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
손동우 기획에디터
입력 : 2011.05.02
“대형교회 잇단 비리… 개신교 ‘작은 교회’ 지향해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이 서울 북아현동 연구소 앞 골목길에서 한국 개신교회를 둘러싼 여러 현안에 대해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교회가 사회공동체 속에서 의미있게 존재하려면 철저하게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며 “다른 종교와 비신자들에게 열린 자세로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교회에 몰래 들어가 은촛대를 훔친다. 하지만 지금 그가 대한민국에 나타난다면 교회, 특히 개신교의 대형교회에는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성 싶다. 성채처럼 높이 치솟은 교회 건물의 압도적인 위용과 휘황찬란한 화려함, 철저한 경비태세 앞에서 절도 전과의 잡범이 어떻게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설령 어찌어찌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미리엘 주교와 같은 따뜻한 심성의 성직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해서 장발장은 다른 곳을 범행 장소로 선택하거나 그냥 마음 편하게 노숙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더이상 ‘힘들고 짐진 자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공간이 아니다. 교회가 억눌리고 힘없는 대중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다수가 교회를 걱정하고, 질책하는 기막힌 전도현상이 매일 목도되고 있다. 세금 면제의 혜택 속에서 교회, 특히 대형 개신교회의 은퇴 성직자는 40억원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의 전별금을 챙긴다. 교회 재산을 사유물처럼 2세에게 넘기는 등 세습 문제도 비일비재하다. 특정 대형교회의 신자들이 정부의 요직을 꿰어차는가 하면, 개신교단체 회장을 맡고 있는 목사님은 현직 대통령을 무릎 꿇릴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사찰에 난입해 그곳의 땅을 유린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반성은커녕 ‘우상 파괴’ ‘복음 전파’ 운운하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도 한다.
개신교회를 둘러싼 이러한 작금의 상황에서 교회의 통렬한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젊은 신학자·목회자 그룹들이 있다. 1996년 출범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연구실장(49)도 그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 최근 들어 ‘작은 교회운동’을 열심히 펼치고 있는 그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연구소에서 만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의 역사적 연원과 실태, 그 해결책 등을 들어 보았다.
김진호에 따르면 기존의 전통을 철저히 부정하는 전통단절주의, 친미주의, 성공·성장주의, 공격적·호전적 선교 등 개신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뿌리는 1906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닿아 있다고 한다. 러일전쟁시기였던 1904~1905년 육로를 따라 요동반도에 진군하던 일본 육군은 길목이던 평양 등 평안도 지역에서 약탈, 살인, 강간 등 잔혹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산속으로 도망가거나, 일종의 치외법권지대였던 미국인 선교사의 교회로 피신했다. 전쟁이 끝난 뒤 교인의 수가 늘어났으나 전쟁의 병증(病症)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증오했다.
이 같은 갈등과 반목을 열광적인 종교체험으로써 일거에 해소한 것이 바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한 평양대부흥운동이었다. 김진호는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교회 안의 권력구조가 선교자들을 중심으로 재편됐다”면서 “이들이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북장로회 소속이었던 만큼 교회와 이들이 운영하던 교육기관에도 친미보수색이 짙게 드리워졌다”고 말했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무기력한 만큼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마라’ ‘제사 지내지 마라’ 등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통제가 가해지고,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가 확립된 것도 평양대후븡운동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이후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조선인 목회자가 탄생하고, 개신교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은 ‘교정(矯正)’과 척결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해방 직후 영어구사능력이 있는 개신교 목회자들이나 신자들이 미군정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이들은 한국전쟁에도 적극 개입하면서 한국개신교의 친미주의와 반공주의는 더욱 견고해졌다. 1954년 나운몽이 개설한 용문산기도원의 성공신화는 각종 교회집회에서 ‘울고 불고 경련을 일으키고 쓰러지는’ ‘한국적 교회문화’의 초석이 됐다. 또 1960~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이농인구의 도시 유입 등은 대형교회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고도 산업화 시기 급속한 교회 성장의 상징이 바로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였다. 1958년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 천막교회로 시작한 순복음교회는 조용기라는 카리스마적 능력을 지닌 목회자로 인해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무허가 판자촌에 모여든 이농민들은 강도높은 노동과 질병, 가난 등 혹독한 도시체험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 있었고,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인 조용기는 종교적 에너지가 넘치는 설교 등으로 난치병을 고치는 등 수많은 이적을 행했다. 김진호는 “병을 고쳤다는 이들이 며칠 뒤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기는 했지만 조 목사의 능력은 이미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며 “특히 영혼·건강·재산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3박자 구원론’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잘 살아보세’라는 시대적 조류와 맞아떨어지면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초 강남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이 지역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중산층이 대거 유입되면서 광림교회, 소망교회 등 강남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최근 개신교에서 불거지고 있는 갖가지 문제로 전체적으로 신자 수가 다소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초대형교회는 별로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김진호는 “대형교회는 유력자·부유층 신자들의 결혼시장이자 취업과 구직과 관련한 온갖 고급 정보가 유통되는 공간인 만큼 그 매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형교회에서 떨어져나가는 신자들은 “웬만큼 살아도 대부분의 부유층 신자들과도 도저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어느 강남 대형교회 대학부의 경우 구성원이 SKY(서울·고려·연세대)와 이화여대 등 4개 대학 재학생만으로 이뤄져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이들끼리만 어울리고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대형교회의 계층적 편형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며 “대형교회가 주는 매력은 이처럼 ‘보험효과’를 누릴 수 있는 종교외적인 요소가 많다”고 말했다.
개신교의 많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김진호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도 나서고 있다. 그가 말하는 ‘작은 교회’란 규모지상주의라는 병폐에서 벗어난 ‘의미있는 소수’로서의 교회를 뜻한다. 김진호는 “진정한 ‘작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교인의 수가 적고, 교회건물이 좁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교회의 형식과 내용을 민주적·수평적·실험적 면모로 일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은 교회’를 위해서는 목회자와 신도 사이의 권위주의적 수직적 위계질서를 없애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고 한다. 민중신학자 1세대인 안병무(1922~96)가 세운 한백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지낼 당시 김진호는 ‘설교’ 대신에 ‘하늘뜻 나누기’라는 신조어를 창안했다. 목회자가 ‘하늘의 뜻’을 신자들에게 일방적 수직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예배 참여자들이 공유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를 위해 그는 목사가 설교하고, 신자는 이를 신의 대언(代言)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과감히 철폐했다.
그 대안으로서 토론형식의 집단설교를 하거나, 특정한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하는 등 갖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수다떨기’였다. 주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으며,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자신의 사적 경험담을 자유롭게 얘기하는 등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이었다. 김진호는 “하늘뜻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 그것에 자신의 말을 섞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이렇게 사람들 각자가 대화를 통해서 ‘뜻’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곧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작은 공동체의 대화나눔은 예배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으며 이를 통해 ‘하늘뜻’이 서로에게 형성되고 신뢰가 쌓였다고 한다.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 외에도 개신교회가 사회 안에서 존중받기 위해서는 개신교 아닌 다른 종교는 물론 비종교인에게 따뜻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김진호는 믿고 있다. 그는 “교회는 종교의 차원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면서 “대형교회가 현재의 행태를 반복한다면 오랫동안 살아남을지는 몰라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혐오의 대상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호는 다른 종교나 비신자에 대한 경멸과 혐오, 공격적 태도 등도 개신교회가 하루 빨리 버려야 할 병폐라고 생각한다. 한신대 신학대학원생 시절 그와 동료학우들은 ‘수유리 이웃사촌’인 화계사의 학승들과 평소에도 대화를 나누고, 축구경기를 하는 등 친밀하게 지냈다. 수유시장 감자탕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며 종교와 정치와 같은 무거운 주제는 물론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수다를 떨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어느해 크리스마스때 화계사 학승들은 ‘축 성탄’이라는 펼침막을 사찰 입구 연도에 내걸었다. 한신대 신학대학원생들을 향한 마음의 선물이었다. 이듬해 사월 초파일 신학대학원생들은 대학 입구에 ‘부처님 오신날 축하합니다’라는 펼침막을 대학 진입로에 내걸어 이에 보답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다. 신학대학원생들이 ‘우상숭배자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한 인천지역의 ‘열혈 십자군’들이 펼침막을 가위로 자르고 학생들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인근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도 학교를 찾아와 욕설을 퍼붓는 등 이에 가세했다. 학생들은 다시 내걸고, 십자군들은 또다시 자르기를 되풀이한 끝에 결국 학생들은 십자군에 항복해야만 했다. 더이상 펼침막을 제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진호는 “그 사건을 계기로 타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오만과 편견, 이웃과의 공생과 조화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성찰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진호는 이웃종교인들과의 연대와 조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평신도 불자모임인 ‘참여불교재가연대’와 천주교 평신도들로 구성된 ‘우리신학연구소’ 등과 상설 네트워크를 결성해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으며, 1년에 몇 차례씩 세미나 등을 열고 종교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전국을 휩쓴 구제역으로 가축 수백만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있던 지난 2월 말 천주교·개신교·불교·원불교·천도교 등 5개 종단이 서울 장충동에서 개최한 애도의식에 참여했다. 3·1절에는 서울 탑골공원에서 여러 종단들과 함께 ‘학살당한 동물들을 위한 선언서’를 낭독하고 관련행사를 갖기도 했다.
김진호가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은 고교시절 학원에서 만난 어느 친구를 통해서였다. 서강대 수학과에 진학한 뒤 대학생 선교단체에 가입했고, 1학년 여름방학 때 “종교적 엑스터시”를 경험했다. 그 이후 그의 종교적 태도는 독선적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작금의 개신교 대형교회가 보이고 있는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가톨릭의 예수회 재단인 서강대의 신학과목을 공부하면서 교수들과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신학적 세계관은 우연히 선택한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생의 스승 안병무를 만나 민중신학에 귀의하면서 180도로 바뀌었다. 안병무는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음에도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고 제자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민주적인 품성의 소유자였다. 김진호는 “선생은 나에게 한마디로 신학적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대학원시절 그는 텍스트로서의 민중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진짜 민중’을 보았다. 그들은 방직공장 노동자, 매매춘여성, 깡패, 비전향 장기수 등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 민중들이야말로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진호에게 “기독교 신자와 무신론자 간의 대화가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그는 “당신은 무신론자처럼 보이는데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내친 김에 “교회에 가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촌스럽고도 영악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오래전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천명한 것처럼 교회 밖에서 진리를 종교처럼 행하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며 “다만 불의와는 이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진리와 정의를 행하면 교회에 가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셈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와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으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저녁밥 짓는 냄새가 집집마다 풍겨나오고 있었다. 김진호는 “달동네 풍경은 특히 저녁 무렵이 아름답고 정겹다”고 말했다.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한국교회에 의해 숨겨진 사회적 고통 찾아내고 대안 모색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서울 북아현동 달동네 언덕배기에 있었다. 김진호가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개신교와 관련한 신학적 고민을 나누고 있는 그곳은 올망졸망한 집들과 가파르고 좁은 길 등 주위의 정겨운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말이 연구소지 허름한 연립주택 1층의 방 2개가 딸린 작은 집 한 칸에 세든 것이었다. 입구에는 소박한 글씨체의 간판이 달려 있어 초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연구소와 잘 어울려 보였다.
연구소는 1991년 민중신학 연구공동체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뒤 96년 지금의 명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들은 70년대 안병무·서남동·서광선 등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1세대에게 세례를 받은 신학자들로서 민중신학의 발전적 계승, 한국교회의 지속적 개혁,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연구소 초기에는 출판활동에 힘을 쏟았다. <함께 보는 민중신학>을 5권까지 발간했으며, 김진호·김경호·최형묵 등이 공동집필한 <함께 읽는 구약성서> <함께 읽는 신약성서>는 각각 2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연구소 구성원들은 민중신학자, 목회자, 기독교 사회운동가 등으로서 신학과 교회에 대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연구소는 대광고 강의석군의 문제제기로 비롯된 종교사학의 학내 종교자유, 종교인 과세, 사학법 개정, 소수자 차별,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호화생활과 교회세습 등 교회 안팎의 뜨거운 쟁점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최근에는 근대한국사회, 특히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형성에 개신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성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대형교회의 현상과 문제점에 천착해온 김진호는 성공지상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반공주의·극우보수주의의 이념을 갖고 있는 대형교회 가운데 양적 성장에 치중하는 ‘선발대형교회’와, 풍요 속에서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후발대형교회’로 나눈다.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 전투적 선교방식도 당연히 연구소의 연구과제에 속한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이후 김진호는 김창락·김경재·김상근·최형묵 등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무례한 복음>을 펴냈다. 한국교회 선교방식을 폭넓게 성찰하고 날카롭게 비판한 이 저작에 대해 기존 대형교단은 지금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김진호는 “예수는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는데도 한국교회는 철저히 사회적 강자의 편에서 보수적 귀족적 성공지향적 모습만을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교회에 의해 숨겨진 사회적 고통을 찾아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연구소의 과제”라고 말했다.
◇ 김진호 약력
△1962년 서울 출생
△서강대 수학과·한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계간 당대비평 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현)
△공저 <반신학의 미소> <함께 읽는 구약성서> <함께 읽는 신약성서>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article/201105022103425#csidxce8e3af6134e9539084a68ba49b33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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