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을 띄우려는 의지가 여지저기서 보인다. 우상화하려면 학습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백선엽을 띄우고 싶어하는 6,70대도 전쟁을 치른 세대가 아니라 전후 베이비부머다. 군사사에 관심 없이 먹고 살기에 바쁘게 자라, 6·25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민군이 쳐 들어왔슈, 공산당 나뻐유 정도의 상식으로 남을 훈계하고 싶어한다. 요즘 애들의 지식 수준과 비하면 유치원생 수준도 안 될 걸?
지난 6월에 리지웨이 장군 회고록이 번역되었다. 1950년 12월부터 53년 종전까지 6·25의 중심에 있었던 장군의 회고록이 지금껏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책을 사 봐. 지금 청년들은 6·25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며 책도 사 주니까 이런 책이 출간된다. 그 어느 때보다 자료도 많아 입체적으로 전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백선엽에 대해서도 그렇다. 백선엽을 띄우려는 사람들이 백선엽을 더 모른다. 백선엽은 60년대 뉴스에서 사라졌다. 박정희 생명의 은인인데 왜 사라져? 미국은 미국통이었던 백선엽을 통해 박정희를 파악하려 했다. 백선엽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이 염두에 둬야 한다. 쿠데타 가담 젊은 장교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됐을 수 있으며 미국은 그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심스럽게 조사해야 한다. / 5·16 직후 드럼라이트 주중화민국 미국대사 백선엽 면담보고
최우방 중화민국 대사였던 백선엽은, 토고, 가봉, 세네갈 등등 아프리카 일대 대사를 맡아 세계를 떠돌며 근 10년간 한국땅을 밟지 못한다. 그러니, 다부동 전투니 한국전의 영웅이니 하는 인식도 남기지 못했다. 당신이 군사 쿠데타를 갓 저지른 박정희라면, 군 원로이자 생명의 은인이자, 한국전 공로도 훨씬 큰 백선엽을 떠 받들며 살겠는가. 백선엽이 나이도 두 살이나 어리고, 군 인맥은 훨씬 더 탄탄하다. 그 결과 흑산도 유배간 정약전처럼 회고록을 준비하며 살았다.
백선엽이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신문에 기고한 회고록을 통해서다. 백선엽은 30년간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한국전쟁사의 사관 역할을 했다. 그때부터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며 전쟁영웅이 되어간다. 자가발전한 전쟁 영웅인 셈이다. 백선엽은 아주 오래 살았다. 많은 책을 출판했다. 그 내용이 그 내용인 짜집기 책들도 많다.
도서관에서 6·25 전쟁 영웅들을 검색해본다. 백선엽의 회고록과 평전들은 우르르 쏟아진다. 한강 방어전으로 전쟁초 낙동강 방어를 할 수 있게 만든 김홍일 장군 책은 두 권. 그것도 낡아빠진 책이다. 철저한 준비를 통한 방어전으로 인민군 엘리트 사단 두 개를 막아낸 김종오 장군은? 두 권이다. 김홍일, 김종오는 김일성의 초반 전쟁계획을 완전히 분쇄해 서울에서 3일간이나 묶어두었다. 춘천, 홍천 전투 기록을 읽다보면 눈물이 난다. 두 장군이 무력하게 무너졌다면 UN은 스스로 돕지 않는 한국을 돕지 않았을 것이다.
백선엽의 다부동 전투도 의미는 있지만, 그때는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미군 폭격기들이 네이팜탄 융단 폭격을 하며 공세를 저지한 시점이다. 워커 장군과 낙동강 방어전을 함께 치른 1/n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선엽의 위세는 김홍일, 김종오를 한참 가리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나. 훨씬 오래 살고, 훨씬 큰 권력을 가져 역사를 승자의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 우상화는 시대착오적이다. 이제 각자 제 자리에 돌아갈 때이다.
이 글도 백선엽 자서전 다섯 권을 읽고 썼다.
한미혜
백선엽은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라있지 않나요?
본인도 인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네요
김성민
한미혜 친일은 아예 빼놓고 판단해도, 과도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