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뿌리·이념 논쟁
문갑식 gsmoon@chosun.com
근로자들의 노조에 대한 관심 저하, 양대 노총 간의 제 살 깎아먹기式 경쟁으로 한국의 노조는 1987년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노총의 통합제의로 시작된 화해 제스처가 兩大 노총의 뿌리 논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봉합돼 통합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민주노총 :『李承晩 정권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全評을 깬 뒤 한국노총의 前身인 대한노총을 창립했다』
한국노총 :『그렇다면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표방한 全評이 민주노총의 前身이란 말인가』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2001년 5월1일 서울역에서 열린 한국노총의 노동절 기념행사에서 4500여 명의 노조원들이 「일방적 구조조정」과 「경찰 공권력 남용」이 적힌 깃발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4월21일과 22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勞動節(노동절)」 명칭을 둘러싸고 치열한 聲明戰(성명전)을 벌였다. 느닷없이 시작된 두 노동단체의 치고받기는 민주노총의 선제공격과 이에 대한 한국노총의 응사로 끝나 擴戰(확전)되지는 않았다.
한국노총이 민주노총과 조직통합 노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비록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좌절되기는 했지만 남북한 공동 노동절 행사까지 준비한 시점이라는 최근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두 조직 간의 돌연한 一合(일합)은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노동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인사들은 『이번 성명전의 배경은 兩大 노총의 뿌리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두 단체의 뿌리는 무엇이며, 무엇이 두 단체 간에 가시 돋친 설전을 펼치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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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근로자의 날」로 부르는 5월1일의 원래 명칭은 「노동절」이다. 흔히 「메이데이(May-day)」라고 불리기도 한다. 메이데이의 시작은 1886년, 미국 시카고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유래됐다.
당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미국은 「자본가에게는 천국, 노동자에게는 지옥」 같은 세상이었다. 일부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義齒(의치)를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月 10~15달러의 임금을 받기 위해 하루 12~16시간 동안 땀 흘려야 했다.
그 해 5월1일, 미국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외치며 총파업에 돌입한 게 메이데이의 유래다. 세계 노동운동사에 「헤이마킷 사건」으로 규정된 사건은 5월1일 파업을 벌이던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가 살해된 다음날인 5월2일 시작됐다.
3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집회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의 최후 진술은 이랬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고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됐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가 선고됐고 1890년 국제 노동계는 이 사건을 기리면서 5·1절 행사를 시작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23년 조선노동총연맹 주도로 첫 노동절 행사가 열렸고, 1946년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노동자 2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전평) 주최로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政權마다 날짜ㆍ명칭 오락가락
하지만 한국에서의 노동절은 그 후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먼저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게 된다. 李承晩(이승만) 정권 시절, 「3월10일 노동절」로 바뀌었다가 朴正熙(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3월10일 근로자의 날」, 金泳三(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5월1일 근로자의 날」로 변경된 것이다.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민주노총의 이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민주노총은 4월21일 손낙구 대외협력실장 성명을 통해 노동절 명칭 배경의 이유에 대해서, 『李承晩 정권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全評을 깬 뒤 한국노총 전신인 대한노총을 창립하고는 1957년부터는 노동절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10일로 바꿔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 『날짜를 빼앗긴 노동절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朴正熙 정권이 그 이름까지 「근로자의 날」로 바꿔 버려 날짜와 이름을 모두 빼앗긴 노동절이 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독재정권이 이름과 날짜를 빼앗은 이유는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는 날, 노동자들의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해 투쟁하고 결의를 다지는 날, 노동자 국제연대의 날이라는 노동운동 정신을 빼앗고 「정권의 하수인 어용노총 생일날」,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근로자」로 살 것을 다짐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부분이 대한노총의 맥을 잇고 있는 한국노총을 자극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이정식 대외협력본부장 명의의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全評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5일 설립됐다. 全評 간부 대부분이 조선공산당 간부를 겸임하고 있을 정도로 全評의 활동은 朝共(조선공산당)과 좌익의 방침에 직접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全評은 좌익의 방침에 따라 초기에는 식량문제 해결 등 경제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월 총파업을 거치면서 신탁통치 찬성, 朴憲永(박헌영) 석방, 「남조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등의 정치투쟁으로 치달았다.
全評은 左右대립이 격화되고 美 군정의 탄압이 가해지자 대중과 유리된 폭동투쟁으로 일관하면서 대중 기반의 와해를 재촉하였다. 李承晩의 우익 정권 역시 좌익혁명노선을 운동노선으로 하는 全評과 양립할 수 없었으며 탄압을 가했다』
그러면서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첫째, 한국노총의 前身(전신)이 대한노총이면 민주노총의 前身은 全評인가. 둘째,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지향하며 극단적 폭력투쟁을 전개한 全評의 운동노선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가』
하지만 한국노총은 대한노총이 前身이라는 민주노총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대한노총은 1960년 11월25일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는 현장의 투쟁으로 전국노협과 통합하여 한국노련으로 다시 태어났고, 1961년 5·16 직후 일시 해산되는 비운을 겪은 후 8월 재건됐다. 엄격히 따지면 지금의 한국노총과 대한노총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대한노총이 한국노총의 前身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우리가 싫다고 해서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노총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아 자주성과 민주성, 대중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논쟁은 다시 민주노총의 「뿌리」 쪽으로 옮아갔다. 한국노총 주장에 따르면, 『민주노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조직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도 대한노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지향한 全評의 운동노선을 표방하는 노동조합들은 6ㆍ25 이후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남한에 강력한 반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좋든 싫든 남한의 노동조합은 그 뿌리를 대한노총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全敎組는 민주노총 소속
그러면서 한국노총은 이렇게 逆攻(역공)한다.
『민주노총은 과거 민주금융, 민주택시처럼 한국노총 산하 조직으로 있으면서 연맹 선거에서 떨어진 후보가 새로운 연맹을 만들어 민주노총 계열로 가거나 한국통신, 철도처럼 오랫동안 한국노총에 있던 노조들이 소위 强性(강성) 집행부로 바뀌면서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주노총의 前身이라 할 수 있는 전노협 역시 주로 한국노총으로부터 이탈한 조직들이 건설했다는 것은 노동판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한노총이 한국노총의 前身이라면 민주노총에게는 「할아버지」 정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얼마 전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변경한 철도노조는 대한노총의 설립 멤버 아닌가. 무늬만 바꾼다고 과거 역사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민주노총이 어떻게 성립됐는지를 살펴보자.
민주노총 창립의 환경은 1987년 7, 8월의 소위 「노동자 대투쟁」 시기였다.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 시절 말기, 6·29 선언 이후 조성된 노조 결성 붐을 타고 기존의 노동 환경에 염증을 갖고 있던 일부 노조 대표들이 규합,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만든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전국업종별노동조합이 결성됐고 1993년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가 결국 1995년 민주노총으로 발전한 것이다.
민주노총의 공식 창립일은 1995년 11월5일. 당시 조합원은 41만8154명이며, 산하 노동조합의 수는 862개였다. 민주노총의 규모는 1997년 5월31일 산하 노조수 1147개, 조합원 52만5325명으로 크게 늘었고, 최근에는 조합원 수가 60여만 명으로 증가했다(한국노총은 1960년 11월 창립됐으며, 조합원은 94만 명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한국노총에 비해서는 모자라는 수이지만 증가율은 놀라울 정도라는 게 노동계 인사들의 말이다. 민주노총은 산하에 16개 産別(산별)연맹이 있는데, 주력은 금속산업연맹, 전교조 등이며 최근에는 공공연맹의 위력이 배가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민주노총 산하 대부분 조직이 신규 사업장을 중심으로 신설된 것이 아니고 기존 한국노총 조직에서 상당 부분이 이탈했다는 점이다. 특히 민주노총은 이른바 大工場(대공장) 노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조직을 빼앗긴 한국노총 입장에서 볼 때 민주노총의 「시비」는 매우 자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총의 대응에 민주노총은 일단 제2탄을 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지난 5월1일 발표한 성명에서 노동부 쪽으로 화살을 돌려 『빼앗긴 노동절 이름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정작 노동자를 대변해야 할 노동부가 시큰둥하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노동자들이 1년에 한 번뿐인 노동절을 노동절로 불러 달라는데 왜 국민 공감대 운운하는지 의아스럽다』고 비난했다.
이에 앞서 4월30일에는 한국노총이 국회에 「근로자의 날」을 「세계 노동절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해 달라며 법 제정 청원을 냈다.
한국노총은 당시 성명에서 『朴正熙 군사정권이 1963년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제정, 법률상 모든 용어를 근로자로 바꾸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과 참여정부가 출범한 상황에서 노동절이란 명칭을 회복시키는 것은 개발독재와 노동운동 탄압의 산물을 청산하는 데 의미가 있다. 5월1일을 근로기준법에 의한 유급 휴일로 지정하고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교사, 공무원도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노동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현행 국경일에 관한 법에는 국민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을 축하할 때 「절」을 쓰도록 돼 있어 3·1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4개 기념일만 「절」을 붙일 수 있다』며 『노동절 명칭 변경 사항은 아직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아 법 개정 등을 검토할 단계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조심스런 화해 모색
사실 이번 성명전이 있기 전까지 兩大 노총 사이에는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한국노총 쪽으로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조직통합」을 추진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한국노총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노조는 위기를 맞고 있다. 한때 13%대까지 치솟았던 노조 조직률이 최근 하락하고 있다. 1987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근로자들의 노조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약해진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두 조직 간의 「제 살 깎아먹기」式 경쟁 때문이다. 우리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조직 불리기」式 경쟁을 중지하고 궁극적으로 노동계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투쟁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조직통합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민주노총의 반응은 아직까지는 냉담한 편이다. 먼저 손을 내민 한국노총의 입장을 고려해 극단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사석에서는 『한국노총과 우리는 아직까지 뭉치기 힘들다. 조직의 풍토가 너무도 다르고 조직 내부의 반발도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런 차이 때문에 올해에도 두 단체는 각각 노동절 행사를 치르고 말았다. 한국노총은 이날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기념식을 가진 뒤 5.1㎞ 코스로 「거북이 달리기」 마라톤대회를 열었고 민주노총은 대학로에서 「세계 노동절 113주년 기념 전국 노동자 대회」를 연 것이다.
하지만 이날 양측 대회에서 나온 주장은 노동조건 저하 없는 週5일제 쟁취 및 非정규 노동 차별 철폐(한국노총), 非정규직 차별 철폐, 週5일 근무제 도입, 파업 관련 損賠(손배)·가압류 철회, 노동3권 보장, 경제자유구역과 개방정책 중단(민주노총) 등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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