 각성을 촉발한다. 병원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선물이다.) 둘째로, 이 병원에는 오남호 원장님을 비롯한 스탭 모든 분들의 성실하고 합리적인 팀웤이 있다. (미국의 비합리적인 의료 시스템과 천문학적 의료비, 삭막한 병원 분위기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아주 신선하게 느껴지고, 아직 부족한 여러 부분들이 빨리 채워져 갈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해준다.) 셋째로 이 병원은 영암의 건실한 군민들과 영암을 사랑하는 군수와 유지들의 감성적 품 안에 세워져 있다.(모든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영암군과 군민의 체감은 56년간의 해외 생활을 하고 6년 전부터 영암 군민이 되어 살아 온 필자가 유심히 보고 느끼는 부분이다.) 영암은 외국 사람들이 전통적인 한국 정서와 2,200년의 마한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또 왕인 박사의 존재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 쌍방에 감동을 주는 화해의 지역이다.)
~ 영암을 국제 의료관광지로...
우리나라의 의료관광은 2016년 의료해외진출 및 외국인 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급격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자랑하고 있다. “외국인 환자 수로 양적인 성장을 따져보더라도 2009년 60,201명에서 2018년 378,967명으로 연평균 22.7%의 증가율을 보였고 유치국가도 139개국에서 190개국으로 확장하였으며, 향후에도 외국인 환자의 국내 유입은 지속될 것” 이라 한다. (참조: Korean Journal of Medicine, “한국의 의료관광 발전과정, 현황과 정책, 저자 임영이)
한국 의료관광은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많이 오고, 러시아에서도 오고, 환자의 80%가 암 때문에 한국을 찾는 경우라 한다. 이들이 한국을 선호하는 이유는 한국은 높은 의료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비스가 뛰어나고, 유럽에 비해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한국 의사와의 상담비용은 약 60달러 정도인데 비해서 유럽의 경우, 의사와의 상담비용은 350 달러부터 시작된다 한다.)
저렴한 가격과 함께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정서와 카자흐스탄 정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병실에 와서 밤을 새기도 하며, 환자들은 치료 중에도 혼자가 아니라 느끼며, 주변인에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상량하고 배려 깊은 한국 병원의 병실 문화가 유럽 의료관광과 대조된다는 사실 이 외에도, 의료관광을 유치하고 있는 한국 병원들은 무료 통번역이 있어 신속한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며, 최근에는 한-카 무비자 협정 체결이 되어 있어 한국방문이 쉬워진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한다.
의료관광으로 오는 외국인 환자들이 한국에 와서 일인당 쓰는 비용은 숙박, 치료비를 포함해서 3천만 원 이상 1억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니 대단한 액수다. 영암군이 특별 부서를 만들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영암의 꿈을 대폭 확장하여 국제 의료관광을 유치하게 되면 국내 관광 명소로 성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 환자와 보호자들이 월출산의 기운을 받으며 영성 체험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전력을 다하여 노력해 볼 만한 일이다.
- 김반아 (영암군 국제홍보대사)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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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한국병원 체험기 2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06.22 14:37
수정 2021.07.07 21:58
댓글 2
통일 한국 (x) ==> 통일조국 (o)
통일한국(x) ==>통일조국 (o)
영암한국병원 환자복에 가슴 보호대를 하고 빨간 모자를 쓴 필자
첫 2주일은 목포한국병원에서, 그 다음 3주일은 영암 사람들과 24시간을 지내게 되었다.
내 앞 침대에 대상포진으로 입원한 32세 초등학교 교사가 있었다. 한 반에 스물여섯 명을 데리고 아이들을 돌보며 수업하며 학교 정보실장 책임을 맡고, 석사 코스까지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내 중립화통일활동 이야기를 들은 H 선생은 자기 학교에서 하고 있는 통일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내가 초등학교 통일교육의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인터넷 교재를 보내주었다. 우리나라 통일 교육이 업그레이드 되게 도와주기 바란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생활 통일 관련
놀라운 것은 초등학교 6학년 통일 교육 교재 안에서 ‘통일 한국‘이 마치 통일의 궁극적인 목표 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북녘의 동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북진통일‘의 뜻을 내포하는 우월적이고 압박적인 것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남과북을 칭하는데 있어서 북을 (북이 싫어하는) ’북한‘이라고 부르고, 남을 (남이 펄쩍 뛸)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력적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일이다. 이재봉 교수 자신은 “'통일 한국'이란 말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관용어가 돼버린 것이지 '북진 통일'을 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관점과 동의할 수 없는 필자는 좀 더 널리 찾아보았다.
통일부UniTV가 주최한 “설민석 통일 특강, 통일한국을 말하다“는 통일부의 심사를 통과한 내용이니, 통일부의 관점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설민석의 <2016 통일을 말하다 >를 보면 그의 강의를 통하여 한국의 통일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직시할 수 있다. 설민석 선생은 '2016년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원동력은 통일'이라고 말문을 열면서 "1950~60년대에 있었던 북한주도의 통일, 즉 ’흡수통일’이 시도 되었다가 실패하고 1972년에 이르러서는 남한주도의 통일이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꼭 이루어내야 한다. 법흥왕과 왕건이 보인 관용과 포용을 우리도 보여서 ‘통일한국’을 세우고 북한 인민들이 대한민국이 주도한 통일한국에서 열심히 일할 역군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고 그의 통일론을 펼쳤다.
통일부 UniTv에서 만든 통일 교육 프로그램
설민석 선생은 강의 앞부분에서 ‘독도는 우리 땅, 북한도 우리 땅’이라고 학생들을 설득 시킨 바가 있다. 그의 논리는, 남북의 기 싸움에서 이긴 대한민국은 이제 형의 아량으로 북한 동포들을 보듬고 포용과 관용으로 자원이 풍부한 북한 땅을 ‘우리 땅’으로 만들고 북한 인민을 우리의 일꾼으로 만들자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 말의 숨겨진 의미는 '잘 계획되고 포장된 북진통일을 해서 아우는 무시하고 형에게 좋도록 하자.'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진정으로 현재 한국 통일교육의 현주소가 아니라면, ‘통일 한국’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한국 통일교육의 현장을 모두 적시하여 떼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 병실에 새로 들어 온 영암의 여성 농부 환자 한 분과 간병인 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북한은 누구의 땅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은 “아니, 북한이 북한 땅이지, 누구 땅이란 말이요....” 별난 질문도 다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분들에게 우리 사회의 이런 건전한 상식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312호 실에서 2주일 간 룸메이트 강순임 어르신네
그 옆 침대에는 89세 어르신네가 입원해 계셨다. 췌장염 수술 후 아파서 입원 시켰는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갈비뼈 세 개가 골절되었고 그 후 상태가 점점 악화되더니 대소변을 받아내게까지 되었다. 주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생각이 전혀 안보이고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간병인을 보내고 가족들이 와 있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아들과 며느리가 인천서 와서 5일간 보냈는데 며느리는 온 종일 기저귀를 갈며 간병을 했다. 하루는 곤히 자고 있는데 고함지르는 소리가 나서 후다닥 잠이 깼다. 새벽 두시 반이었다. 다소곳하던 며느리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시어머니가 잠을 안자고 계속 침대를 올려라내려라 담요를 덮어라벗겨라 하셔서 참다못해 폭발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함께 왔지만 낮에는 나가 있다가 밤에는 물리치료실 침대에서 잔다고 한다. 다음날, 아들 딸 며느리가 어머니를 휠체어에 싣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며느리가 어제 밤에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할머니에게 내가 “지금은 표정이 밝으시네요. 아들딸이 다 와서 기쁘세요?” 하니까, “우리 아들 이뻐?” 하신다. “어제 밤에는 아들 정말 안이뻤어요. 며칠 째를 며느리와 교대를 않고 어머니 돌보는 일을 며느리에게 다 맡겨놓고... 그건 말도 안돼요. 우리 어머니는 제주 병원에 계실 때 호주에서 대학교수 하던 아들이 3개월을 휴직하고 와서 24시간 간병을 했어요. 기저귀 다 갈아드리고요.”
어르신네는 가만히 듣고 계셨다. 하루는 항상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가 잠간 앉아계신 동안 나를 쳐다보고 계셔서 손을 흔들었더니 손을 흔들어 응답을 하셨다. 그리고는 “빨간 모자 이쁘다”라고 하셨다. 나는 다가가서 “이 빨간 모자 예쁘지요? 제가 만들었어요.“ 라고 했다.
다음날 어르신네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계셔서 내가 다가가서 ”노래 하나 불러주세요” 라고 했더니 간병하던 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딸이 깜짝 놀라더니 '나그네의 설움’이란 노래인데,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노래라고 한다. 다음 날은 “아줌마~ 아줌마~“ 하신다. ”왜요“ 하고 다가가니까 ”놀자고...“ 하신다. 하하!! ”그래요. 노래불러 주세요. 내가 춤 출께요.“ 하니까, ”아줌마는 즐거움이 많은 사람이야.“ 라고 대꾸하신다.
딸들은 어머니가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오고 고지식한 분이라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힙’한 한국여성성이 숨어있다. 시골서 일찍 시집가서 자식 다섯 낳고 밭농사 지으면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개성이 키워지지 않은 것뿐이다. 전통적 시골 분위기에서 자식들은 어머니의 키워지지 않은 잠재성을 볼 수가 없었고, 어머니는 항상 하향적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식들이 고개를 돌려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딸들이 어머니에게 말하는 어조도 하향적이고 명령조이기도 한것 같았다. 자식들과 어머니 사이에 '오순도순 대화'라는 것이 없다. 나의 어머니의 말년과 비교 되었다.
또 한 여성은 앞방의 환자를 돌보는데 지극정성이어서 “어머니 좀 어떻세요?”하고 물으니까, “시어머니에요. 식사를 전혀 안하셔서 대소변 싸는 게 없어요. 정말 걱정이에요.” 라고 했다. 식사 때마다 한 시간씩 씨름을 하며 먹이려고 하는데 도무지 안드신다며 어쩌시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먹이지 마세요.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원하는 것을 해드리세요.” 했더니 의사 선생님도 같은 말을 하셨다 한다. “음식을 더 먹이려고 애쓰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좋아하는 것애 대하여 물어보고 해 드리는 거에요.“ 했더니 ”선생님, 의사분이세요?“ 했다. ”저는 영혼의 의사예요.“ 라고 답을 하고는 우리 어머니 경우를 말해줬다. 1994년에 어머니를 부추겨서 십년 걸려 이루어 낸 감성치유와 그림자 작업 덕분에 나는 모녀관계에서 도반-동지의 관계로 관계 변혁을 해나갔고, 그 여파가 집안 식구 전체에 펴져 나갔다. 그리하여 대화와 갈등의 해소는 우리 삶의 기본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 일선님은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해 놓으셨다.
좌뇌 1/3을 잘라 낸 어머니(~일선님)와 호주에서 귀국한 장남, 세진
2010년 11월, 88세이실때 서귀포에서 혼자 사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여섯시간 후에 발견되어 좌뇌가 부어올라 우뇌를 누르기 시작하여 좌뇌의 1/3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수술 후, 제주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일선님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천지공사”하는 이야기를 하셔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속에 쌓아 놓은 것들이라고 하셨다.
차남 유진과 이야기 하는 일선님
하루는 "일선님 오늘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하니까 ”나를 여기서 분리시키는 명상을 했어. 나의 몸과 큰 영을 분리시키는 명상...“ 수행생활을 수십년간 해 온 일선님은 생명을 건 뇌수술을 하고 놀라운 속도의 회복을 하셨다. 오랜 수행과 풍부한 상상력은 사지마비가 되어 병상에 누워서 혼자 계신 동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선님은 매일 병상에서의 명상의 결과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 행복해 하셨다. ”오늘은 행복풍선 명상을 했어.“ 행복풍선을 만들어서 세계 어린이들에게 날리는 명상이었어”. ”오늘은 금강산, 한라산 명상을 했어.“ ”나 해금강에 가보고 싶다..“ 일선님은 우리가 몸을 쓰다듬으며 노래 불러드리면 좋아 하셨다. 그래서 일선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는 둘러서서 노래를 불러드리며 ”어머니, 우리 여기 있어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되풀이해드렸고, 일선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다.
갖가지의 병을 가지고 모인 영암 사람들과 병실에서 깊은 교류를 갖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 여성 환자는 주사제를 맞지 않을 때면 부지런히 움직인다. 오늘은 월요일, 아침에 청소 업체에서 온 팀이 나와서 주말이 지난 화장실을 치우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해야 깨끗하게 된다”며 쇠솔과 호스를 들고 자진해서 물청소를 한다. 미국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화장실 청소 돕는 환자
또 한 분은 새벽에 산책을 나갈 때 여러 번 마주쳤는데, 몸집이 작고 깡마른 할아버지이시다. 도시락 가방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와서 315호 실에 들어가서 전달하고 나간다. “요구르트 배달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마누라가 뇌출혈로 쓰러진지 10년 째 되어 집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이 세상에 이런 남편도 다 있다니. “열남비 세워드려야겠어요!”
나를 한 방에 녹인 영암 남성 이야기도 있다. 병원 음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가니까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그리워졌다. 며칠간 머릿속에 오이맛고추와 참외,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계속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또 하고 있는데 내 휴대폰이 울렸다. “먹고 싶은 거 없소?” 영암문화원의 김한남 원장님이었다. 나는 숨 가삐 답을 했다. “있어요. 아삭한 오이맛고추, 참외, 무가당 플레인 요구르트.” 양쪽에서 폭소가 터졌다. 곧 쇼핑백이 배달되었고, 그 안에는 쌈장도 들어있었다.
영암문화원 원잠님이 보내 준 "케어 패키지"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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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한국병원 체험기 3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07.02 12:21
수정 2021.07.07 21:59
영암의 보물, 최형석 경찰
설민석 선생은 강의 앞부분에서 ‘독도는 우리 땅, 북한도 우리 땅’이라고 학생들을 설득 시킨 바가 있다. 그의 논리는, 남북의 기 싸움에서 이긴 대한민국은 이제 형의 아량으로 북한 동포들을 보듬고 포용과 관용으로 자원이 풍부한 북한 땅을 ‘우리 땅’으로 만들고 북한 인민을 우리의 일꾼으로 만들자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 말의 숨겨진 의미는 '잘 계획되고 포장된 북진통일을 해서 아우는 무시하고 형에게 좋도록 하자.'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진정으로 현재 한국 통일교육의 현주소가 아니라면, ‘통일 한국’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한국 통일교육의 현장을 모두 적시하여 떼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 병실에 새로 들어 온 영암의 여성 농부 환자 한 분과 간병인 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북한은 누구의 땅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은 “아니, 북한이 북한 땅이지, 누구 땅이란 말이요....” 별난 질문도 다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분들에게 우리 사회의 이런 건전한 상식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312호 실에서 2주일 간 룸메이트 강순임 어르신네
그 옆 침대에는 89세 어르신네가 입원해 계셨다. 췌장염 수술 후 아파서 입원 시켰는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갈비뼈 세 개가 골절되었고 그 후 상태가 점점 악화되더니 대소변을 받아내게까지 되었다. 주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생각이 전혀 안보이고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간병인을 보내고 가족들이 와 있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아들과 며느리가 인천서 와서 5일간 보냈는데 며느리는 온 종일 기저귀를 갈며 간병을 했다. 하루는 곤히 자고 있는데 고함지르는 소리가 나서 후다닥 잠이 깼다. 새벽 두시 반이었다. 다소곳하던 며느리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시어머니가 잠을 안자고 계속 침대를 올려라내려라 담요를 덮어라벗겨라 하셔서 참다못해 폭발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함께 왔지만 낮에는 나가 있다가 밤에는 물리치료실 침대에서 잔다고 한다. 다음날, 아들 딸 며느리가 어머니를 휠체어에 싣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며느리가 어제 밤에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할머니에게 내가 “지금은 표정이 밝으시네요. 아들딸이 다 와서 기쁘세요?” 하니까, “우리 아들 이뻐?” 하신다. “어제 밤에는 아들 정말 안이뻤어요. 며칠 째를 며느리와 교대를 않고 어머니 돌보는 일을 며느리에게 다 맡겨놓고... 그건 말도 안돼요. 우리 어머니는 제주 병원에 계실 때 호주에서 대학교수 하던 아들이 3개월을 휴직하고 와서 24시간 간병을 했어요. 기저귀 다 갈아드리고요.”
어르신네는 가만히 듣고 계셨다. 하루는 항상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가 잠간 앉아계신 동안 나를 쳐다보고 계셔서 손을 흔들었더니 손을 흔들어 응답을 하셨다. 그리고는 “빨간 모자 이쁘다”라고 하셨다. 나는 다가가서 “이 빨간 모자 예쁘지요? 제가 만들었어요.“ 라고 했다.
다음날 어르신네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계셔서 내가 다가가서 ”노래 하나 불러주세요” 라고 했더니 간병하던 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딸이 깜짝 놀라더니 '나그네의 설움’이란 노래인데,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노래라고 한다. 다음 날은 “아줌마~ 아줌마~“ 하신다. ”왜요“ 하고 다가가니까 ”놀자고...“ 하신다. 하하!! ”그래요. 노래불러 주세요. 내가 춤 출께요.“ 하니까, ”아줌마는 즐거움이 많은 사람이야.“ 라고 대꾸하신다.
딸들은 어머니가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오고 고지식한 분이라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힙’한 한국여성성이 숨어있다. 시골서 일찍 시집가서 자식 다섯 낳고 밭농사 지으면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개성이 키워지지 않은 것뿐이다. 전통적 시골 분위기에서 자식들은 어머니의 키워지지 않은 잠재성을 볼 수가 없었고, 어머니는 항상 하향적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식들이 고개를 돌려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딸들이 어머니에게 말하는 어조도 하향적이고 명령조이기도 한것 같았다. 자식들과 어머니 사이에 '오순도순 대화'라는 것이 없다. 나의 어머니의 말년과 비교 되었다.
또 한 여성은 앞방의 환자를 돌보는데 지극정성이어서 “어머니 좀 어떻세요?”하고 물으니까, “시어머니에요. 식사를 전혀 안하셔서 대소변 싸는 게 없어요. 정말 걱정이에요.” 라고 했다. 식사 때마다 한 시간씩 씨름을 하며 먹이려고 하는데 도무지 안드신다며 어쩌시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먹이지 마세요.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원하는 것을 해드리세요.” 했더니 의사 선생님도 같은 말을 하셨다 한다. “음식을 더 먹이려고 애쓰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좋아하는 것애 대하여 물어보고 해 드리는 거에요.“ 했더니 ”선생님, 의사분이세요?“ 했다. ”저는 영혼의 의사예요.“ 라고 답을 하고는 우리 어머니 경우를 말해줬다. 1994년에 어머니를 부추겨서 십년 걸려 이루어 낸 감성치유와 그림자 작업 덕분에 나는 모녀관계에서 도반-동지의 관계로 관계 변혁을 해나갔고, 그 여파가 집안 식구 전체에 펴져 나갔다. 그리하여 대화와 갈등의 해소는 우리 삶의 기본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 일선님은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해 놓으셨다.
좌뇌 1/3을 잘라 낸 어머니(~일선님)와 호주에서 귀국한 장남, 세진
2010년 11월, 88세이실때 서귀포에서 혼자 사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여섯시간 후에 발견되어 좌뇌가 부어올라 우뇌를 누르기 시작하여 좌뇌의 1/3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수술 후, 제주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일선님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천지공사”하는 이야기를 하셔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속에 쌓아 놓은 것들이라고 하셨다.
차남 유진과 이야기 하는 일선님
하루는 "일선님 오늘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하니까 ”나를 여기서 분리시키는 명상을 했어. 나의 몸과 큰 영을 분리시키는 명상...“ 수행생활을 수십년간 해 온 일선님은 생명을 건 뇌수술을 하고 놀라운 속도의 회복을 하셨다. 오랜 수행과 풍부한 상상력은 사지마비가 되어 병상에 누워서 혼자 계신 동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선님은 매일 병상에서의 명상의 결과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 행복해 하셨다. ”오늘은 행복풍선 명상을 했어.“ 행복풍선을 만들어서 세계 어린이들에게 날리는 명상이었어”. ”오늘은 금강산, 한라산 명상을 했어.“ ”나 해금강에 가보고 싶다..“ 일선님은 우리가 몸을 쓰다듬으며 노래 불러드리면 좋아 하셨다. 그래서 일선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는 둘러서서 노래를 불러드리며 ”어머니, 우리 여기 있어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되풀이해드렸고, 일선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다.
갖가지의 병을 가지고 모인 영암 사람들과 병실에서 깊은 교류를 갖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 여성 환자는 주사제를 맞지 않을 때면 부지런히 움직인다. 오늘은 월요일, 아침에 청소 업체에서 온 팀이 나와서 주말이 지난 화장실을 치우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해야 깨끗하게 된다”며 쇠솔과 호스를 들고 자진해서 물청소를 한다. 미국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화장실 청소 돕는 환자
또 한 분은 새벽에 산책을 나갈 때 여러 번 마주쳤는데, 몸집이 작고 깡마른 할아버지이시다. 도시락 가방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와서 315호 실에 들어가서 전달하고 나간다. “요구르트 배달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마누라가 뇌출혈로 쓰러진지 10년 째 되어 집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이 세상에 이런 남편도 다 있다니. “열남비 세워드려야겠어요!”
나를 한 방에 녹인 영암 남성 이야기도 있다. 병원 음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가니까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그리워졌다. 며칠간 머릿속에 오이맛고추와 참외,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계속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또 하고 있는데 내 휴대폰이 울렸다. “먹고 싶은 거 없소?” 영암문화원의 김한남 원장님이었다. 나는 숨 가삐 답을 했다. “있어요. 아삭한 오이맛고추, 참외, 무가당 플레인 요구르트.” 양쪽에서 폭소가 터졌다. 곧 쇼핑백이 배달되었고, 그 안에는 쌈장도 들어있었다.
영암문화원 원잠님이 보내 준 "케어 패키지"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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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좋아요8훈훈해요0슬퍼요0화나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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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한국병원 체험기 3
기자명 김반아 주주통신원
입력 2021.07.02 12:21
수정 2021.07.07 21:59
영암의 보물, 최형석 경찰
새벽의 월출산 (출처: 글쓴이)
영암한국병원에서의 ‘월출산 명상‘은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영암한국병원에서의 ‘월출산 명상‘은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월출산의 분홍 하늘 (출처: 글쓴이)
이른 새벽의 고요 속에 병동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급습해오는 산 기운을 활짝 열린 가슴으로 받고 있는 동안에 6.25때 피난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만 네 살이었으며 일종의 신비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혼자만의 것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나 나의 인생의 틀을 세워주었다.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후에 되돌아보니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아버지는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Korea) 관계로 미국에 가계시고, 어머니 혼자 우리를 데리고 ~ 2살짜리 동생을 등에 업고 언니 (5세)와 나(4세)는 손을 잡고 ~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끊어진 한강 다리를 어떻게 건넜는지 기억에 없지만, 폭탄 터지는 소음 속에서 끝없이 이어진 피난민들 속에 묻혀 걷다가 기차를 타고 내려서 또 걸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충청남도 입장역에서 한 참 걸어들어 간 산속이었다. 헤매던 끝에 어머니는 오두막집 한 채를 발견하였고 모두 환성을 지르며 뛰어 들어갔는데, 한 칸짜리 방은 장판을 깔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흙바닥이었다. 다행히 집 가까이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아침에 세수 하러 나가면 작은 산짐승들이 푸다닥 거리며 도망을 간다. 어머니는 불을 지피고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온 쌀로 밥을 하실 때면, 나는 행복에 쌓여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동덕여중 교사였고 북아현동 한옥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던 어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방을 내주고 평소에는 건넌방을 사용하며 학교에 출근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보낸 산속 생활은 처음 맛보는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피난민의 대열 속에서 정신없이 걸어온 장면이 끝나고 1막이 내리고 다음 막이 올라가가더니, 깊은 산 속에서 엄마와 평화롭게 보내는 장면이 시작된 것이다.
밤하늘의 가득한 별들과 '쌩~'하는 산기운은 나의 작은 머리 뚜껑을 열고 쏟아져 들어와 나의 허기졌던 속을 담뿍 채워주었다. 이 시기의 경이로운 경험들은 나의 무의식 세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후에 만난 성현들과 종교의 말씀들은 나의 정신 세계가 성장해 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를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나의 삶은 4부작으로 정리된다. 어릴 때 전쟁을 맞아 폭탄 터지는 소리와 밀려가는 피난민들, 육중한 탱크들, 미군이 지프차 타고 지나가는데 흑인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 그리고 산속의 신비 체험이 1부를 구성했고, 2부는 18세에 부모님 따라 부산항에서 화란 화물선을 타고 40일이 걸려 브라질로 가서 4년을 살고, 캐나다로 다시 이민하여 9년간 살고, 다시 미국으로, 총 3차 이민을 한 것이다. 3부에는 어머니가 토론토에 사시던 동안 1975년에 부녀상봉을 위해 평양방문을 함으로 하여 북녘과의 관계가 열렸고 그로 인해 한국에 사는 외가친척들과의 관계가 일체 단절되었다. 우리 집안 내의 분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사촌동생의 외아들 영화배우 강동원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4부에는 어머니가 외조부 이종만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서 남북의 영세중립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서귀포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내가 바톤을 이어받아 남북과 영적 교류를 하고 중립화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요약할수 있겠다.
어릴 때 우주 의식과 연결된 나는 4부 과정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런데로 순탄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언어 체계가 세워지기 이전의 어린아이였지만, 일찍이 체험한 고차원의 진동은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사다난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온전성’에 대한 감을 잃지 않고 노를 저어 가게 해주었고, 훗날 남북을 왕래하면서 교류하는 것도 제주도 여행 가는 정도로 수월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교회에 적을 두지 않은 신앙인으로 살아왔는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도 그랬으니, 대를 물리는 일종의 ‘모태신앙’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생명모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홍익인간'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 온 것 같다. ‘저 높은 산’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세상 사람들과 깊이 만나고 어울려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어머니 일선님은 89세에 뇌수술을 하고는 일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일기장에 “각성”이란 단어가 떨린 필체로 써 있었다. 육신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누워 살아도 깨어 사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에 사고가 일어났을 때, 네 개의 늑골이 골절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집에 가서 쉬면 나으려니 했다. 그러나 진통제를 두알 먹어도 계속 아파서 이튿날 병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목포행 버스 정거장 앞에 가서 보니 바로 곁에 군서파출소가 있어 들어가서 사고에 대해 알렸다. 그러자 그들은 영암 경찰서 교통사고 부서에 연락을 했고 담당 조사관이 배정되었다 최형석 조사관은 전화로 자기소개를 하며 진술조사를 해야 한다고 영암병원 로비에서 만나자고 했고, 한 시간 반이 걸려 조사문을 작성해 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더 조사할 것이 있다고 영암 경찰서로 와달라고 했다. 내가 아직 입원하고 있으니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2차 조사는 영암경찰서에서 세 시간이 걸려 진행되었다. 최 조사관은 지난번에 작성한 진술서를 보여주며 그때 진술한 말들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나의 손도장이 찍힌 진술서를 받아들고 읽어본 후, “상대 운전자가 일단 정지를 하지 않고 확 튀어나왔다”고 진술한 말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고 정정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 “사고가 난 위치에 대해서 진술한 것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맞다고 생각합니다.”
- “차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급정거하다가 넘어지셨습니까?”
“2~3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 “CCTV에 그 때 사고가 난 장면이 담긴 것을 찾았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아, 시골 길에도 CCTV가 있어요? 보여주세요.”
- “잘 보세요. 여기 자전거가 내려오고 있지요? 그리고 저기 승용차 한대가 골목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요? 그런데 저 골목은 어머니가 진술한 골목이 아니고 그 전 골목입니다. 그리고 넘어지신 지점은 저 차에서 2~3미터 떨어진 곳이 아니고 12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부서에서 나가서 줄자로 재어 보았습니다. 여기 사진이 있으니 보세요”
“어쩌면... 정말 그렇네요.”
- “어머니가 다치고 경황이 없으셔서 잘 못 기억하고 계셨어요. 만약에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갔다면 저 정도 거리에서는 차가 골목에서 나오더라도 충분히 지나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급정거를 했더라도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는 영암 식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음,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이 사고는 ‘운전미숙‘과 ’부정확한 상황판단‘이라고 보입니다. 동의하시겠어요?”
“네~” 라고 말하는 자신이 허황스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 새벽, 다시 병동 뒷쪽으로 나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이번에 일어난 사고 당시의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떠올랐다. 구림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데 오른 쪽에서 승용차가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고, 접촉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급정거를 하다가 넘어졌다. 그런데 왜 CCTV에는 다르게 찍혔을까?
2년 전인 2019년 12월에 LA 부근에서 내가 항상 다니던 24 Fistness (450 N Brand Blvd, Glendale, CA) 에 운동하러 가기 위하여 파란 불에서 길을 건너고 있는데 별안간 오른 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빨간 불을 무시하고 직진을 해 와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나를 넘어뜨렸다. 내 오른쪽에서 내 손이 차의 앞부분에 닿는 거리에 와서 급정거를 했을 때 나는 내동댕이 치듯 넘어졌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응급차가 와 있었고, 구급의료대원 두 명이 내 곁에 있었다. 사고 당시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911에 전화를 걸었고. 뺑소니치고 있는 상대 차를 사진 찍어서 경찰에게 보내 주어 즉시 추격하여 잡았다.
이번에 일어난 사고는 지난번 사고 때 받은 트라우마가 몸세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이번 사고도 전에 일어난 사고와 같은 상황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부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게 한 것이다. 12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는 여유있게 일단 정지하거나 또는 무리하지 않고 직진할 수 있는 거리었는데 차가 바로 앞에 와있는 것 같은 환각작용이 일어나며 놀라서 넘어진 것이다. 경악스러운 부분은 그 성실한 조사관이 시골길에 설치된 CCTV를 찾아내서 차분하고 공손하게 내가 넘어진 장면을 모니터에서 보여줄 때까지 나는 이번 사고는 절대적으로 상대 운전자 탓이고 나는 피해자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의 절정은 영암경찰서의 담당 수사관이 보여준 모범적인 자세였다. 시골 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조사에 착수하여 “잘못은 상대 운전자”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칠십대 여성에게 온전성의 화신으로 다가 와서 감화-감동 시킨 최형석 경찰은 영암의 보물, 한국의 보물로 상정할만 한 인물이라고 느껴졌다. 작년 5월에 미국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를 땅에 엎드리게 해놓고 무릎으로 9분29초 동안 목을 눌러 질식시켜 죽게 한 백인 경찰 데릭 셔빈(Derek Chauvin)과 확실히 크게 비교되는 경찰관의 모습이다.
병원 로비에서 이동용 프린터를 바닥에 놓고 진술서를 프린트 하는 최형석 조사관 (출처: 글쓴이)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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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의 고요 속에 병동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급습해오는 산 기운을 활짝 열린 가슴으로 받고 있는 동안에 6.25때 피난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만 네 살이었으며 일종의 신비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혼자만의 것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나 나의 인생의 틀을 세워주었다.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후에 되돌아보니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아버지는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Korea) 관계로 미국에 가계시고, 어머니 혼자 우리를 데리고 ~ 2살짜리 동생을 등에 업고 언니 (5세)와 나(4세)는 손을 잡고 ~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끊어진 한강 다리를 어떻게 건넜는지 기억에 없지만, 폭탄 터지는 소음 속에서 끝없이 이어진 피난민들 속에 묻혀 걷다가 기차를 타고 내려서 또 걸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충청남도 입장역에서 한 참 걸어들어 간 산속이었다. 헤매던 끝에 어머니는 오두막집 한 채를 발견하였고 모두 환성을 지르며 뛰어 들어갔는데, 한 칸짜리 방은 장판을 깔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흙바닥이었다. 다행히 집 가까이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아침에 세수 하러 나가면 작은 산짐승들이 푸다닥 거리며 도망을 간다. 어머니는 불을 지피고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온 쌀로 밥을 하실 때면, 나는 행복에 쌓여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동덕여중 교사였고 북아현동 한옥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던 어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방을 내주고 평소에는 건넌방을 사용하며 학교에 출근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보낸 산속 생활은 처음 맛보는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피난민의 대열 속에서 정신없이 걸어온 장면이 끝나고 1막이 내리고 다음 막이 올라가가더니, 깊은 산 속에서 엄마와 평화롭게 보내는 장면이 시작된 것이다.
밤하늘의 가득한 별들과 '쌩~'하는 산기운은 나의 작은 머리 뚜껑을 열고 쏟아져 들어와 나의 허기졌던 속을 담뿍 채워주었다. 이 시기의 경이로운 경험들은 나의 무의식 세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후에 만난 성현들과 종교의 말씀들은 나의 정신 세계가 성장해 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를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나의 삶은 4부작으로 정리된다. 어릴 때 전쟁을 맞아 폭탄 터지는 소리와 밀려가는 피난민들, 육중한 탱크들, 미군이 지프차 타고 지나가는데 흑인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 그리고 산속의 신비 체험이 1부를 구성했고, 2부는 18세에 부모님 따라 부산항에서 화란 화물선을 타고 40일이 걸려 브라질로 가서 4년을 살고, 캐나다로 다시 이민하여 9년간 살고, 다시 미국으로, 총 3차 이민을 한 것이다. 3부에는 어머니가 토론토에 사시던 동안 1975년에 부녀상봉을 위해 평양방문을 함으로 하여 북녘과의 관계가 열렸고 그로 인해 한국에 사는 외가친척들과의 관계가 일체 단절되었다. 우리 집안 내의 분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사촌동생의 외아들 영화배우 강동원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4부에는 어머니가 외조부 이종만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서 남북의 영세중립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서귀포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내가 바톤을 이어받아 남북과 영적 교류를 하고 중립화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요약할수 있겠다.
어릴 때 우주 의식과 연결된 나는 4부 과정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런데로 순탄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언어 체계가 세워지기 이전의 어린아이였지만, 일찍이 체험한 고차원의 진동은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사다난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온전성’에 대한 감을 잃지 않고 노를 저어 가게 해주었고, 훗날 남북을 왕래하면서 교류하는 것도 제주도 여행 가는 정도로 수월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교회에 적을 두지 않은 신앙인으로 살아왔는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도 그랬으니, 대를 물리는 일종의 ‘모태신앙’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생명모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홍익인간'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 온 것 같다. ‘저 높은 산’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세상 사람들과 깊이 만나고 어울려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어머니 일선님은 89세에 뇌수술을 하고는 일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일기장에 “각성”이란 단어가 떨린 필체로 써 있었다. 육신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누워 살아도 깨어 사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에 사고가 일어났을 때, 네 개의 늑골이 골절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집에 가서 쉬면 나으려니 했다. 그러나 진통제를 두알 먹어도 계속 아파서 이튿날 병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목포행 버스 정거장 앞에 가서 보니 바로 곁에 군서파출소가 있어 들어가서 사고에 대해 알렸다. 그러자 그들은 영암 경찰서 교통사고 부서에 연락을 했고 담당 조사관이 배정되었다 최형석 조사관은 전화로 자기소개를 하며 진술조사를 해야 한다고 영암병원 로비에서 만나자고 했고, 한 시간 반이 걸려 조사문을 작성해 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더 조사할 것이 있다고 영암 경찰서로 와달라고 했다. 내가 아직 입원하고 있으니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2차 조사는 영암경찰서에서 세 시간이 걸려 진행되었다. 최 조사관은 지난번에 작성한 진술서를 보여주며 그때 진술한 말들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나의 손도장이 찍힌 진술서를 받아들고 읽어본 후, “상대 운전자가 일단 정지를 하지 않고 확 튀어나왔다”고 진술한 말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고 정정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 “사고가 난 위치에 대해서 진술한 것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맞다고 생각합니다.”
- “차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급정거하다가 넘어지셨습니까?”
“2~3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 “CCTV에 그 때 사고가 난 장면이 담긴 것을 찾았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아, 시골 길에도 CCTV가 있어요? 보여주세요.”
- “잘 보세요. 여기 자전거가 내려오고 있지요? 그리고 저기 승용차 한대가 골목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요? 그런데 저 골목은 어머니가 진술한 골목이 아니고 그 전 골목입니다. 그리고 넘어지신 지점은 저 차에서 2~3미터 떨어진 곳이 아니고 12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부서에서 나가서 줄자로 재어 보았습니다. 여기 사진이 있으니 보세요”
“어쩌면... 정말 그렇네요.”
- “어머니가 다치고 경황이 없으셔서 잘 못 기억하고 계셨어요. 만약에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갔다면 저 정도 거리에서는 차가 골목에서 나오더라도 충분히 지나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급정거를 했더라도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는 영암 식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음,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이 사고는 ‘운전미숙‘과 ’부정확한 상황판단‘이라고 보입니다. 동의하시겠어요?”
“네~” 라고 말하는 자신이 허황스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 새벽, 다시 병동 뒷쪽으로 나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이번에 일어난 사고 당시의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떠올랐다. 구림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데 오른 쪽에서 승용차가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고, 접촉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급정거를 하다가 넘어졌다. 그런데 왜 CCTV에는 다르게 찍혔을까?
2년 전인 2019년 12월에 LA 부근에서 내가 항상 다니던 24 Fistness (450 N Brand Blvd, Glendale, CA) 에 운동하러 가기 위하여 파란 불에서 길을 건너고 있는데 별안간 오른 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빨간 불을 무시하고 직진을 해 와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나를 넘어뜨렸다. 내 오른쪽에서 내 손이 차의 앞부분에 닿는 거리에 와서 급정거를 했을 때 나는 내동댕이 치듯 넘어졌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응급차가 와 있었고, 구급의료대원 두 명이 내 곁에 있었다. 사고 당시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911에 전화를 걸었고. 뺑소니치고 있는 상대 차를 사진 찍어서 경찰에게 보내 주어 즉시 추격하여 잡았다.
이번에 일어난 사고는 지난번 사고 때 받은 트라우마가 몸세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이번 사고도 전에 일어난 사고와 같은 상황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부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게 한 것이다. 12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는 여유있게 일단 정지하거나 또는 무리하지 않고 직진할 수 있는 거리었는데 차가 바로 앞에 와있는 것 같은 환각작용이 일어나며 놀라서 넘어진 것이다. 경악스러운 부분은 그 성실한 조사관이 시골길에 설치된 CCTV를 찾아내서 차분하고 공손하게 내가 넘어진 장면을 모니터에서 보여줄 때까지 나는 이번 사고는 절대적으로 상대 운전자 탓이고 나는 피해자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의 절정은 영암경찰서의 담당 수사관이 보여준 모범적인 자세였다. 시골 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조사에 착수하여 “잘못은 상대 운전자”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칠십대 여성에게 온전성의 화신으로 다가 와서 감화-감동 시킨 최형석 경찰은 영암의 보물, 한국의 보물로 상정할만 한 인물이라고 느껴졌다. 작년 5월에 미국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를 땅에 엎드리게 해놓고 무릎으로 9분29초 동안 목을 눌러 질식시켜 죽게 한 백인 경찰 데릭 셔빈(Derek Chauvin)과 확실히 크게 비교되는 경찰관의 모습이다.
병원 로비에서 이동용 프린터를 바닥에 놓고 진술서를 프린트 하는 최형석 조사관 (출처: 글쓴이)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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