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으니
내몽골 3만 정보 개간권을 획득하고 2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하려 1925년 밀입국한 김창숙
제1373호
등록 : 2021-07-25
1925~1926년 국내 비밀활동을 할 즈음의 김창숙. 눈매가 형형하고 날카롭다. 임경석 제공
김창숙이 국경을 넘은 때는 1925년 8월23일께였다.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1919년 4월 망명길에 오른 지 6년4개월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합법적인 귀국길이 아니었다. 행여 남의 눈에 뜨일세라 몰래 잠입하는 길이었다.
조선으로 밀입국하려면 어느 경로를 택해야 할까? 그는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신의주와 건너편 중국 쪽 국경도시 안동(현재 단둥) 사이를 오가는 철교가 놓인 코스였다. 이 철교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삼엄한 감시 아래 관리됐다. 1909년 5월 착공하고 1911년 11월 준공한 이 철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세운, 길이 944m의 현대식 교량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부설된 이 철교는, 국외로 망명하는 지사들과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하는 혁명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국경을 관리하는 신의주경찰서는 바쁘고 사건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928년의 보기를 들면 1년간 관내 검거 사건은 3109건으로 조선의 모든 경찰관서 가운데 1위였다. 당연히 정치·사상범 사건도 많았다. 제령 위반과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이 각각 47건, 84건으로 이를 합하면 131건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국경을 넘으려다가 적발된 경우였다.1
김창숙은 걸어서 넘기로 결심했다. 철로를 따라 기차에 탑승한 채 월경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허름한 농민 복장을 했다. 거기에도 검문과 감시망이 깔려 있었다. 경찰과 헌병이 경쟁적으로 운용하는 밀정이 도처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누런 베옷을 입은 40대 후반 추레한 농민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1927년 2월, 용수를 쓰고 포승에 묶인 채 재판정에 들어가는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갓 쓰고 두루마기를 갖춰입은 방청객들이 도열한 채 피고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경석 제공
면우 선생의 문집 간행을 기회로 삼아서김창숙이 비밀스레 조선으로 되돌아온 까닭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결사입국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2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벌이는 까닭은 바로 독립운동자금 모금 때문이었다.
1924년 10월께 중국의 진보적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이 집권할 때, 김창숙은 중국 정부와 교섭해 내몽골 미간지 3만 정보의 개간권을 어렵사리 획득했다. 쑤이위안성 바오터우 일대였다. 그곳에 재만주 동포를 불러모아 농업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전 농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3만 정보’란 9천만 평의 넓이로 대농장을 경영할 만한 땅이었다. 농장 자립 기반을 확충하면서 사관학교를 세우고 병농일치의 군대도 준비할 수 있었다. 중장기 전망을 갖고 조선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문제는 사업비였다. 조선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가옥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데 큰 자금이 필요했다. 모두 합쳐 20만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얼마나 되는 돈인가? 1919년 당시 관청 ‘서기’의 1개월 급여는 본봉 30원에 수당을 합해 약 50원이었다. 1920년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원 내지 1원10전이었고, 1925년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의 월급은 40원이었다. 따라서 사업비 20만원을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200억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창숙은 국내 모금으로 사업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의 유교 역량과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유교 학맥으로 연결된 대지주 출신의 부호 10명에게서 1만~2만원씩 모금하고, 나머지는 각 지방 문중을 통해 형편 닿는 대로 수백~수천원씩 거둘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혹여 동의하지 않는 부호가 있다면 강제로라도 징수할 생각이었다. 권총 두 자루와 실탄을 산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좋은 기회가 왔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사후 6주기에 즈음해 문집을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곽종석은 그의 스승이었다. 또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유학자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그 첫머리에 서명한 대표 유학자였다. 그 사건으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문집 간행을 도모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었다. 김창숙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비밀 입국을 기획했다.
두터운 인맥이 겹겹이 보호김창숙의 국내 비밀활동은 예상보다 길었다. 경성에 도착한 1925년 8월25일 시작한 비합법 지하운동은 이듬해 3월24일 출국할 때까지 만으로 7개월이나 계속됐다. 신분을 보장해줄 아무런 합법적 보호 장치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 자체로도 놀라운 현상이었다.
장기간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해준 원동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층적 협력자들이 있었다. 20대 중반의 중국 베이징 유학생 청년 그룹이 있었다. 송영호, 김화식, 이봉로가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김창숙의 망명지인 베이징에서 2년 전부터 친교를 맺은 혁명계 후배였다. 베이징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이들은 김창숙과 크고 작은 일을 상의했다. 김창숙은 기록하기를, “때때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 경서의 뜻을 질문했는데, 그 질박하고 진실함이 서로 의지할 만하여” 기뻤노라고 썼다. 이들은 국내 비밀활동 계획을 입안 단계부터 함께 논의했다. 여비 조달, 권총의 구매와 국내 반입, 밀입국과 물품 반입 정보, 국내 사전 잠입 등도 나눠 맡았다.
다음으로 학맥과 문중, 망명시 교유 등의 경험으로 신뢰감을 갖게 된 측근 그룹이 있었다. 곽윤, 김황, 정수기, 손후익 등이 그들이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두 살 차이의 동년배(곽윤)이거나 9년(손후익) 혹은 17년 차이(김황, 정수기)의 연하자였다. 이들은 김창숙을 대리해 각지를 순방하면서 모금 활동을 대행했다. 걷어들인 자금을 보관하는 일도 맡았다(정수기). 김창숙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요양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자기 집을 내주기도 했다(손후익).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 형성된 인맥도 김창숙의 협력자 네트워크 구실을 했다. 김창숙은 전통사회 내부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의성 김씨,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이었다. 그로 인해 문중과 친척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도실마을에서 450년 동안 세거(대대로 살다)해온 까닭에 지역사회에서도 우뚝한 존재였다. 경북 봉화군도 그의 지역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 김호림이 봉화군 해저마을에서 성장하다가 23살 성년이 된 뒤에야 성주의 동강 김우옹 가문의 종손 자격으로 입양돼 왔기 때문이다. 성주 사도실마을과 봉화 해저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은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함없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3
요컨대 다중 동심원 같은 협력자층 존재가 김창숙의 장기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동지적 유대를 맺은 유학생 청년 그룹, 두텁게 신뢰를 쌓은 측근 그룹, 전통사회의 두터운 인맥 등이 겹겹이 그를 보호하는 형상이었다.
법정에 선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앞줄 오른쪽부터 송영호, 김화식, 손후익, 이종흠, 이우락. 두 사람이 상투를 튼 모습이 이채롭다. 머리카락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유교 윤리의 근본이라 하여 형무소 쪽 박해를 무릅쓰고 버텨냈다고 한다. 임경석 제공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대해 말하지 마라”장기간 비밀활동의 또 하나 원동력은 김창숙 자신의 재능이었다. 그는 지하운동에 요구되는 엄격한 절제력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은신처를 한번 정하면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을 극소수 필요한 동지로만 한정했다. 예컨대 1925년 9월께 경성 적선동 한적한 곳에 은신처를 정했을 때는 오직 곽윤, 김황, 송영호, 김화식 네 사람만이 때때로 연락할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가족과 연락도 일절 시도하지 않았다. 사촌동생 김창백과 접선했을 때다. 김창백은 때마침 넷째 여동생이 경성에 체류 중이니 한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김창숙은 정색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친척에게 인사를 닦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니, 비록 내 본가라 하더라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4 말이 돌고 돌아서 결국 일이 실패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비밀활동 기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모금이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심이 1919년 3·1운동 때와 달랐다. 일신의 위해를 무릅쓰고 공공선을 증진하려 헌신하던 혁명적 열정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김창숙이 각지에 파견한 유학생과 측근 등 대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심을 전했다. “백성의 기운이 이미 죽어 냉담하게 불응하는 자도 있고, 겁이 나서 불응하는 자도 있으며, 비록 응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몇 사람의 일시 노잣돈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5라고 말했다.
각별한 수단을 택해야 했다. 김창숙은 직접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첫 넉 달 동안 경성에 거점을 두고 지방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1925년 12월25일 김창숙은 대구로 거점을 옮겼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최후의 일책을 결행해보겠다”는 작정이었다.
목표액 1.8%, 요즘 돈으로 3억5천만원석 달이 더 흘렀다. 1926년 3월 초, 부산 범어사 금강암에서 은밀한 회의가 열렸다. 김창숙은 7명의 가까운 청년과 측근, 친척을 불러모았다. 국내 비밀활동을 매듭짓는 마지막 회합이었다. 김창숙은 입국 목적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국민이 호응해주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실제는 달랐다. 지난 7개월 동안 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민심이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일본 경찰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사망을 좁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하운동을 종결짓고 다시 망명하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밖에서 다시 국내 민심을 고무할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겠노라고 밝혔다.
모금한 자금은 3500원이었다. 목표액의 1.8%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3억∼3억5천만원 되는 돈이었다. 휴대한 채 국경을 넘기에는 큰돈이었다. 김창숙은 일족이자 무역상인 김창탁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기차 편으로 압록강 너머 봉천까지 그 자금을 반출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월22일 부산 삼랑진역에서 기차에 올라타 24일께 압록강을 넘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
2.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48쪽, 1979년
3. 최미정, ‘봉화 해저마을 의성김씨 문중의 유림단 의거 참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96쪽, 2014년
4. 김창숙, 앞의 책, 750쪽
5. 김창숙, 앞의 책, 7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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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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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용 그 자체라기보다는, 임경석 선생의 화폐가치 환산에 다소 의문을 느껴 몇마디(결국 내용과도 관련이 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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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3만 정보 개간권을 획득하고 2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하려 1925년 밀입국한 김창숙"
문제는 사업비였다. 조선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가옥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데 큰 자금이 필요했다. 모두 합쳐 20만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얼마나 되는 돈인가? 1919년 당시 관청 ‘서기’의 1개월 급여는 본봉 30원에 수당을 합해 약 50원이었다. 1920년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원 내지 1원10전이었고, 1925년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의 월급은 40원이었다. 따라서 사업비 20만원을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200억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모금한 자금은 3500원이었다. 목표액의 1.8%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3억∼3억5천만원 되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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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경석 선생은 당시 관청 서기, 일용노동자,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 등의 수입액을 기준으로 화폐가치(구매력)를, 대략 당시 1원=현재의 10만원 정도로 환산하고 있는데, 이건 좀 과도하게 평가되었다고 보인다.
'당시 1원=현재 10만원'이었다고 한다면, 관청 서기는 월 500만원을, 일용노동자는 하루에 10만원, 동아일부 지방부 기자는 월 400만원씩을 벌어 갔다는 계산이 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일제시대'에 빈곤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식민지는 천국'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2) 당시의 총리대신의 연봉은 12,000원, 각 대신의 연봉은 8,000원, 각성청 국장(칙임 2급)의 연봉은 5,200원.
여기에 현재의 연봉을 비교해 보면, 총리대신 약 4,000만엔, 각 대신이 3,000만엔 정도, 각 성 국장급이 2,300만엔 정도.
이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당시의 1원이 현재의 3000엔~4500엔 정도가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총사업비 20만원은 200억까지는 아니고 80억 정도?
그리고 국내에서 모금된 3500원은 "약 3억∼3억5천만원"까지는 안되고, 1억 2천~1억 5천 정도 된다고 보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 내에서 모금활동을 한 결과, 중앙 성청의 과장급(주임 4급) 연봉 정도 밖에 모으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활동은 참담히 실패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3) 이건 그냥 소생의 느낌에 지나지 않는데, 이 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전공 분야에 따라 돈에 대한 감각이 상당히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운동사를 전공하시는 분들이, 늘상 '가난뱅이(실례!)'들을 다루다 보니까, 화폐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환산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싶다.
같은 돈 70원이라도, 당시의 빈농에게는 "큰 돈이고 말고, 소 한마리 사고도 남잖어?!"할 만큼 거금이었던 반면, '좀 있는 사람'에게는 "애게, 그거 신참 소위 한달 월급이잖아?"할 정도의 액수에 지나지 않았으니, 역시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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