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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드 조약 결과에 불만은 품은 군중들의 히비야공원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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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시 결기대회 모습. 일본 국민들은 10년 동안의 중세와 국방에 모든 것을 희생한 결과가 전쟁배상금
도 전과도 없는 강화 조약이라며 불만을 품었고, 개선환영식장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제국
국방방침을 앞세운 일본은 더욱 군사화와 전쟁으로 폭주하게 된다. 이 전쟁이 남긴 결과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히비야 폭동이다.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러일전쟁의 세기: 연쇄시점으로 보는 일본과 세계日露戦争の世紀: 連鎖時
点から見る日本と世界』, 정재정 역, 소화(岩波書店), 2010(2005).
전쟁은 많은 것을 결정하고 그 구조를 남긴다. 이 책은 전쟁을 통해서 본 일종의 사상사이다. 『러일전쟁
의 세기』를 읽으면서 나는 줄곧 두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러일전쟁’이
미친 영향이다. 러일전쟁의 영향은 사상으로 남아서 식민지 조선에 그리고 현대 한국에도 영향을 남기
고 있다. 이런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이 책을 읽어나갈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고, 또 가장 중요한 부분
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머리쪽 한 구석으로는 한국전쟁이 한반도 분단에 남긴 영향을 사상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구나. 살펴보고 또 살펴볼 일이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변화는 이런 한반도 분단 구조를 남북
양쪽에서 각각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저자인 야마무로 신이치는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주저인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도 곧 번역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러
일전쟁의 세기』는 이와나미 신서로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내용은 가볍지 않지만.
이 책은 ‘연쇄시점’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근대 일본의 역사적 위상을 세계적인 시야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서 서구나 아시아, 더 나아가 미국 등과 일본이 실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끊었는지를 확인하는 시
점이 필요하다는 것. 일종의 역사를 파악하는 결절점을 말한다. 야마무로 신이치는 연쇄시점을 모든 현
상을 역사적 총체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부분적이고 사소하게 생각되는 현상이
구조적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규정해 갔는지를 생각하기 위한 방법적 시좌視座라고 정의한다.(9-10)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함몰되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변화들을 연관성을 보면서 살피겠다는 이야기
인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관점을 유지하겠다는 주장이다.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의 국제법 논리는 당시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책봉 조공의 논리를 거부하고 새
로운 질서를 수용하겠다는 말이다. 만국공법의 이름으로 평등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세
계였고, 무엇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자신이 이를 잘 알고 있어서 ‘백 권의 만국공법은 여러 문의
대포와 같지 못하고, 몇 책의 화친조약은 바구니의 탄약과 같지 못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기도 다카
요시木戸孝允도 처음부터 약한 나라에 대해서는 공법의 이름으로 이익을 도모할 것이 많다고 말하면서
만국공법이 약한 국가를 수탈하기 위한 도구라고 논했다. 만국공법, 곧 국제법을 지키며 일본이 국제사
회로 들어간다는 것은 동시에 이 국제법으로 ‘비문명국’으로서의 아시아를 향해, 그에 따라 아시아 세계
의 국제질서를 재편해 나가게 된 것이기도 하다.(28-29) 어떤 의미에서 약소국이 명분과 논리에 매달
리면서 만국공법에 호소하려는 것은 실제로 자기를 지켜낼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달릴 것이 국
제법 뿐인 것이다. 이때의 경험, 다시 말하자면 일본의 문을 열어 이권을 취하려던 구미 각국과의 불평
등조약 개정과정의 쓰라린 경험이 일본으로 하여금 조약에 강한 나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만국공법을 받아들인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향해 곧바로 이 만국공법을 내세운다. 청일전쟁은
바로 이 만국공법과 책봉체제의 충돌로 볼 수 있다. 국제법을 받아들인 ‘문명국’ 일본과 국제법을 거부
하고 책봉체제를 고집하는 ‘야만국’ 청과의 전쟁이라고 말하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문
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불렀고, 우치무라 간조는 ‘야만주의의 보호자’인 청에게 문명을 선포하기 위한
의전義戰이라고 말했다.(45-46) 물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이다. 조선의 독립이란 오
직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고 실은 누가 조선을 지배할 것인지 힘으로 결정하는 동시에 그 명분으로 만
국공법과 책봉체제를 문명과 야만의 논리로 적용한 것 뿐이다.
하지만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마무리하고 이루어진 한국 병합의 과정을 보면 일본이 그렇게 일
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 조약에서 대한제국 황제가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할 것을 제의하고, 일본국 황제는 양여를 수락하고 또한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는 국제법에 의거한 형식을 취하면서도, 메이지 천황이 병합
과 동시에 발표한 조서는 다르게 표현한다. “짐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비기丕基를 넓히고 국가는 훌륭
한 예수禮數를 갖추고자 하니 전前 한황제韓皇帝를 책하여 왕으로 삼는다”는 말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책봉·조공체제의 정점의 청의 황제를 대신하여 메이지 천황이 선다는 선언에 다름아니다.(50-52) 야마
무로 신이치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의 국양(국가양도)신화도 한일병합조약의 형태를
결정지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신화에 기대는 것은 병합을 영구화하려는 의도이고.
흥미로운 것은 만국공법과 책봉조공의 논리가 다시 말해 문명과 야만의 논리가 서로 상반되거나 강력하
게 충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어차피 만국공법이나 책봉조공이나 모두 힘
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 자신의 제국지배의 논리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중화로 간주하는 듯이 보이는 책봉조공의 논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고 또 흥미롭다.
국가적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면 지나친 주장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만국공법 즉 국제법이 있다고 정
말 믿은 것은 당시 약소국 지식인들 밖에는 없는 것 같다. 훗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믿은 것도 마찬
가지. 약소국이나 식민지 지식인들이 만국공법 내지 민족자결주의란 허울좋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
각하면서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며 친일파 즉 제국주의 협력자가 되거나, 아니면 믿으면서 낭만적인 독립
운동을 하다가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런 말은 믿지 않지만 실현시키기 위해서 무장투쟁에 나서거나. 어
찌보면 실력양성을 한 것이 남한이고, 무장투쟁을 한 것이 북한일지도 모르겠다.
청일전쟁 후 중국에서 진행된 조차와 할양은 박이 쪼개지듯 국토가 잘려나갔기 때문에 과분瓜分이라고
불린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개발사업은 야만, 미개한 사람들에게 문명의 은혜를 베푸는 문명화의 사
명으로 정당화되지만, 실제 농민 측에서 보면 생활 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조계나 조차지에
서 ‘문명화의 사명’에 따른 서양적 생활양식이나 기독교 신앙의 강제에 대한 반발은 반기독교 기운을 낳
는다.(90-91) 이런 상황이 북청사변(의화단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와 문명의 관계는 그 문명이
전파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위치를 부여받는다. 기독교가 특정 사회
에서 어떤 방향으로 영향력을 가지는지 발휘하는지는 때로 순전히 우연일 수 있다.
일본에서 북청사변이라고 부르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8개국이 군대를 파병한다. 그리고 여기
에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한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특히 대량으로 군대를 파병하고 규율 있는 행동을
취한 것 사태가 조기에 해결된 것에 대해 구주열국의 반려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았다고 평가한다.(94)
실제 일본이 파병하는데 대해서 여러나라가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군대를 파병하는
데 미심쩍어 했지만, 사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군의 대규모 파병이 불가피
했다. 실제 일본군은 2만 2천명을 파병하여 전체의 2/3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 파병의 목적을 가쓰라
다로는 구주열강의 반려가 되는 시험이라고까지 말했다.(93) 열강의 반려, 즉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
는 것은 일본의 일관된 목표였다. 1900년 북청사변에 대규모 파병은 1902년 영일동맹으로 이어지게
된다.(96) 열강의 반려로 인정받은 모양새다.
의화단 배상금의 사용도 주목할 만하다. 1923년 일본은 1차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조건으로 5년간 유예
되었던 의화단 배상금을 운용자금으로 중국에 대한 문화사업에 충당하기로 결정한다. 대지対志문화사
업은 미국이 배상금을 유학생초청사업이나 문화교류사업에 사용하여 미중관계를 호전시키던 것을 따른
것이다. 베이징에 인문과학연구소, 상하이에 자연과학연구소, 동아동문회나 동인회 의료사업 유학생 장
학금 보조 사업 등이 이루어졌으나 지난濟南사건으로 중일 양국군이 충돌한 후, 일본은 도쿄와 교토에
동방문화학원을 개설하여 단독으로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95-96)
북청사변에 대한 설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일본군의 규율에 대한 강조다. 일본의 문학작품이나 영
화 등에서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그리고 북청사변 등을 묘사할 때, 일본군의 규율에 대한 강조가 아주
두드러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국군의 무질서함이나 영국에서 구입해 온 최신예 전투함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무능력함을 강조하고, 러시아 군의 경우는 장교는 귀족이고 사병은 평민이기 때문에 결국은 무
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모두들 강조하
고 있으니 청·러의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규율의 차이가 없었다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크게 작용했을까. 일본군의 규율은 도대체 얼마만큼이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 있다. 애초에 이 규율이
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신화’ 곧 근대의 신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 어떤 군대든 마적떼가 아닌한
그 나름의 규율이 없으면 존속하기 어렵다. 일본군의 규율을 강조하는 것 것 자체가 이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구도로 놓으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규율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제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군의 규율에 대한 신화는 확실히 존재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에 남긴 영향 중 하나가 연약외교, 굴욕외교라는 담론이다. 청일전쟁에 승리에 곧이은
삼국간섭의 결과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곧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자 그 분노는 보복심리로 국민 전체를 사로잡아 가며, 이런 국민심리를 ‘와신상담’이라는 표현 아
래 응집시키게 된다.(108-109) 군은 성공적이지만 외교가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담론은 러일전쟁의 승
리에서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든가 훗날의 워싱턴 군축회의의 결과가 일본에 불리했던 경우에도 정권을
퇴진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 굴욕외교나 연약외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이 자기에 대해 가
지고 있었던 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는 결국 힘의 한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와신상담’의 담론은 사람들의 힘을 모으고, 군비 확충을 위한 중세와 병역 부담을 감당하게 하며, 장차
우익이 발호하는 기반을 이루게 된다. 청일전쟁 직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가 주권선/이익선을 내
세우면서 장차 조선을 지배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10개년 군비 확충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수립한 10년 계획의 군비증강 예산은 1893년 총 예산의 9배에 달하고, 그후 10년간 세출 중 군사비는
평균 42%에 달한다.(114-115) 러일전쟁은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이 이룩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싸운
전쟁이다. 이를 국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온갖 슬로건이 필요했다. 와신상담이 그것이다. 러일전
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러시아 보다 일본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억눌렸던 국민의 다수는 증세의 괴로움과 폐색감의 배출구로 ‘폭러응징’이라는 슬로건에 동참하게 된다.
포학무도한 러시아를 정벌하여 응징하는 것이 정의이고 일본의 천직이라는 것. 그러나 이 폭러응징은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어서, 청일전쟁 개전 전에는 폭청응징으로 1930년대에는 폭지(지나, 중국)응징
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미 상대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전쟁에 승리해야 하고, 정의가 실
현되고, 상대를 각성시킬 수 있다는 주전론만이 정론으로 인식된다.(138) 반본적인 주전론의 등장은 실
은 주전론으로의 도피일런지도 모른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이어나가던 정세는 극단적인 패전을 맞이한
후에야 끝나게 된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신속하에 들어가지 않는 정부를 비판해서 공로병恐露病이라
는 비난까지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부도 일조한다. 칠박사를 동원하여 러시아토벌론을 주장하게
하고, 대러동지회를 조직해서 강경론을 주창하게 한 것은 국내의 여론과 결의를 보여주어 러시아를 위
압하고 양보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난 한 번 풀려나온 강경론/주전론은 스스로 힘을 얻어서
움직인다. 결국 일본의 “스스로 바라지 않는데 제어할 수 없이 흘러가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하는 심
리과정”이 나타난다. 스스로 전쟁을 결정했다는 자각이 없이 어느덧 전쟁 중이고, 이런 형태가 몇 개의
사변과 전쟁으로 이어진다.(139-141) 훗날 패전 이후에도 일본에 전쟁 책임론과 책임자가 명확하게 부
각되지 않은 이유가 전쟁의 결의와 전쟁의 시작 자체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분위기
를 형성하고, 사건을 벌이고, 휩쓸려나간다, 그 사이에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에 휘말려서 패전으로 이끌
려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한없이 어리석으면서도, 인간의 무책임한 그 본성을 꿰뚫는 현실이 한없
이 두렵기도 하다.
일찌기 청일전쟁을 의로운 전쟁이라고 칭송했던 우치무라 간조의 태도가 영일동맹을 두고 변하기 시작
한다. 1902년 영일동맹이 성립되자, 일본은 흥분한다. 당시 영국에 있던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소란
스러움을 전해 듣고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결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큰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 가운데를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했지만,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이 영국과 함께 아시아
나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억압하는 측에 선 것을 조선에서, 랴오둥에서 대만에서 대죄악을 범한 일본이
죄악 위에 죄악을 더했다고 평한다.(130-131) 주전과 비전론 중에서 고르라면 비전론에 속하는 우치무
라 간조지만, 그의 입장이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갈팡질팡한다. 갈팡질팡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르지만. 하긴 가가와 도요히코도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하자 군국주의 파시즘을 지
지하게 되기도 하니까.
러일전쟁의 승리의 결과는 무엇보다 한국(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이집트 관계를 모델로 삼는다. 그래서인가 이집트를 만든 사람으로 불린
크로머E. B. Cromer의 사적이 주목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스스로를 크로머에 견주기도 했다고 하니까.
(169-170) 일본의 구미에 대한 사랑은 정말 일관성이 있다.
실제로 러일전쟁 중에 기독교는 또 기묘하게 이용된다. 러일전쟁의 한 축은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전이
었다. 황화론과 황복론이 그 중 하나다. 러일전쟁을 인종간의 전쟁으로 보고 백인인 러시아가 황인인 일
본에 이겨야 한다는 주장도 러시아 정교라는 기독교 국가가 승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하게 되고, 일
본은 곤란한 입장에 처한다. 여기에 대항하는 선전에 일본의 종교계도 이용된다. 아니 자발적으로 나섰
는지도 모른다. 1904년 5월의 대일본종교가대회에서는 러일전쟁이 문명, 정의, 인도를 위해 일어난 것
이라고 주장했고, 특히 기독교도이자 주전론자인 혼다 요이쓰本多庸一는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일
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러시아의 전제에 반대하고 러시아 국민에게 자유를 가져오기 위한 의로
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호소한다.(178-179)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쟁이라고 러시아를 편드는 거나 그게
아니라 의로운 전쟁이라는 기독교인의 호소나. 종교 특히 기독교와 전쟁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순은 20
세기의 본질인 것 같다. 실제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은 기독교 국가들 간의 전쟁이기도 하다. 루터교와
개혁파와 성공회와 카톨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인종과 종교가 뒤얽힌 이 전쟁의 특징은 전비를 조달
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전비 조달을 위한 외채 모집을 성공하게한 뉴육의 투자은행
쿤 앤드 로브의 제이콥 시프의 사채는 유대인이 러시아에서 받는 억압과 학대를 돕기 위한 일본에 대한
원조 였다는 회고도 있다.(181) 결국 이런 황화론에 대응하는 일본의 외교정책은 같은 황색인종인 아시
아 여러 민족과 거리를 두는 정책이었다.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이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서
구와 아시아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더욱 부상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일본의 황화론을 부정하기 위한 행
동은 스스로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일본을 아시아의 공적으로 만들게 된다.(189-190) 전시 중임에
도 불구하고 한동안 용인되었던 비전론도 전승이 농후해지면서 통제의 대상이 된다.(193)
야마무로 신이치는 러일전쟁이 미디어전쟁이었다고 평한다. 황화론을 불러일으킨 독일의 빌헬름2세로
부터 시작해서 전쟁 초기부터 인종간의 전쟁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이끌어 나가려 했던 일
본의 노력은 눈물겹다.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로 기울어졌던 미디어의 관심을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이
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런 미디어 전의 전개는 외채를 이끌어 내어서 전비를 조달하고, 승전으
로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일본인 크리스챤들을 내세워서 유럽과 아메리카를 순회
시키기에 이른다. 미디어 전략은 강화조약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최근 일본의 튼튼한 미국에 대한
외교 네트워크와 영향력에 새삼스럽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일본의 아메리카와 유럽에 대한 공공외
교와 여론 관리는 러일전쟁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코 가볍게 비교할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의 결절고리가 된다. 그 중 하나가 아시아의 피억압민족이
교류하는 거점으로 황인종 신진의 나라로 문명의 교도자·아시아 해방의 선도자로 기대받는다.(209) 일
본의 러일전쟁 승전 소식은 백인종의 유럽국가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희망으
로 보였고, 한때 환호를 보내기도 한다. 특히 일본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는 중심에 있었
다. 그중 흥미로운 것이 조선에 대한 초기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 유학생을 통해 전해지는 경로다. 재일
조선인에 의해 1921년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 흑도회黑濤會가 박열, 김약수, 권국조, 원종린 등을 회원
으로 결성되었지만 노선 대립으로 해산하고 김약수의 북성회北星會와 박열의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된
다. 북성회는 조선 내의 본부로 북풍회北風會를 결정하고, 그후 일원회一月會를 거쳐 화요회火曜會, 무
산자동맹 등과 합동하여 조선 공산당 조직에 이른다.(230-231) 물론 일본은 전후 2년에 걸쳐 서구와
서로 식민지 이권을 보장하는 대신에 민족독립운동을 압박하는 쪽에 서게 된다.(246)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은 무사도다. 무사도가 구미에 알려진 것은 물론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다. 그
것은 야마토혼大和魂 곧, 일본 국민성론, 일본의 윤리성이나 정신성을 서양에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 일본은 이를 러일전쟁기에 선전전에 이용한다.(232) 야마무로 신이치는 서구인을 향해 기사도나 기
독교 정신과의 유사성으로 설파된 무사도는 메이지에 이르러 충효나 충군애국을 골자로 만들어 낸 것이
고, 실제 무사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 전투자의 윤리인 무사도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
을 것이다.(236) 야마무로 신이치가 지적하는 것은 이것이다. 무사도론은 일본에서 발신된 것은 아니었
지만, 선전전의 성과로 역으로 일본의 본질이 그것에만 있다는 밖으로부터의 시선으로 되돌아와 외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 마저 사로잡게 된다. 그래서 일본 국내에서도 무사도론이 미디어에 넘치자 중국에
서 방문한 유학생이나 망명정치가들도 일본 국력 발전의 기저로 무사도나 야마토혼을 발견해 나간다.
(237) 량치차오는 여기서 ‘중국혼’을 발견하고, 1906년 한국에서 번역되자 최석하는 조선혼을 창출할
핑요성을 주장하고, 박은식은 ‘대한혼’을 양성할 필요를, 신채호는 ‘국민혼’을, 신규식은 ‘한국혼’을 말한
다.(239) 이쯤되면 모순 정도가 아니라 자가당착이 아닐까. 이 기묘한 사상의 연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무사도의 배경에는 ‘지행합일’의 양명학이 있다는 인식하에서 중국에서는 혁명이론으로 재조명
되고, 한국에서도 양명학을 통한 국민교육이 제창된다. 덧붙여 말하면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왕양명의
학문은 왕학으로 불려왔으나 양명학이라는 읽기 자체가 일본으로부터의 사상연쇄에 의한 것이다.(239)
일본을 소개하기 위해서 일본을 서구에 알리기 위해서 만들어낸 무사도론이 거꾸로 일본에 들어와 영향
을 미치고, 중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들어오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민족주의의 군국주의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앞으로 나가고 그에 대항하는 전투적 민족주의의 근간이
된다는 이 모순은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단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무수히 반복
되는 이야기다. 사상의 연쇄란 사상의 결절점이란 그런 모순의 극치다.
처음에는 청일전쟁을 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한 우치무라 간조는 전후에 그것을 약탈전이라고 보았으
며, 러일주전론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러일전쟁 후에도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전쟁은 이어진다.
(251) 러일전쟁의 결과가 일본에 가져온 것은 일본의 군사화였다. 러일전쟁 직후에 형성된 제국국방방
침은 러일강화를 다소 장기간의 휴전으로 본 것이었다. 특히 러일전쟁의 교훈은 일본에게 아무리 군비
의 확장을 도모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력으로는 소모전에 견디지 못하는 이상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방침이 형성되고, 전쟁에서도 백병전을 중시하면서 돌관전법에 기대게 된
다.(257-259) 이런 방침들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다시 언급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 의무교육, 청년회, 징병, 재향군인회로 이어지는 전국토의 병영
화와 군대내의 질서를 사회로 가지고 들어오는 체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즉 국가 전체를 준전시체제로
하는 방향으로 바뀐다.(260-261) 러일전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군사화는 기계와 장비의 한계를 정신력
으로 돌파하겠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방법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전쟁을 연구해서는 백병전과 돌관전
법이라는 한국인에게도 몹시 익숙한 수사에 귀착하게 된다. 이래서야 총알이 비켜간다고 주문을 외우면
서 돌진한 동학농민군과 다를바가 없다. 그렇게 사상은 돌고 도는 것인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러일전쟁에서 갖가지 비전사상이 형성되는데 전후의 평화헌법을 둘러싼 비판의 원
형이 거의 모두 등장하는 느낌이다.(282) 일본의 비전론자는 소수이고 그 목소리는 희박했지만 끊임없
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285) 1910년 우치무라 간조는 전쟁폐지를 말하며, 법률 최후의 승리는 전쟁
폐지에 있다고 말했고, 결국 그것은 헌법 9조로 결실을 맺게 된다.(288) 마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이
병상에서 ‘멍청하게 까지 이상을 지킨 것을 자랑한다고 말했던 것처럼.(289) 그 비전론을 거꾸로 혜택
을 입어서 일본은 패전 이후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 체제의 일원으로 움직
이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경로를 걸어갔다. 비전사상이 축복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눈가리고 아
웅하는 거짓말이기도 했다. 세계최강의 군사력과의 동맹을 통해 그 동맹에 의존하는 구조. 그 구조를 이
용하면서 그 안에서 안락함을 구하기는 하지만, 그 구조의 외부와 경계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전
쟁에는 눈감는 비전사상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져온 근대, 그 근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가 무엇인지 깔끔하게 한
두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 근대의 한 축에 군사화가 들어있다는 점만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군사화에 앞서 나간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항하려면 군사화하는 길밖에 없었다. 중국은 일본과 전쟁
하는 중에 군사화가 이루어졌고, 한국은 일본 지배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했고, 분단과 전쟁,
냉전 대결 구도 속에서 군사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군사화를 떠받쳐온 것인지, 군사화가
산업화를 필요로 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군사화가 근대의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그 핵심 중 하
나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사화를 이루었기에 한국의 근대는 그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모순이지만 말이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남북한의 정세를 보면서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원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게
과연 몇몇 사람의 외교술 만으로 변한 일이었을까? 그런 건 청일전쟁의 결과나 러일전쟁의 결과 또는 삼
국간섭의 결과를 연약외교나 굴욕외교라고 불렀던 과거의 수사에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수사는 군대에
대한 상찬이나 의존, 군사력 강화를 가져왔고, 일본을 끝없는 전쟁으로 이끌어서 몰락을 향하게 만들었
다. 수사로서의 외교가 아닌 변화를 가능하게 한 힘의 구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주변국 모
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힘의 구조가 변화해야 외교가 움직일
공간이 생겨난다. 동서독의 통일도 소련 내부의 변화가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남북한 양쪽에서 한국
전쟁의 결과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각기 자기나름의 방식으로 허물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일어난 변화
는 수용소 국가체제의 해체다. 한국전쟁기에 포로수용소에서 만들어진, 포로수용소의 안과 밖에서 만들
어진 공포에 의한 통제, 자기 편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억압, 상대에 대해서는 학살 같
은 폭력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폭력의 구조가 오랜 노력을 통해서 조금씩 허물어졌다. 북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전쟁이 만들어 놓은 구조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제공권을 장악당하고, 보급선의 한계 안
쪽에 틀어막혀서 움직일 수 없었던 북한은 결국 양탄일성이라는 ICBM을 통해 포위망을 뛰어넘을 수 있
게 되었다. 구조의 강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변화가능한 대화가 시작되고 있다. 지금으로선
이런 평가가 성급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오늘 아침 김종필의 부고가 전해졌다. 파란만장하다고 해야 할 한 사람의 인생이 시대와 함께 막
을 내리는 느낌이다.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변화는 때로 너무 느린 것 같지만. 올때는 아주 확실하게
온다. 그런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지금으로선 아무도 아무것도 알수 없지만.
2018. 6. 23.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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